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듯 가슴이 얼얼해집니다. 흐르는 눈물은 가슴 속 때를 훔치고 봄비는 세상살이에 쌓인 먼지를 말끔하게 지웁니다.
코발트색 옷자락을 펼치는 하늘은 목화 꽃처럼 크고 작은 흰구름을 그려 넣습니다. 기약 없는 만남과 헤어짐을 떠올리며 가슴이 저립니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박목월 시가 떠 올랐어요.
청록의 옷을 입은 나무들 사이로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을 한동안 지켜보았습니다.
만남과 이별, 생과 사의 갈림길도 서두르지 않으면 구름처럼 처연하게 흘러가겠지요.
지난 겨울은 참담했습니다. 폭풍우가 대지를 뒤덮고 무릎까지 눈이 쌓였습니다.
봄은 새 각시의 더딘 걸음으로 왔습니다. 목을 길게 빼고 창밖을 바라보며 기다림의 흔적은 찾으려고 애를 태웠습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뚫고 손톱만큼 작은 깻잎들이 먼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연달아 철쭉이 진홍색 잎을 가지 끝에 매달고 목련은 부끄러움으로 고개 숙인 채 땅만 내려다봅니다. 담장을 등에 업은 샛노란 개나리는 질투의 화신처럼 무리 지어 정원의 뒤뜰을 가득 채울 심산입니다.
가을이 올 때까지 기다림으로 여린 손 내밀던 코스모스는 혹한으로 생사가 묘연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가을에 씨를 받아 이름표 붙여 창가에 매달아 두었거든요.
뿌리만 살아있으면 죽지 않듯이, 씨앗은 작고 말라도 생명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뒷마당에 병풍처럼 줄지어 선 나무들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찬란한 초록 빛으로 계절의 풍요로움을 화폭에 담습니다. 연못에는 겨울동안 숲 속에 갇혀 살던 오리들이 한가로이 헤엄치며 장난질합니다. 새들이 지지배배 떠드는 소리에 꽃잎들은 빛나고 아름다운 색깔로 단장하고 세상 어느 오페라 보다 황홀한 인생의 무대를 장식합니다.
그동안 미친듯이 인생을 불태우고 살았습니다. ‘죽지 않으면 산다’ 세 단어로 살아있는 모든 것에 올인했습니다. 사업과 화랑을 병행하며 아이 셋 키우고 한국사람의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고, 차별에 굴복하지 않고 뼈 깎는 인고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생의 목표는 비발디의 사계(절)처럼 바뀝니다. 봄과 여름을 허술하게 보낸 사람은 풍요로운 가을을 수확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야 할 중요한 시간입니다.
박수갈채와 찬란했던 날들을 망각의 강으로 떠나보냅니다. 작지만 반짝이는 새벽별의 손짓을 담아 새롭고 창의로운 인생을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백지에 그려 주세요.
영욕으로 뽐내며 명함 뿌리던 날들을 지워버리면 사는 것이 정직하고 수월합니다.
연락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인연을 절단하는 게 현명합니다. 불필요한 만남과 인연을 덜어내야 목말라 하던 자유를 누리며 작지만 보석 같은 출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망각의 강은 남은 찌꺼기를 바다로 보내고 인생은 늘 푸른 아침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주변의 연락 끊고 ‘귀양살이’ 한다며 너스레 떨다가 ‘유배생활’ 중이라고 바꿨습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빛나는 하늘과 아름다운 자연, 꽃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스치는 바람과 악수하고, 수시로 떠오르는 언어를 가슴에 품고, 다가올 생의 아름다움에 몰두하면, 사랑과 아픔이 망각의 강으로 흘러가듯 사는 게 편하고 따뜻합니다.
외로움을 이기는 힘은 타인의 위로와 간섭이 아니라 스스로 견디는 용기입니다.
지난 겨울은 추워도 따스했습니다. 손바닥에 그려준 사랑의 맹세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꽃잎의 향기로 흩날리듯, 망각의 강물 속에 사랑의 날들은 흘러갑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