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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그 아름답던 날들

Chicago

2026.02.17 12:17 2026.02.1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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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

이기희

모질던 겨울이 소리 소문 없이 떠날 준비를 하는구나. 산더미처럼 쌓였던 폭설과 꽁꽁 얼어붙었던 빙판이 지축으로 스며든다.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날씨가 며칠 계속되자 따사로운 햇볕이 하늘 끝에서 내려와 축제를 벌이듯 사방을 어루만진다.
 
눈사태에 덮혀 형체도 없이 사라졌던 잔디밭과 연못, 숨죽여 엎드린 채소밭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무릎까지 쌓였던 눈이 녹아내리자 거짓말처럼 잔디밭이 푸릇푸릇 얼굴을 드러낸다. 세상에! 그토록 가혹한 추위와 사투를 벌리며 목숨줄 붙잡고 봄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생명은 모질다. 죽지만 않으면 사는구나 생각했다.
 
‘오늘은 까치 설날’ 어제 동창이 카톡을 보냈다. 고등학교 동창 여섯명이 옹기종기 모인 카톡방은 시시껄렁 해도 정겨운 사연들로 넘쳐난다.
 
카톡은 지난 여름 한국 가서 배웠는데 재미 있다. 그동안 회의 참석차 한국 방문 했을 때도 비즈니스 때문에 일주일 정도만 체류하고 황급히 돌아왔다.
 
그러고 보면 여지껏 살면서 놀러다니거나 남의 집에 ‘마실 다닌 기억’이 없다.
 
미국 달력에 구정 표시가 없어 동그라미 쳐두고 ‘Chinese New Year’를 기다렸다. 나보다 더 열심히 기다리는건 손주들이다. 세배보다 세뱃돈의 위력은 크다.
 
새뱃돈 수취인의 전폭적인 지지로 ‘양력과 음력’으로 설날을 두 번 치르게 됐다.
 
우리집 설날 인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새뱃돈 많이 받으세요’로 둔갑했다. 한복 입히고 한국말 인사 연습까지 시켰는데 세뱃돈에 몰입한 막내가 실수인지 고의인지 절하며 “세뱃돈 많이 주세요”라고 해 설날 인사말이 변경됐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목청 돋우고 삼만이 아재가 치는 꽹과리 소리에 맞춰 누렁이 앞세워 마을 한 바퀴 돌면 동네 어른들이 소쿠리에 감이나 군밤, 대추을 담아 주었다.
 
수 십 년이 넘도록 타향살이를 하셨지만 어머니 미국생활은 동지미 시골 마을에서 훈장(訓長) 어른 노릇하던 그 때 그 모습이다.
 
설날이나 구정, 추석 명절이 되면 온갖 음식을 장만해 손님을 초대하고 잔치를 벌인다. 한달 전부터 설날 상차림과 고유명절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한다. 재물을 소망하는 둥근 엽전 모양 떡과 가래떡을 만들고 동그랑땡, 오색꼬지전, 동태전, 깻잎전, 육전, 빈대떡, 잡채, 모듬전 부치고 소갈비를 재운다.
 
삼색나물은 뿌리를 잊지 않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무친다. 뿌리를 상징하는 도라지는 조상을 뜻하고, 고사리 줄기는 부모를, 시금치 잎은 자손이 하나로 연결돼 대대손손 번영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그 뿐이랴! 밤새 찹쌀 삭혀 식혜 만들고 약식 유과 약과 강정을 만들어 개별 포장해 이름표 붙여 일요일 교회에서 분배한다. 특혜를 받는 사람은 평소에 다정하게 손잡아 주거나 건강을 챙겨주는 의사들이다.
 
배달 책임은 막내 아들! 내 말은 죽기로 안 들어도 할머니 지시는 즉시 복종한다. 인생의 꽃밭에는 수만가지의 꽃들이 자란다. 가슴에 사랑을 품은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추억의 꽃밭에는 사시장철 꽃이 핀다.
 
물 주지 않고 가꾸지 않아도 가지각색의 꽃들이 어우러져 자란다. 천국처럼.
 
그 곳은 사랑과 기쁨이 항상 넘쳐나서 외롭고 슬플 때는 되돌아보면 된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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