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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추위 녹인 그 열기로

지난 20일 오바마대통령이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취임식이 열린 워싱턴DC의 당일 체감온도가 섭씨 영하 13도까지 내려갔습니다. 이토록 추운 날씨 속에 진행되었지만 취임식의 열기는 그 추위를 녹이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맹추위와 뜨거운 열기. 저는 그리 썩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이 두 단어가 그날 취임식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가장 잘 나타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맹추위'는 오늘 우리가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이 직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자신이 직접 언급했듯이 '얼음처럼 찬 조류에 맞서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그런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낙심하고 있습니다. 자신감을 잃고 고통가운데 자포자기 하고 있습니다. '탐욕'이라는 암초를 만나 난파하는 뱃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 하는 미국과 세계가 이제 폭풍우를 뚫고 나가며 침몰하는 배를 구할 새로운 조타수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취임식장의 200만 명의 축하인파가 쏟아내는 열기에는 우리의 그런 바램과 희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60년 전에는 식당에서조차 거절당했던 사람의 아들' 흑인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그 취임식의 주인공으로 서있다는 자체가 이미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훌륭한 연설보다도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바마 새로운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보여준 통합정신입니다. 선거기간 중 표를 의식하고 말로만 '통합'을 외친 것이 아니라 대통령 당선 후의 그의 행보가 피부색과 계층과 성별을 아우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게 그가 듬직한 것은 그가 역사와 대화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정신은 역사를 읽는데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의 연설 속에는 늘 역사가 배어있고 역사속의 상황과 인물에게서 배우고 실천하는 자세가 돋보입니다. 이와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오바마의 힘이 인문학의 힘이라는데서 더 희망을 걸어보게 됩니다. 이훈범 기자가 '오바마의 힘은 인문학의 힘'이란 표제로 실은 칼럼입니다. '정말로 글을 쓸 줄 아는 자신에 대해 감동적이고 진솔한 글을 쓰는 아주 드문 정치인'이라는 평가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저는 그가 결코 경거망동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쉽사리 가치를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란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책이라고는 오직 성경만 읽는 신앙 좋은(?) 대통령의 독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러기에 기대는 배가 됩니다. '탐욕의 시대'를 보내고 '책임의 시대'를 외치는 그의 신념에 동의합니다. 취임을 앞두고 어린 두 딸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었습니다. "내가 대통령에 출마했던 것은 너희들과 이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서였다." 멋있습니다. 저는 그의 이 고백에서 그 진정성을 읽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오바마가 듬직합니다. 이제 취임식은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의 신임 대통령 앞에는 냉정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흑인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이루어 낸 그가 이 현실도 잘 극복해내기를 바랍니다. 취임식 장의 맹추위가 그날의 열기를 이겨내지 못했듯이 오바마의 리더십 아래서 우리도 굳게 뭉쳐 꽁꽁 얼어붙은 현실을 녹여내길 기대합니다.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역사에 위대한 대통령이었다는 평가가 더해지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바마 대통령을 축복하소서.

2009-01-27

[신앙의 샘] 영혼을 변화시키는 열정

기독교 역사에 두가지 열정이 보입니다. 첫째는 한 영혼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은 지극히 단순했습니다. 책을 저술하시지도 교회를 세우시지도 않았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셨을 뿐입니다.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들을 만들 수 있을만큼 사랑하시고 영향력을 주신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뒤집어졌습니다. 초대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이 역사하신 교회였지만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없습니다. 자랑할 수 있는 흔적이라곤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 예배했던 카타콤밖엔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통해 나라가 바뀌고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은 모두가 압니다. 모라비안 교파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 사람을 변화시켜 제자만들고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이 활동했던 2세기동안 기독교 전체에서 200년간 보낸 선교사보다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열정적인 기도의 모습을 통해 죤 웨슬리가 감리교를 창시했다는 것도 모두가 잘 압니다. 한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를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반면 눈에 보이는 것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열정이 있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은 150여년에 걸쳐 지어졌습니다. 최고의 장식과 예술품으로 채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당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면죄부를 낳게 한 탐욕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우던 스펄젼 목사님과 뜻있는 사람들은 당시 5000여명이 한번에 들어가 예배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을 건축했습니다. 15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예배당에서는 100여명도 안되는 성도들이 예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윌로우크릭 교회의 자체 신앙 진단 보고서가 공개되어 충격을 준 일이 있습니다. 열성적으로 눈에 보이는 봉사를 많이 할수록 개인의 신앙이 성장한 것일 거라는 예상이 깨졌습니다. 분석을 통한 그래프는 가시적인 프로그램 참여도와 주님을 향한 믿음의 성장이 거의 무관함을 나타냈습니다. 보고서를 제작한 팀은 '우리가 당면한 영적 문제는 정책을 수정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림을 처음부터 완전히 다시 그려야하는 지경'이라는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이런 예들은 한 사람의 내면적 변화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치중할 때 일어나는 결과들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에서 천국은 누룩이 번져나감 같다고 하셨습니다. 변화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이제 변화된 두 사람이 다른 두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제 할아버지 할머니는 8남매를 두셨고 수십명의 손주와 증손주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 두분이 하신 일은 8남매를 사랑하시고 양육하신 일밖에는 없습니다. 갓난 아기였던 8남매가 성장하자 어린 형제 자매를 위해서는 젖병을 물렸고 장성하여서는 수많은 자녀를 생산했습니다. 우리 교회들의 열정은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자주 생각합니다. 정신차려서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세상이 만들어낸 성공신화에 휩쓸려 영적 고아원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고아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 다들 오셨습니까? 입을 크게 벌리십시오. 마음껏 드십시오. 드셨으면 돌아가십시오. 당신은 일주일간 잊혀진 존재입니다.' 제 안에 예수님의 지극히 단순한 열정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한 영혼을 향한 열정입니다. 아버지가 필요한 영혼에게 아버지가 되고 싶은 열정입니다. 교회안의 장성한 청년들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동역하니 행복한 시간입니다.

2009-01-27

[기독교인의 삶] 왕비호와 인생의 겨자씨

한국에서는 왕비호(본명 윤형빈)라는 개그맨이 인기가 있나 봅니다. 최근 마켓에 갔다가 일간스포츠 USA의 연예 섹션을 보다 왕비호 씨 인터뷰가 나와서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인터뷰 기사를 쭉 읽어내려가는데 이 개그맨이 중간에 의미심장한 말을 했음을 발견했습니다. "행복은 여기저기 널려 있고 그걸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성경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와 같은 하늘나라가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천국은 겨자씨와 같아서 잘 보이지 않고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자만이 진정으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것 같습니다. 왕비호 씨는 이 인터뷰에서 더욱 깊이 있는 말을 했습니다. "서울 옥탑방에서 보는 여름 밤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어요." 왕비호라는 개그맨은 인생이 무엇인지 좀 아는 사람 같았습니다. 물론 그는 일종의 '독설 개그'로 원성이 자자하지만 적어도 인생을 보는 눈(life navigation)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더 성숙해지면 그도 독설 개그를 중단하겠죠. 얼마 전 제가 섬기는 교회의 대학청년 모임 때 한 청년이 "야학에서 어린 아이들을 위해 봉사를 했는데 어린이로부터 감사의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찡했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야말로 예수께서 말했던 겨자씨와 같은 하늘 나라 발견의 좋은 예입니다. 큰 것만을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게 겨자씨이겠죠. 큰 비전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고수하면 겨자씨는 보이지 않겠죠. 거기에 핵폭탄 같은 비밀이 담겨 있는데 말이죠. 작은 것에서 찾게 되는 행복. 그것이 바로 겨자씨와 같은 하늘 나라입니다. 대학청년 모임 때 한 청년이 그랬습니다. "인생 뭐 있겠습니까? 인생은 한 방입니다." 모임에 모인 우리는 한바탕 웃었지만 그 청년의 말에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겨자씨에 담겨 있는 비밀을 아는 자야말로 인생에서 얻게 되는 커다란 한 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13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표준새번역) 이 내용을 읽을 때 어떤 부분이 더 눈에 들어오시나요? 대부분의 경우 겨자씨가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되는 부분이 더 눈에 띌 것입니다. 커지는 것에 우리는 집중돼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겨자씨에 더 집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힘없고 순진한 어린 아이들을 보며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죠. 남편이 여럿 있었던 여인 무시받던 사마리아인 병자들 약자들을 찾아 나서 그들과 대화를 했던 분이 예수님이죠. 예수님이야말로 겨자씨를 볼 줄 아는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그러셨습니다. "자녀와 신나게 놀고 집안에 웃음꽃이 피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역이다"라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 큰 나무로 만들 수 없는 부모로 보일 수 있겠죠. 그러나 그런 자녀의 가슴 속에는 겨자씨가 자라납니다.

2009-01-27

[사목의 향기] 뭉클한 '아프리카 후원회'

지난 1월 17일 미주 가톨릭 아프리카 후원회 (Catholic Foundation for African Mission) 창립총회가 있었다.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하느님의 축복을 빌며 이 후원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측은지심이 있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으로서 신앙의 입장에서 보면 성선설에 기초를 둔 것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이를 심어주신다고 믿는다.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먹이고 싶고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입혀주고 싶고 쓰려져 있는 사람을 보면 일으키고 싶으며 피 흘리는 사람이 있으면 치료해주거나 병원에 데리고 가며 불의하게 당하는 사람이 있는 도와주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태석 신부님이란 분이 있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의 신부로서 아프리카의 수단이라는 나라에 선교사로 가서 일하고 있다. 그 곳에서 1인 3역 이상을 하고 있다. 의사요 교육자며 신부로 일하며 학생들에게는 좋은 아버지와 같다고 한다. 여러 가지로 열악한 아프리카의 수단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를 통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어 아프리카 지도를 한 번 더 살펴보게 했다. 그분의 헌신적인 활동상을 보고 일각에서는 그를 한국의 슈바이쳐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한 마디 한다면 우리나라 교회는 외국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왔다. 동족상잔의 6.25 전쟁 이후 우리는 미국의 CRS 독일의 Misereor과 Missio 벨지움의 Cebemo 등 여러 나라와 구호단체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식민생활에서 수탈당하고 전쟁의 페허 속에서 먹고살기가 어려웠던 실정이라 주는 것은 무엇이나 받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해 "받는 교회"였다. 그것이 '88올림픽 개최 이후 경제성장과 더불어 서서히 주는 교회로 변모해 갔다. 동남아의 여러 교회들이 우리에게 손을 벌리고 있고 교황청으로부터도 여러 교회를 도와주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경제적으로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60여년 전 우리나라 교회에 일어난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선교사 파견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심지어는 러시아까지도 우리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이번 아프리카 후원회 발족도 그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교회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모된 것이다. 요즈음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사방에서 어렵다는 소리들이 들리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아프리카와 같은 어려운 나라의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 십시일반이란 말처럼 우리의 정성어린 마음이 모여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이태석 신부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최후심판의 기준을 제시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은 큰 예수님께 드리는 정성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무수히 많은 작은 예수님에게 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자선에 임할 것이다. 이번 창립총회에는 종교를 초월하여 개신교 목사님 불교의 스님 원불교의 교무님도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좋은 일을 하는 데 종교가 걸림돌이 될 수 있겠는가. 아름다운 세상 평화로운 세상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서로 힘을 모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고 바람직한 일인가.

2009-01-27

[지혜의 향기] 아기보살 잠재우기

일전에 한국에 있는 형님이 첫 외손자를 봤다며 이메일로 아기 사진을 몇 장 보냈는데 한 눈에 우리 집안 핏줄이라는 게 확 끼치며 나를 한참이나 동물적인 감각 속에 빠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법당에 누가 갓난아기라도 안고 오면 참으로 향긋하고 귀여워서 체면 불구하고 한 번 건네받아 안아 보고 싶어지는 게 나도 어느새 나이자랑 할 때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조짐인지. 스님의 고매한 법문을 알아들을 리 없는 천진법사 아기보살이 처음엔 입술만 삐죽거리다가 포대기에 누운 채로 팔을 휘젓고 얼굴을 붉으락거리는 게 영 심상치가 않으시다. 마침내 참다못한 아기보살이 대성일갈 '그 무슨 말씀인고!' 고주파의 '할'을 '삐익~삑' 연거푸 터뜨리면 옆에 앉았던 아기 아빠가 놀라 당황하여 대신 얼른 포대기 째로 모시고 나가 뒷문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오히려 흐뭇하고 정겹다. 뱃속의 아기는 열 달 내내 엄마의 심장이 뛰는 규칙적인 소리를 듣고 자라다 바깥세상에 나온다. 배가 고프면 울고 몸이 불편해도 경고음을 울리지만 엄마가 심장의 박동소리대로 토닥토닥 가슴을 두드려 주면 어느새 평온 속에서 스르르 잠이 든다. 강약 이박자의 자장가를 심장 박동과 같은 빠르기로 낮게 흥얼거려도 좋고 엄마의 심장이 있는 왼 가슴 쪽으로 아기를 보듬고 있으면 더 효과가 있단다. 아마 조용한 목탁 소리도 좋을 것이다. 나이가 한참 들었든 죽음이 코앞에 닥쳤든 우리는 사실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아기와 같다. 그 동안 저 시끄럽고 뻑적지근한 시장통이나 골목의 먼지 구덩이에서 놀다 왔지만 마지막엔 그 옛날 뱃속에서 들었던 엄마의 심장 고동소리에 파묻혀 포근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하기야 요즘은 입는 것이며 행동하는 것이며 나이 들수록 더 알록달록 젊은이 흉내를 내기도 한다니까 안 그러실 분도 혹 계실지 모르지만. 그런데 우리를 토닥여 줄 이러한 육신의 어머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이 세상에 머물러 주시지를 않는다. 백중마다 재를 지내고 추석 성묘를 빠뜨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살아오시지를 않는다. 이 자리를 공평하게 메워 주실 분이 누구시던가? 삼계도사 사생자부 온 세상을 이끄는 스승이시요 온 생명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부처님이 아니신가! 이렇듯 우리의 어머니요 아버지이신 부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토닥이고 안심시키시며 우리가 울고 보챌 때 포대기에 싸안고 나가 달래 주시는 분이라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군가? 뭐든지 동생보다 가진 개수가 많아야 하는 이기심의 황제요 어리석은 독재자 공깃돌은 발로 차 흩어 버리고 팔짝팔짝 뛰고 노는 고무줄은 끊어 먹고 달아나는 심술꾸러기에다가 개구리든 잠자리든 아무 거나 재미삼아 찢어 죽이는 잔인한 장난꾸러기가 아니었던가? 그런 아이로 태어나 그런 또래와 어울려 놀며 골목에서 뒹굴고 다투다 다쳐 울며 돌아와도 그 생채기 감싸 주시며 포근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지의 고동소리 들려주시는 분이 부처님이시다. 불교가 있어야 할 이유 종교의 가장 중심 되는 본연의 존재 이유가 이것이 아니던가? 앞으로 골목에 나가 놀 때는 어떻게 하라 동무들과 어울릴 때는 어떻게 조심하며 잘 놀 것인가 하는 타이름은 그 다음 얘기다. 그런데 세상에는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아이를 달래기는 커녕 곧 이 세상이 끝장날 듯이 겁을 주어 울부짖게 만드는 일도 없지 않다. 중생을 안심시키는 것 그 얼마나 큰 공덕일 것이며 중생을 제 맘대로 겁주는 것 그 얼마나 크나큰 업보를 받으리?

2009-01-27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붓다의 유언

불가(佛家)에서는 입적 순간의 '마지막 한마디'를 중요하게 여기죠. 그래서 제자가 귀에 대고 조용히 묻곤 합니다. "스님 여여(如如)하십니까?" 죽음의 눈앞에서 행여 마음의 자리에 '집착의 파도' '아쉬움의 파도'가 밀려오진 않는가를 묻는 거죠. 그럼 소위 '4대 성인(聖人)'으로 꼽히는 이들은 어땠을까요. 붓다와 예수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한마디'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들이 담겨 있습니다. '현문우답'은 앞으로 한 편씩 이들의 최후와 유언에 담긴 '숨결'을 담아볼까 합니다. 먼저 붓다의 최후를 볼까요. ▷풍경1= 2500년 전이었죠. 붓다는 35세 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45년째 설법을 했죠. 그러던 어느날 붓다는 대장장이집 아들 쭌다의 망고 숲에 머물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쭌다는 붓다를 찾아가 법문을 듣고 공양(식사)을 올렸습니다. 버섯이나 돼지고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은 붓다는 탈이 나고 말았죠. 출혈이 심한 설사병에 걸린 겁니다. 당시에는 식중독(추정)이 무척 큰 병이었나 봅니다. 붓다는 결국 죽음을 예감했죠. 월드컵 결승전의 승부차기에서 골을 놓친 선수는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죠. 그럼 상한 음식을 대접해 성인(聖人)을 죽게 한 사람의 양심적인 가책은 얼마나 될까요. 붓다의 위대함은 여기서도 돋보이죠. " 붓다는 쭌다가 겪을 슬픔과 자책을 정확히 예견했죠. 그리고 처방전까지 내렸죠. "쭌다의 슬픔은 이렇게 없애면 된다. '쭌다여 여래가 당신의 공양을 마지막으로 드신 후 열반에 드신 것은 당신의 공덕이며 행운입니다. 쭌다여 나는 이 말씀을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붓2다는 쭌다에게 이 말을 그대로 전하도록 했습니다. 그건 바로 '붓다의 자비'였습니다. 붓다에겐 '중생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매듭이 곧 나의 매듭'이기 때문이죠.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풍경2=인도의 쿠시나가라에서 붓다는 결국 죽음을 맞게 됐습니다. 주위에는 제자들이 서 있었죠. 붓다가 말했습니다. "그대들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그리고 붓다는 숨을 거두었죠. 당시 붓다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갈렸죠. 아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은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어떤 이는 팔을 휘저었고 어떤 이는 이리저리 뒹굴며 슬픔을 토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욕망을 벗어난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죠. 그들은 "이 무상한 것들이 어떻게 영원하기를 바라는가"라며 붓다의 죽음을 고요하게 바라볼 뿐이었죠. 붓다의 유언은 참 간결합니다. '모든 형상은 무너진다'와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이유가 있죠. 봄은 왔다가 또 가죠. 꽃은 피었다가 또 지죠. 세상의 모든 형상은 무너지게 마련이죠. 육신도 그렇습니다. 육신의 무너짐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육신 속에 갇히지 말라고 한거죠. 육신에 갇히지 말고 집착에 갇히지 말고 욕망에 갇히지 말라는 거죠. 눈 앞에 보이는 이 세상에 갇히지 말라는 거죠. 갇힌 자는 육신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순간에도 마음은 그 문턱을 넘질 못합니다. 육신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에도 마음은 이 세상을 붙잡고 말죠. 그래서 흐르질 못합니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움직이고 비가 내리듯이 흐르질 못하죠. 그래서 이 거대한 우주의 숨결 속으로 녹아들지 못하죠. 그래서 붓다는 말했습니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유언의 순간에 딱 한 마디 참으로 간곡하게 말했죠. "부지런히 정진하라."

2009-01-27

[기독교인의 삶] 겨울 여행

겨울비가 소리 없이 가만가만 다녀갑니다. 말 없는 미숙 자매가 비 내리는 산길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운전을 합니다. 말 많은 저도 오늘은 조용합니다. 비에 젖은 산과 들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어제 우리는 5번 북쪽을 타고 138번 동쪽 랭캐스터와 팜데일로 세 시간 가량 운전을 하고 왔습니다. 도착지는 사인이 크지 않아서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천천히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고 저는 목을 길게 창 밖으로 빼고 봅니다. 드디어 산장의 사인이 보입니다. 작게 Anchor 글씨가 비에 흠뻑 젖어있습니다. 긴 광야 길에서 만난 언덕 위에는 통나무집 한 채가 보입니다. 저 멀리에. 어린아이 키 정도의 나무문이 유치원 개구쟁이가 몰래 빠져나간 흔적처럼 열리다 말았습니다. 아마도 비 탓일 거에요. 미숙 자매가 제게 물었습니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을 까요?" "글쎄?" 그렇게 말하면서도 저는 차에서 내려 문을 활짝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저는 여행자이고 손님이니까요. 간신히 들어선 산장입구에는 수만 그루의 죽은 복숭아나무가 양렬로 줄지어서 길게 입구까지 여행자들을 안내합니다. 누군가 꿈을 안고 이렇게 수만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심으면서 오늘처럼 비가 풍성하게 내리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이렇게 비가 오고 봄이 되면 죽었던 복숭아나무에 안개처럼 뽀얗게 꽃이 펴서 하늘을 덮고 꽃향기는 바람을 따라서 산과 계곡을 누빌 거라고 꿈을 꾸면서. 줄지어선 나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땅 주인은 나무의 열매가 아닌 꽃의 향기로도 행복했었겠지요. 저는 산장입구부터 빗속의 안개처럼 마음이 싸~ 했습니다. 죽어가는 나무와 땅을 버리고 떠나야 했을 사람들의 추억을 생각하니 또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넓고 텅 빈 겨울 산장에 자동차 소리를 듣고 개 한 마리가 빗속에서도 연신 꼬리를 흔들며 두려움 없이 함박웃음으로 달려옵니다. 아마도 이 집 주인이 좋은 사람들인가 봅니다. 강아지가 사람 얼굴을 가리지 않고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저는 작년에 이 산 언덕을 몇 번이나 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춥고 비가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들도 가끔은 감정의 변화로 서로 다투기도 하나 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모든 열정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산언덕 구비 구비를 돌아보면서 풀 한 포기에도 인사를 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을 지나는 저는 내일의 구름과 바람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차창으로 흐르는 비에 젖은 Anchor(회복의 집) 온누리 교회 기도원은 길 잃은 여행자들의 길을 안내합니다. 겨울비가 내리는 기도원 길은 풍요롭습니다. 메마른 산과 들에는 구름 속에 숨었던 비가 얼굴을 내밀고 자신의 상처를 눈물로 드러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자연이 아름답습니다. 우리 사람들도 많이 울어서 아름다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겨울 여행은 엠마오로 마을로 가는 길의 두 제자처럼 등 뒤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계셨겠지요.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누가복음24;29~31)

2009-01-20

[목회 칼럼] 하늘나라의 비망록

성경에는 몇 종류의 책이 나온다. 대표적인 책은 생명책이다. 생명책은 영생을 얻는 사람들에 관한 책이다. 교회를 좀 다닌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어떻게 모습일까? 영생을 얻는 사람들의 이름이 쭈욱 나열되어 있을까? 생명책으로 유명한 성경은 계시록이지만 사도 바울도 이 책에 관해서 언급한다. 빌립보서 4장 3절이다. 당시 빌립보교회에는 지도자 급 두 여성도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바울은 이들을 도우라고 하면서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한다. 언젠가 이 구절을 연구할 때 흥미로운 주석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생명책에는 이름 만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행한 일들도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만약 이 주석가의 생각이 옳다면 내가 행한 어떤 일이 기록되어질까? 기록된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그분의 뜻에 합한 일이란 의미일 것이다. 말라기에는 하늘 나라의 '비망록'이 나온다(3:16). 나는 개인적으로 이 비망록도 생명책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한글개역 성경은 이 책을 '기념책'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한 말을 기록한 것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야기와 원리로 가득하다. 경제에 대한 불안의 말 정치적 걱정 남에 대한 불평 낮은 자존감에서 나오는 어두운 말들 저주 독설 자기 자랑 등이다. 우리 시대에는 말라기 시대 처럼 하나님 믿는 것이 어리석다고 주장하는 행동과 원리가 너무나 많다. 이런 꿀꿀한 상황 중에도 빛을 발하는 소리들이 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말이다. 특히 자신이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을 확실하게 인정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오히려 도전과 위로를 주는 소리다. 이런 말은 인간 사이의 갈등을 없애고 마음에 온기를 준다. 비망록에는 이런 '말의 행위'들이 기록된다고 생각한다. 작년 봄 어느 날 당시 교통 사고를 당해 크게 고생하던 성도를 심방했다. 깜짝 심방이었다. 이 성도는 삶의 터전을 미국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비지네스를 막 오픈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기점에서 교통 사고를 크게 당해 몸이 심하게 망가졌다. 미국에 오기 전에는 교회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깜짝 심방은 그 성도의 생일이기에 담임목사와 몇 몇 가까운 분들이 알리지 않고 병원에 가서 그 곳에서 생일 파티를 준비한 것이다. 우리는 그를 이렇게 위로하려 했다. 그는 우리의 방문을 무척 반가워했다. 케잌이 등장하면서 파티 분위기가 시작 되었는데 겸연쩍은 일이 발생했다. 사고를 당한 환우는 정색을 하면서 오늘이 자기 생일 아니라는 것이다. 아뿔사! 실수한 것인가? 그는 말을 이어간다. '나의 생일은 사고 당한 날입니다. 그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순간 우리는 얼마나 큰 마음의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를 위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고 도전한 것이다.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횟수를 열 손 가락에 꼽을 수 있는 초신자인 그는 온 몸이 부숴진 상태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말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 났다. 나는 이런 말들이 하늘 나라 비망록에 적히고 있음을 경험했다.

2009-01-20

[신앙의 샘] 고통을 축복으로 바꾼 은혜

22년 2개월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한국 가정의 안방에 정감을 듬뿍 불러 일으켰던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 드라마 이름은 '전원일기'입니다. 22년 2개월 동안 한국의 안방에 찾아온 전원일기가 막을 내린 이유는 더 이상 소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이야기 거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의 삶에 소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복 받은 이야기 즉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나를 수렁에서 건져 주시고 나의 피할 길을 내어 주시고 나를 부족한 것 없이 채워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내가 부유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부유함의 척도가 무엇입니까. 부유함은 소유함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부유함은 존재함에 있습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를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올바른 존재함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선포하신 팔 복을 받고 누리는 삶을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 2009년 특새는 여느 특새보다 힘이 들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아내 리사(Lisa) 사모가 응급치료를 받아야 했고 24시간 내내 아파하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말씀을 준비해야 됐기 때문입니다. 이번 특새의 주제는 '팔복 이야기'인데 복을 선포하는 목사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내를 보며 축복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저는 영적인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고통은 아무도 원치 않지만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아내는 고통의 시간을 통해 순결한 마음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은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을 하는 신비한 도구입니다. 마음은 사람의 인격이 흘러나오는 샘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순결한 마음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가식이 없이 진실하며 솔직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우리 모두에게 고통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길을 가면서 고통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언제 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고통을 축복으로 전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2009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지도 않으신 새로운 시간입니다. 미국 경제 위기로 많은 분들이 어려움이 있지만 이 어려운 시기를 축복으로 전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 복을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이 여덟 가지 복을 다 받으시는 2009년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009-01-20

[사목의 향기] 눈인사라도···

"안녕!" 하면서 아침에 서로 나누는 인사는 서로를 기쁘게 한다. 어른에게는 "안녕하십니까?" 또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드리는 우리의 예의범절은 자랑할 만하다. 여러 민족과 어울려 살다보면 여러 종류의 인사말을 들을 수 있는데 로마 같은 국제도시에서는 적어도 3~4개 언어는 늘 들을 수 있어 각 민족의 다양한 사고방식을 볼 수도 있다. 한 때 우리나라에는 영어식 아침 인사를 직역하여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말이 유행했는데 이곳 미국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정다운 감을 느끼곤 한다. "신부님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인사가 그것이다. 중동이나 라틴계 사람들의 인사는 너무 요란하다. 가벼운 포옹과 더불어 인사말이 수다스럽다. 로마와 미국 성당에 있을 때 주일 오전 제의방에 들어가면 전례 봉사자들이 6~7명이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과 한 번씩 포옹을 할 때는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 사람처럼 하라는 속담도 있지만 타 문화권에 젖어들기란 쉽지 않아 처음에는 힘들었다. 인사와 함께 몸짓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악수다. 악수는 요즈음 어느 민족에나 통하는 인사라 다분히 국제적이다. 원래 악수는 중세기 유럽에서 산길에 강도들이 숨어서 행인들을 노렸으므로 만나는 사람들이 "나는 강도가 아니오. 나에게는 무기가 없소" 라는 뜻에서 서로 손을 잡은 것이 그 유래다. 그러므로 상호 해칠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요즈음은 그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악수에도 격식이 있다지만 대부분은 별로 따지지 않는 듯하다. 그래도 격식을 따지는 사람들은 따진다. 여성과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다. 그 사람들이 악수를 청할 때 응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그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인사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자 존경과 친교의 표시다. 그리스도인 관점에서 말한다면 내가 인사하거나 악수를 나누는 저 사람도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고귀한 인격을 지닌 인격체이며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구원된 사람이므로 인사를 하거나 악수를 한다. 물론 이를 통해 사랑을 전한다. 한편 불자들의 인사법은 나에게 많은 관심거리였다. 불자들끼리 법당에서 나누는 인사는 종교적인 의식처럼 보여 신성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은 인사할 때 손을 합장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나는 이런 인사법이 좋다고 본다. 내가 인사를 하는 저 사람 안에 불성이 있기 때문에 정중하게 인사한다고 하니 얼마나 깊은 영성이 내재해 있는가. 이런 면에서도 종교간의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살아가면서 인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인사하여 손해 보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인사를 잘 하지 않아 거만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며 예의를 따지는 사람들은 인사하는 것에 따라 또는 하는 방식에 따라 좋은 점수를 주기고 하고 문제를 삼기도 한다. "나한테는 눈 한번 돌리지 않으시더라" 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그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눈인사라도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눈도장이라도 찍어두자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할 말은 없다. 예수님은 율사들과 바라사이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셨다. 그들은 인사를 자신들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책망 받은 것이다. 인사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와 친교와 우정의 표시이므로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인사하는 풍토가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먼저 인사하자는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면 우리 한인사회가 조금씩 좋아지고 건전한 방향으로 발전해 가리라 본다.

2009-01-20

[지혜의 향기] 우주는 큰 TV 같은 것

이 세상은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비롯한 만유가 이루어지고 사라지는 것인데 이러한 것을 연기법이라 하며 어떠한 유상무상을 막론하고 서로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멸하는 것이다. 우리가 불성을 확실하게 알고 내가 불성임을 자각하는 길은 우선 '물질은 없다' '우주는 공이다'라는 것을 먼저 확실하게 알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모든 현상계에 있는 우리의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어느 물질이나 만상이 서로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고 일체의 어떤 존재도 나와 무관한 것은 없으므로 이러한 우주의 상호 연관작용 연기를 진여연기라고 한다. 진여연기의 시초는 불성이다. 불성은 우주의 본질이고 생명의 본체이며 우리 마음의 근본이다. 비유컨대 영화나 TV의 화면이 그 실상은 빛과 그림자의 단순한 조합에 불과한 것처럼 TV의 화면이 전자파를 타고 온 광파와 전파가 이러 저리 활동하는 파장의 힘으로 이루어지듯이 다양한 형태의 생명과 지구 태양계와 은하계까지도 우주적 차원의 커다란 TV와 같은 현상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물질의 근본 구성요소를 원자라고 부른다. 이 원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고 있는데 원자핵은 다시 +전자를 띤 양자와 +도 -도 아닌 성질을 가진 중성자로 구성된다. 양자와 중성자는 또 쿼크라고 하는 소립자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생성 소멸을 계속하는 광명의 파동 현상이라고 한다. 연기도 업감연기나 12인연법이나 그런 차원의 연기는 물론 부처님께서는 근원적인 연기를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르치셨지만 우리가 근본 불교대로만 생각하여 연기법은 이것 저것 모여가지고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 이 몸뚱이도 지수화풍 4대(大)로 이루어지고 내 마음도 수와 상과 행과 식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불교도 굉장히 허무한 생각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은 이른바 진여연기라서 본래적으로 실존하는 진여불성을 우리가 상정을 해야한다. 진여불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허망무상한 허무감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인연 따라서 이것 저것 다 이루어진 것이 몸을 떠나면 그 때는 다 허무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으로 허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정도로 생각해서는 무상 불법대로 이치에 맞는 무상이 아니라 진실로 허망한 무상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연기법은 이른바 법계연기 진여연기까지 도달해야 한다. 무명에 따라서 업을 짓고 업을 따라서 고(苦)를 받는다. 이와 같이 무명과 업과 고의 세가지 법이 윤회무궁하게 돌아간다는 업감연기는 아직은 소승법문인 것이다. 그러나 원인도 진여불성이고 연도 진여불성이란 것이 이른바 진여연기요 법계연기다. 이것이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또는 기신론이나 연기법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중도주의다. 현상도 버릴 수 없고 공도 버릴 수 없는 중도인 것이다.

2009-01-20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예수님의 가장 큰 이적

#풍경1 :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맞바람이 불고 파도도 거셌죠. 새벽이 되자 뭍에 있던 예수님이 배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호수 위를 걸어서 갔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유령이다!"라고 소리쳤죠.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죠.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오너라"고 하셨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자 두려워졌죠. 그리고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허우적대는 베드로의 손을 잡으며 말했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으냐?" #풍경2: 이밖에도 예수님은 많은 이적을 보이셨죠. 성경을 보면 죽어가던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고 결혼식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또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리고 무덤에서 몸소 사흘 만에 부활하기도 하셨죠. '이적'을 어떻게 보시나요.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시각은 갈립니다. 사람들은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징표"라고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적의 능력은 당연한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에 대한 반박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사후에 기록됐다. 그래서 '이적'에 대한 내용은 덧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가공된 이야기'란 거죠. 또 어떤 이는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님은 몸의 부활이 아니다. 영적 부활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각자 입장에 따라 '주의'와 '분파'가 갈리기도 합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논쟁은 늘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현문우답'은 궁금합니다. 왜 사람들은 '이적이 사실이냐 아니냐'에만 매달릴까요. 왜 '몇 토막의 생선과 빵으로 수천 명을 먹이는 게 가능할까'만 따질까요. '현문우답'의 관심사는 '진짜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적 일화를 '누가 왜 만들었나'도 아닙니다. 대신 '현문우답'은 베드로를 묵상할 뿐입니다. 어떤 베드로냐고요? 물에 빠지는 순간의 베드로죠. 물 위를 걷던 베드로와 물에 빠진 베드로는 다르죠. 무엇이 다를까요. 그렇습니다. '두려움'이죠. 물 위의 베드로에겐 두려움이 없고 물 속의 베드로에겐 '두려움'이 있죠. 성경에도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돼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뿌리는 어디일까요. 답을 찾긴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두려움'은 수시로 올라오니까요. 그 바닥을 보면 알죠. 두려움은 어김없이 '나'라는 자아 '나'라는 에고가 생존의 위험을 느낄 때 뿜어져 나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물 위를 걷던 순간에는 '나'가 없었겠죠. 예수님 안에서 '자아'를 모두 내려놓았겠죠. 그런데 거센 바람을 보자 베드로는 겁이 났겠죠. '나'라는 에고가 죽을까봐 말입니다. 그래서 내려놓았던 자아를 다시 잡았겠죠.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믿음이 약해지는 순간에는 늘 '자아'가 올라옵니다. 그때는 멀어지죠. 예수의 숨결 예수의 평화 예수의 생명력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래서 '현문우답'은 '이적 이야기가 진짜냐 아니냐'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묵상할 뿐이죠. '생선과 빵' 일화도 마찬가집니다. 그걸 나누던 예수님의 마음 빵을 쪼갤 때의 온유함을 짚어볼 따름이죠. 그럼 예수님이 보이신 가장 큰 이적은 뭘까요. 그건 물을 포도주로 바꿈도 맨발로 물 위를 걸음도 아니겠죠. 우리가 '자아'를 비운 곳으로 밀려오는 온유함. 세상에 이보다 큰 이적이 있을까요.

200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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