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길의 한 중앙, 올바른 길을 잃고서 어두운 숲을 헤매이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무서움으로 적셨던, 골짜기가 끝나는 어느 언덕 기슭에 이르렀을 때 나는 위를 바라보았고, 이미 별의 빛줄기에 휘감긴 산 꼭대기가 보였다. 사람들이 자기 길을 올바로 걷도록 이끄는 별이었다.’ 단테 신곡 지옥 편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단테는 호메로스,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와 함께 유럽 문학사 최고의 위치에 있다. 신곡은 이탈리아 문학의 최고작이자 인류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단테가 35세 때 밤에 길을 걷다가 산짐승들에게 위협당할 때, 로마 최고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내려와 지옥과 연옥으로 안내하고, 젊은 시절 짝사랑했던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소설에는 1000명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묘사가 강렬하고 생생하지만 이름을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가지각색의 인간들이 등장한다. 지옥에서의 형벌은 자신이 저질렀던 죄를 다시 되돌려받는 식으로 전개된다. 바람을 피우면 바람에 날아다니고, 과하게 탐식하면 괴물에게 먹히고, 인색하거나 낭비하면 돈주머니 같은 돌을 굴리는 형벌을 받는다. 지상에서의 저지른 악행과 똑같은 지옥의 형벌이라고 해서 ‘콘트라파소(Contrapasso)’라고 한다. 콘트라파소는 라틴어의 ‘정반대’란 의미의 ‘콘트라(Contra)’와 ‘고통을 당하다’라는 동사 ‘파티오르(Patire)’ 합성어로 ‘지상에서 행한 악한 행동은 지옥에선 자신이 당한다’라는 뜻이다. 인과응보, 권선징악(勸善懲惡), 뿌린 대로 거둔다와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여태 무엇이 남아있기나 하는지, 스러지는 초승달을 바라보며 고통과 슬픔에게 묻는다. 사는게 허망해지고 공허감과 권태감이 스멀스멀 해질녘의 외로움으로 밀려온다. 무엇을 얻기 위해, 누구를 위해, 그토록 모진 세월을 견디고 버티며 살아왔을까? 한용운의 오언절구 ‘월욕락(月欲落)은 달이 차고 지는 것처럼 하염없은 인생을 아쉬워한다 ‘松下蒼煙歇 鶴邊淸夢遊 山橫鼓角罷 寒色盡情收’(소나무 아래 푸른 안개 스러져 가고/학이 잠든 언저리에 노닐었던 맑은 꿈이 여라/산이 비끼니 이제는 피리 소리마저 그치고/찬 달빛 서서히 걷히니 이토록 아쉬운 것을’ 쇼펜하우어는 지옥 편의 묘사는 머리에 착착 들어오는데, 연옥 편과 천국 편의 묘사는 뭔가 두루뭉술하며 이해가 안 되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데 그 이유는 ‘현실이 지옥과 같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장 차이다. 악함과 선함은 변덕과 자기 방어 논리다. 아침에 마음 다스리고 오늘 하루 착하게 잘 살아보세를 다짐했지만 해 질 무렵에는 스스로 만든 족쇄가 발목을 잡는다. 신곡에 나오는 사람들은 조금만 실수와 악행에도 무지비한 지옥으로 떨어진다.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질 건지 천국으로 갈지 몰라 나는 천국을 믿기로 한다. 천국과 지옥은 스스로 만든다. 살아있는 동안 지옥 대신 천국의 노래 부르며 착하고 마음 따뜻하게 살면, 사람 때문에 울어도 사랑 때문에 웃는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천국 편의 지옥 편의 동안 지옥
2025.09.23. 12:43
차별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차별을 극복하는 길은 차별한 사람보다 더 나아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세상 어느 곳에도 차별은 존재한다. ‘내가 아는 동양 사람들 중에서 네가 제일 똑똑해’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한국 사람을 까는 말이다. 동양인을 얕보고 깔보는 뜻이다. 동양 사람은 무식하고 예의 없고 거렁뱅이란 뜻이다. 거렁뱅이(Begger)는 남에게 빌어먹는 사람이다. 영어 속담 명언 사전에 ‘거렁뱅이는 거렁뱅이와 어울리게 하라(Let beggers match with beggars)’는 말이 나온다. ‘끼리끼리 놀아라’는 말이다. ‘칭챙총’은 서양권에서 동양인, 특히 중국인을 조롱할 때 사용하는 비하 표현이다. ‘이상하고 우스꽝스럽다’라는 의미로 문화적인 모욕이 담긴 말이다. 19세기 미국으로 대거 이주한 중국인 노동자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철도 건설, 광산, 세탁업에 종사했는데 중국인들의 언어를 희화화 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 이후로 아시아인 전체를 향한 조롱 섞인 차별적 영어 슬랭으로 굳어졌다. ‘니거’는 라틴어 ‘niger(검은색)’에서 파생된 단어로 17-19세기 미국 노예제도 시대에 흑인 노예를 부르는 명칭이다. 니거(Nigger)는 가장 금기시되는 인종차별 슬랭이다. 미국 역사 속 흑인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여 절대로 사용해선 안 된다. 봉시아저씨(이제는 할배)는 40년이 넘도록 우리집 대소사를 챙겨 주고 화랑일을 맡아 집사 역할을 한다. 레스트랑을 여러 곳에 운영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우서방 대신 집 안팍 일 도와주고 애들 운동 경기 응원하러 간다. 라오스에서 경찰 신분이였는데 공산 세력을 피해 정글을 헤매며 목숨을 건졌다. 과일 열매나 별의 별 것 다 잡아먹으며 정글에 숨어 한달 만에 타일랜드에 도착해 가족 상봉을 한다. 우여곡절, 난민 자격으로 온 식구가 미국에 정착해서 8명의 자녀가 결혼해 17명의 손주를 두었으니 성공한 이민자로 꼽힌다. 어떠한 상황에도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를 나는 믿는 편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키 작고 왜소한 봉시 아저씨가 서투른 영어로 말을 해도 아무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일이다. 화랑 손님들은 오히려 주인보다 봉시 아저씨를 더 찿는다. 인품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봉시는 한결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누구에게도 똑같은 태도로 느린자의 미학을 실천한다. ‘FOB(Fresh Off the Boat)’는 원래 멋쩍고 어색한 상황이나 상태를 말한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어색하고 적응을 못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영어가 서툴고 서양문화에 익숙하지 않는 아시아 이민자를 비하하는 표현이다. ‘Oriental(동양인)’은 이국적이고 낯선 차별적 뉘앙스로 사용되어 ‘Asian’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GooK’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동양인을 명칭할 때 썼던 단어인데, 지금도 아시아인을 비하할 때 사용된다. 강물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을 모두 껴안고 큰 바다로 흐른다. 편견과 차별을 넘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면 다함께 차별의 강을 건널 수 있다. 잘난 체 있는 체 하지 않고, 공공 장소에서 소란스럽게 떠들지 말고, 누구에게나 정중하게 대하고, 언행을 가다듬고, 낮은 자세로 친절과 사랑을 베풀면 목화 꽃으로 명주실을 잣아올리듯 아름다운 조각 이불을 함께 수 놓을 수 있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차별적 영어 차별적 뉘앙스 봉시 아저씨
2025.09.16. 13:03
여러명이 경주하면 항상 꼴찌다. 근데 홀로 뛰면 나는 늘 일등이다 운동 신경 발달 부족과 주의력 결핍으로 잘 넘어져 꼴찌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생활의 달인 우리 엄니 김해연 여사 개똥철학에 의하면 ‘머리만 잘 돌아가면’ 사는데 별 문제 없다는 실사 구제의 원론이다. 우리 집은 스스로 명성을 자랑하는 요리왕이거나, 요리왕에게 빌붙어 아부하며 먹거리 챙기는 두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된다. 홍콩에서 쇼부라더스 영화 필름 제작자로 일할 때 이소룡(?)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우서방은 미식가에 식도락가의 명성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회사 명의로 십 수 년을 특급 호텔 샹그릴라 등에 거주하며 미슐랭 스타 레스트랑에서 즐기던 음식 자랑에 애들은 선망의 눈초리로 존경을 표한다. 돈 안들이고 혼자 즐기는데 초를 칠 일 없어 내게는 소 귀에 경 읽기다. 나는 양은 냄비에 라면 끓여 찬밥 말아먹어도 꿀맛이라서 감지덕지 먹어 치운다. 어머니는 한식요리 대가로 소문이 자자한 분이다. 스스로 궁중요리 내지 종가집 전통요리 손맛을 자처해서 찬사를 받는다. 퇴근 시간이면 내가 좋아하는 요리로 정성스럽게 저녁상을 준비하시는 어머니. 명절이면 밤잠을 설치며 강정 약과 유과 수정과 식혜를 만들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교회 마당에서 배포(?) 하신다. 수혜자는 어머니 손잡아 드리며 깍듯이 인사 잘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 앞에서 기 죽은 적은 없지만 먹거리 앞에선 생계가 달린 문제라서 머리 수그리고 숙연해진다. 우리집 식탁의 하이라이트는 딸 크리스티나의 등장이다. 컬리너리스쿨 수석 졸업에 푸드네트워크 인턴을 거쳐 레이쳘 레이쇼 수석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방송에 출연한 딸 앞에선 잘난 체 하던 식구들의 기가 팍 죽는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온갖 요리를 한꺼번에 해치우는지 역시 공부는 열심히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전혀 경쟁의 대상이 안 될 경우, 납작 업드려 꼬리 흔드는 게 상수다. 방학 때나 휴가 때 집에 오기 전에 우서방과 입맞추며 메뉴 정하느라 전화통이 불이 난다. 그동안 굶었나?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 간곡하게 부탁한다. 공짜 인생에 길들린 막내 아들은 먹는데는 천재고 도사 빰친다. 고집 세고 자기 것만 챙기는 녀석인데 음식 앞에서 폭삭 찌그려져 온갖 아첨을 떤다. 장 보는 것은 물론이고 부엌에서 보조 요리사로 아부하며 제 먹거리 챙기는데 귀신이다. ‘벗이 먼 데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說乎)가 아니라 ‘자식이 멀리서 집에 오니 기쁘지 아니한가’로 혼자 미소 짓는다. 꼴찌는 행복하다. 시비 거는 사람 없고, 측은지심, 다음 번에 더 잘하라고 격려의 멘트로 위로한다. 한 등수만 올리가도 잘 했다고 칭찬한다. 적어도 우리집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요리 못한다고 태끌 걸지 않는다. 잔소리 안하고, 잘 먹고 감탄사 연발하는 군중이 있어야 요리사가 신나는 법이다. 일등은 외롭고 괴롭다. 고난의 길이 끝없이 펼처진다. 붙잡고 매달려야 자리 보존하고, 추락할까 가슴 졸이고, 앞이 안 보이는 곳을 향해 혼자 달린다. 꼴찌의 여유로움을 즐기며, 유배지의 식탁은 쓸쓸하지만 편안하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꼴찌 신세 보조 요리사로 종가집 전통요리
2025.09.09. 13:09
인생에는 되돌이표가 없다. 물에 섞여 물과 함께 물처럼 흘러간다. 세월은 날강도처럼 눈 깜박할 사이 휘리릭 날아간다. 과거는 나홀로 그린 그림이다. 무대가 바뀌고 등장인물이 달라져도 주인공은 바뀌지 않는다. 공연이 실패하던 성공하던 막이 내릴 때까지 슬픔의 강 따라 인생은 흘러간다. 범선이나 돛단배는 돛을 달아 바람의 힘으로 항해한다. 노를 사용하지 않고 돛을 달아 풍력을 이용해 운행한다. 경상남도 창원 지역은 오래 전부터 강을 건널 때 동력기를 달지 않고 돛을 설치한 돛단배를 타고 낙동강과 마산만을 건너다녔다. 당시 육로가 개설되지 못한 곳이 많았기 때문에 돛단배는 중요한 교통수단 중 하나다. 낙동강은 1980년대 초반까지도 나루터가 있어서 북면과 대산면 사람들이 돛단배를 많이 이용했다. ‘마지막 석양 빛을 깃폭에 걸고 / 흘러가는 저 배는 어디로 가느냐 / 해풍아 비바람아 불지를 마라 / 파도소리 구슬프면 이 마음도 구슬퍼 / 아~ 어데로 가는 배냐 /어데로 가는 배냐 황포돛대야’-이미자 노래 ‘황포돛대’ 중에서 창원시 귀산동은 마산만과 맞닿아 있어 오랫동안 돛단배를 이용했는데 흰 광목을 누런 황색으로 염색해 질기고 튼튼한 돛을 달았다. ‘황포돛대’는 석양을 등지고 강을 건너는 애절한 서민의 영감을 살린 노래가락으로 손색이 없다. 산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크고 작은 배에 몸을 싣고 하염없이 떠내려 간다. 노를 저어 길을 찿기도 하고 풍랑에 배가 뒤집혀 지기도 한다. 1959년 개봉한 영화 벤허는 고전 명작으로 불멸의 걸작이다. 작품 중 나오는 9분 분량의 전차 경주신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장면으로 꼽힌다. 벤허는 단순한 고대 시대의 복수극을 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와 삶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서사극이다. ‘삶의 노력에는 속임수가 있을 수 없다’는 영화 속 메시지처럼 노력은 반드시 상응하는 결실을 맺는다는 진리를 벤허의 삶은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운명은 되돌릴 수 없다 해도 생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 벤허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온 장면은 수없이 많은 노예들의 발이 쇠사슬에 묶인 채 노를 저으며 마케도니아 해적들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승리하던 패배하던 노예들은 몰살당한다. 유대귀족이였던 벤허는 갤리선의 노예로 전락해 쇠사슬에 묶여 노를 젖는다. 아리우스는 벤허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간파하고 쇠사슬을 풀어준다. 해적과의 전투 직전 교전이 진행되던 중 벤허는 동료 노예들의 결박을 풀어주고 해적과 싸우다가 바다에 빠진 아리우스를 구해낸다.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리우스는 죽은 친아들 대신 벤허를 입양, 자신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상속할 권리를 주지만 벤허는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고향 유대로 돌아간다. 배가 파산되고 난파선에 매달려도 살 사람은 살고 죽을 사람은 죽는다. 삶에는 되돌이표가 없다. 되돌아 갈 수 없다 해도 생의 물줄기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물줄기를 바꾸는 것은 선택이고 투쟁이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 말고, 바람과 물을 다스리는 지혜와 용기가 있으면 원하는 쪽으로 강을 건널 수 있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영화 벤허 오랫동안 돛단배 마케도니아 해적들
2025.09.02. 13:43
인생에 명품은 없다. 진짜가 있을 뿐이다. 명품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진짜라고 다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짜는 시간이 지나면 들통 나기 마련이지만 진짜는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명품 인생은 진주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빛깔로 광택이 난다. 세상살이 남의 인생 흉내 내서 사는 것만큼 피곤 한 건 없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한국식 근대화의 격동 속에 살아온 한 남자의 고단한 삶을 그린 천명관의 장편소설이다. 어릴 적부터 이소룡을 추종한 삼촌은 중국집 배달원을 하다가 사기 당해 빈털터리 되고 이소룡과 같은 길을 걷고 싶어 충무로에서 ‘으악’ 하고 죽어나가는 단역배우 ‘으악새’가 되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다. 모방과 아류, 표절과 이미테이션, 짝퉁 인생에 머물게 되는 한 남자의 기구한 삶이 산업화와 민주화혁명, 자본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삼촌 마음 속 이소룡은 그가 혼신을 다해 갈구하고 꿈꾸던 생의 처절한 희망이다. 비록 그의 삶이 상처 나고 찢어지고 실패했다 해도 누가 감히 짝퉁인생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개 같은 인생, 개처럼 살다 죽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개처럼 살게 된다. 어차피 산다는 것은 흉내내기나 짝퉁과 모방을 반복한다. 지금은 짝퉁 인생을 살지만 언젠가는 진품이 되고 명품이 될지 모른다는 로망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로망은 실현하고 싶은 소망이나 꿈꾸는 이상이다. 옷장에 숨겨논 보물처럼 닦고 광를 내도 짝퉁은 진품이 안된다. 가짜란 걸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내가 그 비밀을 알기 때문에 짝퉁을 진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남을 속일 수 있어도 자기를 속이기는 힘들다. “유럽 여행 가서 선물로 명품 가방 하나 사 와라.” 내 친구가 친구에게 말했다. ‘국회의원 뱃지 달고 명품 하나 없는 사람 나 뿐이다. 뭔지는 모르겠고 베토벤 얼굴 비슷하게 로고 찍힌 거’라고 해서 동창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베토벤이 아니고 베르사체(?) 명품 가방 사오란 말이다. 정직힌 발언은 헛소리도 귀하게 들린다. 물건이 짝퉁이면 버리거나 교체할 수 있지만 인생이 짝퉁이면 대체가 불가능하다. 명품은 독창적인 디자인과 혁신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뛰어난 품질과 내구성으로 오랜 시간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를 계승하는 장인의 혼이 담겨 있다. ‘명품’과 ‘짝퉁’이라는 단어는 제품의 가격이나 진위 여부를 넘어선 인생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제품뿐만 아니라 사람 삶의 태도와 성품에도 적용될 수 있는 철학적 개념이기도 하다. 물건은 가짜가 진품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지만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 유행이 지난 옷은 올트레이션을 거쳐 재활용되거나 변신을 꾀할 수 있지만 인간은 하루 아침에 가짜가 명품이 되는 역전의 용사가 되기 힘들다. 20년이 넘도록 매주 하루도 빠짐없이 미주 중앙일보에 칼럼을 썼다. 40여년 전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떠돌았지만 모음과 자음을 숙명처럼 붙잡고 살았다. 새로 맞닥뜨리는 세상에서 짝퉁 인간이 아닌 진품으로 살아 남기 위해 모국어는 어머니의 젖줄처럼 나를 강인하게 했다.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도 명품은 오래된 정원에서 한 떨기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명품 인생 짝퉁 인생 명품 가방
2025.08.26. 13:47
늘 일등하다가 2등 하면 잔소리 듣는다. 꼴찌는 중간만 해도 칭찬 받는다. 요즘 요리 실력 자랑하는라 때 빼고 광 내고 스스로 침이 마른다. 그동안 사업에 매달려 고군분투, 부엌 살림은 어머니 몫이였다. 한식은 먹기만 잘 하지 요리는 젬병이다. 돌아가시기 전부터 어머니는 근동에 사는 한식 요리 맛깔나게 하는 분에게 요리 비법을 전수시키고 굶어 죽지 않게 잘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궁하면 통한다. 얻어먹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남에게 빌 붙어 사는 건 치욕(?)이다. 요즘은 유튜브나 검색란에 요리 이름만 입력하면 가지각색 레시피가 등장한다. 요리 못하는 바보는 ‘바보 중의 왕바보’이거나 게으르고 미련한 인간(?)이다. 배울수록, 할수록 재미 있고 기분 좋은 게 요리다. 먹거리가 넉넉하면 행복하다. 우서방 왈 ‘음식은 즐겨먹기라도 하지만 그림은 먹지도 못한다’며 은근히 애들에게 미식가에 식도락가인 자신을 부추기며 나의 미술적 취향을 성토했다. 요리책 보고 연구하고 연습해서 어르신들 집 배달 가서 스스로 홍보한 덕분에 격려 받는 지경에 도달했다. 왕년에 요리로 한가락 하던 어른 앞에서 문자 깔고 자랑하면 콧방귀도 안 뀐다. 노력은 성공의 아버지, 동정표 받으면 칭찬 받는다. 인생에 역전은 없다. 반전이 있을 뿐이다. 반전(Reverse)의 매력은 전혀 예기치 못한 줄거리로 비틀고(Plot Twist) 복선을 깔아 흥미를 증폭시킨다. 대니 보일 감독의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iionaire)’는 빈민가 한 소년의 특별한 여정을 조명하며, 운명, 희망, 인간 정신의 힘에 대한 주제를 탐구한다. 엄청난 찬사를 받아 8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슬럼독(Slumdog)은 빈곤(Slum)이라는 단어와 개(Dog)를 합성한 단어로 빈민가 거지를 말한다. 미국에서는 할렘, 한국에서는 달동네쯤이다. 빈민가 삶의 엄혹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지식과 재치가 더 나은 삶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제말의 여정은 인간 정신의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어려움과 역경에 직면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배웠고, 자신의 재능을 개발했으며, 결국 자신의 꿈을 실현했다. “끝인 줄 알았는데, 시작이었다.” 퇴사 후 실패를 경험하지만 창업에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는 끝이 아니다’라고 토로한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실패를 기회로 바꾼 사람들의 반전 스토리는 불행을 극복하는 끈질긴 용기다. 완전히 망하고 나면 바닥에서 다시 배운다. 앞이 캄캄하지만 별 수 없이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다. 길을 잘못 들어 캄캄한 구멍에 빠지면 한바퀴 헤매다 보면 본래 자리로 돌아온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반전의 반전은 인생역전이다. 역전의 용사는 움켜 쥔 생의 밧줄을 놓지 않는다. 초인의 허울 벗고 한계를 극복하며 천길 낭떠러지 다리를 혼자 건넌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반전 스토리 빈민가 거지 슬럼독 밀리어네어
2025.08.19. 14:03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변한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 결단과 용기로 생각의 문을 열면 다음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인생살이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과거에서 벗어나야 미래의 희망이 보인다. 생각은 계획을 세우거나 문제를 해결하고 판단을 내리는 활동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과정을 통해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신 작용이다. 백날 생각만 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진전과 변화가 없다. 생각이 미래를 창조한다. 무엇을 탐구하고 옳다고 믿는 생각은 부정적인 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프로그램 한다. 생각은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일어나면 매일 열심히 거울을 본다. 집안 곳곳에 거울을 달아놓고 내 모습을 정리한다. 이 순간은 단 하루 내게 허락된 선물이고 축복이다. 새로 시작하는 하루와 맞장 뜰 준비를 한다. 상대는 거울 속 내 모습이다. 누구보다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는 단단한 속껍질로 버티며 살아갈 생각을 한다. 집안 곳곳에는 펜과 메모지를 비치한다. 생각의 파편은 날파리처럼 한 순간에 휘리릭 날아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흔적없이 사라진 얼굴들처럼. 죽음의 신 하데스가 다스리는 저승에는 망자들이 거쳐야 할 다섯 개의 강이 있다. 저승 입구 아케론 강을 건너며 깊은 고통을 씻어낸다. 비탄과 통곡의 코키토스 강에서 시름과 비통함을 내려 놓는다. 물과 진흙이 끓는 플레게톤 강에서 남은 감정들을 완전히 태운다. 스틱스강은 두려움과 증오를 털어내는 강이다. 레테의 강은 망자가 건너는 마지막 강이다. 내세로 가기 전 과거의 기억을 잊기 위해 망각의 강에서 강물을 마시고 이승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작별을 한다. 잊어버리고 싶은 상처도 많겠지만 지울 수 없는 흔적도 있다. 세월의 바람 속에 상처는 신음으로 흐느낀다. 폭우가 내리는 날에는 번개로 창문을 두드린다. 우서방 투병 동안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2년 동안 리사와 굶지는 않았을 텐데 먹은 음식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뇌는 필요 없는 기억을 저장하지 않는다. 정신적 충격이 큰 사건이나 고통스러운 경험은 의도적으로 잊게 만든다. 선택적 망각(Selective forgetting)이다. 뇌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생존 수단인 셈이다. 뇌는 자신에게 해롭거나 고통스러운 정보는 아예 거부하거나 지워버리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외상이나 상처로부터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뇌는 자가 방어 시스템을 가동한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가운데가 비어 있으므로 그릇의 쓸모가 있게 된다.’ 노자 도덕경 11장에 나온다.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가다듬고 어제처럼 내일을 버티고 오늘을 살아갈 결단을 하면 살아 남게 된다. 어제의 기억에 묻혀 오늘을 살면 슬픈 기억을 떨치고 망각의 강을 건너지 못한다. 레테의 강을 건너면 망각의 언덕에는 작은 깃발 하나 나부낀다. 일생동안 가파른 언덕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는다 해도 레테의 강을 건널 때 사랑은 눈물로 방울져 흘러내린다. 망각은 신의 내린 축복이다. 잊히지 않는 것들 속에서 날파리처럼 떠도는 기억은 꽃잎 송별로 밤하늘을 아프게 수놓는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선택적 망각 정신적 충격 저승 입구
2025.08.12. 13:43
덜 된 밥은 맛없고 빈 깡통은 요란하다 아는 척 잘난 척 있는 척, 삼척을 버리면 사는게 수월해진다. 편해진다. 인간은 항상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자기 존재의 불확실성을 덮고 과대포장 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부풀려 자신의 모습을 위장해 인정 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그림 그릴 때 너무 욕심을 부리면 작품을 망친다. 스케치는 명암 표현을 과도하지 않고 부드럽게 해야 채색 시 엉김을 방지한다. 남의 작품을 베끼지 말고 기법이나 구도는 참고만 하고 자신의 영감과 창의력을 발휘해야 좋은 작품을 만든다. 과도한 채색이나 덫칠은 작품의 신선함을 망가트리고 욕심이 과하면 그림이든 인생이든 어수선하게 황칠한 것 같아 망치기 쉽다. 잘난 척 잘하는 사람은 무리에서 골빈당으로 찍힌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잘났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타인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잘난 척 떠들어대는 사람의 변론은 지루하고 역겁고 진정한 대화의 장을 열기 힘들다. 아는 척 저 혼자 떠드는 사람은 대체로 무식한 사람들이다. 벼가 익으면 머리를 숙인다. 지식이 많을수록 생각이 깊어지고 언어 선택에 무게가 실린다. ‘척’ 잘 하는 사람들은 남보다 훌륭해 보이고 싶은 표면적인 욕망과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자존감을 얻기 위한 본능적인 욕구 때문이다. 자존감 결핍은 자신을 과대 포장하고 현란한 말투로 상대를 제압하려 노력한다. 자존감(自尊感)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자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내적 기준에 따른 자기 수용이며 외부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존심(自尊心)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이다. 지존감이 있는 그대로 자신을 긍정하는 내적 가치인데 비해 자존심은 경쟁이나 타인의 평가에 기반한 외적 긍정이다. 잘난 척과 잘난 것의 차이점은 자신감의 능력을 혼돈하는 것에서 나온다. 잘난 척 하는 사람과 잘난 사람은 다르게 행동한다. 잘난 체 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족한 것을 감추려고 오버 액션 하는 경우가 많지만 잘난 사람은 보이는데로 보게 한다. 진짜 잘난 사람은 자신이 잘난 걸 알기 때문에 굳이 티를 낼 필요가 없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잘난 척 하는 것은 스스로를 해독제에 중독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 헛소리만 지껄이다 보면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믿게 되고 중독에 빠져 사기꾼으로 전락하기 쉽다. 자존심은 자기 사랑이며 자기애(自己愛)다. 자존감이 자신의 가치성을 스스로 가늠하여 느끼는 감성인데 비해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자기애는 자신의 가치성을 으뜸으로 기준하는 개인주의적 사랑이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내가 나를 승인할 수 있는 마음이다. 자기의 하자나 약점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이다. 자기를 긍정하는 마음을 가지면 사는 게 편안해진다.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투영된다. 거울은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비춘다. 요리할 때 향신료와 조미료를 너무 많이 넣으면 음식 맛이 간다. 자랑이 넘치면 듣기에 민망하고 덜 된 밥을 씹을 때처럼 맛이 없다. 빈 깡통은 요란하고 시끄럽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자존감 결핍 부리면 작품 벤자민 프랭클린
2025.08.05. 12:56
다 가지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유의 기쁨은 빈 손일 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이다. 모든 걸 다 가지면 갖고 싶은 것들이 사라진다. 어릴 적 헝겊으로 만든 예쁜 인형을 갖고 싶었다. 버섯처럼 옹기종기 붙은 삼거리 동네에는 도시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예쁜 인형을 가진 애들이 없었다. 인형을 본 적도 없지만 나이든 언니 있는 동무들은 자투리 헝겊으로 인형은 만들었다. 근동에서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지만 ‘공부만 잘하면 된다’며 인형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동무들이 인형을 업고 다닐 때 베게를 포대기에 싸서 업었다. 옥이언니는 내 유년의 구세주다. 빛나는 환상이다. 언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참한 아기인형을 만들었다. 부엌에서 타다 남은 장작 부스러기로 둥글게 눈썹을 그리고 숯덩이를 골라 피카소 그림의 여인들 눈처럼 삐딱하게 선을 그린 뒤 비율에 안 맞는 동그라미를 눈동자로 그려넣었다. 머리와 팔다리는 솜을 뭉쳐 만들고 몸통은 쌀이나 나락 찌꺼기를 도톰하게 넣었다. 참꽃이나 장미꽃잎을 으깨 입술을 칠하면 20세기 큐비즘 시대를 알리는 ‘장밋빛 시대’를 우리기 먼저 연 셈이다. 천경자 화백의 ‘길례언니’는 아름다운 꽃모자를 쓰고 긴 손가락으로 턱을 살짝 고이는 우아한 모습인데 비해 나의 옥이 언니는 세상풍파를 헤쳐나가는 씩씩한 선장처럼 늠름하다. 자전소설 찔레꽃에는 남매를 키우는 나의 어머니 ‘해연’과 원조 현풍할매곰탕 창업주 ‘소선’의 슬픈 사연과 아름다운 인연이 담겨 있다. 옥이 언니는 소선할매 딸이다. 가난으로 떠돌던 언니 가족이 언제 마을로 들어와서 동고동락하며 살게 됐는지 기억이 없다. 유년의 추억 속 언니는 잘 익은 감처럼 달달하고 휘영청 늘어진 수양버들처럼 가슴 속에 그리움으로 나부낀다. 지금은 여장군이지만 어릴 적엔 키가 작고 비실비실 했다. 뇌일혈로 쓰러진 아버지는 내가 두살 때 돌아가셨다. 딸이 부실한 것이 남편 병구환 하느라고 돌보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해서 나는 엄마나 언니의 등에 업혀 자랐다. 엉덩이를 살짝 흔들며 날 업고 언니가 동네를 한바퀴 돌면 동네 총각들이 일손을 멈추고 흠모의 몸짓을 보내는데 언니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번 공주는 영원한 공주.’ 나무꾼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가난하고 배운 게 없어도 스스로 공주라 믿으면 영원한 공주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인증샷 무시하고 스스로 붙인 타이틀 갖고 이러쿵 저러쿵 하면 인간(?)답지 않다. 기막힌 떠돌이 생활로 학교 다닌 적이 없어 보이지만 언니는 모르는 것 빼고는 다 안다. 하늘을 우러러 땅이 품는 진리에 익숙해지면 배우지 않아도 깨우침의 경지에 도달한다. 어차피 인생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여정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매달지 않으면 가진 것이 없어도 넉넉하게 산다. 죽는 것이 두려우면 살아있는 시간에 감사하면 된다. 지나온 날보다 남은 시간에 몰두하면 지난 날의 추억이 향기로 다가온다. 사소한 일에 흥분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건 망설이지 않고, 생각만 하기 보다 실천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며, 오늘이 이땅에서 보내는 마지막이라 해도 별을 가슴에 품고 떠날 생각 하면 슬프지 않다. 인생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제 갈 길 걸어가는 여정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아무것 언니 가족 삼거리 동네 동네 총각들
2025.07.29. 12:32
눈은 보이는 것만큼 본다. 가슴은 느낄 수 있을 때만 흐느낀다. 슬픔은 눈물방울을 만들고 꽃잎이 피고 꽃잎이 흩어질 때 영롱한 이슬로 반짝인다. 상처는 지나간 시간의 아픈 흔적이다.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불교에서 오온(五蘊)은 생멸ㆍ변화하는 모든 것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를 말한다. 오온은 인간을 신체와 정신으로 나누고 정신을 다시 네 요소로 세분한다. 물질인 색온(色蘊), 감각 인상인 수온(受蘊), 지각 또는 표상인 상온(想蘊), 마음의 작용인 행온(行蘊), 마음인 식온(識蘊)이다. 석가모니는 무아상경에서 오온의 특성 중 ‘통제불가능성’과 ‘영원하지 않음’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태어나서 변화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주 작은 모래알 같은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다. 고대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라며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 자만하지 말고 덧없는 인생무상을 직시하라는 경고다. 나바호 인디언의 ‘메멘토 모리’는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참고 견디고 감추지 마라. 잘난 체 하지 말고, 못 나도 숨지 말고, 죽는 날까지 자신을 믿어라. 믿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자신도 믿을 수 있을 때까지만 믿기로 한다. 죽음은 선택이 불가능한 마침표다. 살아있는 동안 가슴 조리지 않고 편히 사는 것이 죽는 일보다 훨씬 수월하다. 인생이 좀 찌그려졌다고 실망하지 말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쓰다듬고, 나누고 싶을 때 마음껏 주고 받고, 혼밥 과식하다 홀로 일찍 죽지 말고, 좀팽이로 아끼고 절약하며 궁상 떨지 말고, 자식이나 친구들에게 있는 척, 잘 사는 척, 호들갑 떨지 말고, 보여주기보다 보이는 대로 살면 편해진다. 사는 게 슬프고 누군가 그리우면 사랑을 하자. 그리움과 슬픔은 같은 말이다. ‘욕심 많은 사람의 큰 그림은 기껏해야 자기가 가진 제일 큰 액자에 그림을 가득 채워 그리는 것이고, 현명한 사람의 큰 그림은 자기 액자를 부숴버리고 그냥 눈으로 보는 것이다.’ 성진 스님의 화담이다. 원래 영어 ‘큰 그림(Big Picture)’의 의미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뜻이다. 좁은 시야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큰 전체를 보라는 말이다. 그리울 때 사랑하고, 울고 싶을 때 눈물 흘리는 사람은 무자비한 ‘모멘트 모리’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빛나는 인생의 그림을 그린다.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시각에 있다. 심미안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눈이다. 같은 사물을 봐도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이 있고 보기싫은 것만 골라보는 사람이 있다. 심미안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꾼다.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면 인생은 아름다운 꽃밭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메멘토 모리 모멘트 모리 표상인 상온
2025.07.22. 11:49
안목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안목은 사람이나 사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이다. 안목을 키우는 것은 더 현명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위해서다. 안목을 키우려면 일단 발품을 팔아야 생긴다. 안 보고 안 듣고 남의 말에 귀 안 기울이고 독야청청 자기 생각만 하면 안목이 생기지 않는다. 예술적인 심미안을 갖거나 훌륭한 미술 작품을 선택하가 위해 안목이 필요한 것만이 아니다. 안목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 속에서 현명하고 보다 나은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비즈니스 결정이나 중대 사안을 논의할 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 있어서도 안목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크고 작은 안목들이 쌓여 내공을 거치면서 실력이 발휘된다. 안목은 스스로의 경험과 사고를 통해 훈련된 자기 설득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곁눈질 안하며 세기의 커플로 하트를 쏘아올려도 신뢰와 믿음없이 땅만 파다가는 가뭄에 동이 날 수도 있다. 사랑은 스스로 등장인물을 제한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과 거시적인 안목으로 사랑을 키우기 어렵다. 좋은 그림 훌륭한 작품을 판별하는 안목을 키우려면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시장을 다니며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한다. 많은 작품을 눈여겨 보고 만나면 눈과 가슴이 먼저 미세한 떨림의 작은 반응을 일으킨다. 시각적인 만남을 지나 가슴의 떨림이 영혼 속으로 침투하는 미동을 느낀다. 작가가 누군지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도 된다. 무식이 탄로날까 봐 지례 겁먹고 뒷걸음 칠 필요가 없다. 안목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인사동이나 아트페어, 전시회 등을 부지런히 다니며 발품을 팔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창공을 날던 새가 내 품으로 날아드는 환희를 느낀다. 작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탐구하는 과정은 큐레이터의 몫이다. 화랑을 찿는 손님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림에 대해 잘 몰라요’라며 꽁무니를 뺀다. 예술에 대한 무식이 탈로날까 봐 걱정하는 눈치다. 하드웨어 스토어에 가서 어느 쪽에 찿는 연장이 있는지 몰라 내가 해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저도 다 알지는 못합니다. 매일 조금식 배우고 있어요.’라고 일단 안심시킨다. 화상과 큐레이터, 바이어가 서로 믿고 한 몸이 되야 판매를 성사시킬 수 있다. 고객에게 좋은 작품을 권하기 전에 전시된 작품 중에 고객에게 느낌으로 다가오는 작품을 눈여겨 살핀다. 고객이 눈을 반짝이며 흡사 나비가 꽃봉우리에 날아들 듯 주시하는 작품이 판매의 대상이다. 일단 좋아하는 작품이 생기면 구매가 가능한 지(Affordble)를 파악해 판매를 진행한 것이 큐레이트의 전략이다. 고객이 창공을 날아오르는 기쁨을 민끽할 때 성공적인 거래를 성사시키고 장래를 기약할 수 있다. 유명 화가의 작품이라도 영혼을 끌어안는 에너지가 없으면 투자의 목적은 되겠지만 고객과 궁합이 맞지 않는 선택이다 안목은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눈이다. 귀하고 좋은 것들을 찾아 헤매지만 보석을 손에 쥐고 있어도 알아볼 수 없으면 값싼 사금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드리’는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를 말한다. 겉모습만 보지 않고 안목을 키워나가면 아름드리 나무의 작은 잎새에서 사물을 통찰하고 꿰뚫어 보는 안목과 혜안(慧眼)이 생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아름드리 이기희 아름드리 나무 미술 작품 큐레이터 바이어
2025.07.15. 14:14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실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 유대인 격언이다. 제주에서 태어난 ‘당찬 반항아’ 애순이와 ‘팔불출 무쇠’ 관식이의 모험 가득한 일생을 사계절로 풀어낸 넷플릭스 시리즈 ‘폭삭 속았수다’는 국민적 화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여전히 꽃잎 같고, 여전히 꿈을 꾸는 당신에게’라는 봄 포스터를 시작으로 세월을 뛰어넘어 피어나는 사랑이야기로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극중에서 애순이는 그 옛날 납치당할 뻔했었다. 다리 아픈 척하는 아줌마를 도와주려고 심부름을 했는데 실은 어린이들 납치해서 조직적으로 갈취하는 앵벌이들이다. 그날따라 애순이 엄마는 애순이를 찾으러 생전 가지 않는 곳을 뛰어다니며 납치 당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애순이를 구해낸다. 엄마의 촉은 그렇게 애순이를 살렸다. 어머니의 촉은 하늘이 내린 사랑의 선물이다. ‘촉’은 사고의 과정을 거쳐가지 않고-혹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바로 알아내는 직감이다. 직감은 현상을 직접 느끼는 감각적 판단을 의미한다. 직감은 논리적 추론이나 경험적 근거 없이 느끼는 본능적인 예감이다. 직감은 특정한 경험이나 지식에 기반하지 않고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나 판단이다. 직감은 사물이나 현상을 직접적으로 느낀다. 직감은 논리적 추론이나 경험적 근거 없이도 본능적으로 발생한다. 지금은 장군 체질이지만 어릴 적 장질부사에 걸려 6개월 사경을 해맸다. 갖은 병치례로 여러번 죽울 고비를 넘겼는데 어머니의 촉이 내 목숨을 구했다. 자식이 위험에 빠지면 어머니의 촉은 귀신도 소름돋을 만큼 강력한 에너지를 감지한다. 어머니의 촉에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주술이 담겨 있다. 직감이나 촉이 ‘느낌’이나 ‘감각’에 가까운데 비해 직관(Intuition)은 경험과 배경, 지식이 은연중에 작용하여 나온 판단이나 통찰이다. 직관력은 판단이나 추리 같은 사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다. 직관력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지식이 쌓여 단단한 내공이 쌓였을 때 발휘된다. 촉이나 직감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직관력은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인간의 직관력은 지능보다 강력하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진정으로 가치있는 인간의 유일한 것은 직감이다’라고 했다. 직감이 에너지 감지 능력인데 비해 직관은 영혼이 알고 있던 진실에 대한 인식이다. 직감은 생존을 돕고 직관은 각성과 사명의 길로 인도한다. 후세에 길이 남을 명작을 남긴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마치 완성돤 작품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짜르트가 그린 악보에는 수정한 흔적이 없다. 미켈란젤로의 모든 대리석 안에는 이미 조각이 숨어 있다. 조각가는 대리석에 숨어 있는 조각을 발견할 뿐이다. 직관이 발달한 사람은 마음의 소리를 듣고 효과적인 결정을 내린다. 촉은 생각을 해서 다가오는 느낌과는 다르게 어느 순간 번개처럼 떠오른다. 촉이 발달된 사람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 못하지만 플래그가 생성된 것처럼 쿡 찌르듯이 심장을 치고 달아난다. 본능적인 촉에 충실하고, 직관을 믿어라.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경험적 근거 사유 과정 배경 지식
2025.07.08. 14:20
자고 나면 오늘은 또 무슨 일부터 시작 해야 되나 고민이 태산이다. 게으름 안 부리고 나름대로 부지런떨어도 해야 할 일은 매일 산더미처럼 쌓인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조선 명종, 선조 때 문장가로 이름 높은 양사언의 시조다. 산에 올라가지도 않고 높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산도 산 나름이고 평지도 평지 나름이다. 매일 똑 같은 마루바닥을 쓸고 부엌 그릇 닦고 옷가지 집어 세탁기 돌리면 발로 차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람 사는 집은 매일 치우고 닦아도 청소한 표시가 안 나는데 며칠만 손을 안대면 엉망진창이 된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몫이라면 용감하고(?) 기분 좋게 해치울 작정이었는데 마음 먹은대로 안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이유없이 부대끼며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은 멍 때리며 구름이 유유히 흐르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나.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인생 후반기는 남은 시간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에 빠진다. 해야 할 일은 의무고 책임이 따른다. 사업하며 아내 노릇 부모 노릇 집안 챙기며 사는 동안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갔다. 해야 하는 일을 분별해서 선택하고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은 소중한 도전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듯 사랑하는 일을 찾아라.” 스티브 잡스 어록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도 된다. 생의 버거운 짐 내려 놓고 어릴 적 노랑나비 좇아 산천을 해매던 순수한 모습으로 살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것 하며, 사랑하는 사람 더 깊히 사랑하며 살 수 있으면 된다.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 하고 싶은 일들을 못할 만큼/ 꿈꿔 왔던 일들은 잠시 여기 한 켠에 밀어둔 채로(중약)/ 네가 꿈꾸는 게 무엇이든 되고픈 게 뭐든 될 수 있어/ 정말 원하는 것을 찾으면/ 너의 삶의 이유를 찾으면(중약)/ 춤을 추듯 하루를 사는 것/ 다시 없을 지금을 사는 것 (중약) /네가 꿈꾸는 게 무엇이든/하고픈 게 뭐든 할 수 있어/ 정말 원하는 것을 찾으면/ 너의 삶의 이유를 찾으면’ -심규선의 ‘해야할 일’ 중에서 어차피 할 일은 다 못하고 죽는다. 시간의 톱니바퀴에 걸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용기가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을 찿아나설 수 있다. 폴 세잔은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목숨 건 사람들’이라고 했다. 목숨은 하나 뿐이지만 목숨 걸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 결과에 매달리지 마라. 남은 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생의 마지막 촛불이고 축복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적절한 출발의 시간이다. 신호등이 바뀌면 빨리 길을 건너야 한다. 주저하고 망설일 시간 없다. 남의 충고에 귀 기울이면 남의 인생을 산다. 아무것도 안하면 아무 일도 안 생긴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다. 가슴 속 응어리진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하고 싶은 일의 윤곽이 잡힌다. 죽기 살기로, 목숨 걸고 하고 싶은 일에 올인 하면 태산도 정복할 수 있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하늘 아래 인생 후반기 시간 무엇
2025.07.01. 12:56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큼 보기 좋은 것은 없다.’ 어머니가 늘 하던 말씀이다. 청춘에 홀로 되어 두 남매 배 안 고프게 하고 올바르게 키우려고 몸이 부셔져라 일하셨다. 초등학교 문 앞에도 못가신 무학이지만 내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쳐 개똥철학의 달인이 되신다. 근동에서 대지주였던 아버지는 내가 두살 때 뇌일혈로 돌아가셨다. 그 때부터 가장이 되신 어머니는 머슴들과 소작농들을 한 식구처럼 돌보며 일꾼들보다 더 열심히 손목이 휘어지도록 농삿일을 했다. 해기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옥이 언니는 무쇠 가마 솥에 삼만이 아재가 땔감으로 팬 장작에 불을 지핀다. 뜸이 돌기 시작하면 온 마당에 구수한 밥 냄새가 진동하고 누렁이는 제 꽁지를 잡으려고 마당을 뛰어다닌다. 저녁 햇살 받아 옻칠이 반짝이는 오래된 밥상은 우리 세 식구가 먹을 자리다. 근데 군데 갈라지고 터진 커다란 두리상 다리를 펴는 건 오빠 몫이다. 둥근 모양의 두리상은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먹기 편해 밥 먹을 사람 머릿수에 상관없이 수저만 더 갖다 놓으면 된다. 그 시절에는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쌀 독에 바닥이 보이면 부엌에 연기 나는 집 앞을 어슬렁거리면 끼니를 해결 할 수 있던 시절이다. 단골로 오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와서 황토로 단단해진 마당에 물을 뿌려 쓸어주거나 돼지 우리를 치워 주기도 한다. 우리집은 언제나 사람이 넘쳐났다. 아버지가 안 계셨지만 나는 외롭지 않게 자라났다. 어머니는 배고픈 사람, 몸이 아픈 사람, 거동이 불편하신 어른, 동네를 떠돌던 미치광이 여자, 우리집 담벽 햇살 따스한 곳에 포대기 깔고 사는 동님(?)씨를 챙겼다. 아이들은 동님이 아재를 거지라고 놀려댔다. 동님씨는 일제 때 강제 징집 당해 전쟁터에서 두 다리가 잘려 불구자가 됐다. 흙 담장을 타고 새하얀 박꽃이 피면 동님씨는 꽃을 꺾어주며 머리에 꽂으라고 손짓을 한다. 몸으로 실천하고 가슴으로 새기는 사랑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은 없다. ‘밤에 잘 잤나? 밥은 묵었나? 그라면 됐다 끊는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일 분도 안 되는 짧은 전화를 친구 할머니에게 일년이 넘도록 했다. 할머니를 공주처럼 떠받들고 사랑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황야의 무법자 모자에 멋진 부츠를 신은 피니씨를 우리 애들은 카우보이 할배라고 불렀다. 골프왕 피니 할매는 국은 절대로 안 먹고 밥을 물에 말아먹지 않는다. 식모살이 할 때 주인이 매일 멀건 죽을 먹여 진절머리가 난다고 했다. 어머니는 남편 잃고 죽을만큼 힘든 친구의 생사를 확인하는 911 안전요원 노릇을 한 셈이다. 모든 걸 잃고 사랑하는 많은 것들이 사라진다 해도 산 사람은 살아 남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복잡한 사연이나 갈피 없는 방황이 아닌 아주 단순한 몸짓, 간단한 말 한마디, 사랑이 담긴 다정한 눈빛인지 모른다. 인생에는 공식이 없다. 어디서 어떤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힘든 사람 다정하게 손잡아 주고 잔잔한 미소로 사랑을 전하는 작은 실천일 뿐. 어쩌면 사는 게 힘든 것이 아니라, 생을 힘들게 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사라지는 것이 있는 것처럼 작지만 오래 남는 것들이 있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친구 할머니 한마디 사랑 아재가 땔감
2025.06.24. 13:40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세상은/ 세상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바람이 되고/ 너는 늦으므로 해서 나는 너를 기다린다는/ 사실로 내 삶이 아름다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만/ 너를 기다렸다’-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해도 기다림으로 설레던 시간은 축복이였다. 사랑했던 아름다운 시절도 꽃잎 송별되어 바람으로 흩어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랑과 미움, 후회와 미련도 절망과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며 조금씩 잊혀지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와 죽음의 시간이 오는 것처럼 나아갈 때와 멈출 때,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사랑할 때와 작별할 때, 마지막 손을 흔들어야 할 시간이 온다. 태어난 때가 있었으니 떠나갈 시간도 온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로 흐른다. ‘찰나’는 매우 짧은 시간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로, 산스크리트어 ‘크샤나(kṣaṇa)’의 음역이다. 1찰나는 약 0.013초에 해당하며 75분의 1초로 여긴다. 찰나는 시간의 최소 단위다. 찰나는 시간의 단위를 넘어 순간의 변화와 무상(無常)을 나타내는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찰나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고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삶을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명상을 통해 찰나의 순간에 집중하면 마음의 평화를 찿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이 들면서 슬픈 일은 주변에 계시는 어른들이 돌아가시거나 병마와 싸우는 소식을 듣는 일이다. 몸과 마음이 늙어지면 사랑도 미움도 날개를 꺾는다. 세월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생의 순간마다 상채기를 내며 파국으로 달려간다. 돈. 명예, 권력, 지위, 가족, 친구, 사랑과 욕망이 지속되길 바라지만 잠시도 머물지 않고 찰나로 흐른다. 후회해도 떠나간 것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일체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다. 무상은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의미한다. 살아있음과 죽음의 고통에서 진리를 찿기 원한다면 무상의 진리를 깨닫고 물처럼 흐르면 된다고 가르친다. 육신과 마음, 생사고락의 변화를 힘들게 붙잡으려 하지 말고 찰나의 변화에 몸을 맡기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나이듬과 늙음은 살아있다는 진리다. 변화를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말라. 모든 괴로움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에서 생성된다. 깨달음은 움켜쥐었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놓았을 때 온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어느 것도 붙잡고 집착하지 말고, 마음과 육신을 한곳에 가두지 말고 해방시키면, 고통과 행복,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돌아오지 못하는 강가에 혼자 서 있어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면 슬프지 않다. 다정한 손길로 나의 모습을 보듬고 쓰다듬는 것은 찰나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한 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고 마지막 숨을 쉴 때가지 목숨을 소중하게 사랑하고 아끼면 생명은 찬란한 축복이고 선물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육신과 마음 불교 가르침 불교 용어
2025.06.17. 13:16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겨놓고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찾아온 나무 밑’ ‘보리수’는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Winterreise)’ 중에서 5번째 곡이다.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는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서정 시인으로 ‘보리수’를 비롯한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등 맑고 깨끗한 민요풍의 많은 시를 썼는데 슈베르트가 작곡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곡이 된다. 뮐러와 슈베르트는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다. 비엔나 부근 힌터뷜 마을 보리수가 서 있는 우물가를 슈베르트는 친구들과 자주 찾았다. 슈베르트는 인생의 마지막 겨울 동안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집에 살며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는데 길 위에 선 고독한 방랑자의 심정에 자신의 남은 음악적 정열을 바친다. 슈베르트는 31세로 병사했는데 가난과 타고난 병약함 등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과 13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가곡의 왕’으로 불린다. 보리수(菩提樹)는 장미목 보리수나무과의 낙엽관목이다. 잎은 긴 타원형으로 복엽이 어긋난 형태로 자라 있다. 개화시기 4월에서 5월에 서식지 산기슭이나 골짜기 또는 마을 부근의 흙이 깊고 진 땅에서 자란다. 귀국 때마다 존경하는 선배는 나를 위해 조촐하고 아주 특별한 오찬을 마련한다. 아름드리 늙은 느티나무 아래서 등 굽은 할머니가 차려주는 꽁보리밥 된장찌개는 가시처럼 목에 걸려 눈물을 삼킨다. 멀리 민둥산을 어루만지며 불어오는 바람이 느티나무 잎새를 흔들고 해묵은 평상은 삐그덕 가슴 아픈 소리를 낸다. 오랜 시간 동구밖 느티나무는 도도한 자태와 끈질긴 생명력으로 마을을 지킨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견뎌온 끈질긴 생명의 연결 고리는 인간과 자연이 맺은 깊은 관계를 상기시킨다. 어쩌면 유년의 기억들을 가슴에 품고 낯선 이국 땅에서 영원히 한국인의 이름으로 내가 살아야 하는 것처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토마스 만은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독일 민중의 자산이며 독일 내면성의 결실이라고 말한다.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장편소설 닥터 파우스트(Doktor Faustus)는 예술과 문화, 인간 정신에 처한 위기를 날카롭게 진단한다. ‘내가 있는 곳에 독일 문화가 있다’라는 그의 말처럼 독일 정신의 성찰을 담아 정치 역사 문화 전반의 방대한 사상을 집약한 최후의 걸작으로 꼽힌다. ‘닥터 파우스트’의 주인공 천재 음악가 레버퀸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지적 탐구에 몰두한다. 레버퀸은 어느 순간 음악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창조력의 위기에 직면한다. 창의력을 얻기 위해 악마의 힘에 의존해 악마로부터 천재성을 보장 받지만 그 대가로 사랑을 잃고 영혼을 판다. 보리수가 우람하게 서 있는 농가에서 태어난 레버퀸은 보리수가 휘어진 가지를 드리운 고향 집에서 최후의 안식을 맞는다. 슈베르트와 레버퀸에게 ‘보리수’가 회귀와 귀속의 원형적인 쉼터가 되는 것처럼 느티나무는 세상 어느 곳에서 살던지 내게 돌아갈 지표를 알려준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장미목 보리수나무과 마을 보리수가 느티나무 잎새
2025.06.10. 12:48
평소 실력이 진짜 실력이다. 평소에 놀기만 하다가 갑자기 오두방정 떨며 벼락치기 공부해도 결과는 뻔하다. 학업에는 집중 안하고 시와 그림을 벗 삼아 나홀로 풍류를 즐기다 보니 성적이 뒤죽박죽, 분야별 꼴찌로 들락날락 했다. 그나마 글짓기나 미술실기 대회에서 상타는 일로 겨우 체면 유지는 됐다. 평상시에 잘 놀다가 학기말 시험 전날은 초비상이다. 초치기 분치기로 시험 준비에 몰두한다. 일단 대청마루에 상을 편 뒤 졸릴 걸 대비해 세수 대야에 찬물을 준비한다. 밤샘 할 요량으로 혹여 잠이 들면 어머니께 깨우라고 신신당부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홀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백점 받은 시험지를 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해진다. 연필에 침을 발라 가며 네모진 공책 칸을 메꾸며 한글을 익히는 동안 소복 입은 어머니는 한석봉 어머니처럼 하얀 가래떡을 써신다. 난리방구통 떨며 시작한 밤샘 공부는 새벽도 안 돼 꼬꾸라지고 어머니는 한쪽 무릎을 꼿꼿이 세운 채로 모시 적삼을 다듬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대 사랑이 흔들리는 안개 속에 잊혀지는 것처럼 머무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동여맬 수 없다 해도 아름다운 기억들은 사랑의 열매로 꽃을 피운다. 부모나 자식, 형제나 이웃, 애인이나 친구가 곁에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때를 놓치기 전에 일상의 바쁜 손 멈추고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있을 때 잘할 걸 후회해도 때를 놓치면 소용없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 뼈 아프게 깨달았다. 때를 놓치면 모든 게 물거품이란 걸. 생각만 하고 할 뻔했던 것들은 흘러간 물이고 놓쳐 버린 파랑새다. 놓친 자의 후회는 공허한 메아리로 가슴을 후려친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도 작은 틈이 생기면 금세 사이가 벌어진다. 죽자 사자 사랑을 불태우던 커플도 헤어질 땐 빙하기의 팽귄처럼 털갈이하며 등을 돌인다. 급하고 먹고 칠칠치 못해서 옷에 음식을 자주 흘린다. 얼룩 지면 얼른 수건에 물 적셔 살살 문지르면 얼룩이 사라진다. 얼룩이 마르면 자국을 지우기 힘들다. 산천은 세월에 묻혀 천천히 변하지만 사람 마음은 작은 말 한마디 흔들리는 눈빛에 일순간 변한다. 때를 놓치면 많은 걸 잃는다. 사랑은 접착제다. 금이 간 도자기는 그대로 두면 언젠가 깨진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꺾이지 않는다. 대나무 꽃은 잘 피지 않는다. 100년을 지나 꽃이 피기도 한다. 대나무는 줄기가 거의 시들어갈 무렵에 꽃을 피운다. 끝간 데 없는 사랑은 매마른 땅을 대나무 숲을 만든다. 사랑은 기다림으로 바위에 상형 문자를 새긴다. 사랑은 따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믿고 보이는 그대로 사랑하고 내 속에 너를 품는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사자 사랑 그대 사랑 한석봉 어머니
2025.06.03. 13:21
사랑은 독약이다. 치유할 약이 없다. 한 번 빠져 들면 물불을 안 가리고, 헤쳐 나올 길이 막막해진다. 사랑할 때는 꽃길이지만 끝이 나면 배신의 지옥불에 몸부림 친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은 찿아 헤맨다. 사랑에 빠지면 가시덤불 속에서도 손을 꼭 잡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든다. ‘옛날에 고슴도치는 자기와는 너무 다른 모습의 다람쥐와 사랑에 빠진다. 다람쥐는 고슴도치의 생김새와 가시가 싫었지만 고슴도치의 사랑이 너무 커서 다람쥐도 고슴도치를 사랑하게 된다. 고슴도치는 다람쥐를 안을 때마다 다람쥐의 몸에 베어나는 상처에 가슴이 저려 슬픔에 빠진다. 고슴도치는 다람쥐를 위해 자기 몸의 가시를 뽑기로 결심한다. 가시를 뽑으며 붉은 피가 넘쳐났지만 고통을 견디며 다람쥐를 껴안는다. 다람쥐는 더 이상 상처가 나지 않았고 가시를 뽑은 고슴도치는 다람쥐 품에서 죽는다. ‘고슴도치와 다람쥐의 사랑’은 유래가 불분명 하지만 헌신적인 사랑을 깨닫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서로의 온기가 필요하면서도, 서로의 존재로 인해 상처가 될까 거리를 두는 상황”을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명명한다. 인간은 서로를 요구하면서도 독립적이고 싶은 욕구를 동시에 지닌 모순적 존재라는 설명이다. 고슴도치는 적대감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이나 천적이 나타났을 때, 몸을 숨겨야 하는 필요성이 있을 때만 가시를 곧추세운다. 고슴도치는 온 몸의 가시를 뽑지 않아도 사랑할 때만큼은 부드러운 ‘남자’로 변신한다. 가시가 돋친 생명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한없이 너그러워 지고, 친구와 우정을 나눌 때, 가족과 함께 일 때는 가시를 납작하게 만든다. 행여나 소중한 사람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는 내 청춘의 로망을 담은 순정 영화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더글라스 서크 감독이 제작한 멜로와 로맨스를 적절하게 담은 전쟁 영화다. 함부로 영화관 출입을 못하던 시절, 일년에 한 두 번 단체 관람을 허락하던 학교 방침에 따라 보게 됐는데 마지막 장면은 일생동안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했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전쟁이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독일 병사 에른스트는 러시아 전선에서 고향으로 잠시 귀향한다. 고향은 폐허로 됐고 부모님은 행방불명이다. 충격에 빠져 길을 걷던 에른스트는 반나찌 혐의로 처형된 옛 스승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서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엘리자베스가 임신을 하고 에른스트는 아버지가 된다는 기쁨으로 행복하다. 하지만 이도 잠시, 전시 상황이 바뀌면서 곧바로 전선에 투입된다. 전쟁터에서 아내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을 때, 그는 과거에 자신이 풀어주었던 게릴라 요원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진다. 에른스트가 숨을 거두고, 그의 손에서 떨어진 편지가 물 위로 흘러간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감동과 묘미는 극과 극의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때문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을 대조하고 병치함으로써 소설이 줄 수 있는 극적 체험의 진수를 보여준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사랑의 꽃은 피어난다. 짓밟고 뭉개도 봄이면 푸른 잔디가 돋아나는 것처럼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고슴도치처럼 털을 모두 뽑아 죽음에 이를지라도, 사랑은 불꽃 속에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된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고슴도치 이기희 고슴도치 사랑 다람쥐 품 영화관 출입
2025.05.27. 13:18
고통과 슬픔, 환희도 사랑이었다. 만남과 이별은 시작과 끝이 속절없는 반복이 되고 상처의 흔적이 물안개처럼 앞을 가려도 사랑이 없었다면 허공에 그리는 그림이다. 그대 있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순간은 기적이었다. 사랑이 없었다면 꽃잎에 맺히는 새벽 이슬과 스쳐가는 바람에 서로를 묶지 않았을 것을. 가랑비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허우적거리며 구멍이 송송 난 가슴을 쓰다듬는다. 사랑으로 총 맞은 흔적은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수시로 아프다. 내 꿈은 여류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전국 여고생 백일장에서 ‘백목련’으로 수상했는데 심사를 맡은 김춘수 시인이 대구에서 노천명 같은 시인이 될 거라고 칭찬하셨다. 시인이 못 됐지만 선생님의 말씀은 일생동안 자음과 모음을 가슴에 품고 살게 했다. 길을 잃고 흔들릴 때, 한국 방문이 쓸쓸하고 외로울 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사랑으로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불러 주셨다. 믿음은 어떤 고난과 불행도 견디게 한다. 사랑은 신통력을 가진 주술처럼 심장을 뛰게 하고 자유로운 영혼 되어 성냥개비 하나로 우주를 불태운다. 운명의 물줄기는 여러 가닥으로 흐른다. 대학시절 미 문화원 원장 부인의 한국어 교사로 일 하다가 미국 독립기념파티에서 미 육군 보급사령관을 만나 결혼하고 도미했다. 너무나 엄청난, 어이없는 일이 벌어져 보수적인 지역 문인들의 마른 안주로 입방아에 올리기에 충분했다. ‘주변문학’ 동인 활동을 함께 하던 동지가 내가 결혼할 즈음 간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도 ‘가난한 작가의 사랑을 배신하고 부귀와 영화를 위해 백마 탄 남자’를 선택한 시나리오로 둔갑했다. 연인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에는 사랑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과 배신자가 등장한다. 작가 지망생의 뼈를 수장하는 문우들의 슬픔을 담은 중편소설 ‘전리’로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진출한 작가는 훗날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된다. 기억조차 흐릿한 먼 옛날의 추억은 아득하고 멀지만 사랑은 밤하늘의 별처럼 지상으로 내려와 반짝인다. 결혼 후 첫번째 고국여행 때다. 문단의 반항아로 찍힌 나를 측은하게(?) 여긴 선배 시인이 오늘의 작가상을 탄 신예작가 술잔치에 날 데려갔다. 순식간에 인기 문인 반열에 오른 작가가 ‘남편을 사랑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난감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위장된 정답이고 아니라면 부귀영화에 침몰한 여자가 된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지옥에서도 나를 구출해 줄, 내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남편이라면 사랑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 대답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은 작가와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다. 모국어는 내 존재의 증명서다. 천국과 지옥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패스포트다. 지상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지, 살아야 하는 지는 여태 미지수다. 살아있다는 것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단지 잊히지 않는 작은 눈짓이 되고 싶을 뿐이다. 사랑에는 인센티브(Insentive)가 없다. 성과나 실적에 따라 보상받지 않는다. 사랑은 받은 만큼 주는 것이 아니라 유통기간의 제한 없는 조건 없는 선물이다. 사랑은 무언의 자작극이다. 흉내 낼 수 없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다.분가루를 얼굴에 바르고 비통하고 아름다운 몸짓으로 별들의 아픔을 새기는 광대의 무언극이다. 사랑은 각본 없이 가면 쓰고 목숨 걸고 줄타기 하는 꼭두각시 탈춤이다. 단 한 번의 몸짓으로 막이 내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사랑 이야기 국민적 사랑 김춘수 시인
2025.05.20. 13:12
이것 저것 손에 안 잡히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력해지는 날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집안 구석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십 분이면 끝낼 일을 한시간이나 뒤적거리고 할 일은 태산 같은데 시작할 엄두도 못 내고 허둥댄다. 이 일 하다가 저 일 꺼내며 갈피를 못 잡고 헷갈리며 무력해진다. 생각의 태엽이 너무 탱탱하게 감겨 오류가 발생했나. 벽시계는 매 순간 잘 돌아 가는데 일상의 태엽은 중요한 순간에 떡 가래처럼 늘어지고, 죽치고 멍청하게 허탈한 날엔 등 푸른 생선처럼 퍼덕거리며 꼬리를 흔든다. 머리도 몸도 마음도 휴식이 필요한 시간인가. 괜히 슬퍼지고 가슴으로 눈물이 방울져 내린다. 이런 날엔 사고의 바다에서 멸치 꺼내 육수를 우려내서 국수를 말아먹는다. 가슴 속 흐르는 눈물은 닦을 손수건이 없다. 멍 때리고 앉아 창밖을 무심히 바라본다. 매일 똑 같은 자리에서 바라다보는 풍경인데 항상 새롭다. 하늘은 단 한차례도 같은 색의 물감을 하늘 바다에 풀지 않는다. 칠흙 같은 어둠을 헤치고 제일 먼저 어둠을 깨우는 것은 짙은 파랑색(Navy)다. 여명의 빛이 나무숲 가지 사이로 안개를 피우듯 번지기 시작하면 하늘은 청옥색 사파이어(Sapphire)에 보랏빛 자수정(Amethyst)을 수놓으며 하늘 바다로 떠오른다. 그 사이로 맑고 푸른 눈의 터키옥색(Turquoise)이 청록색의 물감을 풀어낸다. 곧이어 진홍색 빨강이 번져 나오고 비슬산 참꽃을 닮은 뜨거운 핑크색(Hot Pink)이 무지개를 그리며 한편의 오작교를 완성한다. 그 황홀함에 빠져 아무 생각도 없이 다가오는 천상의 조화에 빠져 든다. 이승에서 새겨진 상처와 고뇌, 회환과 슬픔이 흐릿한 무채색으로 번져 나간다. 존재의 살아있음을 잊어버리고 시간을 멈추고 멍 때리며 보내는 시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 온전한 자유로움은 창조의 원동력 된다. 움켜진 정신 줄을 내려 놓으면 경의로운 발견을 체험한다. 살아있는 존재의 아픔을 잠시라도 잊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멍 때리다’는 영어로 ‘Space out, Zone out’으로 표현한다. 집중력을 잃고 멍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멍하게 있거나 무의미하게 어떤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상태를 말한다. 2025 ‘한강 멍 때리기 대회’가 서울에서 열려 80팀, 총 126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가치 있는 행위’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2016년 시작됐는데 매년 외신의 주목을 받으며 화제를 모은다. 참가자는 90분 동안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고 ‘멍 때리기’를 가장 잘한 사람이 우승자가 된다. 참가자들은 심박 측정기를 착용하고 15분마다 측정된 심박수와 시민 투표로 점수를 받는다. CNN은 “한국의 초경쟁 사회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휴식처”라고 평가했다. 돌덩이처럼 무겁게 하늘과 땅이 가라앉는 날, 너를 지우고 나를 잊어버리는 시간은 엄마가 무릎에 발라주던 아까징끼처럼 굳은 살이 박혀 치유의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몸도 마음도 무겁고 힘든, 일상의 짐 내려놓고 훨훨 날아오르고 싶은 날, 영혼도 무거운 옷 벗고 맑은 폭포수에 목욕 하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진다. 이유도 없이 울컥 울고 싶은 아침,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망각의 강을 건너는 시간은 영혼의 조용한 반란이다. 속박과 억눌린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놓아주는 시간은 자유와 해방으로 창조된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하늘 하늘 바다 청옥색 사파이어 보랏빛 자수정
2025.05.13.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