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꽃물 들인 손톱이 첫눈 올 때까지 안 빠지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첫눈 오는 날 같이 맞으면 연인이 된다는 낭만적인 속삭임도 아련한 옛추억이다.
쓸쓸해지면 종이학 접어 하늘 높이 날려보냈다. 종이학은 돌아오지 않았다. 삶이 흔들리는 창가에 여린 날개 접고 사뿐히 그대 품에 안겼으리라.
옆집 옥이 언니는 인형놀이 대신 내 얼굴에 숯덩이로 눈썹 그리고 꽃잎 따서 입술과 볼을 연홍색으로 다듬었다. 꽃물 들인다고 봉숭아 찔레꽃 진달래 개나리 철쭉 유채꽃 동백꽃 꺾어 삼만이 아재가 주워 온 돌접시에 갈아 명주실로 꼭꼭 싸매 주었다. 첫눈 오기를 기다리며 손톱 꽃물이 지워질까봐 애를 태웠다.
올 겨울은 유난히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폭풍이 몰아치고 모진 회오리 바람이 벌거벗은 가지를 꺾는다. 눈덩이를 등에 업은 채 눈부시게 반짝이는 나무들은 서로 가지를 껴안는다. 갈대는 죽은 듯 서있지만 생명을 움켜쥐고 사투를 벌인다.
죽지 않으면 산다. 쓰러져도 사랑이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여우와 놀던 시절, 아득한 기억의 파노라마 속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아이처럼 철 없는 여자를 죽도록 사랑했다,
여자는 귀엽지만? 고집이 세고, 짧은 영어 실력으로 제 할 말만 지껄였다. 달래고 가르치고 응원하는 남자의 깊은 사랑이 여자의 삶 속으로 파고 들었다.
여자는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여자를 위해 남자는 세살짜리 딸의 손을 잡고 팝콘을 한 바가지 튀겨 승마장 근처 연못에 가서 한 시간을 놀았다.
병아리 날개처럼 노오란 원피스에 수술 달린 노란 모자를 쓰고 하얀 장갑을 낀 리사는 예쁘다는 말 듣는 게 좋아 아빠 손잡고 오리 먹이주려 매일 연못으로 갔다.
리사는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났지만 귀엽고 둥근 한국인 얼굴을 하고 있어 언뜻 보면 정상아 같았다. 우리 가족 누구도 리사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리사는 우리집에서 가장 소중하고 빛나는 보석이었다.
세상에 완전한 행복은 없다. 온전한 사랑도, 영원한 약속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가 지면 칡흙 같은 어둠이 몰려오듯 태양은 공전을 하며 돌고 있을 뿐이다. 짧았지만 행복했다. 불행은 햇볕을 가리는 어둠일 뿐 심장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의사가 남은 시간이 6개월이라고 했을 때 ‘전쟁터에서, 아무도 내가 오늘 하루 살아 돌아온다고 약속하지 않았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시간은 죽음 앞에 무자비하게 흘렀다. 검정 드레스에 검은 모자를 쓰고, 리사는 아빠가 좋아하는 노란 드레스를 입혔다. 성조기를 받자 21발 예포(Canon Salute)가 발사됐다. 리사는 아빠가 왜 안보이는지 모른 채 내 치마 뒤로 숨었다.
별들도 가볍고 무거운 인생을 산다. 블랙홀은 우주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신비로운 천체다. 중력이 강해서 빛조차 못빠져 나온다. 사랑도 빠져나올 수 없다. 산다는 것이 허공에 날리는 휘파람 소리라 해도 그리움의 강에 돛단배 띄우는 사람은 사랑의 묘약을 먹고 산다.
천지가 흰눈으로 덮여도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운명을 사랑할 수 없지만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사랑을 선택할 수 있기 바란다. 아파하지 않기로 한다. 슬픔이 빗물처럼 쏱아지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바람이 모질게 부는 날은 마지막 잎새 붙잡고, 눈밭 헤치고 방황했던 계절의 아픔 접으며, 사랑으로 버티고 사랑으로 살아남은 그해 겨울은 따스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