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예수님의 가장 큰 이적
'진짜냐 가짜냐' 따지기 보단 메시지에 담긴 뜻 짚어 보길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죠.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오너라"고 하셨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자 두려워졌죠. 그리고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허우적대는 베드로의 손을 잡으며 말했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으냐?"
#풍경2: 이밖에도 예수님은 많은 이적을 보이셨죠. 성경을 보면 죽어가던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고 결혼식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또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리고 무덤에서 몸소 사흘 만에 부활하기도 하셨죠.
'이적'을 어떻게 보시나요.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시각은 갈립니다. 사람들은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징표"라고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적의 능력은 당연한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에 대한 반박도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 사후에 기록됐다. 그래서 '이적'에 대한 내용은 덧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가공된 이야기'란 거죠. 또 어떤 이는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님은 몸의 부활이 아니다. 영적 부활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논쟁은 끝이 없습니다. 각자 입장에 따라 '주의'와 '분파'가 갈리기도 합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논쟁은 늘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현문우답'은 궁금합니다. 왜 사람들은 '이적이 사실이냐 아니냐'에만 매달릴까요. 왜 '몇 토막의 생선과 빵으로 수천 명을 먹이는 게 가능할까'만 따질까요. '현문우답'의 관심사는 '진짜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적 일화를 '누가 왜 만들었나'도 아닙니다. 대신 '현문우답'은 베드로를 묵상할 뿐입니다.
어떤 베드로냐고요? 물에 빠지는 순간의 베드로죠. 물 위를 걷던 베드로와 물에 빠진 베드로는 다르죠. 무엇이 다를까요. 그렇습니다. '두려움'이죠. 물 위의 베드로에겐 두려움이 없고 물 속의 베드로에겐 '두려움'이 있죠. 성경에도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돼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뿌리는 어디일까요. 답을 찾긴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두려움'은 수시로 올라오니까요. 그 바닥을 보면 알죠. 두려움은 어김없이 '나'라는 자아 '나'라는 에고가 생존의 위험을 느낄 때 뿜어져 나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물 위를 걷던 순간에는 '나'가 없었겠죠. 예수님 안에서 '자아'를 모두 내려놓았겠죠. 그런데 거센 바람을 보자 베드로는 겁이 났겠죠. '나'라는 에고가 죽을까봐 말입니다. 그래서 내려놓았던 자아를 다시 잡았겠죠.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믿음이 약해지는 순간에는 늘 '자아'가 올라옵니다. 그때는 멀어지죠. 예수의 숨결 예수의 평화 예수의 생명력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래서 '현문우답'은 '이적 이야기가 진짜냐 아니냐'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묵상할 뿐이죠. '생선과 빵' 일화도 마찬가집니다. 그걸 나누던 예수님의 마음 빵을 쪼갤 때의 온유함을 짚어볼 따름이죠.
그럼 예수님이 보이신 가장 큰 이적은 뭘까요. 그건 물을 포도주로 바꿈도 맨발로 물 위를 걸음도 아니겠죠. 우리가 '자아'를 비운 곳으로 밀려오는 온유함. 세상에 이보다 큰 이적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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