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멍 때리는 시간은 창조의 원동력

이기희
생각의 태엽이 너무 탱탱하게 감겨 오류가 발생했나. 벽시계는 매 순간 잘 돌아 가는데 일상의 태엽은 중요한 순간에 떡 가래처럼 늘어지고, 죽치고 멍청하게 허탈한 날엔 등 푸른 생선처럼 퍼덕거리며 꼬리를 흔든다.
머리도 몸도 마음도 휴식이 필요한 시간인가. 괜히 슬퍼지고 가슴으로 눈물이 방울져 내린다. 이런 날엔 사고의 바다에서 멸치 꺼내 육수를 우려내서 국수를 말아먹는다.
가슴 속 흐르는 눈물은 닦을 손수건이 없다. 멍 때리고 앉아 창밖을 무심히 바라본다. 매일 똑 같은 자리에서 바라다보는 풍경인데 항상 새롭다. 하늘은 단 한차례도 같은 색의 물감을 하늘 바다에 풀지 않는다.
칠흙 같은 어둠을 헤치고 제일 먼저 어둠을 깨우는 것은 짙은 파랑색(Navy)다. 여명의 빛이 나무숲 가지 사이로 안개를 피우듯 번지기 시작하면 하늘은 청옥색 사파이어(Sapphire)에 보랏빛 자수정(Amethyst)을 수놓으며 하늘 바다로 떠오른다. 그 사이로 맑고 푸른 눈의 터키옥색(Turquoise)이 청록색의 물감을 풀어낸다. 곧이어 진홍색 빨강이 번져 나오고 비슬산 참꽃을 닮은 뜨거운 핑크색(Hot Pink)이 무지개를 그리며 한편의 오작교를 완성한다.
그 황홀함에 빠져 아무 생각도 없이 다가오는 천상의 조화에 빠져 든다. 이승에서 새겨진 상처와 고뇌, 회환과 슬픔이 흐릿한 무채색으로 번져 나간다.
존재의 살아있음을 잊어버리고 시간을 멈추고 멍 때리며 보내는 시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 온전한 자유로움은 창조의 원동력 된다. 움켜진 정신 줄을 내려 놓으면 경의로운 발견을 체험한다. 살아있는 존재의 아픔을 잠시라도 잊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멍 때리다’는 영어로 ‘Space out, Zone out’으로 표현한다. 집중력을 잃고 멍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멍하게 있거나 무의미하게 어떤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상태를 말한다.
2025 ‘한강 멍 때리기 대회’가 서울에서 열려 80팀, 총 126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가치 있는 행위’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2016년 시작됐는데 매년 외신의 주목을 받으며 화제를 모은다. 참가자는 90분 동안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고 ‘멍 때리기’를 가장 잘한 사람이 우승자가 된다. 참가자들은 심박 측정기를 착용하고 15분마다 측정된 심박수와 시민 투표로 점수를 받는다. CNN은 “한국의 초경쟁 사회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휴식처”라고 평가했다.
돌덩이처럼 무겁게 하늘과 땅이 가라앉는 날, 너를 지우고 나를 잊어버리는 시간은 엄마가 무릎에 발라주던 아까징끼처럼 굳은 살이 박혀 치유의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몸도 마음도 무겁고 힘든, 일상의 짐 내려놓고 훨훨 날아오르고 싶은 날, 영혼도 무거운 옷 벗고 맑은 폭포수에 목욕 하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진다.
이유도 없이 울컥 울고 싶은 아침,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망각의 강을 건너는 시간은 영혼의 조용한 반란이다.
속박과 억눌린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놓아주는 시간은 자유와 해방으로 창조된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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