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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떠나는 것들 속에 사랑을

Chicago

2026.01.06 12:24 2026.01.0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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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

이기희

유년의 기억 속에 대청마루 한 가운데 액자가 걸려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깨우칠 때까지 뭐가 적혀 있는지 읽지 못했다. 우리집 대청마루는 엉덩이만 붙이면 누구나 쉬어갔지만 대부분 액자의 글을 읽지 못했다.
 
출생지가 현풍면 원교동이라고 적혀 있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현풍읍을 지나 마산과 창영을 연결하는 삼거리 작은 동네다. 낙동강을 구비 돌아 비슬산을 등지고, 먼지가 눈 앞을 가리는 도로를 달리면 삼천리 버스는 우리집 앞에 선다.
 
대구에서 탑승해 목마른 손님들에게 차갑고 신선한 우리집 우물물을 배달하는 건 내 몫이다. 갈증을 푼 손님들은 청문 틈으로 찌게발(?)을 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애호박 바가지에 동전을 넣어주었다. 고마운 사람에겐 돈을 주는구나 생각했다.
 
아! 이젠 족보도 연유도 없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대청마루에 유령처럼 자리잡고 있던 그 액자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하루에도 몇차례 삼천리버스가 오고가는 탓에 누렁이 황구 털처럼 잘 다져진 갈색 마당은 먼지를 뒤집어쓴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차례 회색 눈처럼 덮히는 대청마루를 쓸고 닦는데 공을 드린다. 한글을 잘 못 읽는데도 어머니는 정성스레 액자의 먼지를 닦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액자의 시를 내가 낭송하고부터 어머니 이마의 굵은 주름살이 펴지고 보름달은 외양간과 돼지우리, 찔레꽃이 만발한 마당을 훤하게 비춰주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리도 / 슬퍼하지 마라, 성내지 마라! /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 기쁨의 날이 옴을 믿으라.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오늘은 언제나 슬픈 것- /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는 것. / 지나간 것은 또 다시 그리워지는 것을’ -1837초판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저서 출간 번역본 참고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마주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슬픔과 괴로움은 결국 지니갈 것이고 인생의 역경과 불안, 좌절과 슬픔을 견디면 더 나은 내일이 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 푸쉬킨의 시는 청상과부 어머니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푸시킨은 러시아 사람들한테는 ‘문학의 아버지’ 같은 존재로 단순한 시인을 넘어 러시아 문어체의 기틀을 세운 작가로 토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푸쉬킨은 말이 많은 세상에서 말이 없는 작가로 시대와 맞선 조용한 저항은 푸시킨이 남긴 침묵의 항거였다.  
 
살아갈수록 푸쉬킨의 시가 주는 무게가 가슴에 쌓인다. 어릴 적엔 철 없어 의미를 깨닫지 못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탐욕과 재물에 도취돼 욕망이라는 전차에 매달려 허우적거렸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으며, 무엇을 위해 남은 시간을 소모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소중한 것들이 한 순간, 눈 깜박 할 사이에 사라져도 그리운 것들을 붙잡고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고뇌와 아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새벽별 머리에 이고 아침을 기다린다.  
 
마음은 침묵으로 말한다. 떠들지 않는다. 마음의 창문을 닫지 않으면, 내일은 미래를 머리에 이고, 밝은 걸음으로 창문을 두드린다.
 
사랑하는 그대여! 마음이 미래에 사는 것처럼, 오늘이 슬퍼도 내일은 절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한 순간에 인생이 덧없이 지나가도, 떠나는 것들에게 가볍게 손 흔들며, 다가오는 날들 위해 사랑이 불타오르기를 간구합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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