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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오늘, 나는 그 길을 걸었다

소포가 왔다. 웬만한 용무는 이메일로 주고받는 세상에,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을 또렷한 손 글씨로 적은 소포였기에 더 반가웠다.     그 안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뉴욕에서 사역하는 선배 목사가 보낸 책이었다. 40년 넘게 목회하면서 매주 정성껏 빚어낸 설교문을 하루 한 편씩 묵상할 수 있도록 정리한 책이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30분 설교문을 300자로 요약했다며, 서두르지 말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읽어달라고 당부했다. 저자의 친절한 조언도 잠시, 책을 받자마자 단숨에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책 속에 녹아있는 이민 목회 현장의 생생한 소리, 신앙인의 깊은 고뇌가 책을 덮지 못하게 했다.   책 속에서 잊고 있었던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였다.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와 함께 흑인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인물이다. 킹 목사와 함께 17번이나 감옥에 투옥되었고, 셀마 행진에도 동행했던 그였다. 킹 목사가 암살당하기 전날 밤에는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바로 옆방에 머물렀으며, 총에 맞아 쓰러진 킹 목사를 부둥켜안고 병원까지 갔던 이도 애버내시였다.   한때 그는 흑인 인권 운동의 대부로 불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름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함께 싸웠던 동지들 중에는 UN 대사나 애틀란타 시장이 된 이도 있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명예나 박수갈채가 아닌, 오직 소명에 충실한 길을 걸었다. 그 삶의 진가는 조용히 흘러가는 일상에서 드러날 뿐이었다.   얼마 전 애틀랜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킹 목사 박물관을 찾아 애버내시의 흔적을 살펴보려 했지만, 박물관은 리모델링을 한다며 문이 닫혀 있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하니, 애틀랜타 다운타운을 지나는 프리웨이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고, 또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지역에도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교통편도 마땅치 않았고, 그의 이름이 붙은 길을 지나간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냥 한번 가볼 걸’하는 아쉬움이 맴돌던 어느 날, 그의 이름을 다시 검색해 보았다. 그 순간, 믿기 힘든 사실과 마주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길이 바로 교회 옆에 있었다.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닿는 거리.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그토록 멀리서 찾던 길이 사실은 바로 곁에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나는 그 길을 걸었다. 애버내시의 이름이 새겨진 도로를, 햇살이 드리우고, 들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인도를 천천히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행복과 진리, 사랑과 은혜는 늘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다만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길은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필요한 건 주위를 먼저 살피는 것이었다는 것을.   애버내시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I Tried(나는 한번 해 봤다)’.   비록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무대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한번 해 봤다는 그의 진솔한 고백과 겸손한 헌신이 깃든 발자취가 그의 이름이 새겨진 길 위에서 조용하지만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열린광장 목사 박물관 이의 이름 이름 하나

2025-04-29

[열린광장] 지구가 좋아하는 사람

“엄마는 지구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나의 딸이 가끔 하는 말이다. 내가 하는 일이 못마땅해서 에둘러 하는 놀림이라고 여겼다. 남들이 기피하는 쓰레기 수거 같은 지저분한 일을 열성으로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하느님은 피조물 중에서도 으뜸인 지구를 장장 6일 동안 정성을 다해 지으셨고 인간을 흙으로 빚으신 후 당신의 거룩한 숨을 불어 넣으시어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시간상으로 인간은 하룻밤의 꿈처럼 태어나서 하느님 최고의 창작품인 우주 만물을 관리하도록 청지기 직분을 받게 되었다.     인간들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고귀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귀한 직분을 망각하고 인간들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너도 함께 바닷가에 나가서 쓰레기를 주우면 좋겠다” 하니 “지금은 아니야 엄마, 병원 일이 너무 바빠요. 언젠가는 꼭 할거야”라고 답한다.   대부분의 사람도 그렇게 말한다.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는 건 알겠지만 왜 못한다는 건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일회용 컵 대신 물통과 텀불러를 들고 다니는 것이 바쁜 것과 상관이 있을까.   플라스틱 쓰레기가 마지막 당도하는 곳이 바다이다. 바다는 마치 구역질을 하듯 몸살을 앓고 있다. 파도는 끌고 온 쓰레기를 토해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은 다시 끌어안고 만다. 인간들이 썩지 않는 플라스틱을 남용하는 한 바다의 숨막힐듯한 고통은 끝없이 지속된다.   나는 20여 년간 허리 통증을 앓았다. 만성 기관지염에 결핵성 늑막염과 2번의 폐렴을 앓았다. 매년 겨울이 되면 환자처럼 살아가는 날이 길었다. 하지만 몸을 추스린 후 23년간 바다와 공원 동네 길 학교 앞 발길 닿는 곳의 쓰레기를 주웠다.   몸이 아파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짧은 인생, 살면서 더럽혔던 곳이나 치우다 가야겠다는 일념에서다. 선한 것을 희망했고 지구에 도움될 일을 나의 일처럼 실천하면 지구도 인간의 뜻을 감지한다. 인간이 자연을 감지하듯이 말이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 치유의 힘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상호작용의 관계가 있다. 흙은 인간의 본향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자연을 착취하려고만 하는 탐욕은 의로움을 잃게 된다. 사람이 먼저 알아차려 자연에 손을 내밀어 화해를 도모하면 늦지않는 기적을 만나게 된다.     점진적으로 좋아져 가는 건강, 활기찬 열정, 질서 잡힌 생활 방식으로의 전환이라는 치유다.   그러나 내가 체험한 모든 변화가 모두에게 공감을 얻었던 건 아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유난히 고통을 느낄 때가 있다. 행사 때면 빠질 수 없는 쓰레기 때문이다. 먹고 버리는 일회용 용기는 어떻게 폐기할 것인지 단 한 번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다. 당연한 듯 버리는 권리를 행사할 뿐이다. 그럴 때 나의 양심은 마치 상처받은 것처럼 아프다.   지구와 자연 생태계가 앓고 있듯이,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딸은 초과근무는 예사고 병실마다 환자가 포화상태라고 한다. 자연과 함께 살지 못한 부작용들은 여러 질병으로 인간에게 돌아온다.   내가 기침으로 잠 못 이루던 그때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가 겪게 될 고통의 시작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구는 모든 피조물의 공동의 집이고, 지속 가능한 미래의 희망이다. 지구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해주는 것은 최고의 찬사가 아닐지. 나의 묘지 석판에 새겨 주기를, 그날 지구가 좋아하는 별이 되어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최경애 /수필가열린광장 지구 지구도 인간 그날 지구 플라스틱 쓰레기

2025-04-27

[열린광장] 닻내림 효과

불안하거나 확신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결정하고 선택할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정보에라도 의지하려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을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부른다. 신앙에 의지하고 점을 보는 것도 이런 현상과 관계가 있다.   이런 효과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카네만이라는 학자와 트버스키라고 하는 학자가 실험으로 확인을 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이자 인지심리학자인 카네만 교수는 이런 실험을 바탕으로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심리학자가 경제학분야에서 노벨상을 받게 되었으니 경제학자들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최근 심리학은 기존 경제학의 중요한 가정들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 카네만과 트버스키가 닻내림 효과와 관련되어 증명한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 중에 유엔에 가입되어 있는 나라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카네만과 트버스키는 이 질문을 무작위로 뽑은 많은 피실험자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 질문을 하기 전에 엉뚱한 실험을 먼저 진행한다. 실험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1부터 100까지 숫자가 쓰여 있는 100장의 카드 중에서 아무 카드나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낮은 숫자를 뽑고 어떤 사람은 높은 숫자를 뽑았다.   그들은 자신의 숫자를 확인한 후에, 본격적인 질문을 받는다. ‘아프리카 나라들 중에 유엔에 가입되어 있는 나라의 숫자는 얼마인가’를 추측해보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앞서서 자신들이 카드에서 뽑은 숫자가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가자들 가운데 카드로 평균 10 근처의 숫자들을 뽑은 사람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유엔 가입국이 25개국 정도 될 것이라는 대답을 했다. 하지만, 카드에서 뽑은 숫자가 평균 65 근처였던 사람들은 아프리카에 유엔 회원국이 45개국 정도일 것이라고 대답을 한 것이다. 서로가 전혀 상관이 없는 숫자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잘 모르는 선택을 할 때,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의지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이 실험은 알려주고 있다.   극심하게 혼란스럽고 변화가 빠른 시대에 사는 요즘 사람들은 하루하루 결정해야 하는 많은 일들에 직면한다. 정보를 전부 접할 시간은 없고 선택할 것들은 많기 때문에 그저 어떤 곳에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으면 그 근처에 덩달아 닻을 내릴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진로나 학업이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큰 의심 없이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위험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가끔은 배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 근처에 무작정 닻을 내릴 것이 아니라, 인적이 드문 곳에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골라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현재 아프리카 국가 중에 유엔 회원국의 숫자는 54개국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닻내림 effect 아프리카 나라들 닻내림 효과 유엔 가입국

2025-04-24

[열린광장] 백수의 삶과 예술의 힘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예술의 사랑도 곁들어야 한다(Where there is the love of Man, there is also love of the Art).”   의학의 천재 히포크라테스가 읊은 인생 철학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짧은 인생을 사랑하려면 긴 예술도 함께 사랑하라고 말한다.   한국사람들은 짧은 인생을 어지간히 오래 살았다고 환갑 잔치를 벌이곤 했다. 그런데 이젠 옛이야기가 됐다. 이제 우리는 이른바 백수(白壽·99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백수를 넘게 삶을 살기는 무척 어렵다. 성경의 시편 기자도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있으면 80년, 게다가 거의가 슬픔과 괴로움 뿐, 덧없이 날아가고 맙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인이나 철인들이 덧없는 인생에 대해서 노래했고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람찬 삶의 길을 터득하려고 여러모로 힘쓰고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마감이 오기 전에 누구나 나름대로 어떤 예술품을 남겨 놓는 것이 슬기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에게 닥쳐 온 좋은 기회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또한 어떤 일을 할 때도 좋고 나쁜 것을 쉽사리 찾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일도 잘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뚜렷하게 남겨놓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술을 하나의 예술로 보았다. 예술은 아름답고 착하고 그리고 참된 것이다. 비록 음악이나 미술이나 조각 같은 정말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해도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얼마든지 예술을 창조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마켓의 냉장고를 열면 그 속엔 쇠고기 덩어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것을 보면 그냥 쇠고기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나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푸줏간의 쇠고기’란 그림을 본다면 그땐 달라진다. 그 그림은 쇠고기 덩어리가 아니고 하나의 미술 작품인 것이다.     푸줏간에서 쇠고기 덩어리를 손으로 만지는 사람이 비록 오랜 삶을 살지 못한다 해도 이것을 그린다면 백수를 뛰어 넘는 삶을 산 것과 다름없는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열두 번을 승전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전한 나폴레옹이 밀라노 전투를 하루 앞둔 날 어느 귀부인의 만찬 초대에서 한 말이 매우 흥미롭다.   “오늘은 아직 젊지만 내일은 천 살이 될 겁니다(Aujourd‘hui je suis encore jeune, mais demain j’aurai mille-ans).”   “밀란을 점령한다”와 발음이 같은 “천 살이 된다”라고 예술 감각이 뛰어난 말로 익살스럽게 한 말이다. 열두 번을 승전하고 단 한 번 패전한 나폴레옹은 겨우 쉰 두 살에 황제란 예술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가장 오래 사는 사람(死而不亡者壽)’이라는 노자의 격언이 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엔 따져서 안 되는 것이 셋 있는데 그 하나가 ‘잡아도 안 붙잡히는 것(搏之不得)’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노자의 말이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호수 위에 비친 달빛은 잡을 수 없어요.”   나폴레옹은 50대에 황제란 예술을 남기고 삶을 마감했다. 60대에 대통령이 된 윤석열은 허술한 계엄선포로 말미암아 대통령직을 잃었으니 대통령이란 예술을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예술이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백수 예술 예술 감각 쇠고기 덩어리 천재 히포크라테스

2025-04-22

[열린광장] 1960년 4월19일의 기억

어김없이 올해에도 4월이 되면 1960년 그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65년 전 4월 19일의 충격과 벅찬 감동은 여전히 생생하게 다가온다.   정오를 향해 치닫던 그날 오전, 서울 사대 물리과 2학년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을 품고 데모대의 선두에 섰다. 마지막 철조망과 허리 높이의 시멘트 토관 앞에서, 굳건히 경무대를 지키던 권력과 마주한 그들의 눈빛은 결연하기만 했다.   순간, “빠방” 하는 섬뜩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채 피어나지도 못한 젊음, 졸업을 앞둔 국어과 4학년 학생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4.19 희생자 1호라는 비극적인 이름표가 그의 젊음에 새겨졌다. 연이어 체육과 4학년 학생마저 목숨을 잃었고, 가정과 여학생들을 포함한 수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6.25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 대한민국은 또다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혼란에 휩싸였다.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무자비한 총격은 ‘피의 화요일’로 기록되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순간 중 하나로 남았다.     특히, 서울 문리대 수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학생의 이야기는 깊은 슬픔과 함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집안의 귀한 외아들이었음에도, 그는 초등학교 6학년 어린 학생에게 수혈 기회를 양보하고 스러져 갔다. 그의 헌신은 당시 4.19 정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수많은 안타까운 사연들을 뒤로하고, 4.19 희생자들은 서울 북방 우이동의 묘역에 영면해 있다. 당시 2학년으로 사대 신문 주간을 맡았던 나는 부정선거에 항거하며 학생들을 격려하는 글을 썼다. 6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절 우리가 공유했던 뜨거운 열정과 하나 된 마음은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있다. 글을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가 같은 이상을 향해 나아갔던, 순수하고 뜨거웠던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80대 중반의 노인이 된 4.19의 주역들은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와 대한민국을 세계 경제 10위권의 선진국으로 이끈 현대화의 주역이 되었다.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묘하다.   그해 여름,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은 농촌 계몽 운동을 계획했다. 당시 사대 학생회장은 법대에서 사회학과로 전과한 최영상 군이 맡았고, 사대는 전라남북도를 담당했다.     전주에 본부를 둔 학생회 소속이었던 나는 물리과 3학년 동기들(임장규-전 문교부 장학관, 유경근-전 서울시립대 교수, 이창무-캐나다 이민)과 함께 귀한 영사기를 마련했다. 공보부와 미국 USIS에서 어렵게 빌린 뉴스 필름을 들고, 우리는 전주를 시작으로 이리, 익산, 정읍, 장성, 담양, 순창, 남원, 장수, 장계를 순회하며 밤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   당시 지방은 전기와 전화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전기가 들어오는 곳은 경찰서뿐이었고, 우리는 경찰서의 경비 전화를 빌려 사용해야 했다. 3일장, 5일장이 끝나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밤 8시에 시작하는 영화를 기다렸다. 버스도 흔치 않아, 영화가 끝나면 칠흑 같은 밤길을 몇십 리씩 걸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영사기 불빛에 비춰보면 아이들과 남자들뿐 아니라, 이웃 동네 아낙들까지 모두 나와 영화를 보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소외되었던 농촌 사람들에게 영화는 귀한 볼거리였고, 우리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담양을 지나던 어느 날,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서울대 마크가 선명한 검은 교련복을 입은 우리 학생들을 불러 세운 한 분이 계셨다. 6.25 전쟁 때 개성에서 피난 와 담양에 정착해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가게에 들어서자 그분은 시원한 냉수를 건네주셨다. 잠시 후, 그분은 신문지에 싼 두 개의 뭉치를 우리 앞에 내놓으셨다. 당시 돈으로 20만 원, 지금 시세로 따지면 작은 가게 하나를 열 수 있는 거금이었다. 학생들의 농촌 계몽 활동에 써달라는 따뜻한 격려였다.   학생들 등록금이 몇 천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큰돈이었다. 시골에서는 더욱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분의 후한 인심에 감탄했지만, 우리는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 계몽 운동을 한다면서 돈을 받고 다닌다는 오해가 생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은 완강하게 돈을 받으라고 권하셨고, 우리는 오랜 실랑이 끝에 결국 돈을 받지 않고 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그해, 학생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기차역에 도착하기만 하면, 지방 면장은 물론 군수와 경찰서장까지 나와 우리를 환영했다. 평생 다시없을 특별한 경험이었고, 젊음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시절의 한 페이지였다. 6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뜨거웠던 함성과 잊을 수 없는 풍경들이 여전히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듯하다. 주영세 / 은퇴목사열린광장 기억 단과대학 학생회장들 4학년 학생 사대 물리과

2025-04-20

[열린광장] 부활절과 평행우주

부활절이 다가오면 아내는 흰 백합화로 뒷마당을 장식한다. 백합화는 부활절의 의미인 순결, 희망, 부활 그리고 새 생명을 아름답게 시각적으로 표현하기에 기독교인의 사랑을 받는 꽃이다. 특히, 새 생명은 부활절의 핵심이며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인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에서 부활절이 갖는 참된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단일한 의미를 구성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부활과 직결되기 때문에 십자가는 그 자체가 고난을 넘어 영광에로의 통로이며 세상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약함’이지만, 그 약함 후에는 ‘새 생명’이 찾아온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죽음의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부활의 차원으로 승화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현재와 숨겨진 승리를 상기시킨다. 십자가가 이러한 능력을 갖는 것은 다가올 영광된 부활이 마지막 승리와 하나님의 통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의 모습을 보면, 결단코 그러한 영광의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오직 의인만 참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solus Christus)와 믿음(sola fide)을 통해 장차 올 영광된 부활을 향한 신앙의 진보를 약속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만으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     키에르 케고르가 “선한 행위들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한 행위들을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한 사람이 된 후에 신앙의 행위를 한다면 우리는 의로운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의 삶은 어떤 것일까. 참담했던 과거의 삶일까, 아니면 매일 성찰하며 진보하는 현재의 삶일까. 참담했던 과거의 삶은 ‘사실(fact)’이며, 진보하는 현재의 삶은 ‘진실(truth)’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실’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정보인 반면에, ‘진실’은 주관적 해석이 가미된 더 깊은 의미에서의 참된 것을 뜻한다.     그러면 “나의 진실된 삶은 어디에 실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천국에 관한 비유에 따르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훗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나의 진실된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천국을 평행우주에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평행우주는 가상의 우주 모형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가 아닌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평행선상에 위치한 또 다른 세계를 말한다. 넓은 의미로 평행우주는 여러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다중 우주다.   이렇게 보면 천국은 우리의 순간순간의 진실된 삶이 실재적 행위로 나타나는 차원일 수 있다. 나의 진실된 삶과 하나님의 차원 안에서 실재하는 ‘또 하나의 나’는 평행우주에서 실재한다는 개념이다.     비록 기독교의 천국과 평행우주는 개념적으로는 다르지만, 둘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신학과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의 진실된 삶과 또 하나의 당신이 평행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열린광장 부활절과 평행우주 부활절과 평행우주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신앙

2025-04-16

[열린광장] 빛바랜 오욕

불교는 인간은 오욕(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색욕)을 지니고 산다고 풀이했다. 늙으면 이 오욕이 쪼그라지고 빛바래진다. 물욕, 은퇴한 사람은 사회보장 연금 이외에 수입이 없다. 명예욕, 내가 왕년에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자화자찬으로 끝난다. 식욕, 맛있는 음식이 없어 덜 먹는다. 수면욕, 초저녁에 한잠 자고나면 정신이 똘똘해져 만리장성을 쌓는다. 색욕, S라인이 뚜렷한 미녀가 앞을 지나가도 ‘소가 닭 보듯’ 한다.     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식욕이다. 먹는 것이 힘이다. 밥이 보약이다. 어떻게 하면 밥을 잘 먹을 수 있을까. 반찬이 좋아야 한다. 나는 은퇴하고 집에서 반찬 만들기를 시작했다. 구글 요리사에게 물으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우리 집 밥상에 한 끼도 빼놓을 수 없는 반찬이 물김치다. 좋은 배추를 사다가 잘라서 소금물에 절인다. 절이는 시간을 잘 조정한다. 약간 덜 절인 배추를 건져 씻어서 양념을 넣어 버무린다. 양념은 비방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 각자 양념을 만들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힌트를 준다. 고추 가루를 사용하지 않는다.   빵도 만들어 먹었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를 반죽해서 이스트를 넣고 두 번 발효해서 건포도를 넣고 스팀 냄비에 찐다. 산양 젖 가루를 넣어 빵을 만들어 보았다. 각양각색의 빵을 만들어보았다. 요즘은 실증이 나서 집에서 빵을 만들지 않는다. 시장에 맛있는 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맛있는 김치가 있으면 김치찌개는 자연히 만들게 된다. 콩나물과 두부만 넣으면 된다. 양파와 마늘 그리고 식물성 고기인 버섯도 넣는다. 요즘 새로운 메뉴가 등장했다. 찐 비트(홍당무), 보혈강장제와 시금치 무침과 시금치 된장국이다. 매운 풋고추를 넣고 만든 멸치 볶음도 빼놓지 않는다.   후식으로 새로 등장한 과일이 파파야다. 이 파파야는 혈당도 별로 올리지 않고 시원하고 맛있다. 멕시칸 마켓에 가서 방금 수입된 파파야 열 개를 카트에 넣으면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러진다. 우리 아이들과 친지에게 파파야를 선물하면 모두 좋아한다.   아내가 3년 전 뇌졸중을 앓고 나서 내가 식모, 아니 식부가 되었다. 반찬 만드는데 익숙해졌다. 아내에게 삼시세끼 상을 차려준다. 지난 60년을 받아먹었으니 내 차례다. 새로 반찬을 만들어주면 맛있다고 덥석덥석 집어먹으면 좋으련만. 고양이 밥 먹듯 깨작거린다. 맛이 없다고 불평한다. 주먹으로 꿀밤을 주고 싶지만 참는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오욕 수면욕 색욕 물욕 명예욕 시금치 무침과

2025-04-15

[열린광장] “Bless you”와 “불났씨유”

낯선 땅에서 여행하거나 거주할 때, 언어와 문화는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미국에서 처음 생활하며 겪었던 인상적인 경험 중 하나는 재채기를 하는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누군가 재채기를 하면 주변에서 “Bless you!”라고 말하고, 재채기한 사람은 “Thank you”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Bless you!”는 “May God bless you!”라는 표현을 줄인 말로, 서기 590년 유럽에서 전염병이 유행했을 당시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재채기가 병의 초기 증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의 가호를 빌어주라는 특별한 지시를 내린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미국에 처음 이민 온 한인 부부가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손님들이 하는 “Bless you”라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그래씨유”나 “불났시유”처럼 들렸다고 하며 겪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언어 장벽의 단적인 예시이다.   또 다른 경험은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가 “Soup or salad?”라고 묻는 질문을 “Super Salad?” 즉, 아주 큰 샐러드를 원하는지 묻는 것으로 오해하여 “Yes!”라고만 반복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비슷한 발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흔한 오해 중 하나이다.   낯선 음식 이름과 발음의 어려움 때문에 일행 중 먼저 주문하는 사람의 메뉴를 따라 “Me, too!”라고 외치는 경우나,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Paper or plastic?”이라는 질문을 그저 봉투에 담아주겠다는 친절한 말로 잘못 알고 “Thank you”만 연발하는 상황도 외국 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에피소드이다. 영어는 비영어권 화자에게 쉽지 않은 언어이다. 26개의 알파벳으로 45개의 음소를 표현하며, 한국어에는 없는 ‘f’, ‘v’, ‘th’와 같은 발음은 특히 한국인들에게 어려움을 준다. 예를 들어, ‘wife’를 ‘와이프’로 표기하는 것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실제 영어 발음 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또한, 영어의 장모음과 단모음의 명확한 구분은 한국어 발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 “sheet”와 “shit”처럼 짧은 발음 하나로 전혀 다른 의미가 되는 단어들은 의사소통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s’ 발음이 단어에 따라 ‘스’ 또는 ‘즈’로 소리 나는 규칙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as long as”를 “ass long ass”로 잘못 발음하여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미국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는 영어는 방문객이나 이민자들에게 때로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한인들도 많다는 점을 언급하며 그들의 노력을 칭찬하고 싶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언어와 문화가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반대로 문화를 알지 못하면 언어 습득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 거주하며 한국어와 문화를 깊이 이해한 로버트 할리 씨는 이러한 가설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을 방문하거나 이민 오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는 매우 생소한 언어일 것이며, 오랜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만큼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한국어와 문화를 능숙하게 이해하는 외국인들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결국, 외국에서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는 것은 개인의 성공적인 정착을 돕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조국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박시걸 / 캘스테이트 샌버나디노 교수열린광장 한국어 발음 영어 발음 비영어권 화자

2025-04-14

[열린광장] 나쁜 사마리아인

수영장에는 두 사람만 있었다. 한 사람은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물 밖에서 지켜 보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고 도망친 사람은 형사 처벌을 받을까?   1964년 뉴욕의 퀸즈에서 20대 중반이었던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밤늦게 귀가하다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사건 발생 초기에 이 사건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사건 발생 1주일 후에 큰 사건으로 다뤄진다. 뉴욕타임즈 편집국장이 뉴욕 경찰서장과 점심식사 중 우연히 이 사건을 듣고 기사화한 것이다.   제노비스는 38명의 목격자들이 각자 자신의 집 창문을 통해 지켜보는 가운데 오랜 시간 고통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살인자는 30분 동안이나 그녀를 쫓아다니며 그녀를 여러 차례 칼로 찔렀고,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필사적인 저항을 했지만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주변의 창문을 통해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목격자 38명 중 그녀를 도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전화로 경찰에 신고한 사람조차 단 한 사람도 없었다.   38명의 목격자들은 모두 선량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 경찰은 목격자들을 조사했다.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38명의 목격자들은 아무도 형사 처벌을 받지 않았다. 현재 미국의 대부분의 주에서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났쳤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어떤 선지자가 예수에게 물었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시는데 제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했단다. 한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있었다. 그런데 유대인 제사장과 유대인과 한 핏줄인 레위인도 쓰러진 이웃을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유대인과 적대적인 민족이던 한 사마리아인이 쓰러진 유대인을 치료하고 돌봤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이웃이고 이것이 이웃사랑이란 이야기에서 ‘착한 사마리아인’ 또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 이란 말이 유래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라고 알려져 있는 법은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은 사람을 벌하는 법’이 아니다. 대신에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이 법적인 책임을 면제받도록 보호하는’ 법이다. 길에 쓰러진 사람을 돕기 위해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나타나, 인공호흡을 시도하다가, 쓰러진 사람의 갈비뼈를 부러뜨렸다고 가정해보자. 나중에 깨어난 사람이 갈비뼈를 부러뜨렸다는 이유로 자신을 구해주려던 사마리아인을 고소할 수 없도록 보호하는 법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다. 이런 법은 현재 대부분의 주에 존재한다.   수영장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지나쳤다고 벌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벌을 받는 경우도 있다. 만일 물에 빠진 사람을 버리고 도망친 사람이 수영장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거나, 물에 빠진 사람의 보호자나 배우자였다면, 이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형사 처벌이 될 수 있다. 또한, 도망간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 밀어넣은 당사자라면, 이 사람 역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심각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사마리아 수영장 이야기 유대인 제사장 형사 처벌

2025-04-08

[열린광장] 여행의 불편함은 재미다

여행이란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문화와 생활에서 탈출하여 낯선 세상에서 새로운 경험에 도전해 보는 것이다.     여행지에 가면 음식 문화의 차이나 생활 관습 등에서 오는 생소함으로 인해 다소 불편함을 느낄 수가 있다. 사실은 그 불편함 역시 새로운 경험이다. 이것은 여행의 또 다른 유익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여행은 내 인생에서 경험의 폭을 넓혀주고 편견의 벽을 허물어 준다. ‘집 나서면 고생’이다 라는 말이 우리 속담에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속담에는 ‘집을 나서보지 않은 사람은 편견의 덩어리다’라는 말이 있다. 또는 ‘귀한 자녀일수록 여행을 보내라’는 말도 있다.   내 인생에서 첫 비행기를 탄 경험은 40여 년 전 20대 초반 김포발 워싱턴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다. 식사 시간에 앞 테이블을 펴는 것조차 새로웠다. 촌스런 내 행동이 들킬까 옆 사람의 행동을 살짝 살짝 봐가며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뒤편 좌석에서 갑자기 “팽!” 하고 코 푸는 소리가 났다.   ‘누가 식사 시간에 이렇게 몰상식하게 더러운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나’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소리가 난 뒷자리에는 전혀 경망스럽게 보이지 않는 노랑머리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참 교양 없게 자랐나 보군’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또 다른 옆에서 “패엥!” 하고 소리가 났다. 더 큰 소리였다. 이번에는 코 큰 신사양반이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며 코를 푼 것이다.   ‘허 참! 이들은 왜 이리 교양 머리 없이 이럴까?’ 생각하며 역시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이 이런 데서 표시가 나는가보다고 혼자 착각을 하며 미국으로의 첫 여행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1988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이탈리아 중부 페루지아라는 도시의 한 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때였다. 겨울철 습도가 높고 몹시 추웠던 첫해 콧물 감기로 고생을 했었다. 주기적으로 흘러내리는 이 콧물을 주체할 길이 없어 소리 내지 못하고 훌쩍거리며 될 수 있으면 남들에게 실례가 안 되게 하려고 콧물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아뿔싸! 그런데 이 미세한(나한테는) 훌쩍이는 소리에 왜들 이렇게 민감한지 20여 명의 클래스에 모든 급우들과 강의중이던 교수님까지 놀라는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수업을 마친 후 한 친구에게 왜들 그렇게 나를 쳐다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깔깔대고 한참을 웃어대더니 “너 그 더러운 콧물 들이마시고도 너하고 키스하는 애 있니?”하고 묻는 거였다.     나중에 보니 아프리카인이나 유럽인, 중동인 모두가 콧물은 힘차게 소리를 내서라도 풀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만 그 소리가 실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콧물 훌쩍이는 게 얼마나 미개한 짓이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을 하면 얼굴이 후끈거리는 것 같다. 콧물은 풀어 내야 깨끗한 것이 맞다.   불가리아에서의 일이다. 버스로 단체 관광객들을 인솔할 때였다. 호텔에 도착할 시간쯤 되었을 때 앞에 호텔이 하나 나타났다. 버스기사에게 저 앞에 보이는 호텔이 우리가 묵을 호텔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앞으로 끄덕이면서 “네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손님들에게 저 앞에 보이는 호텔이 우리가 가는 호텔이고 이제 곧 내려야 하니 준비하자고 안내 방송을 했다.     그런데 버스는 그 호텔 앞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 버스 기사에게 저 호텔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역시 “네네” 라고 대답했다. 불가리아에서는 No가 ‘Ne’이였던 것이다. 고개도 앞으로 끄덕이면 부정의 답이란다.     이 혼란스러움은 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이지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리라.   엘리베이터가 너무 작다느니 침대를 만들다가 말았다느니 이런 사소한 불편을 감수하는 여행은 경험 폭을 넓혀 주고 편견의 폭을 줄여 준다. 여행을 할 때는 익숙한 것, 내 입맛에 맞는 먹어본 음식, 익숙한 곳만을 찾아다니지 말고 생소한 곳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경험을 해 보는 것이 여행의 진정한 재미일 것이다. 남봉규 / 미래 관광 대표열린광장 여행 불편 첫해 콧물 이탈리아 속담 식사 시간

2025-04-07

[열린광장] 폭싹 속았수다

초등학교 1, 2학년은 같은 담임이었다. 1학년을 잘 가르쳐 주셨던 중년의 여자 선생님은 2학년이 되자, 나를 불렀다. 1학년 때는 없던 반장이라는 제도가 2학년부터 생겼단다. “선생님이 너를 반장으로 임명할테니 어머니께 꼭 그렇게 말씀을 드려라.”     세 번 정도 나를 불러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실제로 반장을 임명하는 날, 선생님은 다른 아이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반장도 부반장도 아니었다.   집에 가서 어머니께 이 이야기를 하자, 남편 없이 혼자 호텔에서 매일 청소를 하셨던 어머니께서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상담을 하시더니 다음날 학교로 찾아가셨다. 선생님은 촌지를 기대했던 것인데, 어머니가 알아듣지 못하셨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봉투를 들고 학교에 다녀가신 후에, 선생님은 ‘회장’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나를 임명하셨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반장보다 회장이 더 높은 자리란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정기적으로 선생님을 찾아 가셨고 2학기때 나는 회장보다 낮은 ‘반장’이 된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반장투표를 했다. 학생들이 모두 청소를 하는 동안 선생님은 혼자서 개표를 마친다. 그리고 결과를 칠판에 적으셨다. 박미애 24표, 손헌수 12표, 이승진 10표, 기타 등등….     박미애라는 여자아이가 반장이 된다. 미애는 부모님 두분 모두 선생님들이었다. 특히 미애의 어머니는 담임선생님을 가르쳤던 선생님의 선생님이었다고 했다.   여학생에게 투표에서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친구들은 모두 투표용지에 내 이름을 적었단다. 나도 내 이름을 적어냈으니 어림잡아 계산해도 내 표가 20표는 넘을 것같았다. 그날 선생님이 자기의 책상 아래 서랍에 투표용지를 넣으신 것을 보았다. 친구들에게 다음날 아침 일찍 학교에 나오라고 했다. 투표용지를 함께 열어 보자고 말이다.   다음날 선생님이 오기 전에 친구들과 투표용지를 꺼내서 세어 보았다. 내 표가 제일 많았다. 사실을 알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모두 함께 2교시 국어시간에 개표를 다시 하자고 하셨다. 결과는 역시 내표가 가장 많았다. 하루만에 반장이 바뀌었다. 다음날 어머니는 다시 봉투를 들고 학교에 오셨다.   중학교 1학년 담임은 영어선생님이셨다. 그분에게 배운 영어문장 하나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What is the matter with you?” 누군가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때 물어보는 문장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너 무슨 문제 있니?, 어떻게 도와줄까?” 이런 뜻이란다.   얼마 후 백인남자 한 명이 지하철역에서 승차권을 구매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배운 걸 써먹고 싶어서 달려갔다. “What is the matter with you?”라고 물었다. 백인은 나에게 한동안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신촌’을 외치는 것으로 보아 신촌역으로 가는 표를 사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표를 사도록 도와줬지만 그에게 고맙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말이 “너 도대체 왜 그래? 정신이 있는거야?” 정도로 상대방을 질책할 때 쓰이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년 후에 일이다.   이 분은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 입학성적 순으로 반장 부반장을 임명했다고 하셨다. 부반장이 된 나는 몇일 후에 입학성적이 8등인 학생이 반장이 된 사실을 알고 선생님에게 따졌다. 선생님은 임명장이 이미 인쇄된 후이기 때문에 변경은 불가하니, 나더러 반장으로 임명된 친구와 1주일씩 번갈아서 차렷 경례를 하라고 하셨다. 가난과 촌지 때문에 ‘폭싹’ 속았던 어린 시절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반장 부반장 여자 선생님 동안 선생님

2025-04-03

[열린광장] 광야를 채우는 첫사랑의 기억

어쩌면 인간은 사랑 이야기에 질릴 법도 하다. 문학, 음악, 예술, 영화는 물론이고, 주변의 감동적인 사랑의 순간들까지,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랑 이야기를 접해왔다. 누구나 가슴속에 사랑 노래 한두 곡쯤, 잊지 못할 사랑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여전히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사랑 이야기를 갈망하며 귀 기울이는 것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명확하다. 삶의 근원적인 힘이 되어주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사랑을 아직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 인간의 깊은 갈증과 아픔 때문일 것이다.   특히 현대 사회의 환경은 인류에게 더욱 절실하게 진정한 사랑과 희망의 증표를 찾도록 요구한다. 임상목회학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인은 에른스트 베커의 “죽음 부정의 시대”나 빅터 프랭클의 “의미를 찾아나선 인간”에서 제시된 무거운 주제들과 다시금 마주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질병과 죽음을 외면하거나 은폐하려 하고, 내면의 공허함의 이유를 애써 외면하며, 노년을 성숙과 삶의 결실의 계절이 아닌 돌봄과 의존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디어가 묘사하는 노년의 모습에서도 노화 과정과 노인에 대한 편견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미지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현대인은 고독과 아픔 속에서 소진되지 못한 삶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내면 깊숙이 자리한 영혼의 목마름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며 더 큰 의미를 찾아 나서야 한다.   인류는 어김없이 새로운 사순절을 맞이하여 40일간의 거룩하고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묵상의 여정을 시작했다. 학생, 직장인, 질병과 싸우는 환자, 새로운 인생을 맞이한 은퇴자, 타지에서 헌신하는 이, 그리고 남모르는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이 40일간의 묵상 여정에 동행하자.   동시에, 올해의 사순절 여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감사히 여기며 시작하자. 또 다른 사순절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묵상의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다. 이 기간을 통해 우리는 역사적인 첫 부활절 새벽의 기쁨과 소망을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이러한 특별한 시간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성경은 그 소망의 언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만약 누군가가 우리 대신 갚아야 할 빚을 “전액 완불”해 주었다면, 우리는 그날부터 시작된 새로운 삶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현대라는 광야에서 길을 잃을 때, 우리에게 먼저 베풀어주신 그 거룩한 “먼저 사랑”에 의지하며, 이전보다 더욱 풍성한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가득 채워지는 사순절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김효남 / HCMA 원목협회 디렉터열린광장 첫사랑 광야 사랑 이야기 사순절 여정 묵상 여정

2025-03-30

[열린광장] 한국학교 학생들의 만세 삼창

학생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토요일 아침 한국학교에 온다. 특히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2세 엄마들도 자녀들을 교실에 들여보내며, 젊은 부모들의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의와 집념을 엿볼 수 있다. 주말 아침, 충분히 휴식하고 놀 수 있는 시간임에도 한국어 교과서를 펴고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면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하다.   풀러턴 한국학교는 남가주 한국학원 산하 10개 한국학교 중 가장 많은, 약 350명의 학생이 다니는 대규모 학교다. 교장 선생님은 사랑과 정성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며, 선생님들에게도 늘 감사의 마음을 전하시는 분이다. 그 따뜻한 리더십 아래 학교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정을 쏟는 선생님들, 그리고 탁자를 직접 옮기고 무거운 물통을 들며 학생들의 간식을 준비하는 학부모 회장님의 솔선수범은 학교의 든든한 힘이다.   올해 풀러턴 한국학교의 3.1절 기념행사는 예년과는 조금 달랐다. 1교시에는 학생들이 태극기를 직접 만들었다. 음과 양을 나타내는 붉은색과 푸른색을 도안에 색칠하고, 하늘, 물, 불, 땅을 상징하는 사괘에 정성껏 검은색을 채우며 태극기에 담긴 깊은 뜻을 배웠다.   2교시에는 유관순 열사 역할을 맡은 선생님께서 태극기가 그려진 흰 티셔츠에 검정 치마를 입고 선두에 섰고, 학생들과 TA, 교사들은 흰 상의와 검정 바지 또는 치마를 입은 채 손수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교내를 행진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마지막으로 교무실 외벽에 부착된 큰 태극기 앞 간이 연단에 모여 애국가를 제창한 뒤, 교장 선생님께서는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 학교가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이어가길 바란다는 말씀을 전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모두 큰 목소리로 “만세” 삼창을 외치며 기념행사를 마무리했다.   모국을 떠나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멕시코 등지에서 독립자금을 모았던 선열들의 애국 활동은 더욱 뜻 깊다.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남긴 “오렌지 하나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라는 말씀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문학 역시 그 시대를 반영한다.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에는 만주 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던 독립군의 의지와 고향을 떠난 동포들의 고달픈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주갑이 아제’는 만주에서 홀로 벌목일을 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한다. 강물에서 목욕한 여윈 몸에 베옷을 걸친 채, 학의 날개짓 같은 몸짓으로 참담한 현실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구구절절한 소리로 풀어낸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한 민중의 삶과 소망이 애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 시인의 시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모국이란 무엇일까. 필자는 한국의 학교에서 애국가를 부를 때보다, 이곳 한국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를 때 더욱 깊은 울림을 느낀다. 첫 소절부터 눈시울이 젖는 경험을 하곤 한다.   먼 조국의 태극기를 직접 그리며, 선열들처럼 함께 만세를 외치는 한국학교 학생들의 가슴 속엔 분명 새로운 씨앗이 심어졌을 것이다. 권정순 / 풀러턴 한국학교 교사열린광장 한국학교 학생 이곳 한국학교 대한독립 만세 한국어 교과서

2025-03-27

[열린광장]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젊었을 때, 힘든 시기를 보낼 때마다 작고하신 어머니께서 자주 해주셨던 말씀이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가정이 빈곤에 허덕였지만, 우리 집은 유독 더 가난했다. 8남매를 둔 어머니는 36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자식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공부는 사치였다. 결국 나는 중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가구 공장에서 일하며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 했다.   이른 아침 공장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심정과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좋아했던 여자애가 여고생이 되어 단정한 교복 차림에 자주색 책가방을 들고 등교하는 모습과, 공장으로 향하는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내 모습이 중간에서 마주칠 때였다. 그 순간이 너무 창피해서 매일 다니던 길 대신 20분을 더 걸어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동생보다 더 아껴주던 친구의 누나가 “남자라면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고 설득하며 야간 고등학교 등록금을 내주었다. 동창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나는 비로소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때부터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느 날, 혼담이 오가던 둘째 누나가 나를 불러 앉혔다. “너 때문에 시집을 못 가게 생겼다.” 울먹이는 누나는 나를 부둥켜안고 하소연했다. 명동 한복판에서 신문을 팔던 내 모습을 매형 될 사람이 보았던 것이다.   이후, 작은 무역회사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준비했지만, 끝내 세 과목을 치르지 못한 채 군 입대를 해야 했다. 대학생은 입영 연기가 가능했지만, 고등학생은 예외였다. 제대 후 다행히 손해보험회사에 취직했지만, 고졸 출신은 진급이 늦었다. 나보다 늦게 입사한 대졸 후배가 내 상사가 되었고, 평생 과장 자리에서 머무는 선배들을 보며 좌절감을 느꼈다. 학벌과 학위가 전부인 회사 시스템에 절망했고, 결국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주경야독 끝에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 시절, 야간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 때 얻은 위장병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어머니 말씀은 단순히 고생을 감수하라는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젊을 때의 고생은 훗날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니 받아들이라는 의미였고, 고진감래의 순간이 올 것이니 견디라는 격려였으리라. 하지만 나는 어머니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마다 듣기 싫었다. 맹자는 “걱정과 어려움이 나를 살게 하고, 안락함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이는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안락할 때 방탕하지 말라는 경고다.     독일의 한 연구소에서는 지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역경을 극복한 사람과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더욱 지혜로우며, 특히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인생의 어두운 면을 일찍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젊을 때의 어려움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발전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니겠는가.   주변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집념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지금 내가 미국에서 이만큼 살아가는 것도 그때의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젊은 시절의 고생이 결국 성공의 기회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이진용 / 수필가열린광장 고생 고등학교 졸업 야간 고등학교 어머니 말씀

2025-03-23

[열린광장] 고목 간추리기

연방 공무원 사회가 감축, 감원, 해고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방성 정문에서 신임 국방부 장관(예비역 소령)에게 깍듯이 경례하던 4성 장군 브라운 합창 의장도 해고되었다. 트럼프의 심복 일론 머스크는 공무원들에게 매주마다 다섯 가지 프로젝트를 기록해서 보고하지 못하면 사퇴하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일하지 않는, 쓸모없는 고목을 간추리기 위해서다.   일하지 않는 고목 같은 공무원이 있는가. 물론 있다. 공무원으로 잔뼈가 굵은 나는 알고 있다. 한국전쟁 와중에 월남한 나는 인천에 정착하여 용현동 미군 유류 창에서 소화기 검사원으로 공무원의 첫발을 들여놓았다. 이 소화기 검사원이 나중에 국방성 조달청 서부 지역 계약 사령부에서 ‘직업 안전관리 감사관(Safety and Health Specialist)’으로 보잉의 안전 관리를 감사하는 공무원이 될 것을 누가 알았을까.   나는 미군 유류 창에서 감독자의 호의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 일해 외국어 대학을 졸업했다. 군사고문단 (KMAG)에서 모집하는 통역관 시험에 합격해, 육군본부 인사처에서 민간인 고문관과 막대한 인명과 재산 손실을 감축하는 대한민국 육군의 비전투 사고 방지 업무를 지원하는 일을 했다.   한국에서 21년 공무원 생활을 하고 특별이민으로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주 정부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일본 식당에서 접시닦이를 하고 있는데 주정부 노동청 직업안전 인사과에서 안전 검사원으로 채용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식당의 일본계 웨이트리스들이 우리 식당 접시닦이가 주정부 청소부도 아니고 안전 검사원으로 간다고 한참 동안 입방아를 찌었다.     그 후 6년을 안전 검사원, 교육 및 홍보, 안전 규정 편찬을 지냈다. 하와이 큰 섬, 마우이, 카우아이로 출장다니며 건축 공사장도 검열했다. 그 정점이 마우나케아산(Mauna Kea)의 천문대 건축 공사장 검열(중앙일보 2011년 신인문학상 참조)이었다.   하와이주 공무원들은 대개 진주만을 바라다보고 산다. 선박수리소의 연방정부 공무원들은 높은 봉급에 생활수당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별 따기로 경쟁이 심하다.   진주만 옆의 공군기지에 지상 안전관 모집에 응모했다. 안전관리의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인 나는 퇴역 공군 장교들을 물리치고 국방성 공무원이 되었다.   아이들이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진학한 뒤 방학 때마다 집에 왔다. 아이들 항공요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롱비치 해군 선박 수리소에 공석이 생겨 미 본토로 이주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되었다. 더글러스 항공기 제작소의 공군 소속 현장 파견대에서 일하다가 진급되어, 조달청 서부 지역 계약 사령부의 부 매니저로 자리를 옮겼다.   자격이 의심되는 매니저를 도와주는 내게 시선이 몰렸다. 나의 영어 실력에 바닥이 드러났다. 공문 초안을 작성하여 상부에 제출하면 붉은 펜으로 ‘다시’라고 그어져 돌아왔다. 정관사와 부정관사, 단수와 복수 사용이 왜 그렇게 까다로운지. 그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의 ‘문법 도움이’도 없었다. 달구지를 끌고 나무하러 다니던 촌놈이 바윗덩어리 같은 컴퓨터의 DOS 프로그램 조작은 어려웠다.     그래서 ‘무능하면 파도만 만들지 않으면 된다(make no waves)’고 생각했다. 무사안일주의였다. 공무원은 프로베이션 기간만 지나면 무능해도 해고되지 않는 철밥통이다. 대신 일찌감치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조기 은퇴의 탈출구가 보였다. 30년 전 2만5000불의 ‘상여금(buy out)’을 받고 시원섭섭하게 은퇴했다. 돌아보면 나 같은 사람이 바로 고목(dead wood)이 아니었을까. 윤재현 / 전 연방공무원열린광장 고목 직업 안전관리 공무원 생활 공무원 사회

2025-03-20

[열린광장] 일류의 조건

대기업에 다닐 때다. 회사 전체의 다음연도 손실과 이익 계획을 경영계획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회사 전체의 경영계획을 관리팀의 직원 한 사람이 관리했다. 엑셀(Excel) 프로그램 하나로 직원 한 사람이 4000명이 넘는 회사 전체의 연간 수입과 지출 계획을 관리했던 것이다. 그 직원은 혹시나 다른 직원이 자신이 관리하는 엑셀 프로그램을 알거나 건드릴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자신이 아는 기술이나 지식을 꼭 부여잡고 평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아는 걸 남에게 알려주면 자기 밥그릇이 날아간다고 여기는 것 같다. 어쩌다 얻게 된 노하우나 지식 하나를 부여잡고 평생을 사는 것이다.   요즘에는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기가 쉬워졌다. 하지만 예전에는 ‘도제 교육’이라고 해서, 숙련된 전문가 아래서 초보인 제자가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영화를 보면 제자는 일평생 스승 아래서 마당만 쓸다가 스승이 눈을 감기 직전에 지식을 전수받는 경우도 있다.   일본의 교육학자인 사이토 다카시는 ‘일류의 조건’이란 책에서 ‘훔치는 기술’을 말한다.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잘 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훔치는 기술은 남에게 ‘지식을 훔치는’ 기술이다. 그가 말하는 ‘일류’는 꾸준한 자기 성장을 하며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일생을 성장하는 사람이다.     항상 성장하는 사람은 자기 밥그릇을 쉽게 남에게 내어 줄 수 있다. 자기는 이미 다른 밥그릇을 쳐다보기 때문이다. 남에게 가르치는 것을 꺼리는 사람은 자기 밥그릇만 본다. 남이 금방 자기 밥그릇을 차지할까봐 늘 전전긍긍한다.     남에게 쉽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는 두 개 세 개를 새로 깨우쳐야만 한다. 그것이 일류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이라는 것이다.   동경대 법대를 나와서 일본에서 대학교수를 하는 저자는 ‘일류’가 되기 위한 또 다른 조건으로 ‘요약하는 힘’을 꼽는다. 업무 지시를 하다 보면 5분만 지나도 졸고 있는 직원을 본다. 그는 졸면서 나에게 외치는 것 같다. ‘제발 요약해서 본론만 말하라’고 말이다.     요즘은 영화도 짧게 요약한 것들이 유튜브에 많이 나와있다. 책의 내용도 요약되어 있다. 업무지시를 하든 강의를 하든, 고객에게 설명을 하든 ‘요약’해야 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받은 교육 중에 내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 하나만 꼽으라면 ‘짧은 글 짓기’다. 글을 짧게 짓기 위해서는 내용을 여러 번 곱씹어 보고 완전히 내 것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남의 입장이 되어 내 글을 읽어보아야 한다. 과연 이 말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다카시 교수의 마지막 일류가 되기 위한 조건은 ‘추진하는 힘’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추진력은 매일 샘솟지 않는다. 그래서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몸은 처음에는 생각하는 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계속해서 습관으로 만들면 몸이 알아서 혼자 움직인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습관은 성격을 만들고 성격은 운명이 된다.” 작지만 계속할 수 있는 좋은 습관을 만들어야한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일류 마지막 일류 자기 밥그릇 엑셀 프로그램

2025-03-19

[열린광장] 광화문 광장의 민주주의, 어디로 가나

헌법에도 명시된 바와 같이, 모든 권력의 근원은 국민이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국민의 목소리에 있으며, 이는 국민의 권리로 보장된다.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의 외침과 집회는 이러한 민심을 대변해 왔다. 그러나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은 연일 ‘집회 없는 날이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집회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지만, 때로는 법과 질서보다 앞서는 군중의 외침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최근 3·1절과 같은 국경일까지도 대규모 집회로 인해 국민적 기념일이 아닌 갈등의 장이 되어가는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고민을 안긴다. 서울을 찾는 관광객들에게조차 이제 ‘광화문 집회’는 관광 목록에 오를 정도가 되었다. 과거에는 천막을 치고 자리까지 마련하며 장기간 집회를 이어가는 모습도 흔했다. 단식투쟁을 하며 명상하듯 시위를 벌이는 이들도 있었고, 정부를 향한 항의의 목소리는 민주주의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집회 문화는 과연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모습인가. 지난해 12월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둘러싼 찬반 집회는 전국을 뜨겁게 달궜다. 의회민주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갈등이 거리에서 표출되며, 집회는 다시금 국민의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영국에서는 반정부 시위대가 의회와 궁전을 불태우겠다고 모였을 때, 한 교통경찰관이 나서서 “의회로 갈 사람은 이쪽, 궁전으로 갈 사람은 저쪽”이라며 길을 정리해 군중을 자연스럽게 해산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국가와 국민이 갈등을 조율하며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방식의 한 사례로 꼽힌다.   대한민국 역시 집회의 역사를 지나왔다. 1960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며 “데모로 해가 떠서 데모로 해가 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자유당 시절 연간 50건에 불과하던 집회가, 1960년에는 불과 10개월 만에 1000건을 넘었다. ‘데모한다, 고로 민주주의는 존재한다’는 구호가 여전히 유효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한국의 집회 문화는 3·1운동(1919), 6·10 만세운동(1926), 광주학생운동(1929) 등 역사적 사건을 통해 발전해 왔다. 해방 이후에는 반탁·찬탁 시위가 국토 분단과 6·25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4·19 혁명은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전야의 민주당 정권 시기의 혼란스러운 시위는 한국 집회 문화의 가장 어두운 단면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데모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과도한 집회로 인해 외국 기업들이 한국을 기피하는 나라로 인식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광화문의 외침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국민의 목소리가 중요하지만, 그 방법 또한 성숙해야 한다. 법과 질서 속에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이루어질 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열린광장 민주주의 광화문 광화문 광장 광화문 집회 외침과 집회

2025-03-13

[열린광장] 문학의 ‘쓸모’에 관하여

오렌지글사랑 모임이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매월 공부해온 세월이 어느새 30년이 된 것이다. 도대체 문학이 무엇인가, 거기에 무슨 마력이 있어 그렇게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것일까.   중학 졸업 후 진학을 못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때였다.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참 막막한 시절이었다. 한 달에 한 번쯤 마을 이발소에 들렀다. 그곳에 밀레의 ‘이삭줍기’ 그림 한 폭과 푸시킨의 ‘삶’이라는 시 한 편이 걸려있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 괴로운 날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 오리니 / 인생은 언제나 슬픈 것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매월 꼬박꼬박 만나게 되는 그 시 한 편이 가만가만 나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기 시작했다.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온다’는 대목을 되뇌며 힘든 날을 견뎌낼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만났던 한 편의 시가 지금까지도 나를 응원해주고 있다. 문학의 힘이다.   작년에 글사랑 회원 세 분이 수필집을 출간했다. 수필은 자신의 바닥을 내보이는 글이다. 쑥스럽고 부끄럽고 남세스러운 일까지를 빨랫줄에 걸어놓은 일이다.     밑바닥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남의 밑바닥 얘기를 들으면서 내 밑바닥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이야기 속의 나와 내 속의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이다. 공감하고 감동한다. 밑바닥이 밑바닥을 만나면 부둥켜안고 울기 십상이다. 울음은 엉킨 가슴을 풀어주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준다. 문학의 힘이다.   쉬운 인생은 없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삶이다. 벼라 별일을 겪으며 살아가는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원망과 미움, 자책과 서러움 등이 차곡차곡 쌓인다. 들끓는 마음의 충동, 불안하고 어두운 자의식을 고백하기는 쉽지 않다. 글쓰기를 통해 내밀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밝은 세상이 보이듯, 글을 쓰고 나면 삶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글을 마친 다음 어느 작가는, ‘가슴에 맺혀있던 돌덩이 하나가 쑤욱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글쓰기를 통해 영혼을 위로받고 아픔이 치유되었다는 놀라운 체험을 얘기한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물론 독자에게도 위로와 위안을 준다. 문학의 힘이다.   최근, 한국 헌법재판소에서 최종 변론에 나선 변호인들의 주장을 TV를 통해 지켜보았다. 청구인과 피청구인 측을 대변하는 모든 변론 중, 장순욱 변호사의 변론이 단연 돋보였다. ‘헌법의 말과 헌법의 풍경’을 얘기한 그의 말은 정연하고 담백하고 아름다웠다. 헌재의 최종 결과와는 무관하게, 상대를 설득하여 공감하고 감동시키는데 문학적 표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입증해준 변론이었다. 그의 변론은 ‘문학의 힘’이 얼마나 큰지, 문학의 쓸모가 어디에 있는가를 일깨워 주었다.   문학은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다. 삶의 굽이굽이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잘 살아낼 수 있는가. 문학은 이야기를 통해 그 길을 조곤조곤 안내해 준다. 정찬열 / 시인열린광장 문학 문학적 표현 밑바닥 얘기 오렌지글사랑 모임

2025-03-12

[열린광장] 창고에 묻혀있는 이승만 초상화

미국의 인물화 화가 보리스 샬리아핀(1904~1979)이 1950년 제작한 작품 ‘한국의 이승만(Korea’s Syngman Rhee)’은 그해 10월 16일 시사주간지 타임(TIME)의 표지를 장식했다.     표지에는 “We have not despaired; we must not be disappointed(우리는 절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낙담해서는 안 된다)”라는 부제가 함께 실렸으며, 6페이지 분량의 한국전쟁 관련 종군 기사와 함께 발간되었다. 이 표지는 당시 한국전쟁의 참상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리스 샬리아핀은 이 작품을 수채화 물감에 고무를 섞어 불투명 효과를 낸 ‘구아슈(Gouache)’ 기법으로 제작했다. 모델은 이승만 대통령이 6.25 전쟁 중 서울을 잃고 대전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미국 ‘LIFE’ 잡지와 인터뷰한 사진이었다. 표지의 부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전쟁 대국민 연설에서 발췌한 문구였다. 필자는 당시 발행된 ‘TIME’지를 소장하고 있어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1978년 보리스 샬리아핀의 부인은 이 작품의 역사적 가치와 희귀성을 인지하고, 이를 워싱턴 소재 국립인물화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NPG)에 기증했다. 그러나 기증 후 이 작품은 미술관 전시에서 제외되어 현재까지 창고에 보관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의 크기가 작아 전시 기준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 그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워싱턴에 거주하는 필자의 지인은 NPG 관계자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전해줬다. 필자는 한인으로서 새로운 대형 유화 초상화를 제작해 박물관 전시에 적합한 작품을 기증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인물 자료를 수집하고, 그의 내면 세계와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는 과정을 거쳤다. 수개월간의 작업 끝에 새로운 대형 유화 초상화를 완성했다. 특히, 기존 보리스 샬리아핀의 작품에서 잘못 표현된 태극기의 괘를 바로잡아 보다 정확한 태극기를 배경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평소 추상화를 주로 작업해 온 필자에게 박물관 수준의 대형 유화 초상화 제작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임했다. 이 작품은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 공식 흑백 사진을 모델로 하여 그의 단호한 내면과 최고 지도자로서의 근엄한 자세를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국립인물화미술관(NPG)은 1856년 설립된 스미소니언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부속 미술관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명성을 자랑하며 연간 12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다. 이곳에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부터 도널드 트럼프까지 역대 대통령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으며,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초상화도 포함되어 있다.   필자는 한인 서양화가로서 개인적으로 본 작품을 국립인물화미술관에 기증하고 전시를 추진하고자 한다. 현재 기증 방법을 모색 중이며, 미술관의 심사 기준을 통과할 경우 대한민국의 글로벌 위상에 걸맞은 공공외교의 사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제이 황 / 화가열린광장 초상화 창고 이승만 대통령 한국전쟁 대국민 미술관 전시

2025-03-10

[열린광장] 단국대 미주 아카데미를 마치며

단국 대학교가 주최하는 미주문학아카데미가 LA에서 1주일 간 열렸다. 시와 수필을 창작하는 코스로, 열기가 대단했다.     단국대 문예창작과의 교수이며 한국 문단의 최고봉에 있는 안도현 시인과 해이수 소설가의 열강이 매일 오후 5시간씩 펼쳐졌다. 참가자 40여 명은 대부분 캘리포니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한인 작가들이었다. 북가주와 샌디에이고 쪽에서 온 작가들은 LA 인근의 호텔에 일주일 간 머물며 강의를 들었다. 2014년부터 해마다 단국대가 미주 작가들을 지원해 온 겨울 캠프로 많은 작가들이 도움을 받아왔다.   안도현 시인과 해이수 소설가의 공통적 키워드는 훈련, 훈련, 훈련이었다. 많이 읽기, 매일 꾸준한 연습, 내용과 형태의 다양한 시도, 채찍질 같은 타인의 평가를 겸손하게 수용하며 훈련을 거듭하는 것이었다.     안도현 시인은 낯선 환경을 과감히 접해보고, 자신의 우물에서 벗어나, 사고의 틀 흔들어 주면, 전혀 새로운 시어를 갖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특히 ‘나’를 버리라고 강조했다. 그는 ‘나’를 버리면, 작가가 객관화된 시각으로 사물을 보게 된다고 했다. 시인은 ‘나’를 버리는 글쓰기 연습을 3년 동안 하라고 주문했다.   해이수 작가는 첫 강의에서 자신의 에베레스트산 등반과 호주 사막 여행,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 가졌던 사색과 독서 등이 자신의 인생과 작품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해이수 소설가는 글을 쓰는 행위가 이미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일 읽고, 매일 쓰고, 매일 감동 받으려 노력하면, 타인의 삶에 울림이 있는 글을 쓰게 된다고 가르쳤다. 작가가 되겠다는 용기는 매일 쓰겠다는 결심과 훈련, 그리고 주어진 틀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하고 사물의 본질을 깨닫게 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6일에 걸친 아카데미 강의는 미주 작가들이 느껴온 목마름이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강의는 스파르타식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제자리에서 시간 안에 20편 정도의 수필 작품을 읽어내고 평가하는 훈련을 했다. 시는 왜 꼭 12행 내외여야 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혔냐는 질책을 받으며 30행 이상의 시를 써내라는 과제를 받기도 했다.     오후 내내 강의를 들은 후, 다들 집에 가서 수필과 시를 밤늦도록 써서 다음날 제출했다. 그리고 도마 위의 생선처럼 혹독하게 난도질 받을 각오를 하고 합평 시간을 맞았다. 참가자들은 배움에 진지했다.   미주 작가들의 문학에 대한 갈망은 6일간의 아카데미 캠프라는 단비를 맞았다. 시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고, 수필의 격을 높이는 싹을 틔웠다. 참가자들이 마지막 날 제출한 작품들은 시작 첫날에 제출한 작품보다 월등하게 좋아져 있었다.     우리 미주 작가들은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스스로의 성장을 목격했다. 우리는 귀한 지식과 경험뿐만 아니라 열정까지 나누어 받았다. 해마다 멀리 귀한 지원을 해주는 단국 대학교 미주 아카데미에 깊이 감사한다. 송마리 / 시인열린광장 아카데미 단국대 아카데미 강의 아카데미 캠프 단국대 문예창작과

202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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