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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달콤하고 치명적인, 진흙 속 꽃을 피우며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 가을 속으로 떠났다(중략) /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중략) / 세월은 가고 오는 것 /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박인환 ‘목마와 숙녀’ 중에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잘 생긴 외모와 도시적 낭만성, ‘명동백작’ ‘댄디보이’라고 불리던 박인환은 195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인이다. 그의 시어는 전후 지식인의 통음이 들리듯, 한 구절 한 구절에 절절함이 담겨있다. ‘목마와 숙녀’는 한국 시사에서 감상주의 또는 낭만주의 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감상주의는 슬픔, 동정, 연민 따위의 감상을 지나치게 드러내려는 문예 현상이다.   낭만주의( 浪漫主義, Romanticism)는 개성이 없는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창작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문학 작품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18세기 말 유럽 모든 나라에서 일어난 예술 경향이다.     박인환 시인의 마지막 시로 알려져 있는 ‘세월이 가면’은 당시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명동의 대포집 ‘은성’에서 술을 마시다가 쓴 즉흥시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같이 술을 마시던 극작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부치고 ‘백치아다다’로 유명한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테너 가수 임만섭과 나애심이 불러 ‘명동의 샹송’으로 유명해지고 가수 박인희의 목소리로 국민적인 애창곡이 된다.     1955년 ‘박인환선시집’을 출간한 후 이듬해 1956년, 소설가 이상의 기일을 기념한다고 3일 간 폭음한 탓에 결국 그해 3월 2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자택에서 급성 알콜중독성 심장마비로 향년 29세로 요절했다.   예술가 특히 시인이나 작가들은 왜 술을 죽도록 마시고 사랑하는가?     취중진담이라는 말은 술의 힘을 빌려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뜻이다. 취했을 때의 속마음은 진심일까, 아니면 비겁한 용기일까?   술에 취하면 무방비 상태가 되고 자신을 감싸는 사회적 방어막이 없는 상태가 된다. 취했을 때의 속마음은, 진담이 아니라 본색이라는 생각이 든다.     찰리 채플린은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술에 취했을 때 드러난다’고 했다. 평소에 잘난 척하고 엄숙하던 작가들이 술이 거나해지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진다.     나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다. 못 먹는 게 아니라 절대로 안 마신다. 그래도 문인들 술자리에는 빠짐없이 끼고, 술값은 열심히 낸다.     ‘술 안 마시고, 담배 못 피우고, 애인도 없으니, 무슨 맛으로 살꼬. 글을 우째 쓰겠노’라고 핀잔을 받으면 ‘그래서 작가가 못 됐어요’라고 대답한다.     사랑했던 문우 여럿이 가난과 절망, 술독에 빠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세계적인 시인이 되는 게 청춘의 꿈이였다. 시를 버려도 세상을 버리지 않기로 했다. 문학을 포기해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맨 정신으로 살기로 했다.     ‘술은 비와 같다. 비가 오면 나쁜 흙은 진창이 되지만 좋은 흙은 꽃을 피운다’는 존 헤이의 말을 새긴다. 달콤하고 치명적인 진흙 속 꽃을 피운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박인환 시인 무방비 상태 가수 박인희

2026.03.24.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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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커튼이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사랑은 자유로운 새 / 아무도 길들일 수 없어 / (새를) 부르는 것이 무의미하지 / 싫으면 절대로 오지 않아 / 협박하고 빌어도 소용 없어 / (중략) 사랑은 보헤미안의 아이 / 법을 알지 못하고 살지 /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사랑할 거야 /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조심해야 돼’- 카르멘 ‘하바네라(Habanera)’ 중에서.   보헤미안은 프랑스어 보엠(Bohême)에서 유래해 체코 보헤미아 출신 집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19세기 후반에는 관습과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방랑과 예술적 삶을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오페라(Opera)는 ‘작품’을 뜻하는 라틴어 ‘오푸스(OPUS)’의 복수형에서 유래한다. 음악이 기본적 요소이고 가수들이 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서양 연극의 한 양식으로 무대 장치, 의상, 춤, 발레와 같은 여러 공연 예술을 포함한다.     ‘카르멘’은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소설로 ‘르뷔 데 되 몽드’라는 잡지에 발표된 짧은 소설이다. 촉망 받는 군인 돈 호세가 집시 카르멘과 사랑에 빠져 인생이 망가지자 카르멘을 살해하고 자신도 파멸을 맞게 된다.     카르멘은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이용해 남자 주인공을 파멸시키는 팜므파탈(Femme fatale)의 극치를 보여준다.     비제의 ‘카르멘’은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더불어 극장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으로 꼽힌다.     초연 당시 카르멘의 관능적이고 비 도덕적인 캐릭터와 비극적 결말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혹평을 받고 비제는 큰 좌절을 겪는다. 니체가 극찬한 비제의 카르멘은 처참한 실패였다. 초연 실패로 인한 스트레스와 심근경색으로 초연 3개월 후 비제는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왜 우리는 어렵고, 잘 알아듣지 못하는, 세속적이고 관능적이며 비극의 끝판왕인 오페라에 열광하는가? 커튼이 올라갈 때 관중은 박수갈채로 환호한다. 우아한 모습으로 박수를 치며 불륜을 즐겨보고 비극적인 사랑과 몰락에는 눈물을 흘린다.   니체는 인간은 삶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꿈의 ‘가상’을 만들어내고 삶을 정당화한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가상을 끊임없이 부수고 환상•오류• 변명•핑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치는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설명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원초적 예술의 충동은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끊임 없는 투쟁과 조화로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성스러운 세계의 한계를 상기시키는 아폴론적인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방종을 억제한다.   이 두 가지 예술적 충동이 결합함으로써 삶의 가혹함•전율•악함•고통이 음악적 도취와 화려한 무대, 감미로운 아리아로 환상적인 설득력을 갖게 한다.     무대의 커튼이 올라가면 청중은 시작과 기대, 흥분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마지막 장의 커튼이 내려오면 관객은 ‘길들이지 않은 새’처럼 날아갈 준비를 한다. 커튼콜은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린 뒤, 관객이 찬사와 환성으로 박수를 계속 보내 퇴장한 출연자를 무대 앞으로 다시 불러내는 일이다.   인생에는 앙코르(Encore)도 커튼콜도 없다. 공연은 한 차례뿐이다. 박수치며 재연을 요청하지 않는다. 찬란한 순간들은 한 차례 연습 없이 막을 내린다.   오페라 팜플렛 접어 들고 멋진 스카프를 두르며, 무대를 떠날 시간이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비제의 카르멘 집시 카르멘 공연 예술

2026.03.1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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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페르시아 하늘, 이란 사람들

‘페르시아 시장에서’를 오케스트라 연주로 들으면 낙타들의 발소리가 다가오는 듯, 공주와 마술사들을 보는 듯 신나고 경쾌하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어떠한가? 신드바드의 희한한 모험과 알라딘 램프, 알리바바와 40인 도둑 등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 책은 인도, 페르시아, 아랍 등에서 구전되던 이야기를 18세기 프랑스인 앙투안 갈랑이 모은 설화집이다. 내용은  페르시아 사산 왕조 때 왕비 세헤라자드가 살아남기 위해 1000일 동안 왕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렇듯 먼 나라 페르시아는 기원전 550년 아케메네스 왕조를 시작으로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로 이어 오다가 1935년에는 국호가 이란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란은 어떤가? 경제 제재와 인플레 등 경제 위기로 지난해 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자 이란 정부는 무자비한 탄압으로 맞섰다.  이슬람 시아파 중심의 신정 체제는  반미의 근거지가 되어 왔고, 비밀리에 핵개발까지 추진했다. 이런 이유는 지금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맹폭을 당하고 있다.     10여년 전 ‘테헤란의 지붕’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이란에서 성장한 마보드 세라지라는 미국 작가가 쓴 것으로 친미 팔레비 왕조가 1979년 반정부 시위로 무너지기 전인 1973년의 이란이 배경이다.     당시 팔레비 왕조는 근대화와 여성 권리 확대, 그리고 산업화로 경제 성장을 이끌었지만 종교계의 반발과 빈부 격차의 심화를 초래했다. 국민의 반발이 커지자 팔레비 왕조는 권력 유지를 위해 사바크라는 비밀 경찰 조직을 강화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이나 대학생들은 감시당하고 죽거나 실종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소설의 주인공도 그렇게 희생이 되고 만다.  ‘박사’라고 불린 대학생을 멘토로 여기며 따르던 파샤는 그가 사바크에 끌려가자  그 자리에 장미 나무를 심는다. 민중들의 절망과 희망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하고 보존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도 귀하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주인공의 약혼녀인 ‘자리’가 국왕(샤)의 생일 축하 퍼레이드가 있는 날 광장에서 분신한다. 약혼자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촛불을 밝힌다는 의미였다. 그들의 항거는 동시대에 민주화를 염원하던 한국의 사회 상황과도 비슷했다.     소년들은 밤이 되면 지붕 위에 모여 꿈을 키우고 부모들은 살아가는 방법과 지혜를 자녀들에게 들려준다. 신뢰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튼튼한 내면세계가 정감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슬람이 전래 되기 전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 유구한 역사의 페르시아 땅, 이제는 이란 사람들이 왕조나 신정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잘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권정순 / 전직 교사발언대 페르시아 하늘 페르시아 시장 페르시아 사산 인도 페르시아

2026.03.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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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영혼이 털릴 때 나를 이기는 힘

‘영혼이 털린다’는 말은 극심한 스트레스나 피로, 지나친 감정 소모로 정신적,육체적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된 상태를 뜻한다. 과도한 업무나 고강도 운동,견디기 힘든 충격 등으로 멘탈이 무너지는 상황이다. 머리가 멍해지거나,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시달린다.   영혼은 육체에 담겨 마음의 작용을 맡고 생명을 부여하는 비물질적 실체다.영혼은 문화•학문•종교에 따라 의미가 다르지만 인간의 정신적•본질적 성격을가리키는 말이다. 혼(soul)이 사람의 마음과 감정, 의지를 표명하는데 비해영(sprit)은 신과 교통하며 사람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힘으로 간주된다.   괴테는 남편 있는 부인에게 연정을 품은 친구가 자살한 것과 약혼자 사라테부프와 못이룬 사랑을 엮어 14주 만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완성했다.   1774년 출간되자 감동의 소용돌이에 빠진 소설은 질풍노도의 시대를 이끈괴테의 대표작이자 사랑의 열병을 앓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영혼을 울렸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직장인’이었다. 변호사•행정가•경영자•극장장 등으로 일하며 글을 썼다. 바이마르 군주의 초청을 받아 군사•외교•사법 행정까지 국정 운영을 도맡았다. 격무에 시달리며 번아웃이 온 서른일곱의괴테는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던지고 이탈리아 로마로 떠난다.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괴테의 ‘파우스트’는 인간의 욕망과 구원이란깊이 있는 주제를 다룬 대작이다. 주인공 파우스트는 모든 학문을 섭렵했지만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해 고뇌하는 학자다.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현세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주겠다는조건으로 영혼을 팔기로 한다. 그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맺지만 더 큰 세계에서정치 예술 전쟁 등 다양한 경험을 한 늙은 파우스트는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전진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메세지다.     길은 잃고 방황하는 자는 영혼이 살아 숨쉬는 사람이다. 절망은 희망을 등에 업고뜀박질할 내일을 기다린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괴테의 말을인용한다.   영혼이 갈피를 못잡고, 이도 저도 안 되면 가만히 멍 때리기를 계속하라.멍 때리기는 더럽고 너덜해진 영혼에 새 살을 돋게 한다.   죽지 않으면 산다. 영혼이 털려도 육신이 살아 있는한 살기를 멈추지 않는다.목숨 줄이 끓어지지 않으면 살 것이고, 살아있는 육신은 영혼의 축복이다.   아무도 내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 출구를 모를 때는 서두르지 말고 그 자리에머무르면 된다. 영혼은 복귀 능력이 탁월하다. 참고 기다리면 정상으로 회귀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춤추는 별을 낳기위해선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라고 설파한다.   별이 빛나는 밤 춤을 추자. 혼돈의 시간에 매듭을 묶고 우주를 향해 팔을 벌리고생명의 기쁨을 담은 왈츠를 추자. 연인이 없으면 어떠리. 운명은 내 편이다.   나를 이기는 힘은 내게서 나온다. 인생이 끝나지 않는 혼돈이라해도, 별빛머리에 이고 달빛을 연인 삼아 춤을 추리라. 전쟁과 평화에서 애틋한 눈길 보내며사랑의 화살로 속삭이던 연인들처럼 ‘Natasha’s Waltz’에 맞춰 춤을 추리라.   잠시 영혼이 털린다해도, 흔들리는 것들은 바람을 타고 영원 속에 머문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주인공 파우스트 정신적육체적 에너지 대문호 괴테

2026.03.10.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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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인생의 꽃밭에서 숨 고르기

뜸만 들이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적당히 살겠다며 모든 일에 뜸만 들이다 보면 적당하게 살다 간다. 인생이 한번 왔다가는 소풍놀이라는 건 빈말이다.   어릴 적 소풍 가는 날은 잠을 설치며 손꼽아 기다렸다. 없는 살림에도 엄마는 장터에 내다 팔 달걀 중에 제일 큰 놈 두개를 골라 병아리 꽁지처럼 노란 지단 부쳐 돌돌 말아 김밥을 싸 주셨다. 삶은 감자와 옥수수, 떫은 맛 도는 땡감을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슬프게도 봄소풍은 일년에 단 한 차례뿐이였다.   감나무 가지 타고 올라가 나무들의 초록빛 치마에 마음을 빼앗긴 아지랑이 보며 봄을 기다렸다. 소풍가는 날을 학수고대 하는 사람에겐 봄은 꼭 온다.   뜸을 잘 들이는 것은 요리의 기본 학습이다. 옥수수는 뚜껑을 닫고 약 30분 삶아주면 탱글탱글하고 쫀득한 식감을 주는데 너무 오래 삶으면 물컹해진다.   밥을 지은 뒤 뜸을 들이는 것은 밥솥 내부의 잔열이 쌀알 속까지 고르게 침투해 밥알의 찰기를 높이고 맛있는 밥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추가로 열을 가하지 않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맛난 밥을 짓게 한다.   ‘급하게 서두른다고, 더 빨라 가는 게 아니라. 천천히 간다고, 더 늦는 게 아니라, 숨 고르며 느긋하게 가다 보면, 부끄럽지도, 후회하지도 않는, 구수한 삶의 냄새가 넘쳐 난다’ - 정웅구 시 ‘뜸 3’ 전문   달리기와 뜀박질에 익숙한 사람은 속도를 줄이고 달리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꺼질 줄 모르는 불꽃으로 몸과 마음을 담금질하고 불태우면 재가 되어 흩어진다.   힘들이지 않고 성공하고, 재물을 쌓고, 빨리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지만 사실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쉽게 무너진다.   인생에도 뜸 들이는 시간, 기다림의 인내, 숙성의 날들이 필요하다.   내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였다. 전국여고생 백일장에서 청상과부로 소복 입은 어머니 모습 담은 ‘백목련’이 당선됐다. 김춘수 시인 칭찬 듣고 내 꿈은 세계적인 시인이 되는 것, 양키시장에서 구입한 바바리 코트 입고 동성로를 배회했다.   소풍이 끝나고 발을 헛디디며 산을 내려올 때처럼, 운명은 꿈꾸던 인생의 달콤한 소풍날을 알려주지 않았다. 시인의 꿈은 문화와 언어의 장벽에서 침몰됐다.   20년이 넘게 매주 빠짐없이 미주중앙일보에 칼럼을 쓰며 자음과 모음을 기억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방인으로 사는 사람들의 눈물과 상처를 담은 장편소설 두권을 쓰고 싶었다.     20년간 뜸 드리며 몸살 앓던 숨고르기를 시작한다. 죽을 각오로 자신이 원하는 길 따라 행군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죽이든 밥이 되든 되돌아 갈 수 없어 지금 시작한다. 나이는 시간을 잡아 삼킨다. 집필을 시작했다. 장편 1권 ‘바람의 연가’, 2권 ‘바람벽에 기대’로 가제를 정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처럼, 시작과 끝은 있을 것이고 불꽃은 마지막까지 타오른다.   후회 없는 인생은 없다. 언제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높이 뜀박질한다고 하늘에 닿지 않고,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고 어제가 지워지지 않는다. 물구나무서기 해도 멀리 바라보고, 뜸 들이지 말고 숨고르기 하며,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것인지 고심한다.   마음의 창을 열고, 남은 시간들을 사랑하고, 올인하는 사람들의 꽃밭에는 청춘이 퍼드덕 봄의 날개를 펼친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김춘수 시인 전국여고생 백일장 editions 대표

2026.03.03.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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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겨울이 봄을 이기지 못한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 바르르 떤다(중략) /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중략) / 3월(三月)에 눈이 오면 /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 밤에 아낙들은 /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중에서     시인은 관념을 벗어나 순수한 이미지만으로 감각적인 언어를 시상에 담아 영혼에 불을 지핀다. ‘샤갈의 마을’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이며, 봄의 맑고 순수한 생명력을 환상적인 분위기에 담아 따뜻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봄을 기다리는 사나이의 관자놀이는 희망으로 생명을 잉태한다. 고통과 상처가 깊어도 겨울열매들은 올리브빛 옷을 입고 여인들은 그해의 찬란한 불을 지핀다.     기다림의 끈을 놓지 않으면 희망은 작은 풀잎에도 여린 꽃봉우리를 맺는다. 꽃샘바람에 가지가 꺾이고 찔레꽃이 바람에 흩날려도 사랑은 맹세를 기억한다. 산다는 것은 한평생 기다림의 끈을 놓지 않는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인지 모른다.     윤흥길의 중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인간의 존엄성를 상실해가는 한 남자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려낸다. 셋방살이하다 집을 장만한 오씨 집에 세든 권씨는 자신이 대학까지 나온 안동권씨라며 무너진 자존심을 지키려한다. 권씨는 아내의 수술비를 오씨에게 빌리려다 거절당하자 (오씨가 수술비를 대준 걸 모르고) 칼을 들고 서툰 강도짓을 하다가 탄로가 나고, 그는 행방불명이 된다. 다음날 오씨는 권씨의 방에 그가 애지중지하던 아홉 켤레의 구두를 발견한다.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不條理)극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줄거리는 ‘기다림’이다. 주 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국도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고도에게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고도를 기다린다. 심지어 고도가 실존하는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끼리 나누는 대화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밥 먹었냐고 물어보면 난 술이 싫다고  동문서답 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기다리지만 실은 무엇을 기다리며 사는지 모른다.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두서 없고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벽에 외치는 것과 같이 피상적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 힘겨운 에스트라공은 ‘우리 당장 목이나 매자’며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실행하지 못한다. 마치 힘겨운 삶을 도피하려는 우리의 나약한 모습과 같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상처에 베이고 긁히며 세월에 떠밀려 살아왔는가?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무너지는 자존심에 절망해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인생’이란 글자에 목숨을 걸며 살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가지 않아.’ 베케트의 명대사다. 무의미한 생을 의미있는 축제로 끝맺기 위해 오늘도 고도를 기다린다.     겨울이 모질어도 봄을 이기지 못한다. 고도가 영영 오지 않는다 해도 기다림의 끈을 놓치 않는 사람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겨울 열매들 주인공 블라디미르 사무엘 베케트

2026.02.24.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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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그 아름답던 날들

모질던 겨울이 소리 소문 없이 떠날 준비를 하는구나. 산더미처럼 쌓였던 폭설과 꽁꽁 얼어붙었던 빙판이 지축으로 스며든다.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날씨가 며칠 계속되자 따사로운 햇볕이 하늘 끝에서 내려와 축제를 벌이듯 사방을 어루만진다.   눈사태에 덮혀 형체도 없이 사라졌던 잔디밭과 연못, 숨죽여 엎드린 채소밭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릎까지 쌓였던 눈이 녹아내리자 거짓말처럼 잔디밭이 푸릇푸릇 얼굴을 드러낸다. 세상에! 그토록 가혹한 추위와 사투를 벌리며 목숨줄 붙잡고 봄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생명은 모질다. 죽지만 않으면 사는구나 생각했다.   ‘오늘은 까치 설날’ 어제 동창이 카톡을 보냈다. 고등학교 동창 여섯명이 옹기종기 모인 카톡방은 시시껄렁 해도 정겨운 사연들로 넘쳐난다.   카톡은 지난 여름 한국 가서 배웠는데 재미 있다. 그동안 회의 참석차 한국 방문 했을 때도 비즈니스 때문에 일주일 정도만 체류하고 황급히 돌아왔다.   그러고 보면 여지껏 살면서 놀러다니거나 남의 집에 ‘마실 다닌 기억’이 없다.   미국 달력에 구정 표시가 없어 동그라미 쳐두고 ‘Chinese New Year’를 기다렸다. 나보다 더 열심히 기다리는건 손주들이다. 세배보다 세뱃돈의 위력은 크다.   새뱃돈 수취인의 전폭적인 지지로 ‘양력과 음력’으로 설날을 두 번 치르게 됐다.   우리집 설날 인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새뱃돈 많이 받으세요’로 둔갑했다. 한복 입히고 한국말 인사 연습까지 시켰는데 세뱃돈에 몰입한 막내가 실수인지 고의인지 절하며 “세뱃돈 많이 주세요”라고 해 설날 인사말이 변경됐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목청 돋우고 삼만이 아재가 치는 꽹과리 소리에 맞춰 누렁이 앞세워 마을 한 바퀴 돌면 동네 어른들이 소쿠리에 감이나 군밤, 대추을 담아 주었다.   수 십 년이 넘도록 타향살이를 하셨지만 어머니 미국생활은 동지미 시골 마을에서 훈장(訓長) 어른 노릇하던 그 때 그 모습이다.   설날이나 구정, 추석 명절이 되면 온갖 음식을 장만해 손님을 초대하고 잔치를 벌인다. 한달 전부터 설날 상차림과 고유명절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한다. 재물을 소망하는 둥근 엽전 모양 떡과 가래떡을 만들고 동그랑땡, 오색꼬지전, 동태전, 깻잎전, 육전, 빈대떡, 잡채, 모듬전 부치고 소갈비를 재운다.   삼색나물은 뿌리를 잊지 않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무친다. 뿌리를 상징하는 도라지는 조상을 뜻하고, 고사리 줄기는 부모를, 시금치 잎은 자손이 하나로 연결돼 대대손손 번영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 뿐이랴! 밤새 찹쌀 삭혀 식혜 만들고 약식 유과 약과 강정을 만들어 개별 포장해 이름표 붙여 일요일 교회에서 분배한다. 특혜를 받는 사람은 평소에 다정하게 손잡아 주거나 건강을 챙겨주는 의사들이다.   배달 책임은 막내 아들! 내 말은 죽기로 안 들어도 할머니 지시는 즉시 복종한다. 인생의 꽃밭에는 수만가지의 꽃들이 자란다. 가슴에 사랑을 품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추억의 꽃밭에는 사시장철 꽃이 핀다.   물 주지 않고 가꾸지 않아도 가지각색의 꽃들이 어우러져 자란다. 천국처럼.   그 곳은 사랑과 기쁨이 항상 넘쳐나서 외롭고 슬플 때는 되돌아보면 된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설날 인사말 까치 설날 설날 상차림과

2026.02.1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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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랑과 예술, 심장의 불꽃은 타오른다

빈자리에 누군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천지차이(天地差異)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광기다. 천둥과 비비람이 몰아쳐도 함께 있는 순간은 따스하고 평화롭다.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 베스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전 벽면에 시민들이 남긴 비문과 그림 79건이 새롭게 발견됐다. 벽면에는 검투사 두 명이 맞붙어 싸우는 장면과 ‘에라토 사랑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누구를 사랑하는지 목적어 없는 고백이지만 사랑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우주를 떠돈다.   사랑은 광야에 몰아치는 모래 바람이다. 형체도 없이 경계를 허물고 세월의 강을 건너 국적을 초월해 사랑없는 모든 것들에게 생명의 환희를 새긴다.   제25회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대회가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시로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화려하게 개막됐다.   이번 행사의 주제는 ‘아르모니아(Armonia)’. 영어로는 하모니, 즉 조화와 균형을 말한다. 복잡다난하고 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21세기, 세계 정세와 세대-계층과 균열이 심각한 사회 분위기를 아우르는 시의적절한 주제다.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가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아리아 ‘네순 도르마(Nessun Dorma), 잠들지 말라’를 열창할 때는 가슴이 저렸다.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개회식 무대에서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가 부른 ‘Nessun Dorma’는 내 생애 잊지 못할 가장 아름다운 아리아다.   추억은 왜 하릴없이 시공을 뛰어넘고, 사랑했던 순간들은 축지법을 쓰며 세월의 흔적을 무자비하게 허무는가? 예술이 없었다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었다면 예술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서 가슴 떨리는 선율이 없었다면 높고 낮은 절망의 순간들을 어찌 참고 견딜 수 있었을까?   베토벤은 청력을 잃는 극한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절망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불굴의 상징으로 칭송받는다. 제자가 교향곡 제5번 ‘운명’ 1악장 서두의 주제를 물었을 때 베토벤이 “운명은 이와 같이 문을 두들긴다”라고 해서 제목이 붙여 졌다고 전해진다.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비켜가는 수밖에 없다. ‘운명’ 교향곡으로 생의 고통과 좌절을 견디며, 모닝 커피를 마시며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듣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심장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것이다.   여린 풀잎에 입맞추고, 늙어 껍질이 벗겨진 고목을 껴안고 사랑을 고백하겠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오직 예술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말을 남긴다.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앞에서 피처럼 붉은 하늘의 아픔을 삼키고, 봄이 오면 모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처럼 뒷마당에서 이웃들과 조촐한 파티를 하겠다.   사랑은 견딜 수 없는 인생의 하루 하루를 아름답게 채색한다.   ‘살아가는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살아가야 할 인생의 목표는 여태 남아있다.   인생의 완벽한 그림은 없다. 구도도 없이 불시착해서 미완성으로 끝이 난다.   사는 것이 바람개비의 펄럭임이라 해도 꼭 붙잡고 살기로 한다. 심장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예술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각자의 색깔로 생을 채색한다.   뿌리 없는 나무로 흔들리지 않기 위해, 심장의 불꽃은 사랑으로 타오른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예술 심장 이탈리아 밀라노 올림픽 스타디움

2026.02.1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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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풍금이 있던 자리

가난이 수치가 아니던 시절은 행복했다.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서로 돕고 기대며 산다. 대구로 이사 오기 전 초등학교 3학년까지 초가집이 버섯처럼 옹기종기 붙은 삼거리 마을에 살았다. 스물 남짓한 집들은 담장이 허름해 내 집, 남의 집 경계가 없었다. 어느 집 쌀통에 쌀이 얼마나 남았는지, 끼니를 걸러야 하는 집이 누구인지 안다. 저녁 때쯤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을 향해 ‘새끼들 데불고 밥 묵으라 오라 캐라’라고 소리쳤다. 굶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 가는 길은 행복했다. 꼬부라진 논둑길 따라 요리조리 논밭 사이를 달리면 보자기로 싼 양은 도시락은 달그락 소리를 냈다. 측백나무가 담장처럼 둘러처진 교문 앞에 장군처럼 버티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큰 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은 주홍글씨로 유명한 너세니얼 호손이 1850년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미국의 작은 마을에 큰 바위 얼굴이라 불리는 바위산이 있었다. 어니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큰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는 전설을 믿고 기다린다.   재력가, 장군, 성공한 정치가를 만났지만 탐욕과 권력 명예욕에 찌든 것에 실망한다. 노년기에 든 어니스트는 마을에서 설교자로 존경 받는 인물이 되고 사람들은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자신보다 훌륭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그 사람을 기다린다.   사람 얼굴은 천차만별이다. 인생이란 대본에는 각기 살아온 세월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태어날 때는 비슷해 보이지만, 세월이 산천을 다스리듯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나이 들면 생김새와 얼굴 모양이 달라진다.   미술이나 문학은 숟가락 얹지만 무식이 탄로날까 전전긍긍하는 것이 음악이다.   시골에선 풍금에 맞춰 종달새처럼 따라 부르면 됐다. 건반이 두개나 고장 나도 목소리 높여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도시로 전학해 피아노의 맑고 명쾌한 소리에 주눅 들어 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촌티가 탄로날까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풍금 소리는 어머니 젖무덤에 잠들 때처럼 포근하고 따스했다. 소복 입은 어머니 한숨소리 같아서 잊히지 않는 날들에 슬픈 날개를 달아준다. 피아노는 고통과 아픔을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풍금은 슬픔의 강물 따라 생을 떠돈다.   우리집 그랜드 피아노는 장식용이다. 애들에게 어릴 적 피아노 바이올린 풀룻 기타 등 렛슨을 시켰지만 연습을 안해 렛슨비만 날렸다. 전인교육 시킨다고 콘서트 오페라 뮤지컬 미술전시회를 주말이면 끌고 다녔다. 그나마 아들이 집에 오면 악보 없이 피아노 치는 걸 보며 ‘잔디밭에도 민들레 꽃은 핀다’로 위로받는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 가는 것이다.’-앙드레 말로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 찬란한 수식어와 빛나는 경력 없이도, 힘든 세상과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면 진실 하나로 살아갈 용기를 가진다.   애들이 그리우면 피아노의 먼지를 닦는다. 그리고 유년의 풍금소리를 듣는다.   세월이 가도 풍금은 유년의 기억 속에 감꽃처럼 밤하늘을 밝힌다. 슬프고 외로울 때면 풍금소리 들으며 찔레꽃 향기로 마음의 바다에 배를 띄운다.   건반이 몇 개 없어져도, 생의 페달을 밟을 때마다 주눅들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를, 기억은 흔적으로 남아 바람개비로 유년의 강가를 맴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큰바위 얼굴 풍금 소리 가도 풍금

2026.02.0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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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마음의 길을 찾아

자고 나니 풍경이 달라졌다.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집과 집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길과 길 사이가 모호해지고, 내 것과 네 것이 불투명해졌다.   땅과 하늘이 맞닿아 껴안고 하나가 되었다. 세상은 숨죽이는 고요 속에 백색으로 대지를 덮고 어둔 밤인데도 온 천지가 천사처럼 흰옷으로 갈아입었다.   미국 전역에 북극 한파가 몰아치는 강력한 겨울 푹풍으로 한파경계령이 내려지고 인구 절반이 넘는 약 1억850만명이 피해 영향권에 들어 22개 주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두려움으로 잠을 설치며 소파에 누워 일기예보를 지켜본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장 3-4절) 폭설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된다.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 그림을 그리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높은 작업대에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누워서 4년만에 ‘천지창조(Creation of Adam)’를 완성했다.   천재는 스스로 길을 만든다. 미켈란젤로는 허공에서 창조의 길을 만들었다.   사는 동안 수없이 갈 길을 잃었다.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좌절하기도 했다. 길을 잃고 헤매여도 찿으면 길은 열린다.   뉴욕 아트엑스포 전시회에 35년 동안 참석해도 여태 화장실을 못찾는다. 눈썰미 없고, 방향 감각 제로에다, 길치에 기계치라서 길 잃는 것이 주 특기다. 운전 면허 땄을 때도 겁쟁이라서 빌빌거리며 운전을 잘 못했다.   옛날 옛적에, 길 잃으면 차를 즉시 세울 것, 곧장 고속도로 순찰 경찰 부를 것, 아는 체 달리다 보면 다른 주로 빠질 위험 있다고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있었다.   마음의 길은 표지판이 없어도 혼자서 잘 찿아간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고, 어디로 가는 것이 바른 길인지 알지 못해도, 마음이 내키는 곳을 향한다.   길을 잘 못 들었다고, 살아온 길이 아니라고 후회하고 자책할 필요 없다. 인생의 길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되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지금 가는 길이 꿈꿔왔던 길이 아니라 해도 절망하지 않기로 한다. 자신이 지고 갈 만큼의 무게를 등에 업고 오르막이든 내리막이던 차분히 걸어갈 뿐이다.   인생 후반부는 후회하고 따질 겨를이 없다. 요란한 생의 깃발을 꽂을 필요 없다. 버티고 살아온 생의 발자취 껴안고 작은 조약돌로 이름 없는 돌탑을 쌓는다.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중략)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중략)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 (중략)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중에서   마음에도 길이 있다. 억만개의 장미로 불태우던 꽃길이 있고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던 가시밭길도 있었다. 사투를 벌이던 고통 속에서도 생명줄 놓지 않으면 아픔은 바람따라 흩어지고 봄이 오면 꽃들은 생명의 찬가를 부른다.   부지런한 이웃들이 삼삼오오로 모여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치우고 길을 만든다.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아도 아파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은 슬퍼할 때가 이니다.     사는 것이 허물어지고 부서지는 바람벽이라 해도, 무너지면 다시 쌓고, 흩어지면 다시 불러 모으면 된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가야할 지 몰라도, 살을 에는 모진 겨울이 지나면 마음의 길은 마른 나무 가지에 백목련 한송이 꽃 피운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인생 후반부 운전 면허 뉴욕 아트엑스포

2026.01.2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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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고독이 머무는 자리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는 84일간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혼자 보트에서 지내다가 대어를 만난다. 상어와 사투를 벌리는 노인은 많은 고난을 겪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물고기는 단순한 낚시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와 고난을 상징한다. 헤밍웨이 글은 표면 아래 감추어진 의미와 감정을 독자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빙산이론’으로 유명하다. 산티아고의 외로운 싸움과 고독을 존재론적 치열한 갈등을 통해 상징적으로 몰입하게 한다.     고독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무지개 색깔로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고 홀로 마시는 향긋한 커피 한 잔은 따스하지만 적조하다. 고독은 홀로 떨어져 있는 듯 마지막 잎새들처럼 외롭고 쓸쓸함으로 뒷마당을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실로 오랜만에 비발디의 사계(四季, Le quattro)를 듣는다. 봄이 감미롭고 경쾌한 반면에 여름의 1악장은 천둥번개를 떠오르게 하고 황홀하고 격렬하다. 가을은 정숙하고 부드러운 음율로 둥지의 새를 남쪽나라로 날려 보낸다. 겨울은 어둡고 우울하지만 쇠소리 내며 마지막 잎새처럼 애절하게 나부낀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애절한 눈빛으로 왈츠(Natasha's Waltz)를 추던 연인들의 사랑처럼 겨울은 슬픈 작별을 견디며 가슴 아리게 등을 돌린다.     인생의 4계절은 소리소문 없이 왔다가 미처 껴안을 틈도 없이 세월 속으로 흘러갔다. 봄날은 아지랑이 머리에 이고 사랑이 있는 곳이면 무작정 달려갔다.     여름은 전쟁터처럼 치열했다. 수십 마리의 상어 떼를 만나도 목숨 걸고 싸워야 했다. 왜 그리 살았을까? 무엇을 얻기 위해 목숨 갈아먹는 줄도 모르고, 이리 뛰고 저리 달렸을까? 돌아오지 못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 문패도 없는 역을 향해 물욕과 탐욕, 욕망과 성공의 지도를 그리며 무작정 질주했다. 세상을 다 가져도 빈손으로 떠나는 게 인생이다. 소명(疏明)할 까닭이나 기회 조차없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러시아의 저명한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는 82세 때 가출해서 열흘 만에 시골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객사했다. 16살 연하에게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해 13명의 아이를 낳고 ‘전쟁과 평화’ 원고를 6번이나 필사한 소피아는 톨스토이의 반대로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죽음을 보며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보다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톨스토이는 돈 명예 명성 지위를 모두 가졌지만 이상과 욕망 사이에서 고뇌하는 불완전한 영혼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행복한 척하기는 쉽다. 요란한 포장지를 벗기고, 내려놓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행복은 환상이다. 스쳐 지나가는 봄바람에 형체도 없이 계절이 바뀌듯,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면 행복은 평온한 고독으로 생의 순간을 따스하게 데운다.     죽음이 두려워 도망치지 말라. 죽는 것보다 살아있음에 찬가를 부르라. 용기 있는 자만이 고독이 머무는 자리에 생명의 나무 한그루 심는다.     고독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견디는 성찰이다. 마음의 바다에 돛단배 띄우고 목마른 나무에 물을 주며, 무너지는 날들 위해 튼실한 나무 가지 붙잡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지렛대 하나 세우는 일이다.     마음의 바다에 폭풍우 가라 앉히고, 조약돌처럼 작은 일상에 감사하며, 사랑이 머무는 곳에 빛과 희망 있음을 믿으면, 고독이 생을 충만케 하리라.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대문호 톨스토이 나무 한그루 나무 가지

2026.01.2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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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겨울 하늘

잿빛 구름 아래   겨울 하늘   흰 눈 가득 이고   산 넘어 물 건너   바람 따라 날아오고…       낙엽 떨어진     나무 숲 사이로   겨울 하늘     더 춥고 더 낮은   바람 몰고 달려온다       나뭇가지 내려다보는   겨울 잿빛 하늘   찬바람 휘몰아   성한 가지 죽은 가지   골라내고…       세상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시련(試鍊)의 겨울 하늘   준비(準備)된 사람만이   극복(克服)할 수 있는   혹한(酷寒)의 바람…       몰아오고 있다  남영한 / 시인문예마당 겨울 하늘 겨울 하늘 겨울 잿빛

2026.01.15. 18:2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그해 겨울은 따스했다

봉숭아 꽃물 들인 손톱이 첫눈 올 때까지 안 빠지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첫눈 오는 날 같이 맞으면 연인이 된다는 낭만적인 속삭임도 아련한 옛추억이다.   쓸쓸해지면 종이학 접어 하늘 높이 날려보냈다. 종이학은 돌아오지 않았다. 삶이 흔들리는 창가에 여린 날개 접고 사뿐히 그대 품에 안겼으리라.   옆집 옥이 언니는 인형놀이 대신 내 얼굴에 숯덩이로 눈썹 그리고 꽃잎 따서 입술과 볼을 연홍색으로 다듬었다. 꽃물 들인다고 봉숭아 찔레꽃 진달래 개나리 철쭉 유채꽃 동백꽃 꺾어 삼만이 아재가 주워 온 돌접시에 갈아 명주실로 꼭꼭 싸매 주었다. 첫눈 오기를 기다리며 손톱 꽃물이 지워질까봐 애를 태웠다.   올 겨울은 유난히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폭풍이 몰아치고 모진 회오리 바람이 벌거벗은 가지를 꺾는다. 눈덩이를 등에 업은 채 눈부시게 반짝이는 나무들은 서로 가지를 껴안는다. 갈대는 죽은 듯 서있지만 생명을 움켜쥐고 사투를 벌인다.   죽지 않으면 산다. 쓰러져도 사랑이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여우와 놀던 시절, 아득한 기억의 파노라마 속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아이처럼 철 없는 여자를 죽도록 사랑했다,   여자는 귀엽지만? 고집이 세고, 짧은 영어 실력으로 제 할 말만 지껄였다. 달래고 가르치고 응원하는 남자의 깊은 사랑이 여자의 삶 속으로 파고 들었다.   여자는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여자를 위해 남자는 세살짜리 딸의 손을 잡고 팝콘을 한 바가지 튀겨 승마장 근처 연못에 가서 한 시간을 놀았다.   병아리 날개처럼 노오란 원피스에 수술 달린 노란 모자를 쓰고 하얀 장갑을 낀 리사는 예쁘다는 말 듣는 게 좋아 아빠 손잡고 오리 먹이주려 매일 연못으로 갔다.   리사는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났지만 귀엽고 둥근 한국인 얼굴을 하고 있어 언뜻 보면 정상아 같았다. 우리 가족 누구도 리사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리사는 우리집에서 가장 소중하고 빛나는 보석이었다.   세상에 완전한 행복은 없다. 온전한 사랑도, 영원한 약속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가 지면 칡흙 같은 어둠이 몰려오듯 태양은 공전을 하며 돌고 있을 뿐이다. 짧았지만 행복했다. 불행은 햇볕을 가리는 어둠일 뿐 심장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의사가 남은 시간이 6개월이라고 했을 때 ‘전쟁터에서, 아무도 내가 오늘 하루 살아 돌아온다고 약속하지 않았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시간은 죽음 앞에 무자비하게 흘렀다. 검정 드레스에 검은 모자를 쓰고, 리사는 아빠가 좋아하는 노란 드레스를 입혔다. 성조기를 받자 21발 예포(Canon Salute)가 발사됐다. 리사는 아빠가 왜 안보이는지 모른 채 내 치마 뒤로 숨었다.   별들도 가볍고 무거운 인생을 산다. 블랙홀은 우주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신비로운 천체다. 중력이 강해서 빛조차 못빠져 나온다. 사랑도 빠져나올 수 없다. 산다는 것이 허공에 날리는 휘파람 소리라 해도 그리움의 강에 돛단배 띄우는 사람은 사랑의 묘약을 먹고 산다.     천지가 흰눈으로 덮여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운명을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사랑을 선택할 수 있기 바란다. 아파하지 않기로 한다. 슬픔이 빗물처럼 쏱아지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바람이 모질게 부는 날은 마지막 잎새 붙잡고, 눈밭 헤치고 방황했던 계절의 아픔 접으며, 사랑으로 버티고 사랑으로 살아남은 그해 겨울은 따스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그해 겨울 봉숭아 꽃물 손톱 꽃물

2026.01.13.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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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떠나는 것들 속에 사랑을

유년의 기억 속에 대청마루 한 가운데 액자가 걸려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깨우칠 때까지 뭐가 적혀 있는지 읽지 못했다. 우리집 대청마루는 엉덩이만 붙이면 누구나 쉬어갔지만 대부분 액자의 글을 읽지 못했다.   출생지가 현풍면 원교동이라고 적혀 있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현풍읍을 지나 마산과 창영을 연결하는 삼거리 작은 동네다. 낙동강을 구비 돌아 비슬산을 등지고, 먼지가 눈 앞을 가리는 도로를 달리면 삼천리 버스는 우리집 앞에 선다.   대구에서 탑승해 목마른 손님들에게 차갑고 신선한 우리집 우물물을 배달하는 건 내 몫이다. 갈증을 푼 손님들은 청문 틈으로 찌게발(?)을 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애호박 바가지에 동전을 넣어주었다. 고마운 사람에겐 돈을 주는구나 생각했다.   아! 이젠 족보도 연유도 없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대청마루에 유령처럼 자리잡고 있던 그 액자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하루에도 몇차례 삼천리버스가 오고가는 탓에 누렁이 황구 털처럼 잘 다져진 갈색 마당은 먼지를 뒤집어쓴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차례 회색 눈처럼 덮히는 대청마루를 쓸고 닦는데 공을 드린다. 한글을 잘 못 읽는데도 어머니는 정성스레 액자의 먼지를 닦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액자의 시를 내가 낭송하고부터 어머니 이마의 굵은 주름살이 펴지고 보름달은 외양간과 돼지우리, 찔레꽃이 만발한 마당을 훤하게 비춰주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리도 / 슬퍼하지 마라, 성내지 마라! /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 기쁨의 날이 옴을 믿으라.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는 것. / 지나간 것은 또 다시 그리워지는 것을’ -1837초판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저서 출간 번역본 참고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마주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슬픔과 괴로움은 결국 지니갈 것이고 인생의 역경과 불안, 좌절과 슬픔을 견디면 더 나은 내일이 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 푸쉬킨의 시는 청상과부 어머니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푸시킨은 러시아 사람들한테는 ‘문학의 아버지’ 같은 존재로 단순한 시인을 넘어 러시아 문어체의 기틀을 세운 작가로 토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푸쉬킨은 말이 많은 세상에서 말이 없는 작가로 시대와 맞선 조용한 저항은 푸시킨이 남긴 침묵의 항거였다.     살아갈수록 푸쉬킨의 시가 주는 무게가 가슴에 쌓인다. 어릴 적엔 철 없어 의미를 깨닫지 못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탐욕과 재물에 도취돼 욕망이라는 전차에 매달려 허우적거렸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으며, 무엇을 위해 남은 시간을 소모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소중한 것들이 한 순간, 눈 깜박 할 사이에 사라져도 그리운 것들을 붙잡고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고뇌와 아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새벽별 머리에 이고 아침을 기다린다.     마음은 침묵으로 말한다. 떠들지 않는다. 마음의 창문을 닫지 않으면, 내일은 미래를 머리에 이고, 밝은 걸음으로 창문을 두드린다.   사랑하는 그대여! 마음이 미래에 사는 것처럼, 오늘이 슬퍼도 내일은 절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한 순간에 인생이 덧없이 지나가도, 떠나는 것들에게 가볍게 손 흔들며, 다가오는 날들 위해 사랑이 불타오르기를 간구합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우리집 대청마루 청상과부 어머니 알렉산드르 푸시킨

2026.01.0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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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태양은 지고 다시 뜬다

지는 것이 태양뿐이랴! 꽃잎도 피고 진다. 사랑도 뭉게구름으로 부풀었다가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달이 차면 보름달도 이지러지고, 동쪽 하늘에서 새벽별로 반짝이던 그대 눈동자도 세월이 가면 목련꽃잎 되어 흩어진다.   새벽별은 계명성, 샛별, 금성을 가리킨다. 리투아니아 신화 속 새벽과 하늘의 여신으로 미모가 뛰어난 아우슈리네는 샛별(베누스)이 되어 하늘을 밝히고 어둠을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어릴 적 산만하고 앞을 안 보고 생각(?)에 골몰해서 잘 넘어졌다. 엄마가 호호 불며 빨간색 아까징끼 발라준 무릎은 피카소 추상화처럼 성할 날이 없었다.   인생은 수백번 엎어지지만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무릎이 깨져도 절뚝거리며 어딘지 모르는 종점을 향해 달린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사는 것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마지막 열차라 해도 뛰어내릴 수 없다.   1819년 겨울 아침 사형대 앞에서 생의 마지막 5분을 세며 서 있던 스물여덟살 청년,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1분이라도 더 살 수 있기를 빌며 죽음 직전 그가 본 건 교회 첨탑에 반사된 빛이였다. 그 빛이 너무나 눈부셔서 그는 절규한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작품을 쓰는 일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는데 페트라솁스키 금요모임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어릴 적부터 이어져 온 가난과 아버지의 죽음, 사형 선고 후 집행 직전 특사로 풀려나지만 혹독한 시베리아 강제 유배 생활, 광적인 도박 중독, 평생을 달고 산   뇌전증 등으로 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백치, 가난한 사람들, 악령등 주옥 같은 작품들을 집필했다.   1881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부를 구상하고 있던 토스토예프스키는 앓던 폐기종이 악화되어 숨을 거둔다. 장례식에는 6만여명의 인파가 떠나는 작가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토스토예프스키는 한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열매 맺는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내면, 죄와 구원, 자유와 신앙을 가장 깊이 파고 들어 불멸을 관통하는 문장으로 잃어버린 인생의 희망과 방향을 제시한다.   지는 해는 슬퍼라! 노을은 찬란하게 불타는 별리의 인사말도 끝내기 전에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진다. 자리를 비켜주는 것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태양은 지고 다시 뜬다. 그대가 잠든 순간에도 그리움의 끈을 놓치 않는다.   석양은 마지막 남은 잎새 껴안고 작별의 눈물 감추며 활화산처럼 불타오른다. 성냥개비 하나로 사랑은 우주를 밝힐 불을 지핀다.   오늘의 태양이 지면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어둠과 고통의 강을 건너 새벽별과 작별하고, 태양은 숨죽이며 찬란한 생명으로 대지를 물들인다.   힘든 오늘을 견디면 내일은 온다. 꼭 오고야 만다. ‘내일’이란 단어 속에는 ‘희망’이라는 밝은 햇살이 반짝인다. 태양은 죽지 않는다. 잠시 사라질 뿐이다.   검은 망또 걸친 절망을 등 떠밀어 보내면 희망의 태양이 숨죽이며 다가온다.   지는 태양 붙잡고 눈물 떨구지 말라. 내일의 태양은 내일 찬란하게 빛난다. (작가,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새벽과 하늘 동쪽 하늘 건너 새벽별

2025.12.3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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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겨울 하늘

잿빛 구름 아래   겨울 하늘   흰 눈 가득 이고   산 넘어 물 건너   바람 따라 날아오고…       낙엽 떨어진     나무 숲 사이로   겨울 하늘     더 춥고 더 낮은   바람 몰고 달려온다       나뭇가지 내려다보는   겨울 잿빛 하늘   찬바람 휘몰아   성한 가지 죽은 가지   골라내고…       세상 모든 사람이 바라보는   시련(試鍊)의 겨울 하늘   준비(準備)된 사람만이   극복(克服)할 수 있는   혹한(酷寒)의 바람…       몰아오고 있다 남영한 / 시인문예마당 겨울 하늘 겨울 하늘 겨울 잿빛

2025.12.25. 17:30

[이아침에] 성탄,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온 순간

한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다. 올해도 전쟁과 재앙, 지진과 홍수, 온갖 갈등과  아픔으로 지구촌이 온통 어수선한 한해였다. 그런 중에도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성탄 만은 어느 누구에게나 평화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4년 12월24일 밤, 전쟁 한복판의 참호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당시 독일군과 영국군이 서로 총을 겨누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눈은 내리고, 밤은 깊었다. 그때 독일 측 어느 참호에서 낮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느 독일군 병사가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다. 순간 양측 참호 전쟁터에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이번에는 영국 측 참호에서 영어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캐럴이 트럼펫 소리와 함께 울려 나왔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측 참호에서 병사들이 총을 내려놓고 촛불과 초콜릿 같은 선물을 들고 서로에게 다가가 양측 군인들이 서로 감싸안고 성탄을 축하했다. 적어도 이날 밤만은 그들은 서로 총을 겨눈 적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었다.   비록 그 다음날부터 각기 상부의 지시로 다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게 되었지만,  분명 그날 밤만은 이 세상에 총성을 잠재우고 그 자리에 사랑이 태어난 기적의 성탄이었다.   어떻게 인종과 언어가 다른 전쟁터에서조차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이 되어 오신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마구간의 구유로 낮게 임하신 그분의 극진한 사랑 때문 아닐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2000년 전에 오신 과거의 예수 탄생이 어떻게 매년 성탄절마다 다시 이루어지느냐고 의아해 하며 반문하는 이가 많다. 성탄이 그저 하나의 명절이나 축제라는 소리다. 그런 분들에게 성탄은 단지 과거형일 뿐이다. 그러니 축제이상의 진짜 기쁨을 어떻게 맛볼 수 있겠는가!   성탄은 알고 보면, 하느님이 지금 ‘나’를 사랑하고 계심의 확고한 증거며 깨달음이다. 그렇기에 성탄은 분명한 현재형이다. 우리는 완전하지도 않고, 하느님께 나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존재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우리가 하늘로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죄와 거짓의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죄인인 우리 마음속 구유 안 낮은 곳으로 직접 찾아오셨다. 그런 그분의 다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현재형 인식이며 깨우침이 성탄이다.   주님은 단 한 번 오셨지만, 나에게 오신 그분의 엄청난 이런 사랑을 적어도 매년 성탄 때라도 기억하고, 내가  찾기 전 먼저 나를 찾아오신 그분의 사랑의 실체를 깨달아 내 삶이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면, 이게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 삶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불평에서 감사로, 불안에서 평화로, 받는 삶 대신 베푸는 삶으로 바뀌어 진리 안에서 ‘새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된다면, 이건 분명  내 안에 이미 와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예수 성탄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절망과 고뇌로 절규할 때, “나는 너의 아픔을 너와 함께 울고 있다”라고 속삭이는 마음속 하느님을 보게 된다. 이를 심령으로 깨달아 흐느끼는 순간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 안에 하늘나라가 찾아 온 때문이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면, 마구간 구유 속이라 할지라도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기 때문이다. 이를 믿는 사람에게 더는 성탄은 주님이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축제가 아닌,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 하느님과 하늘나라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사실 앞에서 억제하기 힘든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 깨달음의 기쁨이 생긴다면, 이게 바로 ‘성탄’이 왜 나에게 기쁨인가에 대한 분명한 대답 아니겠는가.     Merry Christmas!!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수필가이아침에 성탄 하늘 성탄 하늘 예수 성탄 마음속 하느님

2025.12.23.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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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그리운 사람들은 별이 된다

은하수를 본 것이 얼마만인가? 복극성이 그리는 큰곰자리의 일곱 별들은? 눈물 속에서 마지막 보았던 물망초 꽃들은? 금빛 조약돌에 부딪혀 흩어지던 찬란한 청춘의 빛들은? 눈물 모르던 날의 따뜻한 감꽃 목걸이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그리워하던 시간보다, 보이는 것들 속에 세월이 멈춘 풍경 속으로 돌아간 짧은 시간들이 가슴 저미는 추억으로 살아있다. 그 짧은 만남을 위하여 긴 헤어짐의 날들이 필요했던 것일까?   드러내고 흐느낄 수 없었던 폭풍우 치는 저녁과, 잠 못 이루는 어두운 밤을 지나 새벽별을 가슴 깊이 안을 때까지, 삶은 살아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고와 절망을 딛고 세월의 깊고 먼 강을 도도히 흘러온 얼굴들, 간혹 잊힌듯 흔들리지만, 시간의 허리를 파먹으며 저문 날의 창가를 기웃거린다.   고향이나 조국이 그리운 것은 그 땅이나 하늘과 산이 아니라, 그 곳에서 숨쉬고 사는 정겨운 얼굴들이 있어 아득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익숙한 자음과 모음들이 모닥불 지피며 다가오는 땅, 엄마 젖가슴처럼 부드럽고 푸석푸석한 흙이 있는 곳, 그리운 사람들의 눈망울 속으로 달려간다.   오래된 동창들을 만났다. 허둥대는 삶의 고삐 멈추고, 마른 꽃잎의 책갈피 속 유년의 뜨락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이 함께 나누었던 시간들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해도 남은 시간 따스한 강물되어 서로의 가슴을 데펴주지 않을까?   바람이였을까? 찰나와 영원 사이, 세월의 골목마다 숨어있다가 할퀴고 지나간 것은 눈물이었을까? 가슴 헤집고 모질게 흩어지던 꽃잎들의 흐느낌은 외로움과 상처를 견디지 못한 꽃들의 아우성이었을까?   꽃잎들이 빛 바래져, 인고의 날들로 실강을 만들며, 눈가에 잔 주름으로 퍼질 때, 우리는 나목처럼 당당하게 서 있어야 한다. 사랑이 이별로 무너져도, 사랑을 다시 하고, 무너진 사랑을 견뎌내야 한다. 청춘은 버릴 것 없는 축복이였다.   ‘소년은 한 옴큼 꽃을 꺾어와 싱싱한 꽃가지만 골라 소녀에게 건넨다. “하나도 버리지 말어” 산마루께로 올라갔다’ -황순원 ‘소나기’ 중에서   꿈이 부서져 낙엽처럼 저문 거리를 나부껴도, 미련 버릴 수 없는 오늘과 포기할 수 없는 내일 있어, 달무리는 달을 껴안고 희미한 빛의 둥근 테를 두른다.   그리운 사람들이여! 어둠 속에서도 촛불을 켜 주세요. 영혼의 어둠을 밝힐 날들 위해, 꺼지지 않는 심장의 등불 켜고 청춘의 촛불을 밝혀 주세요.   보고 싶은 사람이여! 그대 슬픔이 내 것이 되지 못하고, 나의 아픔 속으로 그대가 들어오지 못한다 해도, 별들이 모여 찬란하게 반짝이듯 당신은 나의 별이 돼 주셔야 합니다. 가장 소중하고 빛나는 별로 내 곁에서 반짝여 주세요.   알지 못할 슬픔이 밀려오는 날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사랑이 있었기에 그래도 살 만한 인생이였다고’ 사랑의 독백을 주술처럼 외워주세요.   그대 곁에 늘 별자리로 남아있겠어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대가 내 곁에 있듯이, 북극성 멀리 떠나 있어도,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해 주세요.   세월이 흘러도,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별로 내곁을 밝혀 주세요.   그리운 사람들은 별이 된다. 떠나도 그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곁에 있듯이,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엔 별이 뜬다.  (작가,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엄마 젖가슴 가슴 저미 금빛 조약돌

2025.12.2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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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는다

흔들리는 게 갈대뿐이랴! 사랑도 바람도 나무도 떠나간 그대 목소리도 흔들린다.   한줌 목숨 지키기 위해 인생은, 마음의 끝자락도 흔들린다. 목숨 붙어있는 것들은 살아남기 의해 몸부림치며 흔들린다.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는다.   뒷마당 연못에 살던 갈대가 땅밑으로 숨어들었다. 가을 햇살에 연못 물이 마르기 시작하자 오리 가족은 숲속으로 거쳐를 옮겨 아기사슴 형제와 동거를 한다.   갈대는 혹한 속에 언 발을 비비며 목숨줄 붙잡고 봄이 오길 손꼽아 기다린다.   정원의 꽃들이 기지개 켜기 시작하면 갈대는 연못 가장자리부터 단단한 생명줄을 감아올린다. 갈대는 손잡지 않아도 어울려 사는 법을 안다. 무리지어 어깨 추스리며 따스하게 등을 어루만진다.     초라해 보여도 화려함을 탐하지 않고, 연인처럼 깍지 낀 손 서로 껴안고 다정하게 입맞춤한다. 꽃샘바람이 가지를 비틀며 꽃잎이 낙화돼 허공을 맴돌아도, 한여름 몰아치는 미친 비비람을 모질게 버티며, 갈대는 흔들릴 뿐 부러지지 않는다.     마음이 길을 잃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흔들리고 부러진다.   인생 후반부는 후회보다 성찰의 시간이다. 깨우침과 성찰없는 후회는 무의미하다. 성찰(省察)은 마음을 반성하고 깊이 살피는 것을 말한다. 행동거지, 생각, 감정을 되돌아보고 지난 날 잘못을 반성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길찿기다   후회(後悔)는 과거에 잘못한 일을 두고두고 생각하며 뉘우치는 것을 말한다.   자기성찰 없는 후회는 무용지물이고 시간 낭비며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땅을 치고 후회해도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는다.   나이 들어 가장 많이 하는 후회는 ‘하고 싶은 일을 미룬 것’과 ‘자신답게 살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라며 미루다 보면 결국 ‘그 나중’은 오지 않는다. 남들의 기대에 맞춰 살다 보면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려 삶이 공허해진다.   미국의 국민화가로 추앙 받는 그랜마 모지스(Grandma Moses)는 78세에 그림 그리기 시작해 101세까지 1600여점을 그림을 남겼다.   가난한 농부 집안의 10남매 중 셋째였던 애나 메리(본명)는 교실 한 칸짜리 시골 학교에 잠깐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다. 12살 때부터 밥을 먹여주는 댓가로 농장 일, 집 안팎 청소, 음식 준비, 바느질 등 15년 동안 가정부로 일했다.   27살 때 같은 농장에서 일하던 모지스와 결혼해 10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가난한 살림으로 5명이 병으로 죽는다. 그림 속 따뜻하고 정겨운 고향의 모습과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모지스가 그리워하는 사랑하는 아이들이다.    남편이 67세 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삶에 가장 고달픈 길로 빠졌을 때 동생의 권유로 78세에 그림 그리기 시작한다. 모지스는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5명으로 꼽히고 미국을 움직인 100대 인물로 선정됐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딱 좋는 때이죠.’ 모지스의 어록이다.   목숨 있는 것들은 흔들린다. 뿌리만 살아있으면, 흔들려도 희망을 놓치 않는다. 후회없는 인생은 없다. 흔들리지 않는 삶은 없다.   한해 동안 부족한 글 아껴 주신 분들께, 감사와 사랑을 담아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라고 기러기 편에 적어 보냅니다. (작가,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인생 후반부 행동거지 생각 연못 가장자리

2025.12.1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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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돌아갈 수 없는 날들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 (중략)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 이어령 유고시집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중에서.   시대의 지성,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딸 이민아 목사 10주기를 앞두고 생의 마지막에 남긴 아버지의 독백이다. 헌팅턴비치는 이민아 목사가 생전에 살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해변이다.   이민아 목사는 생전에 쓴 책 ‘땅끝의 아이들’(2011)에서 예쁜 잠옷 입고 서재로 가서 아버지가 ‘굿 나잇’ 해주길 바랬지만 아버지는 건성으로 손을 흔들기만 했다고 한다. 작가, 교수, 논설위원 등 3개 이상의 직함을 가진 아버지 팔에 매달려 사랑받는 딸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피곤한 아버지는 ‘밥 좀 먹자’면서 날 밀쳐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했다’고 토로한다.   ‘고통으로 아파하는 딸 위해 흘리는 눈물이, 유리창에 흐르는 빗방울과 무엇이 다르냐’고 미안해하던 아버지는 딸 10주기 기일을 보름가량 앞두고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며 가장 아픈 손가락이던 딸의 품으로 돌아갔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얻기 위해 우리는 투쟁하며 사는가? 명예와 부, 지식과 행복, 사랑과 배신, 상처와 굴욕을 견디며 생의 한가운데로 던져지는가?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한줌 목숨 지킬 수 없어 우리는 빈손으로 작별 인사를 한다. 용서를 빌며 회한의 눈물로 적은 편지는 부칠 곳이 없다.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은 파랑새가 되어 허공을 맴돈다.   사랑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아이들은 어른을 흉내 내며 자란다. 아버지와 어머니, 가장 가까이 함께 숨결 나누는 사람에게 사랑을 배운다. 아름다운 집과 값 비싼 옷, 멋진 환경보다 따스한 아랫목에 다정하게 두 발 비비며 살던 때를 그리워한다,   강남 갔던 제비는 봄이 오면 다시 온다. 생태계 문제로 제비가 돌아오지 않아도 어머니는 대청마루에서 발 뒤꿈치 들고 빈둥지로 돌아올 제비를 기다렸다.   사업하며 가장 힘들었던 일은 시간을 쪼개는 일이다. 풀타임으로 뛰어도 감당 못할 노릇에 여자가 사업하는 건 생명 건 투쟁이나 다름 없다. 천방지축 잠꾸러기가 새벽 4시 기상, 지금까지 지속하는 건 ‘어머니’란 기적의 단어 때문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투항하는 게 내가 사는 법칙이다.   애들은 날 닮아서 갈팡질팡 일거리를 만들었지만 할머니 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정이 많고 착한 편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숨가쁘게 이리 뛰고 저리 달렸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축복 받고 아름다운 시절이였음에 틀림없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 어떤 것이 축복인지 행복인지 알지 못한다. 산다는 것이 허무의 신발 가게에서 짝이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쩔뚝거리며 산다해도, 명절이면 품 속에서 데펴 꽃신 신겨주던 엄마 손은 따스했다.   하늘을 나르는 샤갈의 연인처럼 내 아이들이 행복한 사랑을 꿈꾸고, 피카소처럼 굵고 강렬한 선으로 스스로 인생을 창조하기를 바란다.   크리스마스 때 손주들 만나면 꼭 껴안고 볼에 뜨겁게 키스하리라. 내 침대에서 ‘미미’하고 자겠다며 차례를 다투는 손주들을 품에 껴안고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리라. (작가, Q7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행복 사랑 이민아 목사 이어령 유고시집

2025.12.09.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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