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살 비비며 사는 곳이 나의 지표

이기희
살아있는 것들은 작은 신음 소리를 낸다. 꽃잎은 서로 얼굴을 비비고 가지는 작은 잎을 손 끝에 매달고 여린 악수를 한다. 아마 작은 휘파람 소리로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바람은 휘몰아 치며 무섭게 소리 지른다. 꽃잎을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나뭇가지 꺾어 내동댕이 친다. 산들바람은 그대 창가에 기웃거리다가 장난끼가 발동하면 분홍빛 새아씨의 두 볼을 툭툭 치며 달아나기도 한다.
온 동네가 왁자지껄 하다. 적막강산이던 이웃들이 야단 법석이다. 아이들이 타는 롤러스케이트와 스쿠터 밟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모처럼, 사람 사는 동네에 사람사는 소리가 넘쳐난다. 제일 시끄러운 건 잔디 깎는 소리다. 가스 넣어 자체 잔디 깎는 기계를 사용했는데 새로 이사 온 집은 뒷마당이 넓어서 Riding lawn mower를 구입했다.
잦은 소낙비로 잔디를 못 깎다가 주말에 햇빛만 나면 온 동네가 잔디 깎는 소리로 귀가 아플 정도다. 옆집 아저씨는 귀마개 끼고 멋진 선글라스 쓰고 황야의 무법자처럼 긴 부츠를 신고 작업에 몰두한다. 키 작은 우리집 정원사 아저씨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요리 조리 운전을 잘 해서 순식간에 해치운다.
30년이 넘게 살던 옛집은 처음에는 동네 애들이 바글바글 했는데 대학 졸업하고 결혼 하고부터 일년에 몇 차례 공휴일 때만 귀향(?)해서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됐다. 할로윈 때는 백명 가까운 아이들이 별의별 변장을 하고 축제를 벌여 뒷마당 잔디밭을 쑥대밭으로 망가트렸는데 그 때가 정말 그립다.
상큼한 풀 냄새가 진동하는 새 동네에서 이웃들과 어울려 사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현관 문을 닫아도 아이들 웃음소리, 앞집 꼬마가 타는 세발 자전거 페달 소리, 담장에 골대 쳐 놓고 두 아들에게 풋볼 연습시키며 땀 뻘뻘 흘리는 뒷집 남자 팔뚝은 싱싱한 활어처럼 듬직하다. 옆집의 귀염동이 하얗고 반짝이는 멋진 털을 뽐내는 그레이스 양은 백수로 왔다 갔다 하는 날 꼬시려고 프리스비(frisbee)를 물고 와서 같이 놀자고 꼬리 흔든다. 완벽하고 멋진 봄날! 즐거운 비명 소리가 동네에서 터져 나온다.
죽은 것, 생명 없는 것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 작별의 인사도 하지 못한 체 황급히 길을 떠난다. 밤이면 또 다시 다가올 어둠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별이 쏟아지는 연못가 언덕에서 그리움 담은 엽서를 띄운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중략)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항해(航海, navigation)나 위치 찾기(orientation)는 목표를 향하여 이동하는 상태나 능력, 그런 과정이다. 개미는 특정 냄새가 나는 페로몬을 길 위에 분비해 다른 개미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길을 찿는다. 철새는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할 수 있는 유전자 단백질인 크립토크롬(cryptochrome)을 뇌와 망막에 가지고 있어 이동주기를 결정하다.
사람 사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동물도 끼리끼리 모여 산다. 새들은 군단을 이루며 난다. 봄 향기와 사람 냄새에 취해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나의 지표라는 생각을 한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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