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열린광장] “뉘신지…” 치매 가족의 고통과 소망

6월은 ‘치매 인식의 달(Dementia Awareness Month)’이다. 서늘한 그림자처럼 노년의 삶에 드리워지는 치매, 그리고 그 가장 흔한 형태인 알츠하이머병은 한 인간의 존엄과 삶의 질을 송두리째 흔드는 질병이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따르면 이미 500만 명 이상의 노인이 치매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 곁을 지키는 가족과 의료진, 돌봄 제공자들의 수를 헤아리면 이는 우리 사회 전체가 직면한 거대한 과제임을 실감하게 된다.   알츠하이머 협회는 2060년이 되면 환자 수가 지금의 두 배를 훌쩍 넘어설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의학과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인류의 삶은 풍요로워지는데도, 우리는 왜 이토록 아픈 도전 앞에 서 있는 것인가. 은퇴를 앞두거나 이미 노년의 여정을 걷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제 이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성찰과 대비에 나서야 할 때이다.   치매 환자와 가족을 위한 생활 수칙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기에, 이 지면에서는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병원 채플린으로서 기억의 상실과 싸우는 환자들과 동행하며 길어 올린, 삶의 성숙과 시간에 관한 절절한 통찰인 까닭이다.   환자와 그 가족의 투병기는 한 편의 긴 ‘상실의 서사’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가족들은 처음에는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어느 한순간 켜켜이 쌓아온 슬픔과 아픔이 터져 나오며 무너지곤 한다. 한 사람의 인격과 사회적 존재감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고통,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가족의 심적 부담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아직 의학적 완치법은 없으나, 이 지난한 과정 속에서도 삶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들은 수많은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뤄내고 있다.   상담의 최우선 순위는, 환자의 힘겨운 여정 속에서 ‘삶의 기쁨’과 ‘존재의 의미’를 선제적으로 찾아 함께 빚어가는 데에 있다. 환자는 점차 기억과 단어를 잃어가며 대화의 끈을 놓치기 일쑤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궁극의 소망’이 무엇인지 함께 발견하고 그 여정을 완주하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돌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소망을 붙드는 프로그램 중 ‘매주 한 시간, 스토리 타임’은 금보다 귀한 시간으로 여겨진다. 환자의 삶의 목적을 함께 다듬고, 영적 자아상을 그리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남길 ‘마음의 유산’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는 과정이다. 날이 갈수록 기억이 흐릿해지는 환자를 보며, 이 시간이야말로 얼마나 꾸준하고 헌신적인 돌봄의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쩌면 미래의 나’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이처럼 우리를 실존의 중심으로 이끌며, 궁극적 신뢰의 대상을 향하게 하는 구심력이 된다.   수년 전, 필자의 선친께서 알츠하이머를 앓으셨을 때 아내와 함께 잠시나마 집에서 아버지를 돌본 경험이 있다. 평온한 얼굴로 우리를 보시거나, 말없이 뒤뜰을 바라보시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우리 내외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물으셨다.     “뉘신지….” 그 순간 필자는 하늘을 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제부터 아버지의 남은 여정, 온전히 주님께 맡깁니다.’   성경은 이같이 위로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 모두는 유한한 존재로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피할 수 없는 질병이 닥쳐온다 해도, 그 시간 속에서 ‘궁극의 신뢰’를 잃지 않도록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지막 여정이 단순한 소멸이 아닌, 거룩한 축복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간절히 구한다. 김효남 / HCMA 채플린 본부 디렉터열린광장 치매 가족 치매 가족 치매 환자 치매 인식

2025-06-12

[열린광장] 이재명과 이명박의 평행이론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은 여러 면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당선을 떠올리게 만든다. 두 사람 모두 한국 정치의 기존 틀이나 주류에서 벗어난 이력, 성과와 경제를 강조하는 리더십, 대중 친화적인 화법, 그리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자신의 소신을 꺾고 상대방의 의견을 적극 수렴할 것 같은 성향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모두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현대건설 CEO에서 서울시장, 그리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기업가적 경력을 앞세운 실용주의 리더였다. 그는 청계천 복원사업을 성공시키고,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성장 중심의 공약을 내세웠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로 일하며 정치인보다는 행정가로서 지역경제 활성화와 행정 성과를 바탕으로 지지층을 확장해왔다. 두 사람 모두 엘리트 정치인 출신은 아니었고, 비주류이지만 강한 추진력과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는 능력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들의 경제정책 기조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747 공약’(연 7% 성장, 4만 달러 국민소득, 세계 7대 경제강국)을 내세우며 규제 완화, 기업 친화 정책, 자원외교 등 외형 성장 중심의 경제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분배와 복지를 강조하며 ‘기본소득’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국가주도형 성장’을 앞세운다. 재정 건전성과 기업 혁신의 균형을 꾀하려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 모두 ‘경제를 통해 국민의 삶을 바꾸겠다’는 명확한 목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화법 또한 유사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특유의 기업가식 언어와 자신감 넘치는 단어 선택으로 대중과 소통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직설적인 언변과 SNS를 활용한 대중 직접 소통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이들의 언어는 직관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지지자들에게는 통쾌함을, 반대자들에게는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또 하나 주목할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전임 대통령들의 실패를 이유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의 이념 중심 정치와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지친 국민들에게 ‘일 잘하는 경제전문가’로서 어필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령이라는 시대착오적인 판단을 하는 바람에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전임자의 실정이 만든 반작용의 정치적 산물인 셈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그를 괴롭혔던 사법리스크와 전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조사,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의 극단적인 선택은 결국 퇴임 후 그를 감옥으로 보내는데 기여했다. 이재명 대통령 앞에 놓였던 수많은 재판들과 사법적 위기들은 취임과 함께 잠시 멈출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선거에서 그를 지지했던 지지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국민은 그가 5년 임기를 마친 뒤,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감옥에 가게 될지, 아니면 포용력을 바탕으로 실용주의에 기반한 성과 중심의 정치를 성공시켜 새로운 시대를 연 대통령으로 기록될지 지켜볼 것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이명박 평행이론 이재명 대통령 정치인 출신 경제정책 기조

2025-06-09

[열린광장] ‘물은 답을 알고 있다’

고대 철학자들은 말에 대해 깊은 통찰로 교훈을 남겼다. 소크라테스는 “말하기 전에, 그것이 진실인지, 친절한지,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라”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은 사람을 설득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는 무기다”라고 했다. 에픽테토스도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말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들은 말을 하기 전에 진실과 선의를 따져보아야 함을 강조했다.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상처나 혼란을 줄 수 있어 먼저 생각하고 말하라는 것이다. 말이 생각과 감정을 움직일 수 있기에 단순히 소통을 위한 도구를 넘어 사람을 설득하거나 상처를 주는 강력한 무기도 될 수 있다. 인격을 반영하고, 성격과 가치관 그리고 감정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다.     일본 작가이자 대체의학 연구가인 에모토 마사루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The Hidden Messages in Water)’는 자신의 저서에서 컵에 담긴 맑은 물에 아름다운 말과 부정적인 말을 했을 때, 물의 분자가 변화한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에모토는 맑은 물이 담긴 컵 앞에서 여러 가지로 대화한 후에 물을 얼려서 그 결정체를 현미경으로 찍어 8년간 연구한 결과를 사진과 함께 책으로 집필했다. 그는 물에 긍정적인 말을 하거나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면 물 분자가 아름다운 결정체를 형성하고, 반대로 부정적인 말이나 소리를 들려주면 일그러진 결정체를 형성한다고 사진으로 보여준다.   물이 인체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이기에 인간의 몸은 70%가 물이다. 인간이 형성되는 최초의 시기인 수정란 때는 물이 99%, 막 태어났을 때는 90%, 완전히 성장하면 70%, 죽을 때는 약 50%가 된다고 한다. 물은 다른 생물체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성분이다. 그런데 이런 물이 어떤 기나 혹은 파장을 받아서 좋은 결정체를 만들기도 하고, 일그러진 결정체를 만든다는 것이 에모토의 주장이다. 그는 물로 구성된 우리 몸이 좋은 말에 좋게 반응한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아름다운 결정체로 증명하고 있다. 결국, 나쁜 말을 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의 몸속에 있는 물이 나쁜 결정체를 이루어 몸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컵에 담긴 맑은 물에 ‘사랑한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 아름다운 결정체로 변한다는 것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물은 소리도 듣고, 사진도 인식한다고 한다. 베토벤의 ‘전원’을 들려주었을 때 한결같이 로맨틱한 결정체로 보여주고, 모차르트나 바흐의 음악을 들려줬을 때도 아름다운 결정체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는 일상에서 수많은 말을 주고받는다.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이 있다. 사실,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위로와 힘이 되고, 형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던진 부정적인 말이 오히려 마음을 닫게 할 때가 있다. 앞서 어느 정치인의 말처럼 말이다.   서로의 신뢰에서 오는 진심이 담긴 말은 변화와 감동을 가져다주는 긍정의 힘이 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에 천량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말 한마디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잘 선택된 말 한마디가 때로는 그 어떤 물질적 보상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따뜻하고 정이 담긴 긍정적인 말 한마디가 살맛이 나는 세상, 바른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각자의 속내를 컵에 담긴 맑은 물 앞에서 드러내면 과연 어떤 결정체로 변할까.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고 하는데. 박철웅 / 일사회 회장열린광장 감정 상태 통찰로 교훈 고대 철학자들

2025-06-05

[열린광장] 미사리 카페촌, 부활의 노래

2000년대를 전후해 고국을 방문하는 미주 동포들이 자주 찾았던 추억의 명소가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미사리 라이브 카페촌이다.     서울에서 한강변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올림픽대로가 끝나고 하남시 방면으로 접어들면 강변의 금빛 모래, 은빛 모래가 아름답다 하여 ‘미사리’로 이름 붙여진 강변 마을이다. 이곳에 88올림픽을 앞두고 미사리 조정 경기장이 세워지고 한강변에 야영하기 좋은 캠핑장이 생기면서 일약 유명해졌다.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해진 추억의 장소가 되었지만, 전성기 시절 매일 밤 도로가 꽉 막힐 정도로 인파들이 몰려들었고 카페들은 불야성을 이루며 라이브를 들었던 7080 문화특구였다.   그 당시 미주 공연에 초청할 가수 섭외를 위해 서울 방문이 잦았던 나는 기획사 사무실이 아닌 미사리 카페에서 출연하는 가수들을 만나곤 하였는데 실력파 뮤지션들의 언플러그드 무대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어서 만족스러웠다. 또한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LA 지인들과의 시간도 또 다른 기쁨이었다.   그때 인연을 맺고 LA에서 공연을 가졌던 가수들은 이태원, 하남석, 장계현, 이동원, 이광조, 유익종, 이주호, 강인원, 박강성, 최성수, 변진섭, 임지훈, 채은옥, 김세화 등이였다. 특히 유익종은 그 당시 미사리에서 최고의 가수로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또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쳤던 박강성은 이곳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면서 ‘미사리 스타’에서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는 1990년대 중반, 전원 카페 형태의 ‘전인권클럽’과 ‘록시’로 시작됐다. 이후 전성기인 2000년대 초중반에는 70~80개가 넘는 카페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업소 간에 스타 가수 유치를 위한 경쟁도 치열해졌다. 30일 출연료가 수천만 원에서 1억 원에 달하는 업소도 생겼고 피크 타임 때는 커피값이 3만~4만원까지 치솟았다.   천정부지로 높아진 출연료는 결국 미사리의 문제점으로 현실화됐고 가격에 부담을 느낀 고객들은 하나 둘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업소 간의 과대경쟁은 쇠퇴의 원인이 되어 중년들의 추억의 장소로 빛나던 미사리의 영광은 아쉽게도 15년을 지키지 못하였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미사리가 최근 새로운 변신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하남시 문화재단은 미사리 카페촌 부활을 위해 7080을 대표하는 포크 가수들과 대담회를 여는 등 여러 가지 방안들을 논의했다고 한다. 포크 가수들의 꿈인 통기타 전용 공연장 건립 이야기도 나왔다고 하는데 반가운 일이다.   모두가 떠난 미사리 강변에서 ‘DOME 676’, ‘윤시내의 열애’, ‘카페 쉘부르’는 아직도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과연, 미사리는 화려했던 과거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중년들의 청춘과 낭만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이광진 / 문화기획사 에이콤 대표열린광장 미사리 카페촌 미사리 카페 미사리 라이브 미사리 스타

2025-05-27

[열린광장] 저축의 역설

경제학에서 저축은 ‘미래소비’로 정의된다. 현재의 소비를 줄여 미래의 소비 여력을 확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소비와 미래소비는 서로 보완적인 개념이며, 소득은 이 둘의 합으로 구성된다. 예컨대 월소득이 100인 사람이 80을 소비하고 20을 저축한다면, 그의 현재소비는 80, 미래소비는 20이 되고, 저축률은 20%가 된다.   2025년 1분기 기준, 미국의 평균 가계 저축률은 약 4.6%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다시 말해 100을 벌면 95.4를 소비하고, 4.6만 저축한다는 뜻이다. 최근 경기 침체와 부동산 시장 위축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축 여력이 부족한 가계는 소비를 줄이게 된다. 그러나 소비가 줄어들면 기업의 매출이 감소하고, 생산도 위축되며, 결국 경기 하강이라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저축과 절약은 바람직한 경제 습관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환경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재 2만 달러인 자동차를 구매하지 않고 5년 후를 기약하며 저축한다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해당 차량의 가격은 4만 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 이 경우, 5년 후의 2만 달러는 물가 상승률을 이기지 못하고 구매력을 절반으로 하락시킨다. 은행 이자가 일부 손실을 보전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인 저축 수단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초과하는 수익을 얻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반면, 지금 2만 달러로 자동차를 구매한 사람은 상황이 다르다. 중고차 가격 역시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아 상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5년 뒤 해당 차량을 다시 2만 달러에 팔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기대가 확산하면, 사람들은 저축보다 소비를 선택하게 된다. 결국 물가 상승과 저축은 상반된 경향을 가지게 된다.   물가 상승이 없는 상황에서도 저축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개인이 소비를 줄이면, 기업의 판매량은 감소하고, 생산은 축소되며, 고용도 줄어든다. 실직은 소득 감소로 이어지고, 다시 소비를 위축시켜 경기침체를 가속화한다. 이처럼 개인에게 미덕인 절약이 전체 경제에는 해악이 되는 경우를 ‘절약의 역설(paradox of thrift)’이라 부른다.   ‘착한 선택’이 항상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저축은 개인 재정에 있어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것이 항상 경제 전체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처럼 경제 구조와 시장 환경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는, 전통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상황에 맞는 경제 감각이다. 미국처럼 현재소비 성향이 강한 나라는 절약의 역설로 인한 소비 위축에 대한 걱정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반대로 저축이 부족해 경기 침체 시 회복력과 대응력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다.   경기는 언제나 호황일 수 없으며, 결국 중요한 것은 불황을 견딜 수 있는 체력이다. 경제적 체력은 단순한 저축뿐 아니라, 혁신, 자기계발, 생산성 향상 같은 능동적 전략에서 나온다. 특히 최근 미국의 관세 정책 변화로 촉발된 글로벌 공급망의 불안정성과 지정학적 리스크는 세계 경제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으며,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더욱 민첩하고 체계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저축 역설 저축 수단 가운데 저축 현재소비 성향

2025-05-26

[열린광장] 새 대통령의 품격

지금 한국은 전임 대통령 탄핵 후 또 한 번의 조기 선거를 앞두고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지만 그 꽃이 아름답게 피기 위해선 건강한 토양, 곧 성숙한 정치 문화와 책임 있는 시민 의식이 필수다.   한국 정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극단적인 진영 대결이다. 선거철만 되면 정책보다 정파적 충성심이 주요 쟁점이 되고 여야는 마치 전쟁하듯 싸운다. 정작 민생 문제나 국가 비전은 뒤로 밀린다. 이러한 구도가 반복되면서 유권자들은 피로감을 느끼고, 정치 혐오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투표율이 낮아지고 이는 곧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들 수 있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 쟁취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상대를 깎아내리는 네거티브가 아니라 탄핵 이후의 경제 회복, 인구 절벽과 지방 소멸, 기후 위기 대응과 같은 장기적 과제에 대한 청사진이다. 차기 대통령 후보들은 ‘누가 더 인기있는가’가 아닌 ‘누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   정치는 사람을 통해 구현된다. 따라서 후보자의 인격과 윤리성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후보자를 둘러싼 도덕적 논란은 단순한 흠결을 넘어서 그가 최고 권력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대한민국의 품격은 대통령에게서 시작된다. 대통령은 단순히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국가의 품격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가족과 관련된 윤리, 도덕 논란은 단지 후보 한 사람의 이미지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를 사생활로 치부하며 책임을 외면하는 태도는 공적 책임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대선을 앞둔 지금, 유권자들은 단순히 진영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인물의 윤리성과 정치 세력의 책임감,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는 도덕성과 공정성을 매우 중시하며 권력자에게는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을 요구한다.     거대 양당 모두 당내 검증 시스템 부재와 리더십 부족에 대해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지금 정치적 이념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인 ‘이 사람이 과연 대통령으로서 품격과 자질을 갖췄는가’를 던지고 있다.   바라건대 국가의 지도자는 국민에게 희망과 기회를 줄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점에서 후보자는 국가 부흥을 이끌 준비가 되어 있는지 되묻게 한다. 또 가장 중요한  대북 문제에 대한 후보자의 일관성 있는 발언도 요구된다.     한 후보는 과거 북한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을 보이다가 정권 교체 국면에서는 강경한 메시지로 입장을 선회했다. 국민은 외교와 안보에 있어 신중하고 일관된 리더를 원한다. 모름지기 경제는 국가의 성장을, 안보는 국가의 존폐를 뜻한다.   정치의 품격은 높은 도덕성과 정치적 책임감을 요구받는 게 당연하다. ‘누구를 심판할 것인가’ 못지않게 중요한 질문은 ‘누구에게 미래를 맡길 수 있는가’이다.     정치는 비전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유권자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이번 대선은 단지 한 명의 대통령을 뽑는 절차가 아니라 한국 정치의 방향을 결정짓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유권자와 정치권 모두가 성숙한 책임감을 발휘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열린광장 대통령 품격 대통령 탄핵 차기 대통령 한국 정치

2025-05-21

[열린광장] 내 영혼 어디에

작년 이맘때 문인 3개 단체가 관광 버스를 대절해 단합대회 겸 야유회를 갖고자 ‘카추마 레이크’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여류 소설가 K 작가를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 이름 석 자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첫 인상은 조용하고 차분하다고 느껴졌다. 우수에 젖은 듯한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녀에게서 친필 서명이 적힌 작품 ‘내 영혼 어디에’를 선물로 받았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미국 교포인 미모의 의대생 강엔젤라와 20년 연상인 한국 인기 영화 배우 김청하가 전무후무한 뜨거운 사랑에 빠졌으나 엔젤라가 의문의 교통 사고로 사망하여 그 영혼이 우주 공간을 돌아다니다가, 암으로 10년을 고생하다 죽은 70대 여인 유여사와 동반자가 되어 하늘 아래 지상을 내려다보며 나누는 대화체 형식의 중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은 후부터 나는 밤잠을 설치고 있다. 오늘도 새벽 1시쯤에 깨어난 이후로 갖은 상념에 잠겨 밤을 꼬박 새웠다. 내가 살아온 70평생을 뒤돌아보며 지은 죄가 어떤 것이었는지 성찰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내가 원치 않는 임신을 중절시키는데 공범이 된 것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죄를 여섯 번이나 더 범하였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인간이 죽어서 육체가 땅에 묻히면 흙 속으로 사라지고, 불에 타면 한 줌의 재로 변해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어디론가 사라진다. 육체는 이미 사라졌지만 영혼은 그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작가의 말 중에서)     영국의 작가 존 번연이 쓴 ‘천로 역정’은 기독교 우화 소설로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익히는 책이라고 하는데 죽은 영혼이 우주 공간을 여행하는 것이 비슷하나 천로 역정은 내가 무지해서인지 이해하기가 역부족이었고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내 영혼 어디에’는 미사여구 없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써 내려간 작품이었기에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었다. 우리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영혼이 100% 존재한다고 확신하며 살아온 이유는 밤에 자다가 가끔 꿈을 꾸게 되기 때문이다.     꿈이란 넋이 돌아다니며 겪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육체는 그대로 누워 있으나 그 혼은 돌아다니며 망자를 만나기도 하고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일들을 꿈속에서는 이루기도 하는 등 온갖 일을 경험한다. 꿈을 꾸며 살기에 영혼은 존재한다고 여기고 살아오지만, 천국과 지옥설에는 반신 반의하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영혼처럼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느냐? 확증은 없으나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있다’ 라고 심증을 굳혔다. 영혼은 영원불멸하여 이 우주 어디엔가를 떠돌아다닌다는데, 내가 지은 죗값을 어떻게 치러야 할지 고민하느라 잠 못 이루고 있다.     내 여생을 자신보다 처지가 불우하고 가난하며 약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며 살아간다면 그 지은 죄를 대신 할 수 있을까. 이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께 용서받는 길이란 그것 뿐일 것이라고 가슴 속에 새겨둔다. 사후 세계에서 내 영혼을 벌하실 신 앞에 서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이진용 / 수필가열린광장 영혼 영혼 어디 여류 소설가 우주 공간

2025-05-20

[열린광장] 중상모략과 보이지 않는 손

심리전 원리에 따르면, 모략(謀略)이란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주체에게 불리하도록 조작된 정보로 누명을 씌워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상대방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단결력을 파괴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되고 조작되는 정치적 기술이자 심리적 전술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모략은 이처럼 비열한 공격 수단으로 활용된다.   최근 불거진 한 정치인의 ‘모략’ 의혹은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논란을 던졌다. 유력 정치인의 부인이 ‘점쟁이를 찾아다닌다’는 날조된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그 중심에 박지원 의원이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스스로 ‘정치 9단’이라 칭하며 김대중 정부에서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국회의원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가 이러한 종류의 공격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씁쓸함을 안긴다.   화려한 고위직을 두루 거치며 국가의 중요한 결정 과정에 참여했던 인사가, 나라의 장래를 논하고 인재를 보호하기보다 이러한 정치적 공세에 나섰다는 점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정치적 모략의 위험성과 그 파장이 얼마나 큰지는 역사가 생생히 증언한다. 지금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죄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던 엄혹한 시절의 일화는 여전히 정치의 윤리를 곱씹게 한다.   당시 국방부 대변인으로 근무했던 필자는 이 비극적인 상황을 막기 위해 세 가지 방안을 구상하고 관계 당국에 보고한 바 있다.   첫째,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사형을 집행하는 방안, 둘째,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유배처럼 세인트 헬레나 섬에 가두는 방안, 셋째,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시절처럼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방안이었다. 각 방안의 장단점을 상세히 기술했다.   특히 호남 지역 인사들의 정치적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임을 강조했다. 결국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 뉴욕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당시 망명 중이던 박지원 씨를 만나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경제 원리와는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당시 필자의 이러한 건의와 결정 과정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망명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박지원 의원이 훗날 김 전 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을 더욱 깊게 맺고 성장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음을 박 의원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의 정치적 여정 이면에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존재했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필자의 저서 발간 과정에서 뒤늦게 일부 알려지기도 했으며, 호남 지역 인사들과 손주환 의원 등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을 여러 차례 제안받았으나 사양했다. 박지원 의원의 오늘이 있기까지 이러한 알게 모를 역사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기억하고, 근거 없는 중상모략은 스스로 자제하기를 촉구한다.   동양의 지혜가 담긴 팔만대장경에는 정치인이라면 새겨들어야 할 경구가 실려 있다. 경, 율, 논 삼장 중 한 구절은 이렇게 가르친다. “이기심을 채우고자 정의를 등지지 말고, 원망을 원망으로 갚지 말라, 이익을 위해 남을 모략하지 말라”고 말이다.   이 경구처럼, 정치라는 어려운 사회생활 속에서 때로는 예상치 못한 ‘보이지 않는 손’이나 역사적 인연에 의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기본적인 윤리와 상대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 9단’이 갖춰야 할 덕목일 것이다.   박종식 / 예비역 육군 소장열린광장 중상모략과 정치적 모략 유력 정치인 정치적 인연

2025-05-19

[열린광장] 세 개의 주머니

살아가면서 꼭 챙겨야 하는 주머니가 있다. 무조건 돈을 열심히 많이만 벌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어디에 담고 어떻게 나눠둘 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나는 이걸 ‘세 개의 주머니’라고 부른다. 생활비 주머니, 은퇴 주머니, 그리고 꿈의 주머니다.   가장 기본이자 생존의 근간이 되는 것은 첫 번째 주머니, ‘생활비 주머니’다. 이는 매달 벌어들이는 소득이 들어오고, 동시에 월세, 공과금, 식비, 교통비 등 생존에 필수적인 지출이 쉼 없이 빠져나가는 영역이다. 사업가의 매출이든 직장인의 급여든, 이 주머니는 은퇴할 때까지 평생 채우고 비워야 할 삶의 흐름 그 자체다. 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들어오는 돈보다 많아지는 순간, 재정적 불안정은 시작되고 타인의 도움이나 빚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이 주머니는 엄격하고 일관된 관리, 그리고 무엇보다 소비에 대한 냉철한 자제력이 요구되는 재정 관리의 기초 체력과 같다.   생활비 주머니에 숨통이 트이거나, 설령 당장의 여유가 부족하더라도 반드시 일정 부분을 떼어내 채워야 할 두 번째 주머니는 ‘은퇴 주머니’다. 젊은 시절에는 멀게만 느껴질지라도, 노동 소득이 중단되는 미래 어느 시점에 우리의 삶을 든든히 지탱해 줄 최후의 보루가 바로 이 은퇴 자금이다. 준비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시간이라는 강력한 동맹군이 복리의 마법을 부려 작은 씨앗을 거목으로 키워주기 때문이다. 은퇴 주머니를 채우는 행위는 단순한 저축을 넘어, 미래의 나에게 선사하는 자유와 독립을 위한 가장 지혜로운 투자다.   앞선 두 주머니가 현재와 안정적인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세 번째 ‘꿈의 주머니’는 삶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열정을 현실로 만드는 동력원이다. 이 주머니에는 사업 투자금, 창업 시드 자금, 혹은 자녀 교육이나 평생 숙원 사업 등 인생의 다음 단계를 위한 재원이 담긴다. 이 자금의 일부는 상대적으로 높은 위험을 수반하는 투자에도 과감히 활용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지만, 성공한다면 그만큼 인생의 지평을 넓혀주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꿈의 주머니는 단순히 돈을 불리는 것을 넘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희망의 기금이다. 로또 한 장으로 한 주를 행복하게 꿈꾸듯, 이 주머니를 채우는 과정 자체가 즐거운 상상력을 자극한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유산이나 예상치 못한 행운처럼 찾아온 목돈을 이곳에 넣어두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세 개의 주머니를 구분하기는커녕, 하나의 주머니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도 많다. 하루 벌어 하루 쓰는 구조 속에서 미래를 위해 따로 떼어둘 여유를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더라도, 그리고 바로 그럴수록 마음속에서만큼은 이 세 개의 주머니를 명확히 나눠둘 필요가 있다. 당장 실천하기 어렵더라도, 내가 벌어들인 돈의 쓰임새를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하고 각 영역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재정 관리의 방향성은 확립되기 때문이다. 방향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지금 당신은 어떤 주머니를 얼마나 채우고 있는가? 당신은 삶의 재정이라는 설계도를 그리기 위해 세 개의 주머니를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최소한 마음속으로라도 그 주머니들을 그려보고 있는가?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잡한 재정이라는 삶의 설계도를 한 걸음씩 완성해 나가는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작이 될 것이다. 돈은 목적이 아닌 도구이며, 그 도구를 어떻게 나누어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주머니 은퇴 주머니 생활비 주머니 주머니로 하루하루

2025-05-13

[열린광장] 오월이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

“파-란 하늘 아래 언덕에서 우리들이 즐겁게 노래부르면 하늘을 포르르 날아가는 종달새들도 좋아라 노래부른다.”   어린 시절 입가에 맴돌던 이 동요 가락이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문득 귓가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5월의 푸른 하늘 아래, 언덕 위에서 뛰놀던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이 맑은 노랫소리는 울긋불긋 만개한 온갖 꽃들과 힘차게 비상하는 바다새들처럼 아름답고 활기찬 삶에 대한 갈망을 일깨운다. 비록 작금의 국정 혼란으로 마음 한편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찬란하게 도래한 이 아름다운 5월을 외면하고 침묵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이 계절의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복잡한 현실을 잠시 잊고 희망을 노래할 힘을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하얀 은방울꽃이 소담스럽게 피어나는 5월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한 해의 다섯 번째 달인 5월(May)의 어원은 ‘인생의 봄’ 또는 ‘봄꽃을 따다’라는 뜻을 지녔다. 그 이름이 말해주듯, 5월은 그 자체로 봄날의 절정이며 아름다움의 상징이니, 어찌 이를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5월은 푸름의 계절이다. 눈 시리도록 맑은 하늘도, 생명력 가득한 땅도, 넘실거리는 바다도 온통 푸른빛이다. 이 생동하는 푸른 5월은 새싹처럼 피어나는 어린이들의 세상인 동시에, 넉넉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는 달이다.   5월의 아름다움은 시각뿐 아니라 청각으로도 다가온다. 청아하게 지저귀는 새소리, 만개한 꽃들의 향연, 그리고 화사하게 단장한 이들의 모습까지. 이 아름다운 계절에 문득 잊히지 않는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메이플라워(Mayflower)’이다. 5월에 피는 꽃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향했던 이들의 배 이름으로 더욱 친숙하다. 이 배에 올랐던 신앙 선조들이 먼 훗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메이플라워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아름답고 의미 깊은 5월에는 역사 속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나고, 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에서 5월은 어떤 발자취를 새겼을까. 한국 최초의 아동문학가이자 ‘어린이‘라는 존칭을 처음 사용한 방정환 선생은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며 이 땅의 아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선물했다. 그의 뜻을 기리며 이때부터 매년 5월 5일은 온 국민이 어린이를 기념하는 날이 됐다. 또한 한국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평가받는 ‘봉숭아’를 작곡한 홍난파 선생은 이 곡을 발표한 지 4년 뒤인 1924년 5월, 중앙기독교회관에서 직접 바이올린 연주로 대중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선보였다.   5월의 정취는 예술을 통해서도 깊어진다. 문득 요하네스 브람스의 자장가 선율이 귓가에 맴돌았다.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아름다운 장미꽃 너를 둘러 피었네. 잘 자라 내 아기 밤새 편히 쉬고, 아침에 창 앞에 찾아올 때까지.”   5월에 태어난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떠올려본다. 서양 음악사의 거장으로 꼽히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의 이름은 물론, 그들보다 후대에 활동한 독일의 요하네스 브람스가 1833년 5월 7일에 태어났고, 놀랍게도 러시아 음악의 위대한 별 피터 차이콥스키 역시 1840년 같은 날에 세상의 빛을 봤다. 이 외에도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만든 어빙 벌린(1888년 5월 11일, 미국) 등 5월은 음악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이름들을 많이 품고 있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이야기 요하네스 브람스 서양 음악사 이름 하나

2025-05-12

[열린광장] "너 늙어봤냐"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내가 요즘 즐겨 듣는 서유석의 노래 제목이다. 겪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다. 젊은 사람들 눈에는 나이 든 사람에게는 새로운 것이 없을 듯싶겠지만, 살아보면 이 나이에도 새로 경험하고 깨닫는 것들이 있다.   난 어려서부터 냉수만 마셨다. 할머니가 누룽지를 끓여 구수하게 만든 숭늉을 드시며 “시원하다”하는 것이 도무지 생소하고 낯설었다. 받아 놓은 물은 차갑지가 않아, 추운 겨울에도 마당의 수도에서 갓 받는 얼음 같은 냉수만 마셨다.     우리 집 정수기에서는 온수, 냉수, 상온, 이렇게 세 가지 온도의 물이 나온다. 어느 날부터 냉수 대신 상온의 물을 마시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게다가 누룽지를 끓인 물이 구수하니 맛있어졌다. 점심을 잘 먹은 날은 끓인 누룽지를 저녁으로 먹는다. 전기밥솥에서는 누룽지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아내가 집에서 누룽지를 만든다.     언제부턴가 조금 힘을 쓰는 일을 할 때면 “끙끙”소리가 절로 나온다.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나도 모르게 “끄응.” 옆에 있던 여학생이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본다.   나이가 드니 큰소리가 싫다. 남이 내는 큰소리는 물론 내가 내는 큰소리도 싫다. 세상사 좋은 게 좋은 거다. 지내고 보면 다 별것 아니다. 가끔은 아내가 할 말은 하고, 따질 건 따져야 한다며 답답해 한다. 사람이 변했다고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심하게 따질 수 있겠나.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일이 주는 스트레스가 싫어 일을 그만두었다. 매출과 수익이 주는 스트레스가 힘들었다. 막상 일을 그만두고 보니, 스트레스가 없는 삶은 없다. 일을 그만두면 스트레스 없는 날들이 계속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지내보니 전에는 별것 아니었던 일들이 스트레스가 된다.     성인병의 원인이라는 콜레스테롤과 당도 적당량이 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스트레스가 주는 긴장감이 있어야 동기부여가 된다. 그래서 몸이 알아서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는 모양이다.   같은 맥락으로 사람들은 누구나 걱정을 하고 산다. 남들이 보기에는 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걱정은 있다. 그런데 그 걱정이 실은 삶의 의미인 것이다. 죽어보지 않아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죽은 사람이나 걱정이 없으려나.   나이가 들면 죽음이 다가오는데, 도리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차츰 사라진다. 이것도 자연이 마련해 주는 배려가 아닌가 싶다. 차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어 결국 담담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게 되는 모양이다.   70~80대의 인생 선배들은 “너 70 넘어 봤냐, 난 60대를 지나 봤단다”라고 말할 것이다. 과연 70줄에 들어서면 또 어떤 것을 느끼고 경험하게 될지 자못 기대하고 있다.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열린광장 온수 냉수 냉수 대신 가지 온도

2025-05-11

[열린광장]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이 멀다

또 일을 저질렀다. 가든그로브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일어났다. 아내가 화장실에 간다고 한다. 다시 앉아서 기다렸다. 한참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여자 화장실 앞에는 항상 여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남자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다 싶다.     아내가 나오지 않았다. 여자 종업원에게 말했다. 아내가 화장실에 가서 나오지 않으니,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텔레비전을 보다가 더 기다릴 수 없어 일어나서 주차장으로 나가려는데, 아내가 밖에서 식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아내는 화장실에서 나와 곧바로 주차장으로 갔다고 했다.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아내가 나가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아내를 떼어놓고 혼자 다니는 ‘전과’가 있다. 오래전 일이다. 그랜드캐년에 갔었다. 그곳은 몇 번 갔어도 항상 그 웅대함에 압도당하고 감탄사가 나온다. 골짜기 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흙탕물이다. 누군가가 “음료수로 마시기는 너무 걸쭉하고 농사짓기는 너무 묽다”라고 했다. 나는 군중과 같이 움직였지만, 아내는 풀 한 포기, 돌 하나를 세심히 관찰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아내를 놓쳤다. 한 참 돌아다니다가 쉼터서 만났다. 아내는 뿔이 났다. 혼자 다니다가 어떤 할머니를 만났는데, 어찌 혼자 구경 왔느냐 묻더란다. 아내는 “당신은 날 생과부로 만들었어”라고 툴툴거렸다.   단체 여행을 가도 아내를 깜빡 잊어버리고 혼자 다닌다. 몇 년 전 동유럽에 갔었다. 안내자는 나와 아내가 따로 다니는 것을 보다 못해, 아내의 손을 끌어다 나의 손을 잡아주면서 “이렇게 같이 다녀요”라고 주의를 줘 모두 웃었던 일도 있다.   성경에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하고 배려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너무 고생시켰다. 결혼하자마자 아내는 인천에서 경기도 향남의 시골 초등학교로 전근 발령이 났다. 미군 부대 박봉으로 시동생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남편을 보다 못해 교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임신한 몸으로 매주 토요일이면 한 시간씩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수원으로,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인천에 왔다. 그리고는 하룻밤 자고 다시 향남의 학교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냉면도 제대로 사주지 못했다.   아들이 8개월 조산아로 태어나서 2파운드가 되지 않았다. 아기의 포동포동한 모습은 없고 작고 약하기만 했다. 마침, 인천 기독 병원에서 인큐베이터를 최초로 도입한 혜택으로 아들을 살렸다. 아내는 교사를 포기하고 아기를 키우는 데 전념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지금 청년 장로 그리고 심장전문의로, 매년 필리핀으로 단기 의료선교를 다녀온다. 모두 천우신조(天佑神助)다.   아내가 3년 전 뇌졸중을 일으켜 심신이 쇠약해졌다. 나도 구순을 넘겨 걸음걸이가 시원하지 않은 몸으로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다. 아내에게 빨리 보상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가도 아내 사이 아내 여자 화장실

2025-05-05

[열린광장] 잊히지 않는 LA 폭동

4월이 저물었다. 엘리엇의 시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4월은 나에게도 잔인한 달이다. 폭동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어느새 33년 전의 일이 됐다. 잊힐만한 세월인데 잊히지 않는다. 1992년 4월29일, 폭동은 흑인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찰들을 석방한 것에 대한 항의로 시작됐다. 그 무렵 두순자 사건의 판결을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하며 LA 코리아타운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4.29는 우리 식구가 LA에 정착한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 일어났다. 남편은 은행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은행 면접을 마친 상태였다. 출근을 앞두고 일어난 폭동으로 나는 예정보다 일주일 늦게 일터로 나갔다. 그 사이 주방위군이 출동했고 5월4일이 되어서야 폭동은 끝났다.     폭동이 진압되고 나서 은행에 출근했다. 폭동으로 피해 입은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만났다. 피해자들의 실상은 다양했다. 화마로 전소된 가게를 보며 실의에 빠진 분들이 많았다. 물건은 약탈당했어도 가게는 그대로 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더니 그런 것만도 아니란다.     장사가 안 되던 차에 가게가 전소돼 보상금을 받게 돼 오히려 잘됐다는 분도 있었다. 세금을 잘 낸 분은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보조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어 또 다른 희망을 내보이기도 했다.   폭동이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돈벌이만 열중하던 한인들은 정치력이 약함을 깨닫고 한인 정치인을 세우기에 한마음이 됐다. 가난한 흑인과 히스패닉 지역에서 장사하던 한인들이 그들과 친구로 지내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그들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현지 타인종과 교류를 활발히 해가며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은행을 퇴직하고 지금은 리커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25년이 훌쩍 넘었다. 베트남 사람과 히스패닉이 대다수인 지역이다. 그동안 험한 일을 셀 수 없이 겪었다. 도둑이 가게에 들어와 물질적 손실을 낼 때마다 4,29를 생각하곤 했다. 개인적인 4.29를 수없이 겪었다. 눈앞에서 물건 들고 뛰는 도둑을 여러 번 마주했다. 나도 어느 순간 두순자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손님과 도둑을 구별할 수 없으니 경계를 늦추지 못한다. 말은 예의 갖춰 하나, 가슴 한구석 의구심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게 먹고 사느라 바쁜 이민자일 터. 타인종 손님을 편하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주위에서 흔히 만나는 히스패닉은 우리 자녀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됐다. 그들과 결혼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타인종 이민자들은 우리 아이들의 급우며 직장 동료며, 우리 며느리, 사위가 됐다.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 해당하겠지만 양심이 살아났으면 좋겠다. 남의 것을 훔쳐 살아가는, 옳고 그름도 모르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들. 그들의 가슴이 말랑말랑 해지길 바란다.      4월이 지나갔다. 오늘도 손님을 미소로 맞는다. 잊히지 않는 그날을 생각하면서.       김현실 / 수필가열린광장 폭동 la 폭동 타인종 이민자들 히스패닉 지역

2025-05-04

[열린광장] 오늘, 나는 그 길을 걸었다

소포가 왔다. 웬만한 용무는 이메일로 주고받는 세상에, 보내는 이와 받는 이의 이름을 또렷한 손 글씨로 적은 소포였기에 더 반가웠다.     그 안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뉴욕에서 사역하는 선배 목사가 보낸 책이었다. 40년 넘게 목회하면서 매주 정성껏 빚어낸 설교문을 하루 한 편씩 묵상할 수 있도록 정리한 책이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30분 설교문을 300자로 요약했다며, 서두르지 말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읽어달라고 당부했다. 저자의 친절한 조언도 잠시, 책을 받자마자 단숨에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책 속에 녹아있는 이민 목회 현장의 생생한 소리, 신앙인의 깊은 고뇌가 책을 덮지 못하게 했다.   책 속에서 잊고 있었던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랠프 애버내시(Ralph Abernathy)였다.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와 함께 흑인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인물이다. 킹 목사와 함께 17번이나 감옥에 투옥되었고, 셀마 행진에도 동행했던 그였다. 킹 목사가 암살당하기 전날 밤에는 멤피스의 한 모텔에서 바로 옆방에 머물렀으며, 총에 맞아 쓰러진 킹 목사를 부둥켜안고 병원까지 갔던 이도 애버내시였다.   한때 그는 흑인 인권 운동의 대부로 불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이름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함께 싸웠던 동지들 중에는 UN 대사나 애틀란타 시장이 된 이도 있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명예나 박수갈채가 아닌, 오직 소명에 충실한 길을 걸었다. 그 삶의 진가는 조용히 흘러가는 일상에서 드러날 뿐이었다.   얼마 전 애틀랜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킹 목사 박물관을 찾아 애버내시의 흔적을 살펴보려 했지만, 박물관은 리모델링을 한다며 문이 닫혀 있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하니, 애틀랜타 다운타운을 지나는 프리웨이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고, 또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지역에도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교통편도 마땅치 않았고, 그의 이름이 붙은 길을 지나간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냥 한번 가볼 걸’하는 아쉬움이 맴돌던 어느 날, 그의 이름을 다시 검색해 보았다. 그 순간, 믿기 힘든 사실과 마주했다. 그의 이름이 붙은 길이 바로 교회 옆에 있었다.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닿는 거리.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그토록 멀리서 찾던 길이 사실은 바로 곁에 있었던 것이다.     오늘, 나는 그 길을 걸었다. 애버내시의 이름이 새겨진 도로를, 햇살이 드리우고, 들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인도를 천천히 걸으며 문득 깨달았다. 행복과 진리, 사랑과 은혜는 늘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다만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길은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필요한 건 주위를 먼저 살피는 것이었다는 것을.   애버내시의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I Tried(나는 한번 해 봤다)’.   비록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무대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한번 해 봤다는 그의 진솔한 고백과 겸손한 헌신이 깃든 발자취가 그의 이름이 새겨진 길 위에서 조용하지만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열린광장 목사 박물관 이의 이름 이름 하나

2025-04-29

[열린광장] 지구가 좋아하는 사람

“엄마는 지구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나의 딸이 가끔 하는 말이다. 내가 하는 일이 못마땅해서 에둘러 하는 놀림이라고 여겼다. 남들이 기피하는 쓰레기 수거 같은 지저분한 일을 열성으로 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없다.   하느님은 피조물 중에서도 으뜸인 지구를 장장 6일 동안 정성을 다해 지으셨고 인간을 흙으로 빚으신 후 당신의 거룩한 숨을 불어 넣으시어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시간상으로 인간은 하룻밤의 꿈처럼 태어나서 하느님 최고의 창작품인 우주 만물을 관리하도록 청지기 직분을 받게 되었다.     인간들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고귀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고귀한 직분을 망각하고 인간들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너도 함께 바닷가에 나가서 쓰레기를 주우면 좋겠다” 하니 “지금은 아니야 엄마, 병원 일이 너무 바빠요. 언젠가는 꼭 할거야”라고 답한다.   대부분의 사람도 그렇게 말한다.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는 건 알겠지만 왜 못한다는 건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일회용 컵 대신 물통과 텀불러를 들고 다니는 것이 바쁜 것과 상관이 있을까.   플라스틱 쓰레기가 마지막 당도하는 곳이 바다이다. 바다는 마치 구역질을 하듯 몸살을 앓고 있다. 파도는 끌고 온 쓰레기를 토해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은 다시 끌어안고 만다. 인간들이 썩지 않는 플라스틱을 남용하는 한 바다의 숨막힐듯한 고통은 끝없이 지속된다.   나는 20여 년간 허리 통증을 앓았다. 만성 기관지염에 결핵성 늑막염과 2번의 폐렴을 앓았다. 매년 겨울이 되면 환자처럼 살아가는 날이 길었다. 하지만 몸을 추스린 후 23년간 바다와 공원 동네 길 학교 앞 발길 닿는 곳의 쓰레기를 주웠다.   몸이 아파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짧은 인생, 살면서 더럽혔던 곳이나 치우다 가야겠다는 일념에서다. 선한 것을 희망했고 지구에 도움될 일을 나의 일처럼 실천하면 지구도 인간의 뜻을 감지한다. 인간이 자연을 감지하듯이 말이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 치유의 힘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상호작용의 관계가 있다. 흙은 인간의 본향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자연을 착취하려고만 하는 탐욕은 의로움을 잃게 된다. 사람이 먼저 알아차려 자연에 손을 내밀어 화해를 도모하면 늦지않는 기적을 만나게 된다.     점진적으로 좋아져 가는 건강, 활기찬 열정, 질서 잡힌 생활 방식으로의 전환이라는 치유다.   그러나 내가 체험한 모든 변화가 모두에게 공감을 얻었던 건 아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유난히 고통을 느낄 때가 있다. 행사 때면 빠질 수 없는 쓰레기 때문이다. 먹고 버리는 일회용 용기는 어떻게 폐기할 것인지 단 한 번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다. 당연한 듯 버리는 권리를 행사할 뿐이다. 그럴 때 나의 양심은 마치 상처받은 것처럼 아프다.   지구와 자연 생태계가 앓고 있듯이,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딸은 초과근무는 예사고 병실마다 환자가 포화상태라고 한다. 자연과 함께 살지 못한 부작용들은 여러 질병으로 인간에게 돌아온다.   내가 기침으로 잠 못 이루던 그때의 시간을 다른 누군가가 겪게 될 고통의 시작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구는 모든 피조물의 공동의 집이고, 지속 가능한 미래의 희망이다. 지구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해주는 것은 최고의 찬사가 아닐지. 나의 묘지 석판에 새겨 주기를, 그날 지구가 좋아하는 별이 되어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최경애 /수필가열린광장 지구 지구도 인간 그날 지구 플라스틱 쓰레기

2025-04-27

[열린광장] 닻내림 효과

불안하거나 확신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결정하고 선택할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정보에라도 의지하려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을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부른다. 신앙에 의지하고 점을 보는 것도 이런 현상과 관계가 있다.   이런 효과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카네만이라는 학자와 트버스키라고 하는 학자가 실험으로 확인을 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심리학과 교수이자 인지심리학자인 카네만 교수는 이런 실험을 바탕으로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심리학자가 경제학분야에서 노벨상을 받게 되었으니 경제학자들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하지만 최근 심리학은 기존 경제학의 중요한 가정들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다. 카네만과 트버스키가 닻내림 효과와 관련되어 증명한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 중에 유엔에 가입되어 있는 나라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카네만과 트버스키는 이 질문을 무작위로 뽑은 많은 피실험자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 질문을 하기 전에 엉뚱한 실험을 먼저 진행한다. 실험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1부터 100까지 숫자가 쓰여 있는 100장의 카드 중에서 아무 카드나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낮은 숫자를 뽑고 어떤 사람은 높은 숫자를 뽑았다.   그들은 자신의 숫자를 확인한 후에, 본격적인 질문을 받는다. ‘아프리카 나라들 중에 유엔에 가입되어 있는 나라의 숫자는 얼마인가’를 추측해보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앞서서 자신들이 카드에서 뽑은 숫자가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과 연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가자들 가운데 카드로 평균 10 근처의 숫자들을 뽑은 사람들은 아프리카 대륙에 유엔 가입국이 25개국 정도 될 것이라는 대답을 했다. 하지만, 카드에서 뽑은 숫자가 평균 65 근처였던 사람들은 아프리카에 유엔 회원국이 45개국 정도일 것이라고 대답을 한 것이다. 서로가 전혀 상관이 없는 숫자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잘 모르는 선택을 할 때,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의지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이 실험은 알려주고 있다.   극심하게 혼란스럽고 변화가 빠른 시대에 사는 요즘 사람들은 하루하루 결정해야 하는 많은 일들에 직면한다. 정보를 전부 접할 시간은 없고 선택할 것들은 많기 때문에 그저 어떤 곳에 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으면 그 근처에 덩달아 닻을 내릴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진로나 학업이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큰 의심 없이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위험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가끔은 배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 근처에 무작정 닻을 내릴 것이 아니라, 인적이 드문 곳에 자기만의 보금자리를 골라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현재 아프리카 국가 중에 유엔 회원국의 숫자는 54개국이다.  손헌수 / 변호사·공인회계사열린광장 닻내림 effect 아프리카 나라들 닻내림 효과 유엔 가입국

2025-04-24

[열린광장] 백수의 삶과 예술의 힘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예술의 사랑도 곁들어야 한다(Where there is the love of Man, there is also love of the Art).”   의학의 천재 히포크라테스가 읊은 인생 철학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짧은 인생을 사랑하려면 긴 예술도 함께 사랑하라고 말한다.   한국사람들은 짧은 인생을 어지간히 오래 살았다고 환갑 잔치를 벌이곤 했다. 그런데 이젠 옛이야기가 됐다. 이제 우리는 이른바 백수(白壽·99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백수를 넘게 삶을 살기는 무척 어렵다. 성경의 시편 기자도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있으면 80년, 게다가 거의가 슬픔과 괴로움 뿐, 덧없이 날아가고 맙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인이나 철인들이 덧없는 인생에 대해서 노래했고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람찬 삶의 길을 터득하려고 여러모로 힘쓰고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사람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마감이 오기 전에 누구나 나름대로 어떤 예술품을 남겨 놓는 것이 슬기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에게 닥쳐 온 좋은 기회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또한 어떤 일을 할 때도 좋고 나쁜 것을 쉽사리 찾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난날의 일도 잘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뚜렷하게 남겨놓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술을 하나의 예술로 보았다. 예술은 아름답고 착하고 그리고 참된 것이다. 비록 음악이나 미술이나 조각 같은 정말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해도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얼마든지 예술을 창조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마켓의 냉장고를 열면 그 속엔 쇠고기 덩어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것을 보면 그냥 쇠고기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나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푸줏간의 쇠고기’란 그림을 본다면 그땐 달라진다. 그 그림은 쇠고기 덩어리가 아니고 하나의 미술 작품인 것이다.     푸줏간에서 쇠고기 덩어리를 손으로 만지는 사람이 비록 오랜 삶을 살지 못한다 해도 이것을 그린다면 백수를 뛰어 넘는 삶을 산 것과 다름없는 하나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열두 번을 승전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전한 나폴레옹이 밀라노 전투를 하루 앞둔 날 어느 귀부인의 만찬 초대에서 한 말이 매우 흥미롭다.   “오늘은 아직 젊지만 내일은 천 살이 될 겁니다(Aujourd‘hui je suis encore jeune, mais demain j’aurai mille-ans).”   “밀란을 점령한다”와 발음이 같은 “천 살이 된다”라고 예술 감각이 뛰어난 말로 익살스럽게 한 말이다. 열두 번을 승전하고 단 한 번 패전한 나폴레옹은 겨우 쉰 두 살에 황제란 예술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가장 오래 사는 사람(死而不亡者壽)’이라는 노자의 격언이 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엔 따져서 안 되는 것이 셋 있는데 그 하나가 ‘잡아도 안 붙잡히는 것(搏之不得)’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노자의 말이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호수 위에 비친 달빛은 잡을 수 없어요.”   나폴레옹은 50대에 황제란 예술을 남기고 삶을 마감했다. 60대에 대통령이 된 윤석열은 허술한 계엄선포로 말미암아 대통령직을 잃었으니 대통령이란 예술을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예술이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백수 예술 예술 감각 쇠고기 덩어리 천재 히포크라테스

2025-04-22

[열린광장] 1960년 4월19일의 기억

어김없이 올해에도 4월이 되면 1960년 그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65년 전 4월 19일의 충격과 벅찬 감동은 여전히 생생하게 다가온다.   정오를 향해 치닫던 그날 오전, 서울 사대 물리과 2학년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을 품고 데모대의 선두에 섰다. 마지막 철조망과 허리 높이의 시멘트 토관 앞에서, 굳건히 경무대를 지키던 권력과 마주한 그들의 눈빛은 결연하기만 했다.   순간, “빠방” 하는 섬뜩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채 피어나지도 못한 젊음, 졸업을 앞둔 국어과 4학년 학생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4.19 희생자 1호라는 비극적인 이름표가 그의 젊음에 새겨졌다. 연이어 체육과 4학년 학생마저 목숨을 잃었고, 가정과 여학생들을 포함한 수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6.25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 대한민국은 또다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혼란에 휩싸였다.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무자비한 총격은 ‘피의 화요일’로 기록되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순간 중 하나로 남았다.     특히, 서울 문리대 수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학생의 이야기는 깊은 슬픔과 함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집안의 귀한 외아들이었음에도, 그는 초등학교 6학년 어린 학생에게 수혈 기회를 양보하고 스러져 갔다. 그의 헌신은 당시 4.19 정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수많은 안타까운 사연들을 뒤로하고, 4.19 희생자들은 서울 북방 우이동의 묘역에 영면해 있다. 당시 2학년으로 사대 신문 주간을 맡았던 나는 부정선거에 항거하며 학생들을 격려하는 글을 썼다. 6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절 우리가 공유했던 뜨거운 열정과 하나 된 마음은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있다. 글을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가 같은 이상을 향해 나아갔던, 순수하고 뜨거웠던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80대 중반의 노인이 된 4.19의 주역들은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와 대한민국을 세계 경제 10위권의 선진국으로 이끈 현대화의 주역이 되었다.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묘하다.   그해 여름,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은 농촌 계몽 운동을 계획했다. 당시 사대 학생회장은 법대에서 사회학과로 전과한 최영상 군이 맡았고, 사대는 전라남북도를 담당했다.     전주에 본부를 둔 학생회 소속이었던 나는 물리과 3학년 동기들(임장규-전 문교부 장학관, 유경근-전 서울시립대 교수, 이창무-캐나다 이민)과 함께 귀한 영사기를 마련했다. 공보부와 미국 USIS에서 어렵게 빌린 뉴스 필름을 들고, 우리는 전주를 시작으로 이리, 익산, 정읍, 장성, 담양, 순창, 남원, 장수, 장계를 순회하며 밤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   당시 지방은 전기와 전화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전기가 들어오는 곳은 경찰서뿐이었고, 우리는 경찰서의 경비 전화를 빌려 사용해야 했다. 3일장, 5일장이 끝나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밤 8시에 시작하는 영화를 기다렸다. 버스도 흔치 않아, 영화가 끝나면 칠흑 같은 밤길을 몇십 리씩 걸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영사기 불빛에 비춰보면 아이들과 남자들뿐 아니라, 이웃 동네 아낙들까지 모두 나와 영화를 보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소외되었던 농촌 사람들에게 영화는 귀한 볼거리였고, 우리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담양을 지나던 어느 날,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서울대 마크가 선명한 검은 교련복을 입은 우리 학생들을 불러 세운 한 분이 계셨다. 6.25 전쟁 때 개성에서 피난 와 담양에 정착해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가게에 들어서자 그분은 시원한 냉수를 건네주셨다. 잠시 후, 그분은 신문지에 싼 두 개의 뭉치를 우리 앞에 내놓으셨다. 당시 돈으로 20만 원, 지금 시세로 따지면 작은 가게 하나를 열 수 있는 거금이었다. 학생들의 농촌 계몽 활동에 써달라는 따뜻한 격려였다.   학생들 등록금이 몇 천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큰돈이었다. 시골에서는 더욱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분의 후한 인심에 감탄했지만, 우리는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 계몽 운동을 한다면서 돈을 받고 다닌다는 오해가 생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은 완강하게 돈을 받으라고 권하셨고, 우리는 오랜 실랑이 끝에 결국 돈을 받지 않고 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그해, 학생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기차역에 도착하기만 하면, 지방 면장은 물론 군수와 경찰서장까지 나와 우리를 환영했다. 평생 다시없을 특별한 경험이었고, 젊음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시절의 한 페이지였다. 6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뜨거웠던 함성과 잊을 수 없는 풍경들이 여전히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듯하다. 주영세 / 은퇴목사열린광장 기억 단과대학 학생회장들 4학년 학생 사대 물리과

2025-04-20

[열린광장] 부활절과 평행우주

부활절이 다가오면 아내는 흰 백합화로 뒷마당을 장식한다. 백합화는 부활절의 의미인 순결, 희망, 부활 그리고 새 생명을 아름답게 시각적으로 표현하기에 기독교인의 사랑을 받는 꽃이다. 특히, 새 생명은 부활절의 핵심이며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인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에서 부활절이 갖는 참된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단일한 의미를 구성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부활과 직결되기 때문에 십자가는 그 자체가 고난을 넘어 영광에로의 통로이며 세상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약함’이지만, 그 약함 후에는 ‘새 생명’이 찾아온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죽음의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부활의 차원으로 승화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현재와 숨겨진 승리를 상기시킨다. 십자가가 이러한 능력을 갖는 것은 다가올 영광된 부활이 마지막 승리와 하나님의 통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의 모습을 보면, 결단코 그러한 영광의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오직 의인만 참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solus Christus)와 믿음(sola fide)을 통해 장차 올 영광된 부활을 향한 신앙의 진보를 약속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만으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     키에르 케고르가 “선한 행위들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한 행위들을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선한 사람이 된 후에 신앙의 행위를 한다면 우리는 의로운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의 삶은 어떤 것일까. 참담했던 과거의 삶일까, 아니면 매일 성찰하며 진보하는 현재의 삶일까. 참담했던 과거의 삶은 ‘사실(fact)’이며, 진보하는 현재의 삶은 ‘진실(truth)’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실’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정보인 반면에, ‘진실’은 주관적 해석이 가미된 더 깊은 의미에서의 참된 것을 뜻한다.     그러면 “나의 진실된 삶은 어디에 실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천국에 관한 비유에 따르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훗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나의 진실된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천국을 평행우주에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평행우주는 가상의 우주 모형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가 아닌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평행선상에 위치한 또 다른 세계를 말한다. 넓은 의미로 평행우주는 여러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다중 우주다.   이렇게 보면 천국은 우리의 순간순간의 진실된 삶이 실재적 행위로 나타나는 차원일 수 있다. 나의 진실된 삶과 하나님의 차원 안에서 실재하는 ‘또 하나의 나’는 평행우주에서 실재한다는 개념이다.     비록 기독교의 천국과 평행우주는 개념적으로는 다르지만, 둘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신학과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당신의 진실된 삶과 또 하나의 당신이 평행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손국락 / 보잉사 시스템공학 박사열린광장 부활절과 평행우주 부활절과 평행우주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신앙

2025-04-16

[열린광장] 빛바랜 오욕

불교는 인간은 오욕(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색욕)을 지니고 산다고 풀이했다. 늙으면 이 오욕이 쪼그라지고 빛바래진다. 물욕, 은퇴한 사람은 사회보장 연금 이외에 수입이 없다. 명예욕, 내가 왕년에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자화자찬으로 끝난다. 식욕, 맛있는 음식이 없어 덜 먹는다. 수면욕, 초저녁에 한잠 자고나면 정신이 똘똘해져 만리장성을 쌓는다. 색욕, S라인이 뚜렷한 미녀가 앞을 지나가도 ‘소가 닭 보듯’ 한다.     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식욕이다. 먹는 것이 힘이다. 밥이 보약이다. 어떻게 하면 밥을 잘 먹을 수 있을까. 반찬이 좋아야 한다. 나는 은퇴하고 집에서 반찬 만들기를 시작했다. 구글 요리사에게 물으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우리 집 밥상에 한 끼도 빼놓을 수 없는 반찬이 물김치다. 좋은 배추를 사다가 잘라서 소금물에 절인다. 절이는 시간을 잘 조정한다. 약간 덜 절인 배추를 건져 씻어서 양념을 넣어 버무린다. 양념은 비방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 각자 양념을 만들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힌트를 준다. 고추 가루를 사용하지 않는다.   빵도 만들어 먹었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밀가루를 반죽해서 이스트를 넣고 두 번 발효해서 건포도를 넣고 스팀 냄비에 찐다. 산양 젖 가루를 넣어 빵을 만들어 보았다. 각양각색의 빵을 만들어보았다. 요즘은 실증이 나서 집에서 빵을 만들지 않는다. 시장에 맛있는 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맛있는 김치가 있으면 김치찌개는 자연히 만들게 된다. 콩나물과 두부만 넣으면 된다. 양파와 마늘 그리고 식물성 고기인 버섯도 넣는다. 요즘 새로운 메뉴가 등장했다. 찐 비트(홍당무), 보혈강장제와 시금치 무침과 시금치 된장국이다. 매운 풋고추를 넣고 만든 멸치 볶음도 빼놓지 않는다.   후식으로 새로 등장한 과일이 파파야다. 이 파파야는 혈당도 별로 올리지 않고 시원하고 맛있다. 멕시칸 마켓에 가서 방금 수입된 파파야 열 개를 카트에 넣으면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러진다. 우리 아이들과 친지에게 파파야를 선물하면 모두 좋아한다.   아내가 3년 전 뇌졸중을 앓고 나서 내가 식모, 아니 식부가 되었다. 반찬 만드는데 익숙해졌다. 아내에게 삼시세끼 상을 차려준다. 지난 60년을 받아먹었으니 내 차례다. 새로 반찬을 만들어주면 맛있다고 덥석덥석 집어먹으면 좋으련만. 고양이 밥 먹듯 깨작거린다. 맛이 없다고 불평한다. 주먹으로 꿀밤을 주고 싶지만 참는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오욕 수면욕 색욕 물욕 명예욕 시금치 무침과

2025-04-15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