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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샘] 주인공 없는 생일 잔치

문득 조그마한 책자에서 읽었던 들이 생각 납니다. 그 글의 필자는 일본 사람이었으며 내용을 대강 요약해 보자면 이러한 것 입니다. 배 안에는 각국의 여러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을 단 한마디에 말로 바다에 뛰어들게 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과연 어떠한 말로 뛰어 들게 할 수 있을까요? 영국 사람에게는 "지금 물속에 여인이 빠져 있습니다." 라고 하면 그 영국인은 "신사도"때문에 용감하게 물에 뛰어든다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에게는 "물에 뛰어들면 돈을 주겠습니다" 라고 권하여 말하면 그들은 두려움을 무릎쓰고 주저 하지 않고 뛰어들어가며일본 사람의 경우는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뒤도 안 돌아보고 물에 뛰어 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본 필자는 주체성이 부족한 그들 민족을 꼬집어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단지 각 나라의 민족성을 비판한 것 이라고 그냥 넘기기에는 우리 자신과 너무 흡사하지 않습니까? 종종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와 같이 주체성의 부족으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던데…" 라고 말로 그것의 옳고 그름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수의 흐름에 따라 끌려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 흐름에 거슬러 가기가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휩싸여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캐롤송이백화점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장식들이 각종 퍼레이드들이 곳곳에서 12월 한달의 축제 기분을 한껏 자아냅니다. 교회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크리스마스 축하 파티 등등으로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달이 아닌가 하고 생각 합니다. 성탄절은 분명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 생일의 주인공이신 예수는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백화점에는 산타 클로스가 자동차 선전에는 비키니를 입은 여자 산타가 거리에는 많은 흥겨운 노래들이. 신문 지상에서는 동창회 모임 광고들이 선물을 파는 상점에는 가족 친지들에게 주려는 선물을 사려는 긴 행렬이… 한 친구의 생일 잔치를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의 생일을 축하 하려고 모인 모든 친구들이 선물들과 음식들로 함께 친구의 생일을 축하한 후에 모두 오랫만에 만난 기분을 한 껏 즐기고 있을 때 정작 가장 기뻐야할 그 생일의 주인공은 혼자 외롭게 앉아 있었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모두 자기 기쁨에 빠져서 그 친구가 외롭게 혼자 있는 것을 보지 아니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뭐…" 라고 말하며 그냥 또 이 크리스마스의 계절을 지내기에는 예수님이 너무 외로우실 것 같습니다. 세상이 다른사람들이 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을 산타나 선물교환동창회 등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우리 마음의 케이크의 촛불을 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절 아니 우리 삶의 주인공되신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치며 이 크리스마스 계절을 보내기 원합니다. "예수님 생일 축하 드립니다!" 라고…. "Happy Birthday Jesus!"

2008-12-16

[목회 칼럼] 맛있는 커피처럼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자주 마시다 보니 그 맛에도 상당히 예민해져 있다. 좀 시건방지게 들릴지 몰라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나는 맛 없는 커피는 마지지 않는다. 맛을 아는 미식가들이 성의 없이 아무렇게나 만든 음식을 외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선교지에서 문명 세계로 나오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내 혀끝에 길들여져 있는 맛나는 커피다. 목회자로서 오랜 시간 동안 어떻게 사람들이 변하는가에 관심을 두어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그들 앞에서 풀어질 때 설득이 되고 이렇게 설득된 말씀이 지시하는 것에 동의가 되면 변화가 시작된다. 그래서 목사의 최고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내는 것이다. 그 말씀이 성도의 영혼 속에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첫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관심 많은 주제나 보통 사람들의 고민거리에 대한 답을 성경을 통해서 찾아가면서 말씀으로 설득한다. 말씀으로 설득이 되면 성도들은 동의가 되어 힘을 얻고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말씀의 맛에 길들여 지면 말씀에 자연스럽게 순종하게 된다. 말씀 맛을 본 성도들은 말씀을 많이 자주 들어야 한다. 그 맛에 대한 감각이 줄어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꿀송이 보다 더 달다는 표현을 쓴다. 말씀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맛있다는 뜻이다. 그 맛에 길들여지면 찾지 않을 수 없고 말씀의 맛을 알면 다른 맛에 더 이상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세상에 있는 인스턴트 식품의 강한 조미료에 더 이상 끌리지 않는다. 김남준 목사님의 글에서 본 것이다. 어떤 부부가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참기름이 필요하여 시장에서 구입하여 먹어보고는 놀랐다.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입에 자극이 심한 것이 참맛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결심을 했다. '온 서울 사람들에게 진짜 참기름을 손수 만들어 공급해 주리라.' 꿈이 야무졌다. 신이 났다. 금방 돈방석에 앉을 것 같았다. 그리고 더욱 건강해질 서울 시민들을 생각하면서 행복해 했다. 그런데 사업은 쫄당 망했다. 아무도 진짜를 사먹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맛이 없어서다. 가짜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혀에는 진짜를 구별할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이제는 진짜 맛에 길들여진 성도들이 거짓 맛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사는 때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의 맛을 모른다면 정말 안타까운 인생인 셈이다. 우리가 길들여져야 하는 맛이 주님의 인자하심이다. 시편 기자는 주님의 인자 하심이 생명보다 낫다고 고백한다.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 한 분만으로 기쁨 삼아 살라고 권면한다. 어찌 생각하면 이것은 지루해 보여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살이 방법인 것 같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주의 인자를 제대로 맛보면 그 맛을 알게 되고 만약 이 맛에 길들여진다면 이 세상에 속한 어떤 것에도 이와 같은 만족스런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커피 맛에 길들여지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주님의 인자에 들여진 맛은 평생 잊을 수도 놓을 수도 없는 행복이요 축복이다.

2008-12-16

[기독교인의 삶] 하나님 안에 있는 보물

너무나 빨리 변해가는 불안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물을 볼 줄 아는 영적인 눈이라 생각합니다. '약한 나를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하신 주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가장 귀한 보배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안타까운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불안함 두려움이 엄습해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정감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품어주시는 자상한 하늘의 아버지가 계심을 믿습니다. 저에겐 가장 귀한 보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제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입니다. '안정감 레슨' 책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알게 되면서 얻은 보물은 우리가 움직일 수 있도록 믿음을 제공한다." 라는 글이 제 마음에 남습니다. 큐티를 통해 다시한번 하나님 안에 있는 보물을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질그릇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는지 생각합니다. 그릇이 아무리 아름다운 재료로 만들어졌다해도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지듯이 겉모습은 조금 소박하여도 그 안에 귀한 것을 담는다면 그 그릇은 귀하게 사용될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겨있는 보물 중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바로 '평안하뇨?' 입니다. 왜 주님이 평안하느냐고 물어봤을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것이 하나님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는 '평안'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요 14:27) 지난 땡스기빙 주일날 '안정감 레슨'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중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사 46:11) 말씀은 내 안에 있는 조그만한 불안함을 평안함으로 바꾸어 주신 말씀입니다. 좋은 책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 안에서 안정감을 누린 저는 그 때 하나님이 주시는 안정감이 무엇인지를 경험했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은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보물입니다.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말씀을 신뢰하며 요동치기 쉬운 환경과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그 크신 품안에서 안정감을 누리길 원합니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함께 할 동역자를 허락하십니다. 동역자에 대하여 묵상하며 전도서 4장12절 안에서 새롭게 깨달은 보물을 봅니다.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결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연약한 저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동역자 그리고 하나님 이 셋의 관계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없는 관계 장소는 불안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복의 근원 사랑의 근원 평안의 근원은 오직 예수님이시기에 그 감추어진 보물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다만 가장 귀한 보배로운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교만함이 제 마음의 그릇에 있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보물을 더 많은 곳에 더 많은 영혼들에게 나눠주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삶을 이루는 2009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08-12-16

[사목의 향기] 술이란···(2)

또 어떤 이들은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손님 접대를 잘 하라는 사도들의 권고를 음식과 술대접을 잘하라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참조. 1디모 32;티토 18;1베드 49). 하긴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술이 빠진다면 결례가 아니겠는가? 구약성경의 집회서만큼 술에 대해 상세히 가르치는 지혜의 책도 드물 것이다. 술이 주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열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술은 알맞게 마시면 사람들에게 생기를 준다. 술 없는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술은 처음부터 흥을 위해 창조되었다. 제 때에 술을 절제 있게 마시는 사람은 마음이 즐거워지고 기분이 유쾌해진다."(3127-28;전도815;97;잠언310). 이 얼마나 좋은 말씀인가? 주님의 말씀이니 애주가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삶의 지혜를 요구한다. "술을 지나치게 마신 자는 기분이 상하고 흥분하여 남들과 싸우게 된다. 만취는 미련한 자의 화를 돋우어 넘어뜨리고 기운을 떨어뜨려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집회 3129-30;잠언201;). 그러므로 술은 적절하게 마셔야지 지나치면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즐기는 잔치나 연회 시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술자리에서 남을 꾸짖지 말고 흥에 젖은 그를 무시하지 마라. 그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지 말고 이것저것 요구하여 그를 괴롭히지 마라."(집회 3131)는 교훈도 있을 정도이다. 마음에 두고 있는 여성과 결혼하려고 마음먹은 남성은 그녀의 부모에게 예의 바르게 특히 술자리를 함께 할 때는 주도에 신경을 써야 한다. 혹시 버릇없는 젊은이로 낙인이 찍히는 날에는 신상에 불리할 것이다. 원래 술과 담배는 건강의 적이라고들 하나 최근에 많은 의사들이 건강을 위해 술을 권하고 있어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폭주는 알콜성 간염과 간경변 등을 일으키며 뇌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알콜 중독을 일으켜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보지 않는가? 그러나 적포도주가 심장병에 좋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상식이다. 적포도주에 존재하는 황산화 물질 때문에 건강에 좋다고 한다.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연구팀은 포도주 뿐 아니라 맥주나 양주 등 모든 종류의 술이 심장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술이 심장병 예방에 좋은 이유는 "좋은 콜레스테롤"로 알려진 "고밀도 콜레스테롤(HDL)"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HDL은 혈관 안쪽에 붙어있는 콜레스테롤 찌꺼기들을 소각장에 해당하는 간으로 옮겨 분해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술은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도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심장병 예방에는 하루에 두 잔 정도의 술이 적당하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술은 음식인 동시에 기호품이므로 절제 없이 지나치게 마시면 탈이 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는 인간의 경험이 잘 말해준다. 술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많은가. 많은 질병 예를 들면 간경화나 알콜성 간염 등의 원인이 술이라고 하니 술은 좋으면서도 절제 있게 마셔야 할 것이다. 또한 술은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사나 명절에 차례를 지낼 때는 제주(祭酒)로 사용되어 왔으니 정성스럽게 다루어야 할 음식이다. 조상제례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주 예수님도 최후 만찬 상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당신의 피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를 행하라고 하셨으므로 가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는 이 성경 구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사제가 미사를 지낼 때마다 포도주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포도주는 빵과 더불어 성체성사의 본질적 재료이다.

2008-12-16

[지혜의 향기] 승만 부인의 아들 교육

승만 부인이라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영부인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체스카 여사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대승 불교의 유명한 경전인 승만경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재가 불자 보살이다. 승만 부인은 열 가지의 서원을 세워 재가 불자로서 걸어가야 할 신행의 도리를 밝혔는데 그 밖에 자신의 아들을 교육하는 종목으로 다음 세 가지를 강조하였다. 첫째로는 아들로 하여금 그 몸을 버려서라도 불법을 지키라는 것이고 다음은 그 재물을 버려서라도 불법을 지켜라 마지막으로는 그 목숨을 바쳐서라도 불법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가르침은 이 세상 많은 어머니들의 본능적인 가르침과는 반대가 된다. 내가 어머니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아마 자기 아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게 대부분 어머니들의 솔직한 심정이 아닐까? 물론 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선 이 세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 몸 간수 하나는 온전히 해라. 남 때문에 네 몸 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둘째 남자는 재물이 생명이다. 재물만 있으면 지위와 명예 여자 추종자 권력 건강 따위가 다 따라온다. 다른 것 다 좋아도 재물 없으면 헛것이다. 재물부터 챙겨라. 마지막으로 신신당부하건대 네 목숨 버리는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하지 마라. 내 눈 감기 전에 그런 꼴은 못 본다. 설사 나라를 팔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만 돌아와 다오. 이 세상 어머니들의 이런 무조건적이고 눈먼 욕망이 없었다면 아마 인류라는 종은 멸종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적나라한 어머니들의 바람을 너무 탓하지는 말자. 오히려 이를 수긍하고 이러한 욕망들이 부당하게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회 정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할 것이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누구의 어머니라도 이런 욕망을 꼭 같이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아들의 몸이 상하면 안 되듯이 남의 아들 몸도 상하면 안 된다. 가혹한 노동 조건과 산업재해의 위험에 노출되어도 괜찮고 병마와 영양실조에 시달려도 상관없고 사회적 정치적 폭력의 위험에 속수무책 내던져져도 좋을 아들의 몸은 어느 집구석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돈이 내 아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남의 아들도 돈 좀 벌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너무 독점하지 말며 돈이 지나치게 한 쪽으로만 쏠리는 사회적인 구조는 완화시켜야 할 것이고 돈 못 버는 아들을 둔 남의 집 어머니를 동정하고 조금이나마 베풀어야 할 것이다. 남의 아들 목숨에 대해서는 두 말 하면 잔소리다. 그런데 보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웃과 사회 가까운 나라 먼 나라의 이름 모를 아들들을 살육의 벌판으로 내모는 일에 은근히 동조하거나 발 담근 일은 없었는지를. 이렇듯 남의 아들과 그 어머니도 생각하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알아들을지 몰라도 실감하고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중생이 한 몸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동체대비의 진리가 몸에 와 닿기 전에는. 그리고 이 동체대비가 바로 불법의 핵심이다. 작은 몸이 죽더라도 큰 몸이 사는 것이니 그 옛날 승만 부인이 불법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치라고 아들에게 가르친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08-12-16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별 하나, 나 하나

#풍경1 : 밤하늘을 보세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죠. 어떤 별은 아주 밝고 또 어떤 별은 아주 희미하죠. 그런데 아세요? 희미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실은 하나의 은하일 수도 있답니다. 1000억 개 이상의 별들이 모인 은하 말이죠. 그 은하가 너무나 멀어서 '별 하나'처럼 보이는 거죠. 우주에는 이런 은하가 약 1250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놀랍죠. 이 우주의 크기는 정말 끝이 없네요. 그런데 은하의 중심에는 '블랙홀'이 있습니다. 처음에 블랙홀은 이론상의 존재였죠.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과학자들이 '블랙홀의 존재'를 입증했습니다. 처음에 블랙홀은 '공포의 대상'이었죠. 그래서 별명도 '우주의 식인종'이죠. 주위의 물질을 모두 빨아들이니까요. 심지어 빛까지도 말이죠. 우주학자와 물리학자들은 말합니다. "거대 블랙홀의 중심에선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리학의 모든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 중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는 완전한 수수께끼다. " #풍경2 : 과학에만 '블랙홀'이 있는 게 아닙니다. 종교에도 '블랙홀'이 있습니다. 또 종교에만 '블랙홀'이 있는 게 아니죠. 내 안에도 '블랙홀'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약 60조의 세포로 이뤄져 있죠. 그 세포 하나하나가 실은 '별'입니다. 그래서 나의 몸은 60조의 별이 모인 거대한 은하죠. 그런데 그 '별(세포)'마다 욕망이 묻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인간의 유전자를 통해 이어지는 가짐과 집착의 기질이죠. 그 숱한 '별'에서 욕망을 하나씩 털어내는 과정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을 통해 털어진 욕망은 어김없이 블랙홀 속으로 '쑥쑥' 들어가죠. 그리고 나중에 '나'라는 은하계의 마지막 욕망까지 블랙홀 속으로 '쑤~욱' 들어갈 때 우리는 '붓다'를 만나는 겁니다. 거기가 바로 '공'의 자리죠. 그래서 붓다는 말했죠.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이 뭔가요. 내가 디딘 땅 곁에 선 나무 지저귀는 새 등 모든 형상이 바로 '색'이죠. 그럼 '공'은 뭘까요. 그 모든 '색'이 나온 바탕이죠. 색과 공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통로. 선의 세계에선 그게 바로 '블랙홀'입니다. 우주에는 '블랙홀'만 있는 게 아닙니다. '화이트홀'도 있죠. 모든 걸 빨아들이는 게 '블랙홀'이라면 모든 걸 내뱉는 게 '화이트홀'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 공간에서 화이트홀의 존재를 아직 입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에선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둘이 아닙니다. '색'이 '공'으로 빨려들어갈 때는 '블랙홀'이 되고 '공'이 '색'으로 나타날 때는 '화이트홀'이 되는 거죠. 하나의 통로를 이쪽에서 보느냐 아니면 저쪽에서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다시 보세요. '색'이 '공'으로 빨려들어갈 때는 '파괴'가 되고 '공'이 '색'으로 나타날 때는 '창조'가 되는 거죠. 그래서 파괴와 창조는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명심해야죠. '나'라는 은하를 비우는 수행은 '파괴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의 작업'입니다.

2008-12-16

[목회 칼럼] 추억의 '새벽송'

성탄의 계절이 성큼 다가왔으니 세월이 너무나 빠르다. 날아가는 세월을 부채질이라도 하듯 어떤 판촉 광고는 '메리 크리스마스'를 '미리 크리스마스'로 바꾸기까지 하면서 소비자들을 부추기기도 한다. 우리 교회는 지난주에야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다가 아롱다롱한 장식을 달고 전구들과 어울려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지만 왜 그런지 어설프다. 아마도 그 이유가 성탄은 설렘으로 맞아야 할 것 같은데 세월에 억지로 끌려서 온 자구지단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강단에 설 때마다 은은하게 풍겨나는 전나무의 향 내음이 너무나 좋다. 어린 시절 성탄절마다 고향 시골교회에 장식했던 전나무의 향기는 성전을 가득 채우고도 넘쳤다. 교회의 청년들이 산에 가서 구하기 어려운 전나무를 톱으로 잘라 리어카에 싣고 와 성전에 장식하는 날은 어린 나에게 있어서는 잔칫날과 같았다. 시골의 작은 교회였지만 매년마다 성탄절이 되면 주일학교에서는 거창한 연극을 했었다. 주제는 늘 '예수탄생'이었다. 나는 중요한 역할인 요셉 역을 맡곤 했다. 왜냐면 요셉은 마리아 옆에 서있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벽송은 달랐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새벽송을 따라가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매일 새벽을 깨우는 목사가 되었나보다. 새벽송은 크리스마스 이브행사가 끝나고 예배당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이 재미있는 게임들을 하다가 밤 12시가 되어서야 성가대와 함께 출발하였다. 당시에 초저녁잠이 많았던 나로서는 그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한번은 새벽송을 따라가려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졸려서 잠깐 자다가보니 아침을 맞이하는 바람에 방성대곡(?)을 한 적도 있었다. 어느 해인가 드디어 대망의 새벽송에 당당하게 합류했다. 출발 시간은 정확히 밤 12시였다. 예배당 밖을 나가니 그 사이에 눈이 내려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은 맑게 빛나고 주위에 수많은 별들과 성운들이 눈에 쏟아질듯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가대원은 어느덧 논두렁을 지나고 작은 산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대원들이 성탄 캐럴을 부르다가 그치면 쌓인 눈을 '뽀드득'거리며 밟는 소리도 환상적이었고 신발창에 부드럽게 느껴지는 눈의 감촉이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었다. 대원들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어느 집에 멈추었다. 대문은 싸릿문이었다. 집안 마당에는 장작이 타고 있는 것을 보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 집에는 여러 곳에서 시끄럽게 짖어대던 그 흔한 개도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싸릿문을 열고 들어가서 불타는 장작더미 앞에서 모여서 찬양을 시작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찬양소리가 초가집을 에워싸고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 귀에는 아직도 그날의 아름다운 찬양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잠시 후 방안에 있던 중년부부가 문을 열고 나와 고무신을 신고서 마당 안쪽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있는 모습이 양떼를 치던 목자들처럼 너무 경건한 모습이었다. 찬양 부르기를 마치니 집주인은 우리를 추운 마루에 앉게 하고 부인은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한 상 가득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무국과 지금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무떡을 내왔다. 우리는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아마 그것이 나의 첫 심방이었던가 보다. 그 다음은 생각이 잘 안 난다. 이 집 저 집을 다니다가 새벽녘에 기진맥진해서 돌아와서 잠을 잤을 것이고 꿈속에서도 나는 새벽송을 불렀을 것이다. '~아기 잘도 잔다~아기 잘도 잔다.'

2008-12-09

[특별 기고] 이성에서 영성으로 귀환···이어령 시집 '어느 불신자의 기도'를 읽고

평생, 지성과 이성의 화신으로만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문학평론가 이어령 교수. 그가 세례를 받고 영성 세계의 문을 열어 생애에 극적인 획을 그으며 첫 시집 〈어느 불신자의 기도>를 문학세계사를 통해 세상에 내놓았다. 금세기를 우리와 함께 살면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구석들을 잽싸게 먼저 보고 먼저 듣고 먼저 터득하여 정신문화의 등불을 밝히면서 산문으로만 자신을 무장하여 50여년 동안 문단생활을 해오던 그가 평론 에세이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문학 전반을 섭렵해 오더니 급기야 그 예리한 감각의 붓을 들어 문학의 꽃이라 불리는 순수시에 접근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감성과 지성의 오솔길을 걸으며 이성의 정상에 올라 있던 그가 영성의 세계로 지향하는 뚜렷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신의 절절한 심경을 널리 펴 보이고 있다. 이제 시 분야에의 접근은 그의 문학에서의 마지막 작업순서가 아닐까 싶다. 그의 시에는 영적 승리를 갈구하는 목마름이 있다. 하나님 앞에 눈을 뜨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사람으로 그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고 송강 정철이 목멱을 그리워하듯 자기 영혼의 집을 그리워하는 그 이상의 영적 기다림이 담겨져 있다. 그의 잔에 가득한 맹물이 맛 좋은 포도주로 변하는 감동을 만나게 된다. 군중 속에 숨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몰래 잡아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시정으로 녹아 흐르고 있다. 기독교 문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언제부터 그의 예리한 붓끝에서 이토록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던가! "하나님/당신의 제단에/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절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중략) 아! 정말 하나님/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사람들은 지금 시를 쓰기 위해서/발톱처럼 무딘 가슴을 찢고/코피처럼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나이다. (중략)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때 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 있느냐고/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2) "내 영혼의 집을 짓게 하소서" (내가 살 집을 짓게 하소서) 산문의 대가로 반세기를 주름잡아 오던 그가 왜 시를 쓰는 걸까? 산문으로는 닿을 수 없는 영적 하늘을 보았음일까! 딱딱한 산문의 껍질을 깨고 운문의 세계로 발돋움하는 몸부림이 더욱 신선한 바람을 불게 한다. "꽃들이 지는데 지금/천 송이 또 천 송이 꽃이 지는데/계백이여 불타는 고향을 지키던 계백이여 지금 어디에서 칼을 가는가" (지금도 떨어지는 꽃들이 있어). 한편 그가 간직해 오던 이지가 시정으로 승화 되어 재치 있게 건축된 언어와 언어들의 틈새에서 삶의 애환을 노래한다. "눈물이 무지개 된다고 하더니만" "미래의 문명은 반짇고리에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모더니즘의 첨단을 오르내리는 몸짓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눈물 묻은 이야기들을 끌어오는가? 신앙적인 것 교훈적인 것 가정적인 것 지성적인 것 이성적인 것 현대적인 것들로 이토록 가슴을 치는가! 그의 시집을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만나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장폴 사르트르 등을 만난 듯 그의 고백 속에 흐르는 눈물의 감격을 뜨겁게 경험한다.

2008-12-09

[사목의 향기] 술 (1)

술은 음식이자 기호품이다. 음식 치고 안 좋은 것이 없겠지만 특히 술은 인간사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음식이자 기호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도 "(주님) 당신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을 얻게 하시나이다."(시편 10415)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술을 별로 마시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이 술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일상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주제이지만 술로 인한 피해가 많은 것을 보고 있어 한 마디 해도 괜찮을 것 같아 감히 펜을 들어본다. 로마 사람들은 'In vino veritas(술 안에 진리가 있다)'라고 하면서 특히 포도주를 즐겨 마신다. 로마에 살다보면 점심과 저녁 식사에는 늘 포도주가 나오므로 술꾼들에게는 살기 좋은 나라다. 'In vino veritas'를 우리말로 표현한다면 '취중진담'이라고나 할까. 스페인의 어떤 지역은 V자와 B자를 구분하지 못해 'Vivere est bibere Bibere est vivere'라고 말하기도 한다. 풀이하면 "사는 것이 마시는 것이고 마시는 것이 사는 것이다." 이다. 술을 즐기는 그 지역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이니 솔직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술을 즐겨 마셔왔다. 술술 넘어간다고 해서 줄여서 술이라고 했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술을 즐겨 마셔왔다. 가무와 풍류를 즐기는 민족답게 삶의 곳곳에 등장한 음식이 바로 술이며 이를 통해 삶의 희노애락을 보다 깊고 진하게 표현해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잔칫집의 술은 기쁨과 흥겨움을 더해 주는 술이요 초상집의 술은 슬픔을 덜어주는 술이며 들판에서 마시는 한 잔 술은 고된 농사일의 피로를 덜어주고 힘을 돋우어주며 주막집의 한 잔 술은 긴 여행의 피로와 고달픔을 풀어주는 활력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가위의 차례상에서 빠질 수 없는 것도 바로 술이다. 한가위의 술을 '백주(白酒)'라고 하는 데 햅쌀로 빚었기 때문에 '신도주(新稻酒)'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풍류 시인들이나 소설가들도 술을 즐겨 마셨는데 조선시대 방랑 시인 김삿갓을 비롯해서 명기 황진이와 그녀의 술 벗들이었던 여러 선비들은 술과 더불어 시조를 지어 읊으며 인생을 논하고 풍류를 즐겼다. 근대의 대표적인 문학도 공초 오상순 수주 변영로 시인 조지훈 등 많은 문인들도 술을 즐겼는데 이들 중에는 지나친 음주로 자신들의 몸을 망치기도 했다고 하니 술이 주는 피해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술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인간사의 모든 것을 다루는 성경에도 술 이야기는 빈번히 등장한다. 노아가 술에 취한 이야기나 로트가 술에 취해 실수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 "세례자 요한은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저 사람은 와서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며'(루카 734)라고 비판할 정도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술을 즐기신 듯하다. 더구나 잔치집에 술이 떨어진 딱한 사정을 보신 성모님이 아드님에게 부탁하자 물이 술로 변화되는 기적을 일으키셨다. 아직 당신이 영광 받으실 때가 오지 않았는데도 딱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지니신 어머니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물을 항아리에 채우라고 하신 다음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요한 2장) 하셨다. 이것만이 아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테오에게 술을 권하기도 했다. "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을 위해서나 자주 앓는 그대의 병을 위해서 포도주를 좀 마시도록 하시오."(1디모 523).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술을 마시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2008-12-09

[지혜의 향기] 법문은 왜 비유일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은 거의 방편설이요 비유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곧 바로 말씀하시니 중생들이 도대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불성이요 부처이고 우주 법계에 부처님이 안 계신 데가 없고 일체중생의 마음 가운데 들어 계시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바로 알아들어야 할 것인데 '내가 어찌 부처인가 배우지도 못하고 세속에 끄달려 사는 이 몸이 어찌 부처일 것인가 하며 부처는 석존께서 부처이다' 하고 결코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방편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 법계에서 내리는 무한의 보배를 받아 쓸 수 있는 그릇을 가지고 있지만 그 그릇을 엎어놓고 있기 때문에 받아쓰지를 못한다. 그러한 것은 과거 전생에 그만한 복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어놓은 복도 받아 쓸 줄 모르기 때문에 또는 불성 즉 정각을 모르기 때문에 주로 방편을 써서 말씀하신 것이다. 법화경의 '탕자 비유편'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오랫동안 헤어져 살았는데 아버지는 각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무역을 하고 상업을 해서 거부가 되었고 곳간에는 금은 보화가 가득하며 하인 노비들이 수 백 명에 이르고 집은 궁궐과 같고 매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내왕을 한다. 그런데 아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얻어먹거나 일을 해주며 겨우 연명하며 남루한 옷에 목욕도 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 소년은 어느 날 으리으리하고 대궐같은 이 집 앞을 지나다가 "도대체 이 집은 얼마나 부자이길래 이토록 웅장한가?" 하고 열려진 대문으로 살그머니 안마당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용상과 같은 의자에 왕과 같은 위엄있는 사람이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시중드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앉아있던 왕과 같은 사람이 대문으로 들여다보는 거지같은 소년을 보는 순간 오래전에 헤어진 자기 아들임을 알아보고 뛰어 내려오며 "내 아들아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하며 붙잡으려고 하니까 이 소년은 잡히면 큰일난다 죽을 수도 있다 생각하고 마구 도망을 친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옆에 있는 시종을 시켜 쫒아가서 붙잡아 오도록 한다. 하인 몇 사람이 달려 쫒아가니 아들은 그만 잡히면 나는 죽는다 하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겁에 질려 그만 쓰러지고 만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을 뿌려서 정신만 들게 해놓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가 버린다.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 아이가 나와 헤어진지가 오래 되어서 제 아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저에게 물려줄 재산이 이렇게 많은 데에도 알지 못하고 도망만 치는구나. 안되겠으니 다시 가서 잘 달래서 말하되 밖에서 자면서 똥 푸는 일을 하게 하여라. 그러면 다니면서 얻어먹는 것 보다는 좋지 않겠는가. 그런 다음에 서로 낮이 익고 임의로워지거든 안으로 들어오게 하거라." 이렇게 일을 시키다가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고 서로 안면이 익고 임으로워진 다음 심부름도 시키고 하다가 창고도 맡게 하고 아버지 옆에서 일을 시키기도 하였다. 어느 날 틈을 보아서 "너는 내 아들이다. 이 집과 이 재산은 모두 네 것이다. 여기에 살면 임금이 부럽지 않을 것이니 이제부터 이 많은 재산은 네가 모두 관리하고 쓰고 싶으면 쓰고 네 마음대로 하거라" 하고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돌려주고 떠난다. 이 방편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2008-12-09

[기독교인의 삶] 돈···하나님의 방법으로

요즈음에는 나도 모르게 지었던 어렸을 적 일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회개케 하신다. 버스를 탈 때 돈 아끼려고 얼마 모자르게 동전 가득 낸 것 부모님께 참고서 사야한다고 거짓말하고 돈 받고 다른 곳에 쓴 것 등교시간에 늦으면 몰래 쥐구멍으로 들어간 것 수업 시간에 몰래 분식집 갔다 온 것 등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일들은 학창시절 즐거운 추억이라 생각했었다. 창피한 죄라고 생각하기는 커녕 내 얼굴에 살며시 미소를 띄우게 만들었던 추억이란 이름으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던 일들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주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죄였다는 생각을 들게 하셨고 늦게나마 죄를 회개케 하셨다.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와 남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말과 행동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했었는지…. 더구나 이러한 죄들이 자랑인냥 떠들고 다녔으니 나는 얼마나 무지하였고 죄에 둔감했었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연약한 나를 사랑과 인내로 지켜 주시고 기다려 주시며 이미 보혈의 피로 용서해 주신 주님의 사랑은 얼마나 위대한지 모른다. 성경에는 돈(재정 헌금)과 관련된 말씀이 2080번이나 나온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이라 한다. 더구나 성경에 믿음에 관련된 말씀이 215번 기도가 500번 나오는 것과 비교해 볼 때에도 돈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 보니 예수님은 돈과 관련된 말씀을 참 많이도 하셨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을 시험한 바리새인에게 세를 정확히 바치라고 하신 예수님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겠냐고 찾아온 사람에게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이웃을 도우라 하셨던 예수님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말씀하시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걱정치 말라 하신 예수님 제자들에게 전도여행시 돈을 들고 다니지 말고 합당한 자를 찾아 머물라 하시며 오병이어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예수님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다 내쫓으신 예수님. 그저 기적이고 사랑을 전하는 일 좋은 가르침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돈과 관련된 말씀이었다. 돈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하시고 우리가 생각치 못한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예수님.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이웃을 도우시라는 예수님…. 그런데 나는 돈에 정직하지 못했고 치사하게 행동하고 헌금하는 것은 무슨 큰 헌신과 희생인냥 우쭐대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미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에 대해 "돈 없으면 어쩌나..." 걱정도 참 많이 했다. 또한 "모두들 그러니깐 이 것이 세상의 법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니깐 이 정도면 괜찮아." 하며 세상과 타협하며 나의 죄를 합당화 시켰었다. 하지만 나는 이시간 다시 한번 나의 연약한 모습을 회개하며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이미 용서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죄에 조금이나마 더 민감케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아직도 완성되지 못하고 선과 악에서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 나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 닮아가는 내가 되고 나의 삶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하며 주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주시는 분도 거두시는 분도 나에게 가장 최고의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나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쓸 것있음을 조심스럽게 다짐해 본다. 주님 나를 도우소서.

2008-12-02

[목회 칼럼] 타인의 자리에 서라

춘향전을 무척 좋아하는 철학과 교수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춘향전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는데 그때마다 그 맛과 느낌이 달랐다고 합니다. 춘향전을 10대 중반에 처음 읽었을 때에는 순정을 지키려고 그 모진 매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는 춘향이가 불쌍했고 20대 때에는 전라도 남원 촌구석의 여자아이에게 발목이 잡혀 허구한 날 장원 급제하려고 골방에서 글만 읽는 이몽룡이 불쌍했답니다. 취업하려고 독서실에서 매일 주야로 공부만 하는 자기 신세와 비슷하더랍니다. 30대 때에 다시 춘향전을 읽으니까 이번에는 방자와 향단이가 한없이 불쌍합니다. 이도령과 춘향이 사이에서 항상 남 좋은 일만 시켜주고 자기들은 언제나 들놀이만 서는 모습이 남의 밑에서 뼛골 빠지게 고생하는 자기 모습 같더랍니다. 40대 때에는 변사또가 그렇게 불쌍하더랍니다. 그가 한 고을의 수령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생이 있었겠습니까. 당시의 관료들이 대부분 하던 대로 자신도 조금 즐겨보려 한 것 뿐인데 그 춘향이라는 못된 것에게 걸려서 삭탈관직에 멀리 귀향까지 떠나는 변사또의 모습이 명예퇴직을 당해 자리에서 밀려나는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지더랍니다. 그리고 50대 후반에 다시 춘향전을 펼쳐보니 이번에는 월매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춘향전에 나오는 인물들은 막판에 다 자기 짝을 찾아가는데 유독 월매만 덩그러니 홀로 골방에 남겨져 곰방대를 빨아대는 처량한 모습이 아내를 먼저 보내고 자식들 다 출가시킨 뒤 홀로 남겨진 자신의 모습 같아서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이기적입니다. 항상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려 합니다. 게다가 자기 자신 조차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줄기차게 바뀝니다. 변덕스럽기가 칠면조 사촌입니다. 자기가 좋으면 남들도 좋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반대로 자기가 싫으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분명히 싫어할 것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세상살이 속에는 항상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고 말씀하신 것은 정말 황금과 같은 통찰력 있는 지적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정확하게 간파하신 것입니다. 이제 온 인류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려고 편한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척박한 이 땅으로 이민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즘은 그 유래를 찾아 보기 힘들만큼 전 세계가 경제적인 침체기라고 합니다. 지구촌 곳곳에 이상기후와 잔혹한 테러가 발생하고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각박하고 이기적입니다. 이번 대강절 기간에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기꺼이 자신을 비워 비천한 짐승의 여물통 속으로 화육하신 아기 예수님의 숭고한 희생이 우리들의 마음 속에 깊이 아로새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자리가 아닌 남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 그것이 바로 성탄절의 기본적인 출발점일 것입니다.

2008-12-02

[신앙의 샘]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어렸을 적 크레파스를 선물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 12색 24색 36색 세트로 판매되었는데 부모님께 12색 세트를 선물받으면 친구들이 가진 36색 세트가 그렇게 아쉽고 갖고싶었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정작 그림을 그리다보면 12색도 다 활용하지 못할때가 많고 계속 닳아 없어지는 색은 3-4색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저에게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3-4색을 적절히 배합하면 24색 36색 이상의 색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지 않은가 합니다. 무언가 복잡하게 많이 아는 것은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몸에서 태우지 못하는 영양소를 과잉하게 섭취하면 남아도는 영양소는 독이되고 결국 당뇨가 찾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은 단순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성령과 함께 복음의 증인되라. 끝입니다. 율법에 대해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네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신앙생활에 대해 하시는 말씀은 간단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입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단순한 주님의 말씀을 복잡하게 만드는 은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이면 공부합니다. 그러나 공부로 제자가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목회현장에서 저도 그것을 실감했습니다. 교회의 지체들에게 지난주 설교 제목을 물어보니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솔직히 설교를 한 제 자신도 어떤 제목인지 가물 가물할 때가 있습니다. 셀모임에서도 시간이 아까워라 수많은 성경구절을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변화는 없고 지식은 쌓여갑니다. 영적 성장이 아닌 비만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사람들은 들은 것의 20%만 기억하며 그것도 복습하지 않으면 열흘 뒤에는 100%잊어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일단 교회를 나서면 설교의 20%만 기억하고 그나마 실천하지 않으면 혹은 같은 설교를 또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 앞에 하늘연교회는 과감한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성경공부처럼 진행되던 셀모임 교재를 대폭 수정하여 말씀은 한 주일에 한 구절씩만 제시하고 청년들이 그 말씀을 한주간 실천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 자매를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구절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3-4주라는 시간을 들여서 실천을 훈련했습니다. 애인정도는 되야 갈만한 데이트 장소에 지체들을 데려가고 인터넷을 통해서는 한사람씩 돌아가며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고 자신의 일처럼 서로의 문제를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할 뿐 아니라 셀에서 한 지체의 영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니다. 3주간의 사랑 실천 후 주일 예배에서는 설교를 생략하고 서로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교환하고 사랑의 편지를 낭독하도록 했습니다. 섬김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예배를 드리고있는 교회 어르신들을 초청하여 손수 만든 음식을 대접하도록 했습니다. 3-4개월간의 훈련이 끝나면서 교회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청년들은 사랑으로 똘똘 뭉쳤고 많지는 않지만 가르쳤던 모든 말씀을 기억합니다. 개개인에게서 영적 비만이 아닌 성장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눈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비밀은 단순했습니다. 실천이었습니다. 현대 시대에 우리는 홍수같은 정보와 가르침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지극히 단순한 신앙의 기본기를 다져야 합니다. 3색으로 거의 무한대의 색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의 기본기에 충실하면 다양한 영적인 경험과 기쁨을 맛볼 수 있게될 것입니다. 지식은 우리보다 많지 않으셨지만 말씀 사랑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도간에 사랑하는 신앙생활을 하셨던 항상 기뻐하셨던 우리의 부모님들을 기억해보십시오. 기쁨은 실천과 단순함에 있습니다.

2008-12-02

[사목의 향기] 예! 그리고 아니오!

옛날 로마에서 일어난 일인데 황제가 선조들의 동상을 전시해 둔 광장을 방문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신하를 불러 그 뜻을 전하자 그 높은 관리는 황제의 왕림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 광장을 시찰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비서에게 연락하여 자신의 방문을 통보하게 하고는 잡무를 정리한 곧 광장으로 향했다. 갑작스런 높은 어른의 방문 소식을 접한 광장의 소장은 직원들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면서 조각품 하나하나를 점검해 나갔다. 모든 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줄에 있던 동상에 금이 크게 나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리둥절 하면서 이를 어쩐다 시간은 없고… 잠시 골똘히 궁리하고 있는데 직원 하나가 기발한 의견을 제시했다. "소장님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흰 초의 눈물을 이용하는 겁니다." "뭐라고 초의 눈물이라고…"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그는 "좋아 기발한 생각이야."라고 화답했다. 이리하여 흰 초에 불을 붙여 떨어지는 촛물을 대리석에 적당히 발라 때웠더니 밀초와 대리석 색깔이 너무 흡사하여 금이 간 자국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소장과 직원들도 모두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 흐뭇하게 생각하고는 높으신 어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고관이 타고 오던 마차가 중간에 고장이 나는 바람에 다른 마차로 갈아타느라고 약간 지체하게 되었다. 한 여름이라 햇볕은 따갑게 쨍쨍 내리쬐고 온 천지는 용광로처럼 더운 날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고관은 다음 달에 황제가 이곳을 방문하게 되니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수행원들을 데리고 직접 광장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그런데 촛물로 땜짐을 한 그 동상은 너무 따가운 햇볕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하여 더운 날씨에 촛물이 서서히 녹아내려 금이 난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그 고관은 미소를 지으면서 소장을 격려했지만 대단히 화가 나 녹아내리는 밀초 위에 손가락으로 "sine cera" 라고 써버렸다. sine는 "...없이"라는 뜻이고 "cera"는 "밀초"라는 뜻으로 "밀초 없이"라는 라띤어이다. 이후 로마인들은 이 일로 인해 sincerus라는 말을 만들어 냈고 그 라띤어가 이딸리아어 불어 스페인어 포르뚜갈어 영어 등으로 파생되어 영어의 sincere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이 단어는 영어로 편지를 쓴 후 맨 뒤 이름 위에 서명하기 전에 Sincerely Yours라고 할 때에 종종 사용 된다. 편지 쓴 내용이 사실이며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솔직하게 썼다는 말일 것이다. 편지에서 내가 쓴 내용이 진실하다고 그렇게 쓰는 사람도 있고 누구와 말을 할 때도 이런 단어를 쓰기도 한다. 성경을 보면 거짓말은 악마가 제일 먼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약하고 호기심이 많은 여성 하와를 속여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했다. 악마가 뱀의 모습으로 나온 것은 재미있는 우화로 꾸민 것이지만 거짓말을 하게 된 인간의 본성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은 "선은 행하고 악은 피하라" 라는 윤리적인 요청에 속한다. 살아가면서 진실과 거리가 먼 일이나 거짓말을 들을 때도 있고 이와 연관된 보도들을 접할 때도 있다. 진실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거짓은 불안하게 한다. 잠시 또는 순간적으로 속인 일이 눈가림으로 통과되는 수가 있어도 내 안에 살아 움직이는 양심은 "이 놈"이라고 꾸짖을 것이다. 양심은 살아있는 하느님의 목소! 리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라고 하셨고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태 537).

2008-12-02

[지혜의 향기] 새벽 윷놀이

처마 끝에 밤새 겨울비가 추적인다. 얼마 전 LA 주위 마른 하늘을 부옇게 덮으며 핏빛 태양을 재구름으로 가렸던 산불의 마지막 남은 불씨가 꺼지나 보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시정에 돈은 마르고 사람들의 어깨는 쳐졌다. 컴퓨터 앞에서 일자리를 찾다 지친 젊은 졸업생은 손가락을 마우스에 얹은 채 마냥 생각에 잠겼고 기름값이 치솟을 때나 이제 도로 내릴 때나 그저 한산할 뿐인 옷가게의 카운터 종업원도 주인도 이젠 눈치 볼 것도 없이 서로의 사정을 훤히 아는 바 되었다. 교회나 성당은 어떠려나 사람들은 어쩌면 좀 더 진지하게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는 것도 같다. 무엇이 잘못 되었고 누구의 탓인가? 인드라의 그물에 걸린 우리 모두의 탓 그 모든 중생들이 이때도록 홀로 혹은 함께 지어 온 좋은 업 나쁜 업이 얽혀 지금 우리가 금융난 경제난이라는 보답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 새벽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빗방울 소리만큼 많은 무고한 생명들의 단말마가 또 다시 들려온다. 하지만 이렇게 쳐져만 있을 것인가? 이럴 땐 후다닥 심기일전 떠들썩한 윷판이라도 한 번 벌여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미국에 와서 절에서나 어떤 모임에서 한두 번 윷놀이를 한 적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제약이 여기서는 이웃을 생각해서 맘 놓고 떠들기가 뭣한 것이다. 하지만 조용히 포커페이스로 둘러앉아 윷가락을 던지고 말을 옮기고 하는 것은 그림이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어릴 때 시골에서는 그믐을 보내고 새해를 맞거나 하면 꼭 윷 놀다가 목 쉰 이들이 한 둘은 있어 세배를 왔었는데. 윷이란 말은 본래 소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윷놀이는 유래가 참 오래 돼서 옛 부여에서 각 부족에 가축 이름을 붙여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부르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도 한다. 도 개 걸 윷 모 하는 것이 돼지 개 양 소 말의 옛말이 바뀐 거라고 하니까. 어떤 이는 삼국 시대에 이런 놀이가 있었다는 증거가 우리 옛 문헌이나 일본 측의 문헌에 있다고도 하고 혹은 중국이나 몽고 등 주변 나라의 풍속에서 근거를 찾아보기도 한다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도 확실히는 그 유래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일 기원설이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물론 불교 기원설이다. 신라시대에는 일종의 계모임인 보라는 것이 있어 불자들이 1년에 한 번 날짜를 잡아 낮에는 경을 읽고 공부하며 밤에는 자신의 잘못과 허물을 뉘우치는 참회의식을 했는데 그 중에 점찰보라는 법회가 있었다. 이 때 불자들은 미리 나무 막대기 열 개를 준비해서 거기에다가 각각 불교에서 말하는 열 가지 죄악 즉 십악을 써 넣었다. 십악이란 알다시피 내 몸이 짓는 살생 도적질 사음이 있고 입이 짓는 거짓말 두 말 못된 말 꾸밈말 그리고 내 마음이 짓는 것으로는 욕심 성냄 어리석음인데 합이 열이다. 역시나 입이 그 중에서도 가장 업적이 많다. 불자들은 법회에서 이 십악 막대기를 던져 올려 뒤집혀 나타난 죄목을 자기가 전생에서 저지른 죄악이라 여기고 무조건 참회하였는데 지금의 윷놀이가 바로 이 법회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잠이 깨어 어둠 속에 혼자 자리에 누운 채 윷놀이를 해 본다. 두 손을 모아 십악 막대기들을 움켜 희붐한 천정으로 높이 던져 올리니 아뿔싸 물고기 배처럼 모조리 뒤집어져 후두두둑 내 가슴에 쏟아져 내린다.

2008-12-02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수녀원 뒤뜰의 구덩이

#풍경1 : '봉쇄 수녀원'을 아세요? 이곳의 수녀들은 평생 바깥 출입을 하지 않죠. 수도원 안에서만 삽니다. 묵상과 관상 기도와 노동으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바치는 거죠. "이곳의 수녀가 되겠습니다"라며 맹세하는 종신서원식의 풍경도 남다르죠. 서원자는 바닥에 팔을 쭉 뻗고 십자가 모양으로 엎드립니다. 그리고 그 위에 꽃이 뿌려지죠.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그게 쌓이고 쌓이고 또 쌓여서 서원자의 무덤이 됩니다. 꽃무덤 다름 아닌 '십자가의 꽃무덤'이죠. 서원자는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겁니다. 그 '죽음의 길'을 서원을 통해 가는 겁니다. #풍경2 : 어느 봉쇄 수녀원의 풍경입니다. 종신서원식을 마치면 원장 수녀가 부른 답니다. 갓 들어온 수녀는 원장 수녀를 따라가죠. 어디로 가냐고요? 봉쇄 수녀원의 뒤뜰이죠. 그곳에는 '무덤'이 있습니다. 평생을 수녀원 안에서 예수를 찾고 기도하고 예수를 찾고 기도하며 살다 간 '선배 수녀'들의 묘지죠. 원장 수녀는 거기서 삽을 하나 건넵니다. 그리고 "구덩이를 파세요"라고 말하죠. 그럼 신참 수녀는 직접 삽으로 땅을 파죠.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구덩이. 꼭 자신의 몸을 누일 만큼의 구덩이를 말입니다. 구덩이를 다 파면 원장 수녀가 말하죠. "보세요. 이 구덩이가 수녀님이 묻힐 곳입니다. 이제 이 구덩이는 덮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파인 채로 그냥 둡니다. 수녀님이 훗날 이곳에 누울 때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봉쇄 수녀원 뒤뜰에는 묘지도 여럿 빈 구덩이도 여럿입니다. #풍경3 : 그럼 '봉쇄 수녀원'의 수녀들은 절대 밖으로 나올 수가 없을까요? 가톨릭에선 이에 대해 '떠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 가지 경우에만 바깥 출입이 허용된다는 거죠. 첫째 수녀원에 불이 났을 때 둘째 몸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갈 때 셋째 교황이 한국을 방문할 때입니다. 실제 1980년대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도 '봉쇄 수녀원'은 외출을 허락했습니다. 그만큼 '봉쇄 수녀원'의 각오는 각별합니다. 나의 기도 나의 수행 나의 묵상 나의 죽음을 향해 지르는 '빗장의 강고함'이 놀라울 정도죠. 그곳에선 종종 '죽음'에 대한 묵상도 합니다. 그럴 때 수녀들은 수녀원 뒤뜰에 모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묻힐 '무덤 구덩이' 앞에 앉습니다. 다들 구덩이를 바라보죠. 그리고 눈을 감습니다. 나의 무덤 앞에서 나의 하루를 살피는 거죠. 그렇게 나의 기도 나의 삶 나의 주님을 짚어보는 겁니다. 사람들은 말하죠. "그건 종신서원을 한 수녀님들 얘기다.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일상이 전쟁터다.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기도 바쁘다" "여기가 무슨 '봉쇄 수도원'인 줄 아나?" 이런 반응들이 쏟아지죠. 그런데 '현문우답'은 '수녀원 뒤뜰의 구덩이'에 주목합니다. 왜냐고요? 우리에겐 그 '구덩이'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내가 죽고서 파는 구덩이가 아니라 내가 살아서 파는 구덩이 말입니다. 그럼 묻겠죠. "우리는 성직자가 아니다. 어디에 구덩이를 파야 하나?"라고 말이죠. 우리가 팔 곳은 '수녀원 뒤뜰'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공원묘지의 양지바른 언덕도 아닙니다. 바로 '내 가슴 속' 입니다. 거기에 구덩이를 파야죠. 사도 바오로(바울)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린도전서 15장31절)"고 했습니다. 그건 내 마음속에 '구덩이'를 파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죠. 집착과 욕망으로 얼룩진 나 그렇게 예수에게서 멀어지는 나를 매순간 죽여본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말이죠. 그렇게 죽은 나를 묻어본 사람만이 토할 수 있는 말이죠. 그런 사람은 알죠. 내 마음의 구덩이 그게 바로 예수를 만나는 '통로'임을 말입니다.

200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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