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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샘] '내가복음' 을 버리자

어릴적 우리가 좋아했던 간식이 있습니다. 바로 '산도'입니다. 산도를 먹을 때 단 크림만 핥아먹던 기억이 납니다. 그 크림만 잘 발라 먹으려고 양쪽의 과자를 비틀어 따는 방법도 유행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도 우리가 이런 태도를 가지고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성경에서 요셉의 인생역전 드라마는 언제나 읽어도 통쾌합니다. 그의 별명은 '꿈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 꿈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감당해야 했던 고통과 배신감 그리고 온통 절제해야만 했던 청년시절을 감수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한나의 눈물어린 기도와 기적적으로 아들 사무엘을 얻는 장면은 우리에게 기도의 삶을 동기부여합니다. 그러나 한나가 그 사랑스런 아들이 3~4살이 되어갈 무렵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성전에 바치는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장면에선 '주여 나에게도 이런 일을 이루소서!' 외치지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짊어지고 따를 것이다' 라는 말씀은 목사님들에게나 해당된다고 여깁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하나님이 하시지도 않은 말씀은 식당마다 부적처럼 걸려있고 성경책엔 형광펜 줄이 그어져 있지만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는 구절은 우리네 암송카드엔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위험하게 보이는 말씀인용은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새옹지마'격으로 '지금 비록 어려운 일이 닥친 듯 하나 결국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식으로 사용하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바로 다음 29절은 그 '선을 이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병에 걸려도 그로 인해 주님을 깊이 알게되고 가난해져도 오히려 주님과의 사귐이 깊어져 우리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찌르는 가시'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신앙은 내가 기대하고 원하는 상황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을 누리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샤머니즘과 십자가의 진리를 구별짓는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모든 면이 소중합니다. 그분의 모든 말씀이 소중합니다. 크림과 과자 모두가 있어야 크라운 산도입니다. 이제 '내가복음'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읽어나갑시다.

2008-10-07

[목회 칼럼] 내 안으로의 여정

가을 냄새가 납니다. LA에 무슨 가을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바람결에 가을이 함께 불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가을을 담은 바람이 얼굴에 그리고 온 몸에 부딪힐 때마다 제 안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가을을 깨웁니다. 존재에 대해 묻고 삶의 좌표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참 신앙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숙제를 들고 씨름을 합니다. 잘 살고 싶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맑은 샘과도 같은 그런 삶이 되고 싶다는 바람입니다. 삶을 꽉 채우고 싶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최근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인 요한 아르트를 책에서 만났습니다. 그분의 글 속에서 어렴풋한 무엇을 잡아 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아는 것이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게 날마다 신음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 싶어 하는 치열한 목적의식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마치 제 손에 잡히는 것 같습니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인으로서 해가 가면 갈수록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길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먼저 내 안으로의 여정에 오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가장 강한 대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제 고백입니다. 겉멋든 신앙 남들에게 보이는 신앙이 아니라 날마다 내 안을 살펴 신음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늘 다짐을 합니다. 신앙의 길에 대한 신음과 고민이 없다면 삶으로 증거 된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입니다. '겉모양의 신앙'과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겉모양의 신앙은 보여지기 위한 외식의 결과로 화려한 조화 같습니다. 그에 비해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은 안으로의 여정을 통해 마침내 피어난 향기 나는 꽃과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은 삶의 진정함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향기는 오래 그리고 멀리 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안으로의 여정'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자신에게 엄격함이요 현재 내 안에 자리 잡은 신앙의 길 하나 하나에 대한 치열한 점검이요 세상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푯대삼음 입니다. 우리의 안으로 우리의 속으로 우리의 깊은 본성이 마침내 터져 나오는 그곳까지 헤집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신음의 과정 없이 그저 그럴듯한 겉모양의 허상에 스스로 안위하며 만족해한다면 자신을 속이고 교회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아닐까요. 눈을 내안으로 돌립시다. 눈을 내 안의 주님께 고정시킵시다. 맑은 눈을 뜹시다. 시편의 기자는 바로 안으로의 여정을 시작하기 위한 신앙인의 기본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하소서(시119:36-37)'. 우리의 주변에 비록 메이플의 붉은 단풍과 애스핀의 노란 단풍이 없을지라도 가을은 가을입니다. 가을에는 생각합시다. 인생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민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라도 본질에 대해 생각하기는 끈을 놓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으로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겠지요. 늦었지만 안부를 전하고 싶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불경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어려울지라도 조금 만 더 힘을 내고 용기를 가지십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샬롬을 전합니다. 평안하세요.

2008-10-07

[기독교인의 삶] 최진실의 죽음과 악령

몇일 전 한국을 대표하는 톱 탤런트 최진실의 죽음은 한국시민뿐 만이 아닌 우리 미주 동포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특히 최진실과 친한 동료 정선희의 남편 안재환의 죽음 이후 최진실이 안재환에게 25억의 사채를 빌려 줬었다는 루머가 최진실을 힘들게 했으며 그녀를 자살까지 몰고 가지 않았느냐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우리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최진실의 죽음에 대해 놀랬고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나 또한 최진실의 죽음은 큰 슬픔과 충격이었고 잠까지 설칠 정도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과 천사들이 우리를 돌봐 주시고 지켜 주시지만 반대로 악한 사탄의 영들 또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괴롭힌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악한 영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며 죄를 짓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갑작스런 자살과 죽음 또한 이러한 영적인 세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는 분을 통해 들은 실화이다. 어느 한 부인이 자신 집안의 장롱을 보며 계속적으로 그 곳에 뭐가 있는 것 같다고 무섭다고 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그 녀의 어린 딸 또한 장롱을 보며 큰 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얼마 후 그 녀는 장롱 안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그녀에게 어려운 상황들과 아픔등이 있었을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 그런 문제들만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악한 영의 세력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냈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나타나 그녀를 두렵게 만들고 생각과 마음을 사로잡아 죽음으로 유혹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 또한 어렸을 적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귀신을 보기도 했고 자는 동안 옆에서 속삭이고 나의 목을 조르기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떠나갈 찌어다!" 를 외치며 그 두려움과 무서움을 떨쳐 보내며 귀신을 내쫓았다.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흥분하여 험한 말로 사람들을 비판하며 화를 낼 때가 있었다. 후에 돌이켜 보며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뭐에 홀렸어나. 제 정신이 아니었어...'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또한 비판과 분노의 영이 나를 사로잡아 내가 죄 짓게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수시로 나를 돌아보며 나의 생각과 행동이 성령충만함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한 것인지 아님 악한 영으로 인해 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악한 영으로 인해 죄를 지었다면 곧바로 회개하고 선포함으로 내 안의 악한 영을 떠나 보내야 한다. 그리고 성령님을 나의 보좌 가운데에 초대함으로 그 분 중심의 삶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주윗 사람들이 악한 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담대히 선포하며 악한 영을 내 쫓아야 할 것이다. 십자가 보혈의 피로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우리는 매 순간 순간 성령님과 거하며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한다.

2008-10-07

[사목의 향기] 놀부 전성 시대

어느 날 등산을 하다가 산속에 있던 암자를 만나 잠시 쉬고 있었는데 도사같은 스님이 나오시더니 우리를 맞아주었다. 스님이 건네준 차 한잔에 넋을 잃고 한참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분이 하신 말씀이 지금도 내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요즈음은 주역의 궤를 거꾸로 놓고 보아야 합니다." '끝나지 않은 바지 소송'이란 기사가 우리를 다시 한번 놀래키는가 하면 '처녀성 경매'로 학비를 마련한다는 기사도 있고 낮에는 학교의 선생님으로 밤에는 몸 파는 여성으로 돈을 번다는 국제 뉴스도 눈에 띤다. 놀라운 일이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다. 도저히 감이 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주역의 궤가 거꾸로 서는 시대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아름다운 민담들이 있다. 대부분 선을 권장하고 악을 경계하며 피하라는 권선징악을 가르치는 민간 윤리지침이다. 선을 행하면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인 상선벌악의 원칙과 너무나 비슷하여 나는 이 민담들을 좋아한다. 그 중의 하나는 흥부놀부전이다. 동생 흥부는 착하고 형 놀부는 악한 사람이다. 부창부수라더니 그 남편에 그 부인이라 악한 놀부 부인도 남편못지않게 시동생에게 악하게 군다. 어느 날 흥부는 굶은 배를 채우려고 더구나 굶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밥을 얻으려 큰집에 갔더니 밥을 퍼고 있던 형수가 밥주걱으로 시동생의 뺨을 때리니 얼굴에 묻은 밥풀을 떼어 먹었다고 하니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못된 형수와 배고픈 시동생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도 착한 흥부는 성실히 살아간다. 그런 흥부에게 하늘의 축복이 내린다. 겨울을 나기 위해 강남 갔던 제비가 봄이 되어 흥부 집을 찾아와서는 집을 지어 살곤 했는데 어느 해는 제비들이 좋은 선물을 흥부에게 날라다 주었다. 박씨였다. 그것을 심었더니 달덩이 같은 박이 주룽주룽 열렸단다. 흥부 부부는 신나게 박을 짜르고 있는데 이게 왠 일이냐. 박 속에서 황금빛이 비치지 않는가. 이게 꿈이냐 생시냐. 분명 꿈이겠지 내가 하두 굶어서 헛것이 보이겠지. 혹시나 해서 잠시 톱질을 멈추고 손으로! 만져보니 분명 금덩이구나! 알밤만한 금덩어리가 몇 주먹이나 나오지 않느냐. 이를 어쩌나 하느님. 이걸 팔아 양식을 사서 배고프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 누더기를 입고 다니던 아이들에게 옷도 사주고 오두막을 헐고 대궐 같은 집을 지으니 동네 사람들도 놀래고 더더욱 놀랜 것은 욕심 많은 형 놀부가 아니던가. 이야기는 끝이 없다… 제비의 발을 부러뜨려 억지로 박씨를 얻어 키운 놀부는 동생처럼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톱질을 하였으나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번쩍이는 황금이 아니라 뱀이요 독충들이니 이 일을 어찌할꼬!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놀부라는 이름을 좋아하는 상가도 생겨나고 놀부정신이 있어야 생존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의 것을 빼앗아야 산다는 사고방식이다. 여대생이 마음에 드는 교수를 만나 스승으로 존경하기보다는 그의 아내를 물리치고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교수 부인과 싸움질을 하거나 친구를 유인하여 80여차례 성매매를 시키고는 1300만원을 가로챈 여고생 이야기나 자기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온갖 감언이설로 꾀어내어 이간질 하는 신도들은 분명 현대판 놀부들이리라. 흥부놀부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주역의 궤가 거꾸로 서는 시대라 한탄할 일이다. 순리에 따르지 않는 지나친 탐욕과 이기심은 화를 부른다. 주 예수님은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고 하신다.

2008-10-07

[지혜의 향기] 매달리지 말고···

경제협력개발기구 곧 OECD에 들어 있는 나라라고 하면 여러모로 좀 살만한데다가 땅이나 인구도 너무 작지는 않아서 살림 규모가 웬만큼은 되는 나라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1996년에 스물아홉 번째의 회원국이 되었다. 한 동안 미국에 맞서 세계를 양분하던 러시아나 얼마 전에 유인 우주선을 띄워 13억 인구를 위하여 생중계 우주 쇼를 펼친 중국도 아직 회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 드러내 놓고 뽐낼 것까진 없지만 우리의 고국이 그래서도 한결 뿌듯하게 느껴지고 안심이 된다. 그런데 한국이 놀랍게도 이 회원국들 중에서 자살률이 높기로 첫 번째다. 교통사고로 죽는 이들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가 훨씬 많다. 몇몇 비회원국들이 앞서 있기는 하지만 한국이 머잖아 이 부문에서도 전 세계의 톱을 달릴 것 같다. 아무리 경쟁을 즐기고 등수를 중시하는 민족이기로서니 그것도 시합 나름이 아닌가. 며칠 전엔 어느 유명인이 또 이 대열에 뛰어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남이가 미주 동포 사회의 허망하고 비장한 자결의 기록도 결코 만만치가 않을 것이다. 희한한 것은 한국이 회원국이 되기 전 별로 잘 못 살았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자살률이 낮았었고 국민 평균소득이 올라감에 따라 높아져 왔으며 이젠 비슷한 경제지수의 다른 회원국들을 건너뛰어 단연코 이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배가 고파 정말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그 사이 복지정책이나 사회보장의 그물도 꾸준히 확충 되어 왔다. 옛날에 무슨 국민 의료보험이 있었으며 독거노인 청소년 가장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 따위가 있었던가? 복지에 관한 어떤 부분은 미주 동포들도 이미 부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저 악명 높은 교육 제도의 후유증으로 워낙 사지선다형에 익숙해 온 인생들이라 막다른 골목에서 튀어 나온 단답형의 문제는 잘 풀지를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례없이 성장해 왔다는 어떤 종교 상황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일까? 아마도 답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세상이 고르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고 공평한 출발선상에서 다시 시작하기에는 이미 글렀다고 보는 데 있는 것 같다. 맹자가 말했듯이 백성들은 예로부터 가난한 것보다는 고르지 못한 것을 더 힘들어한다. 여기서 고르다고 하는 것은 물론 기회와 희망의 평등 기본적인 인간 대접에 관한 평등이라야 할 것이다. 정말이지 내가 겪은 이들 중에는 남을 함부로 업신여기며 우쭐해 하거나 반대로 자신이 얕보인다 여기고 그 때문에 너무 부대끼며 자존심이 상해 있는 이들도 많아 보였다. 그까짓 아파트 평수 때문에 자동차 배기량 때문에 자녀들 과외수업비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정비와 활성화도 필요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마음자리 자체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즉 무엇을 달라고 해 달라고 매달려 빌면서 경쟁해서는 결코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대신 그 매달림의 밧줄을 과감히 끊고 나 자신의 성냄 욕심 어리석음을 들여다보며 이를 차차 녹여 없애 나감으로서 야만적이고 살인적인 경쟁과 시새움의 기계가 터무니없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연료부터 미리 뽑아 버리는 것이다. 이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이 시대를 살려 내는 데에 불자들이 꼭 필요하고 바빠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08-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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