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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서비스의 달인'

얼마 전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기업 1위에는 의외로 서비스 용역 업체 '서비스 매스터'라는 회사가 선정되었다. 최근 그 회사의 회장 윌리암 폴라드의 경영철학을 담은 '서비스의 달인'이라는 책이 출판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경영 철학은 복잡하지 않다. 한 마디로 '섬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윌리암 폴라드의 영향으로 최근 전 세계 일류 기업들은 저마다 경영의 핵심 원리로 '섬김의 정신'을 주장하고 있다. '섬김'이라는 기독교의 용어가 이제는 경영 원리가 되어 세계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최고의 '서비스의 달인'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생의 목표는 언제나 '섬김'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섬김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 '섬기는 모습'이었을 때 가장 강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엄청난 권력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모습으로 존재했을 때 겉으로는 매우 강하게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존재하였다. 중세 시대의 교회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교황 마음대로 한 나라의 왕을 갈아치우고 교회 소속이 아닌 땅이 없을 정도로 교회 재산이 유럽 전체에 널려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보여주고 만들어내는 사회는 '암흑시대' 그 자체였다. 최근 한국에서는 강남의 한 교회가 2500억 원을 들여 초대형교회를 건축하기로 하여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다. 그 교회 입장에서는 "돈이 있어 교회를 크게 짓는데 무슨 말이 이렇게 많은가?" 항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돈으로 교회당을 짓는 대신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에 사용했다면 세상은 박수를 쳤을 것이다. '섬김의 영성'이 메마른 곳에서 기독교는 가장 무력하게 죽어간다. 가끔 "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요!"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그것은 누군가를 조건 없이 섬겨보는 것이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이 두 나라는 차원이 다르며 존재하는 방식이 다르다. '세상 나라'는 권력을 가질수록 임의로 사람을 주관하고 다스린다. 한 때 박정희 대통령이 지나가는 곳에 초가집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방문하는 곳이면 어디나 초가지붕이 갑자기 스레트 지붕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권력은 남의 자유를 이토록 쉽게 박탈해 버리고 권력자는 언제나 그가 좋아하는 것만 주변에 있어야 마음에 안정을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크고자 할수록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려면 오히려 종이 되는 나라이다. 이 시대 교회가 진정한 힘을 잃어버렸다면 사람이 없거나 재정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으뜸이 되려면 종이 되어야 하는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약해진 것이다. 교회는 '서비스의 달인'들을 양육하여 세상에 파송하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교회도 '세상 나라'가 되고 결과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2010-01-26

[변화] '하나남을 기절 시켜?'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성인으로 만드셨다. 아담과 하와는 아기(Baby)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이 땅에 처음 태어났다. 아담과 하와가 이 땅에 태어날 때는 이미 많은 지식과 지혜를 함께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단지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서 여러 가지 더 많은 것들을 배웠을 것이다. 경험없는 두 사람이 함께 새로운 경험의 삶을 살았기에 둘 사이에는 다툼에 대한 기록이 전혀없다. 처음 결혼을 하면 그동안의 적잖은 경험들 때문에 둘 사이에 크고 작은 다툼이 생겨난다. '화장지를 안쪽으로 끼우냐 밖으로 끼우냐?' '치약을 왜 몸통부터 짜느냐?'부터 문제로 등장한다.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즉 많은 경험이 축적되면 '고집불통'이 되기 일쑤다. 젊은이들 중에 '고집불통'으로 불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무리 배운것 없이 살아도 오래살다 보면 '고집불통'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본인의 고집보다는 축적된 '경험' 덕에 '고집불통'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새해를 맞이해 새마음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혹은 사회에서 새로운 일을 추진하려다보면 '다 해봤어!'라는 소리를 제일 많이 듣는다. 이 작은 이민 사회에서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일이 무엇이 있으랴? 그러나 새 일을 계획하려는 리더들을 가장 쉽게 기절 시키는 소리(?)가 '다 해봤다'는 말이다. 우리의 많은 경험 때문에 기절하는 또 한분이 계신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미천한 인생의 경험을 가지고 결론부터 들이 댈 때는 하나님도 대책이 안 서실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무수한 경험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믿음'은 인간의 경험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의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지 않토록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쓴뿌리를 키우지 않토록 조심해야 한다. 내 경험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나의 '고집불통'으로 하나님마저 기절 시키(?)는 한해가 되어서는 안된다.

2010-01-26

[사목의 향기]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은 다양하다. 하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공통된 관심사일 것이다. 나는 과연 사람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자문해 본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인정받는 삶일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배우고 있다. 그것은 어린이와 같이 되라(루카 1817)는 요구이기도 하다. 한때 IQ(intelligence quotient 지능지수)가 얼마냐 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저 아이는 참 머리 좋은 애야." "저 아이는 아이큐가 높아." 마치 머리 좋은 것이 좋고 훌륭한 아이의 상징이기라도 한 듯 말들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는 EQ(educational quotient 교육지수)란 표현을 감성지수(emotional quotient)라는 의미에서 많이 쓰고 있고 머리만 좋아서는 안 되고 정서가 안정되어야 좋은 아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머리만 좋다고 해서 훌륭한 인격으로 성장한다는 법이 없다. 희대의 사기꾼이나 범죄자들 중에는 이 IQ가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 아닌가? 그러나 타고난 머리뿐 아니라 후천적 교육을 통한 인격 성장 또한 중요하기에 IQ와 EQ의 균형적인 성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일 게다. 그런데 요즘 농담 삼아 ZQ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ZQ란 '잔머리지수'라고 한다. 세상이 워낙 살아가기 힘들고 남을 등쳐먹는 세상이라 '잔머리를 잘 굴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극적인 현실에서 나온 농담일 것이다. 이렇게 IQ EQ ZQ가 높은 사람이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겠는가? 일반적으로 각 지수를 100점 만점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몇 점이고 어떤 균형을 취하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기에 IQ는 85점 EQ는 감정의 기복 정서 불안적 요소들을 감안하면 75점 ZQ는 이것저것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며 단순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60점정도 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아닌가? 예수님이 하신 어린이같이 되라는 말씀은 이 지수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 지수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IQ(지능지수)가 아니라 SQ(sapience quotient 지혜지수)가 높아야 하고 EQ(교육지수)가 아니라 '애정지수'가 높아야 하고 ZQ(잔머리지수)가 아니라 '단순지수'가 높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리는 많이 아는 것으로 지식욕을 채우기보다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하고 공부를 많이 하여 감정을 콘트롤하는 데 관심이 있기보다는 타고난 성격이 비록 모난 부분이 있더라도 더 사랑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잔머리를 굴리기보다 있는 그대로 주님께서 주신 삶에 단순하게 응답해 나가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결국 더 지혜로워지는 것 더 사랑하는 것 더 단순해지는 것 이것이 하느님다워지는 길이 아닐까? 이것이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길이 아닐까?

2010-01-26

[지혜의 향기] 승복의 유래

이곳 동포들 가운데 봉제업이나 옷 가게를 하거나 악세사리를 취급하시는 분들은 당연한 얘기지만 더 잘 아시겠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은 옷 안 입고는 못 사는 것이고 또한 옷이라고 해도 아무 거나 걸쳐 입고 나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발이며 장신구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올 때 꼭꼭 챙겨 온 귀한 것들이 이제나 저제나 하다 결국 좀이 슬어 한 보따리 싸서 집 앞에 내어 놓기도 한다. 이 풍요로운 미국에서도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이들이 많다지만 아마 옷이 없어서 떠는 이들은 훨씬 적을 것이다. 온 천지에 멀쩡한 헌옷 더미요 아직 멀쩡한 신발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그런데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틈만 나면 또 한 아름씩 사들고 나온다. 왜냐? 바로 유행이요 패션 때문이다. 세상에서 이런 유행과 겉모양에 가장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분들이 각 종교의 성직자들이고 그 가운데서도 아마 스님들이 가장 간소한 몸차림으로 살아가는 분들일 것이다. 본래 대로 하자면 옷 세 벌에 바리때라는 그릇 하나만 갖추면 일단은 되니까. 만약 세상이 이런 스님들로만 넘쳐난다면 딱 밥 굶을 직업들이 몇 있겠는데 패션 관련 업계도 그 중 하나이겠다. 미장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부처님을 따르는 승가의 사문들은 보통 간단한 아랫도리옷만 입고 어깨 위에 커다란 포대기인 카사야를 걸쳤었다. 이 카사야는 분소의라고 해서 송장을 쌌던 포대기 피 묻은 천 쥐가 쏠거나 불에 탄 옷 쓰레기로 버려진 천쪼가리 들을 모아 조각조각 이어서 만들었다. 철저한 재활용이다. 색깔도 재질도 알록달록 각각이어서 황토로 물을 들이거나 해서 색을 죽였는데 이게 요즘 스님들이 의식을 집전하실 때 걸치는 붉거나 누런 가사가 되었다. 인도는 본래 날씨가 더워서 이렇게 걸치고도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불교가 북방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지에서는 추워서 윗도리를 안 입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지 적삼 동방 두루마기 장삼 등이다. 다 잿빛 옷으로 속세의 헛된 애욕을 뭉개고 지우는 중도의 색깔이다. 회색 자동차처럼 때도 덜 탄다. 먹물옷이라고도 한다. 밑옷을 받쳐 입고 장삼을 입은 다음 그 위에 밤색이나 홍색의 가사를 걸친 모습이 스님의 정장 차림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는 걸치거나 드리우는 것이므로 입는다고 하지 않고 수한다고 한다. 장삼은 소매가 무지하게 넓은 두루마기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눈썰미가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러한 승복들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시대에 따라 종파에 따라 모양과 색깔 재질이 변해 온 것까지 아신다면 이 방면 공부를 계속하시거나 패션계로 나가도 성공하시겠다. 요즘은 스님들도 LA 공항을 자주 드나드신다. 나가서 기다릴 일이 있으면 혹시 낯설더라도 외면하지 말고 한 번 눈여겨보시라. 중국 스님 베트남 스님 미얀마 스리랑카 티베트 스님 서양 스님. 모두 어딘가 조금씩 다르시다. 어떤 일본 스님들은 화려하시기까지 하다. 그러다 옳거니 익히 눈에 들어오는 한국 스님이시다. 살강 위에 씻어 둔 잿빛 사기그릇과 같이 맑고 소박한 모습 말하자면 이게 바로 역사요 문화요 패션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러한 소박한 승복을 걸치고도 단속의 빌미를 주게 되는 게 사바세계인가 보다. 본국의 조계종에서는 몇 해 전 승복을 통일 시키고 디자인을 등록하였다고 한다. 세속의 제도를 빌어서라도 그 옛날 분소의의 본분을 지켜내야 하는 패션 도용의 시대가 왔나 보다.

2010-01-26

[백성호 기자의 현무우답] 당신은 무엇에 물이 듭니까

리안 감독의 영화 '색 계(色 戒)'를 봤죠. 놀랍더군요. 감독의 칼날은 여전히 날카롭게 그리고 깊이 있게 관객의 폐부를 찌르더군요. 극장을 나서는 이들의 평은 '10인10색'이었죠. 각자의 시선과 처지에서 '색'과 '계'를 풀이하니까요. 물론 저도 그랬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물듦'과 '알아챔'에 대한 영화라고 봅니다. '색'이 뭘까요.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상(현상)이죠. 그 속에는 내가 아끼는 모든 게 담겨 있죠.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나의 친구 나의 미래 나의 재산 나의 명예 등등. 그럼 그중 하나를 꺼내 보세요. 그리고 내 마음을 갖다 대세요. 애틋한가요 살가운가요. 그렇다면 나는 이미 거기에 물이 든 거죠. 리안 감독은 그런 '물듦'을 '남녀의 사랑'에 비유하더군요. 1930년대 중국 상하이가 배경이죠. 여주인공은 매국노를 죽이기 위해 그에게 접근하지만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돌이킬 수 없는 강도로 순식간에 물들고 말더군요. 그들의 사랑을 보면서 저는 '색'의 힘을 봤습니다.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색'의 강고함 닥치는 대로 물들이는 '색'의 무자비함을 봤습니다. 그러나 부처의 말씀은 다르네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합니다. 그 강고한 '색'도 본래 텅 빈 것이라고 하네요. 그러니 '색'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 너머를 그 바탕을 보라고 합니다. 그래야 '본질'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를 살피라고 하네요. 내가 사랑에 물이 드는가 내가 짜증에 물이 드는가 내가 자식에 물이 드는가. 그걸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그럼 '색 계'에서 '계'는 무슨 뜻일까요. 맞습니다. '계율'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계율은 '계율을 위한 계율'이 아니죠. 바로 '물듦'을 막기 위한 계율입니다. '내가 물드는 걸 알아차리고 물들지 않기 위해 깨어있으라'는 게 '계'의 본뜻이죠. 물들기 전의 청정함을 안다면 '물듦'은 정말 두려운 일이죠. 영화 속 여주인공도 마지막 순간까지 '물듦'을 두려워하죠. 그렇게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결국 무너지죠.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애잔합니다. '물듦'에 무릎 꿇은 인간사가 보이기 때문이죠. 그래서일까요. 부처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가라'고 하셨죠. 또 예수는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죠. '생이란 한 조각 구름이고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는 것이다.' 구름이 없어지면 무엇이 남을까요. 창공이죠. 원래부터 존재하던 푸른 창공. 그러나 우리가 한 조각 구름에 물들어 버린다면 '창공'을 볼 수 없습니다. 구름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으니까요. 그러니 물들지 말아야죠. 그래야만 구름 속에서 창공을 보고 창공 속에서 구름을 보게 되죠. 그럴 때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구름만 붙든다면 '색즉시색(色卽是色)'에 머물고 마는 거죠. '공'을 찍고 돌아오지 않는 모든 '색'은 한 조각 구름일 뿐입니다. 리안 감독이 '와호장룡'의 대나무숲에서 보여준 '색' 속의 고요함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보여준 로키 산맥의 설산과 푸른 창공을 보세요. 그들은 결코 물드는 법이 없죠.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입니다. 자신을 물들이지 않을 때 우리도 그들과 하나가 되겠죠. 그러니 오늘 하루도 살펴 보세요. '나는 언제 어디서 무엇에 물이 드나.'

2010-01-26

[생활 속에서] 목회자의 기준

최근 크리스천 센추리라는 기독교 잡지에 듀크대 신학대의 학장인 L. 그레고리 존스라는 분이 '믿음이 중요하다(Faith matters)'라는 제목으로 기고해 눈길을 끌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 목회자는 정부 라이센스가 필요 없지만 안수를 받으려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수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기대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얼마 동안은 목회학 석사가 표준이 되었다. 최근 들어 그러한 기대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요즘은 그러한 학력 학위보다는 목회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를 더 보는 것 같다. " 실제 미국 개신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가 없지만 훌륭히 목회를 수행하는 목회자들이 눈에 띈다. 시카고에 있는 세계적인 교회인 윌로우 크릭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벨스는 트리니티 인터내셔널 대학에서 학사(BA) 학위만을 받은 목회자다. 세계적인 기독교 작가이자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맥스 루케이도 목사는 해외 선교사로 나가려면 필수로 밟아야 하는 석사과정 2년만을 마친 후 다른 신적 부르심이 있어 전통 목회를 하게 됐다. 크리스채니티 투데이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의해 미국 최고의 목사.설교가로 선정된 루케이도 목사의 성경해석과 세상과의 접목은 탁월하다. 미국 내에서 10대 대형 교회 중 하나인 하베스트 크리스천 펠로우쉽의 그렉 로리 담임 목사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정식 교육 학위의 전부다. 그는 19세에 성경 공부를 인도한 후 30명 전원의 삶이 변하는 체험을 한 후 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는 수십 년 후에 남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 중 하나가 됐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조엘 오스틴 목사(레이크우드 교회)는 오럴 로버츠 대학에서 단 한 학기 강의를 들은 것이 그의 종교 교육의 전부다. 그는 한 학기를 마친 후 학교를 떠나 부친이 사역하던 레이크우드 교회 TV 제작실에서 1982년부터 1999년까지 일을 했고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교인들의 뜻에 따라 담임목사직을 승계했다.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의 리더이자 타임지가 선정한 미국 내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25인에 들어갔던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신학교 학력이 전무하다. 이 글은 목회학 석사가 쓸 데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학위는 앞으로도 목회자에 권위를 실어줄 것이다. 듀크대의 존스 학장도 "목회학 석사는 앞으로 적어도 25년은 유효할 것"이라고 했다. 존스 학장은 그럼에도 "목회학 석사는 MBA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해지고 있다. MBA는 많은 사람을 잘 훈련시켰다. 회사에서 MBA 공부를 한 사람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요즘 MBA는 필수 학위가 아니다. 목회학 석사는 MBA와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요즘 교회 구성원들은 목회자의 좋은 학력을 원하는 게 아니라 영성이 뿌리가 되어 있는 효과적인 리더십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0-01-19

[변화] A 플러스 신앙

성적이 잘 나오는 것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적이 안나오면 열등생 반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도 성적이 잘 나오면 우등생이된다. 참으로 불공평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과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다른 얘기다. 모든 모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교회서 시키는 것을 다 한다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아는가? 신앙생활도 열등생과 우등생이 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가 나온다. 마리아는 부지런히 열심히 예수님의 수발을 들지만 결국 좋은 성적표를 받아든 것은 마리아였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핵심을 놓치면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사람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장 크게 영광 받으시는 일은 무엇일까?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성적을 받게 될까? 여러 많은 사역들이 있지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입술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면서 덕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삶 때문에 괴로워하고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삶으로' 복음을 전해서 핍박을 당하거나 순교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칭찬받고 환영받았다. 그러나 '입술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대부분 엄청난 시련과 배척받는 삶을 살았다. 좁은 이민 사회는 삶이 비교적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회이다. 실수 많은 우리가 삶으로만 전도하겠다는 것은 나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좋은 핑계거리인지도 모른다. 10년을 가까이 지내도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가 구별이 안되는 '크리스챤 시크릿 에이전트'들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삶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는 선물은 돈도 금반지도 아니다. 집나간 자식이 돌아오는 것보다 아버지를 기쁘게하는 선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교회'이다. 많은 '돌탕'들이 아버지 집을 찾아 돌아오는 일에 우리의 '입술'이 부지런히 쓰임받는 한해가 되도록하자. 'A+ 신앙'을 갖는 비결은 '입술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다.

2010-01-19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진정한 '가피'

Q: 부처님의 가피는 어떤 것입니까? A: 대부분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피를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부처님의 무한한 힘으로 해결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가피를 여러분들이 바라려면 기도를 간절하게 해야 합니다. 간절하게 한다는 말은 하늘이 감동할 만큼 간절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늘이 감동할만한지 아닌지는 옆에 있는 사람이 감동하는지 안 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남편이 감동을 하든지 부모가 하는 걸 보고 자식이 감동을 해서 그들의 인간성이 바뀌어 버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먼저 사람이 감동해야 하늘이 감동합니다. 이해하는 것은 의식의 세계가 움직이는 것이고 감동을 하는 것은 무의식의 세계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무의식의 세계가 변하면 자율신경이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몸의 병이 낫는 효과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 바깥에서 딴 사람이 보고 감동을 해버리면 상상도 못 할 외부적 에너지가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런 것도 가피의 일부이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것을 가피의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으로 말하면 유루복에 속하는 겁니다. 무루복은 이것보다 수 억만 배 더한 한량없는 가피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법에 귀의할 때 법을 깨달았을 때 일어나는 가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내가 행복해지는 이것은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담마 차원에서 얻는 가피에요. 내가 저 사람을 도와줄 때 나한테 기쁨이 오는 이 도리를 깨달으면 가피는 즉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인연을 지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저 사람이 나중에 나를 사랑하거나 도움을 준다면 그것은 드러난 현상계의 과보입니다. 이것은 시차를 두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금방 오는 것도 있고 한 달이나 일 년 있다 오는 것도 있고 한 생 또는 몇 생 뒤에 오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부 다 현상계의 과보(유루복)만 늘 염두에 둡니다. 그런데 내가 상대를 이해하면 바로 내가 행복해지고 내가 상대를 좋아하면 바로 내가 행복해지는 이것은 가피가 즉시 옵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가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들 불교신자가 진짜 얻어야 할 가피는 해탈 열반입니다. 그것은 법의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가피입니다. 그것의 부산물로 따라오는 것이 유루복입니다. 사실 이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닌데도 중생의 눈에는 언제나 그것만 보이지요. 법을 깨친 가피 법을 아는 가피에서 오는 기쁨 이 기쁨은 괴로움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처럼 복이 새지 않는다고 해서 무루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괴로움으로 전환되지 않고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고 괴로움이 없어진다고 해서 니르바나 열반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재앙을 자초할 때가 많습니다. 지어놓은 복은 없으면서 복 달라고 악을 쓰고 나쁜 짓을 해놓고 화는 안 받겠다고 용을 쓰지요. 남의 복은 뺏어오고 나쁜 짓 해놓고 과보는 받지 않겠다는 심보로 극락에 가겠다거나 좋은 일 생기게 해달라고 하는 건 인과법칙에 맞지 않습니다. 복이나 가피를 받고자 한다면 보살의 마음을 내야 합니다. 남의 것 뺏어오는 게 아니고 내 것 좀 나눠주고 남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내가 떠안는 이 마음이 보살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복 받을 일을 해야 복을 받습니다.

2010-01-19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경쟁시대 속에서 '멈추기'

풍경 : 석가모니 당시에 살인마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앙굴리말라'. 그는 무려 999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엄지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었죠. '앙굴리말라'도 그래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앙굴리'는 손가락 '말라'는 목걸이란 뜻이거든요. 그런데 정작 그의 본명은 '아힘사'였습니다. '해치지 않는 자(不害)'라는 뜻이죠. 착하고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부인이 그를 유혹했죠. 거절하자 부인은 "나를 겁탈하려 했다"며 오히려 그를 모함했습니다. 화가 난 스승은 그에게 엉뚱한 가르침을 내렸죠. "1000명의 사람을 죽여 목걸이를 만들면 해탈을 이룬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고 '아힘사'는 '앙굴리말라'가 되고 말았죠. 앙굴리말라는 마지막 희생자를 찾고 있었죠. 한 사람만 채우면 1000명이 되니까요. 우여곡절 끝에 그는 부처님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석가모니는 길을 가고 있었죠. 뒤에서 칼을 든 앙굴리말라가 외쳤습니다. "멈추어라!" 그러자 석가모니가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멈춘 지 오래됐다. 멈추지 않고 있는 이는 바로 너다." 그 말을 듣고 앙굴리말라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석가모니의 제자가 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석가모니는 왜 '멈춤'을 말했을까요. 또 앙굴리말라는 왜 '충격'을 받았을까요. 사람들은 '멈춤'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너무도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멈추는 순간 뒤처지고 낙오하고 실패할 거라 여깁니다. 더욱 본질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순간도 온전히 멈추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멈춤'은 늘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죠. 그런데 석가모니는 "멈추라"고 했습니다. 뭘 멈추라는 걸까요. 사람들은 따지겠죠. "거 봐 맞잖아. 무한경쟁 시대에 에고가 멈추면 어찌 살라고. 어떻게 살아남으라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일하고 싸워도 역부족인데 말이야." 그런데 '멈춤'을 말한 이는 또 있습니다. 세계적인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60)는 "당신이 모든 것을 '멈추고' 고요해질 때 지혜가 바로 거기 있다. 그러니 고요함이 당신의 말과 행동을 이끌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또 지두 크리슈타무르티(1895~1986)는 "명상하는 마음은 침묵한다(A meditative mind is silent)"고 했습니다. 대체 뭘까요. '멈춤'의 자리에 뭐가 있을까요. 톨레는 "거기에 지혜가 있다"고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그걸 '반야의 지혜'라고 불렀죠. 그래도 사람들은 반박하겠죠.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살면서 나도 지혜를 터득하잖아"라고 말이죠. 그런데 '나의 지혜'는 한계가 명백합니다. 그건 '나의 세상 나의 영토'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나가 멈춘 자리의 지혜'는 다릅니다. 거기에는 한계가 없으니까요. 왜냐고요? '나'라는 테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죠. '나'라는 테두리가 없을 때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무한한 우주에 꽉 차겠죠. 거기서 나오는 지혜 거기서 나오는 사랑 거기서 나오는 온유함의 크기를 과연 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석가모니는 "멈추라"고 한 거죠.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죠. '내 이웃이 내 몸이 되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바로 '내가 멈추는 순간'이죠. 오직 그 순간 이웃이 내가 되죠. 그러니 예수의 사랑도 부처의 자비도 톨레의 지혜도 크리슈나무르티의 침묵도 마찬가지죠. 모두 '내가 멈춘 자리'에서 샘솟는 거죠.

2010-01-19

[생활 속에서] 한 평범한 샐러리맨의 성공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의 대 부분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기회가 많았던 사람이 아니라 단지 몇 번의 주어진 기회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고 하였다. 여기 '아낀다'는 말의 원문의 뜻은 '쓰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좋은 물건을 사려고 노력하는 경제 행위를 뜻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써야 할 때는 반드시 쓰고 안 써야 할 때는 반드시 쓰지 않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는 이런 '아낀다'는 말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 나온다. 그것은 '방탕'이라는 단어이다. 일반적으로 '방탕한 인생'은 술이나 마시고 마약이나 취해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인생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되는 '방탕'이라는 개념은 "써야 할 때는 안 쓰고 안 써야 할 때는 지나치게 쓰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누구나 시간이나 재물 혹은 자신의 재능을 써야 할 때는 안 쓰고 안 써도 되는 곳에는 함부로 쓴다면 그것은 방탕하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일본의 한 평범한 샐러리맨 다나까 고이찌라는 사람이 노벨 화학상을 받은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금까지 노벨 화학상은 주로 과학자들이나 교수들이 받은 것이 보통인데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고 그것도 최연소 나이에 그 엄청난 상을 받은 것이다. 언론은 그를 가리켜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전 세계인이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의 공헌 가운데 하나는 보통 사람이 노벨상 받는 시대를 열었다는데 있다. 그에게는 노벨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스승이 한 분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는 그의 삼촌이었다. 그의 친 부모는 그가 아주 어렸을 세상을 떠났는데 삼촌이 그를 아버지 대신 키웠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직업은 목수들을 위해 톱날을 갈아주는 사람이었다. 다나카 고이찌는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아버지를 통해 '톱날 하나하나를 꼼꼼히 세우는 성실성'을 배웠던 것이다. 이러한 성실성은 그의 일생을 지배하는 삶의 원칙이 되었다. 다나까 고이찌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그의 능력이 남보다 탁월하거나 다른 사람 보다 유리한 조건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배웠던 꼼꼼한 성실성이 그로 하여금 시간을 아껴 쓰도록 하였고 조그만 일에도 최선을 다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민 생활 때로 고달프고 힘들지만 톱날 하나 하나를 정성스럽게 켜는 성실성으로 맡겨진 일을 감당한다면 우리는 2010년을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다나까 고이찌의 성실함을 능가하는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하여 모두가 성공의 길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2010-01-12

[성서인물열전] 야베스, 기도로 운명을 바꾼 사람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10) 독일 태생으로 영국에서 고아들을 위해 사역하면서 5만 번 이상 기도의 응답을 받은 죠지 뮬러처럼 야베스는 기도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성서 속 기도의 사람이었다. 야베스는 유다 자손으로 갈렙 지파의 유력한 족장의 아들이다. '야베스'라는 이름에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셨다"라는 뜻이 있다. 아마도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잊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해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으리라. 태어날 때부터 고통 가운데 태어났지만 야베스는 기도로써 자신의 운명을 바꾼 인물이었다. 본래 자녀의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는 것인데 이 '야베스'란 이름을 지어준 이가 어머니였다는 것은 어떤 재난으로 아버지를 잃게 된 야베스의 슬픈 가정사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 한 것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그의 가정에 엄습한 고통의 현실을 극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과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믿음에 근거한 바람이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다 하겠다. 야베스와 그의 가정에 드리운 재난을 극복한 야베스의 기도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암울한 상황을 살아가던 당시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으리라. 개인이든 민족이든 고통과 환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예를 우리는 인간사에서 여러 번 목도하지 않았는가? 기도의 사람 야베스처럼 눈물의 기도를 뿌리며 두만강을 건너 북녘 땅으로 들어간 한인 선교사가 있다. 이곳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북한의 참혹한 인권 문제를 전 세계에 환기시키기 위하여 복음의 사신(使臣)으로 작년 25일 성탄절에 직접 북한에 들어간 로버트 박 선교사의 이야기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도전과 충격을 주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박선교사는 평상시에도 북한 동포와 탈북자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눈물로 기도했다 한다. 구약의 야베스의 기도처럼 그의 기도와 행보(行步)로 억압과 속박의 족쇄가 차여진 그 동토의 북녘 땅이 복음으로 해동(解凍)될 수 있기를 새해에 소망한다.

2010-01-12

[이민목회] 미주 한인의 날

1월 13일은 미주 한인의 날이다. 지금부터 107주년전인 1903년 1월 13일에 최초의 한인이 미국 하와이에 도착한 날을 기념하여 연방에서 승인한 공식적인 날이다. 또한 이날은 캘리포니아 얼바인시를 비롯하여 여러 도시에서도 승인하고 축하한 날이기도 하다. 이러한 1월 13일을 기점으로 미주한인재단LA 한인회 LA한인교회 협의회등이 주축이 되어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미주한인들은 당연히 행사에 참가하여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여야 할 것이다. 미주한인들의 범주는 1차적으로 한인이민자 한인2세 유학생 지상사요원 취업 이민자 교환교수등이 해당되고 2차적으로는 방문비자소유 한인무비자소유 한인 또한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의해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한인들이 해당된다. 미주한인의 날은 하나의 형식적인 의례로 지나가는 날이 아니라 우리 한 민족이 주인이 되어 공동으로 주최하고 연합하여 한인의 기치를 높이 드는 즐거운 날이며 모든 한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행복한 노래를 부르는 날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하나의 겨레임을 온 만방에 선포한 역사적인 경험이 적지 않다. 3.1운동때 온 민족이 일제의 힘앞에 하나의 힘과 정신으로 항거함으로 우리가 하나의 민족공동체임을 세계 민족앞에 분명히 보여주었고 그 후 민족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단합하여 우리가 하나의 민족임을 증명해 주었다. 그중 가장 기억나고 보람되었던 날은 월드컵축구 4강의 신화를 일구어 낸 날이다. 사실 그날에는 누구하나 참가를 종용치 않았지만 한인 모두가 삼삼오오 식당이나 카페 혹은 교회에서 모여 하나의 마음을 가진 민족의 축제였던 것이다. 그 때의 대한민국 한인은 세계를 진동시킬 만큼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렇다. 1월 13일 미주 한인의 날이야말로 우리가 한 민족공동체요 한 겨레임을 진동할 수 있는 우리 한인의 날이다. 아 월드컵 4강때 응원한 한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10-01-12

[사목의 향기] 새롭게 시작한 한해

새로운 한 해가 밝았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시간에 연연하기보다는 다가오는 시간들에 무게를 두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그리하여 새롭게 시작한 올 한 해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훗날 받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언젠가 들었던 얘기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작은 중소기업에 김주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슨 잔정이 그리 많은지 후배들 뒤치다꺼리나 하기 일쑤였고 아무도 손 안 대는 서류함을 거의 날마다 정리하느라 퇴근 시간을 넘겼으며 어김없이 오후가 되면 커다란 쟁반에 커피 여러 잔을 들고는 "즐거운 오후 되십시오" 하며 설탕 대신에 미소 한 숟가락을 더 넣어 책상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휴직계를 냈습니다. 아내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병간호를 위해 그는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지만 한심하고 남자답지 못하고 무능하며 있으나마나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가 회사에 없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빈자리는 사람들에게 너무 큰 것이었습니다. 나른한 오후가 되면 마실 수 있었던 향긋한 커피는 기대할 수 없었을 뿐더러 책상 위의 컵들엔 커피자국이 그대로 남은 채 먼지만 쌓여갔고 향기나던 화장실은 들어가고 싶지 않을 만큼 더러워졌으며 휴지통에는 늘 휴지가 넘쳤고 서류들은 어디 있는지 서류철끼리 뒤죽박죽 섞여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서 내 사람들은 점점 짜증난 얼굴로 변해갔고 서로에게 화를 냈으며 시간이 갈수록 큰소리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에 가득했던 화평은 어느새 조금씩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같은 동료였던 박주임이 상사의 짜증을 다 받아내느라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문득 김주임이 끓여다 준 커피가 그리워졌습니다. 김주임이 생각나자 아직 남아있는 그의 책상 앞에 무심코 갔을 때 작은 메모가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편할 때 그 누군가가 불편함을 견디고 있으며 내가 조금 불편할 때 누군가는 편안할 것이다." 오늘따라 김주임의 책상 위에 있던 글귀 한 줄이 커피 향처럼 진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떠십니까? 편하십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지금 여러분을 대신해서 불편함을 견디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불편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누군가는 여러분으로 인해 편안함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있으나마나한 사람 필요 없는 사람 필요한 사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그 진가는 사실 지금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여러분께서 남기시고 갈 빈자리는 그것을 말해줄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한 한 해에는 언젠가 여러분이 떠난 후 남게 될 빈자리를 생각하시면서 날마다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삶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010-01-12

[지혜의 향기] 불자란?

영어의 '부디스트'에 해당하는 말로 불제자 또는 불자라는 말이 있다. 한자로는 '부처 불' 자에 '놈 자' 자를 쓰는 게 보통인데 '아들 자' 자를 써도 그 낱말이 뜻하는 바가 같은 부분이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닐 듯하다. 이곳 많은 한인들은 보통 불교를 믿는 이들을 불교 신자 또는 불교도라고 부르는데 좀 심한 경우이긴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은혜받지 못한 불쌍한 자라는 말이 쓰이는 경우도 있다. 미국서는 이래저래 동정도 많이 받고 산다. 그게 다 내 복이고 업인 걸 어떡하겠나? 그렇다면 일부의 동정심마저 불러일으키는 불자란 사람들은 도대체 무얼 믿는 것일까? 다른 종교들에서처럼 구체적으로 무얼 믿기나 하는 것일까?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불교라고 해도 한 마디로 딱 잘라 이렇다 저렇다 하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드러난 겉모양만 보더라도 나라마다 종파마다 조금씩 다르고 심지어 같은 사람일지라도 어제와 오늘이 또 다를 수 있다. 더구나 우리는 지금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 나름의 생각이긴 하지만 제대로 된 불자라면 대략 아래와 같은 믿음과 태도를 갖춘 분들이 아닌가 한다. 첫째로는 자기 자신의 믿음만이 절대적으로 옳으니까 다른 것들은 다 없애 버려야 할 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와 다른 믿음에 대해서도 어쨌든 한 가닥 일리는 있을 수 있다거나 그 중 어떤 것들은 얼마간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가능성의 여지를 베푼다. 때로 낯설고 꺼림칙할지라도 손님을 위하여 조그마한 방석 자리나마 내줄 줄 아는 교양과 아량은 갖추고 있어야 불자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로 불자는 이 우주의 질서가 하느님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다르마 곧 부처님이 일러주신 진리임을 믿는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미치는 이 진리는 요약하면 연기법 곧 무엇으로 말미암아 일어남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짐으로서 저것이 사라진다. 바로 자연의 순환 원리다. 셋째 따라서 불자는 인과를 믿는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며 결과 없는 원인도 없다. 기적은 없다. 복은 복대로 가고 죄는 죄대로 간다. 다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관계를 거쳐 갚아지느냐가 다를 뿐이다. 그러니 공덕은 일단 틈 날 때마다 쌓아놓고 볼 일이다. 넷째 불자는 바깥이 아니라 나의 안 즉 내 마음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믿는다. 나를 떠나 바깥에서 나를 찾으려는 헛된 콤플렉스에서 벗어난다. 나야말로 부처의 씨앗을 감춘 여래의 곳간이다. 썩어 없어질 몸 깊숙이 깃든 영원한 본래의 나를 찾아 이 뭣고? 해탈에 이르고자 몸과 마음을 닦는 이들이 불자다. 다섯째 불자는 이 세상 모든 것의 본성이 비어있음을 깨닫는다. 영원할 수 없는 눈 앞의 세계에 끄달리지 않고 공을 깨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언제까지나 내 것이라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 따라서 불자는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여섯째 불자는 작은 나에서 큰 나로 나아간다. 모든 생명의 원천이 같다는 깨달음을 향해 정진한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너와 내가 하나 되는 불이의 경지요 동체대비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픈 이들이 불자다. 남의 고통에 고개를 돌린다면 불자가 아니다. (그리고 뱀발. 위에서 보듯 애기 동자 족집게 점 보살 찾아다니는 이들이 불자가 아닙니다. 아시겠지요?)

2010-01-12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경전 속 진리가 삶 되려면

# 풍경 1 : 발명왕 에디슨의 유년은 참 엉뚱했죠. 아 글쎄 직접 알을 까겠다며 거위알을 품었으니까요. 또 털에서 불꽃을 일으킨다며 고양이 두 마리를 마구 비벼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에디슨이 나중에 백열전구와 축음기 등 숱한 발명품을 만들어냈죠. 에디슨의 장례식날 밤 미국인은 모든 전깃불을 1분간 끄면서 위대한 발명가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 풍경 2 : 마리 퀴리는 1883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죠. 그런데 대학 진학은 상상도 못할 처지였어요. 왜냐고요? 당시 폴란드에는 여자를 받아주는 대학이 없었거든요. 마리는 절망했죠. 의사를 꿈꾸던 언니 브로냐도 마찬가지였어요. 결국 프랑스로 가기로 작정을 했죠. 당시 파리의 대학에는 여자도 입학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돈이 문제였어요. 결국 언니가 먼저 파리로 가서 공부를 하고 마리가 가정교사를 하며 뒷바라지를 했죠. 6년 뒤 언니는 의대를 졸업했어요. 물론 이번엔 언니가 뒷바라지를 했죠. 나중에 퀴리 부인은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는 발명가가 됐습니다. 에디슨과 퀴리 부인 둘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바로 '고정관념 부수기'와 '실제로 적용하기'입니다. 거위알을 품은 에디슨을 보면서 사람들은 "정말 못 말려!"하고 혀를 찼겠죠. 대부분의 사람은 "알에서 거위가 나올 수 있나 없나"만 따지니까요. 과정은 빼고 결과만 따지니까요. 그런데 정작 에디슨은 어땠을까요? 거위알을 품고서 그는 뭘 배웠을까요? 알이 몸에 닿을 때의 촉감 알과 자기 몸의 체온 변화 어미 거위의 웅크린 자세 어쩌면 알을 품는 어미 거위의 심정까지 느꼈겠죠. 그게 '어린 에디슨'에겐 입체적인 자극 살아있는 데이터로 작용한 겁니다. 이거야말로 '최상의 공부'거든요. 퀴리 부인도 마찬가지죠. 그는 "여자는 대학에 못 가!"라는 고정관념에 함몰되지 않았죠. 오히려 그걸 깨부수며 몸소 체험의 영역 발명의 영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집니다. 예수의 말씀 붓다의 가르침은 '책 속에 갇힌 우아한 향기'가 아닙니다. 그런 고정관념을 가졌다면 사정없이 부수어야 합니다. 왜냐고요? '책 속의 향기'에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죠. 팔을 걷어서 경전 속에 '쑤~욱!'하고 손을 집어넣어야죠. 그리고 경전 속 가르침을 주먹으로 꽉 잡으세요. 그걸 나의 생활로 끄집어내세요. 그렇게 꺼낸 말씀을 나의 하루에 적용해 보세요. 그 경전 구절대로 생각하고 행동해 보세요. 어떤 변화가 생기죠? 처음에는 거위알을 품은 에디슨의 심정입니다. "나와 세상을 둘로 보지 마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알을 품고 웅크린 한 마리 거위가 되는 거죠. 물론 무지막지한 의심도 올라옵니다. "이렇게 한다고 설마 알이 부화할까?" "이렇게 한다고 설마 내가 달라질까?" 예를 들어 아내가 설거지 할 때 늘 TV만 보는 남편이 있다고 쳐요. 그럼 이젠 해보는 거죠. "나와 아내가 둘이 아니구나"라며 리모컨을 내려놓고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는 거죠. 그렇게 나와 상대 나와 세상을 하나로 보고 행동해 보는 겁니다. 그럼 곧 깨닫게 되죠. 에디슨이 뭘 보고 뭘 느꼈는지 말이죠. 누구나 의심하죠. 경전 속 거위 알이 과연 부화할까. '성경'을 1000번 읽고 '금강경'을 1만 번 읽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거위알'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말이죠. 그래서 '고정관념 부수기'와 '실생활에 직접 적용하기'는 너무도 중요한 노하우입니다. 발명가에게도 수행자에게도 신앙인에게도 말입니다.

201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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