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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샘] 다시 시작합시다!

수년전에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본적이 있습니다. 말로만 들어왔던 폭포의 웅장함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는 말문이 막혔섰습니다. 그 길이며 높이 그리고 쏟아지는 물줄기의 소리 특히 배를 타고 폭포 밑에까지 가서 밑에서 올려다보는 폭포의 물줄기는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아도 폭포 밑에서 우비를 입고 그 폭포의 물줄기를 맞으며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물이 절벽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폭포가 될수 없다"는 말이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실패나 어려움이 오히려 우리 인생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될수 있다는 말입니다. 절벽이 크면 클수록 큰 폭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듯이 우리의 인생의 실패와 역경이 크면 클수록 더 크게 성장할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말입니다. 요즘 세상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유명한 배우들의 자살로 인해 한국민 전부가 놀라고 미국의 경제가 흔들리며 그 여파로 한국 전체가 힘들어지고 어려워지는 일들 미국도 결코 예외가 아니어서 꿈속에서도 상상조차 못해보았던 거대한 은행들이 무너지고 자동차가 시작된 나라가 미국인데 그리고 그 미국을 지탱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동차 회사들의 무너짐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작년 한해 좋은 이야기 보다 힘들고 아픈 이야기 너무 어려워 말로 표현 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2009년도 그렇게 전망이 좋은것도 아닙니다. 제 주위에 아는 유학생들도 이미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들 힘들고 어려워서 더 이상 가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분명히 힘들고 어려운 때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온통 부정적이고 힘들고 어렵다고 말할 때 바로 그 때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회인 것입니다. 힘들다고 해도 어렵다고 해도 포기 하지 않고 그것들을 다시 도약의 기회로 삼아 내 인생의 '큰 폭포'를 만들어 낼 기회인 것입니다. 포기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았던 모든 사람들도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이런 광야의 길을 다들 지나갔습니다. 모세가 다윗이 바울. 그들에게 있어서 달랐던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의 어려움의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모두에게 문제는 다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각자 느끼는 것이 달랐다고 하더라도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다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달랐습니다. 묵묵히 그 역경을 포기 하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고 끝까지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칼라힐은 "위대한 사람은 곧 시작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모든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 하는 사람이다" 라고….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역경과 좌절 가운데에서도 미소를 짓고 하늘을 보며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아름다운 그 사람의 인생의 '폭포'를 보고 싶습니다. 그 사람의 '큰 폭포'를 보고싶습니다.

2009-01-13

[목회 칼럼] 황소 복음

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새해를 맞이한 사람들의 마음은 새로운 결단과 밝고 아름다운 기대들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새해는 소의 해인 기축년이라고 한다. 성경적으로도 보면 소는 희생의 모습으로 성경에 등장하고 있다. 물론 아론이 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소의 체면 손상(?)을 시킨 사건이 있기는 하다. 신학자들마저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황소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유는 예수님의 모습을 희생의 모습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마가가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사무엘서에 보면 소가 여러 번 등장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은 후 그것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독종이 퍼져서 고통이 하늘에 사무치게 되었다. 결국은 언약궤를 되돌려 보내기로 결정을 했다. 그때에 암소가 등장한다. 그들은 젖 먹는 송아지를 억지로 뗀 두 암소로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게 했다. 만약에 암소가 송아지 때문에 되돌아오면 재앙이 우연이라고 믿기를 원했고 이스라엘지경인 "벧세메스"까지 똑바로 가면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믿기로 했다. 두 암소는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그 후에 번제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올 한해도 벧세메스로 가는 소처럼 세상이나 환경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면 하나님은 분명 행복과 축복의 문을 여실 것이다. 사울에게는 황소가 왕권을 확립하는 중요한 역할로 등장한다. 사울은 이스라엘 12지파가 모인 전국 대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왕이 되고 나서도 소를 몰고 밭을 가는 소몰이 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암몬사람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성령에 감동되어 밭을 갈던 소를 잡아 각을 떠서 각 지파에게 보내고 군대를 모집하여 대승을 거둠으로 인해 실질적인 왕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성령님이 함께하지 아니하는 삶은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졌어도 그저 소몰이 인생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다윗왕도 소에 대하여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다윗왕이 말년에 자신의 업적을 나타내기 위하여 백성을 계수하기를 원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무서운 벌이 이스라엘에게 쏟아졌다. 속죄의 장소로 아라우나 타작마당이 정하여졌고 제물로 타작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던 소가 번제물로 드려졌다. 그곳은 후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진 곳이다. 이것을 보면 묵묵히 맡은 사명을 다하다가 가장 중요한 때에 중요한 장소에서 번제로 드려지는 소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사람들은 작년에 불어 닥친 금융공황의 여파로 인해 신년을 맞이했어도 여러 모양으로 위축되어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를 힘쓰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질이 삶에 중심이 되면 자연 하나님과의 만남은 멀어지며 그로 인해 진정한 행복을 잃게 된다. 잠언15:17절에는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성도는 풍성하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하며 살기에 행복해지고 풍성해지는 것이다. 소로 비유되었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다" (막10:45) 우리도 주님처럼 희생과 섬김의 한해를 살아야겠다.

2009-01-13

[기독교인의 삶]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

2009년이 밝아오면서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축복의 말로 소망의 새해를 시작합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인사를 하면서 저는 사람들의 얼굴에 한결같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다 복을 받기 원하는 구나' '복은 좋은 것이구나' '복은 미소와 행복을 주는구나' 라는 것을 느낍니다. 어느때보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2009년 첫 날 큐티를 열었을때 첫 큐티를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심을 알게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으로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부리 먹게 하실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라' (신 6:10-13)말씀을 묵상하며 저를 이방인의 땅인 미국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낯선 이방인 땅에서 때로는 서러운 눈물 안타까운 눈물 간절한 눈물 이렇게 눈물도 여러가지 이유로 흘리게 하신 하나님 왜 나만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하냐고 울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이 억울하게도 느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흘려야만 했던 눈물들을 하나님은 잊지 않고 다 기억하시고 '나의 모든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셨나이다' (시 30:11) 말씀의 고백을 이제는 당당하게 주 안에서 자랑할 수 있음이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그때 당시엔 왜 저에게 이런 슬픔을 허락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지난날들은 (신 6;10-13)말씀처럼 이방인 땅에서 저의 삶에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경외하며 섬기라는 말씀을 지키도록 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였음을 믿습니다. 지난 성탄절 예배의 말씀에서 '눈물과 입맞춤은 따뜻하고 촉촉하지만 영원하지는 못하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 지혜이다' 합니다. 나오미의 첫째 며느리와 둘째 며느리인 룻이 각자의 선택으로 받은 하나님의 복을 생각합니다. (룻 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말씀을 묵상하며 서롭게 울며 입맞추고 떠난 첫째 며느리의 삶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만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붙잡기로 결심하고 떠나지 않은 룻은 '복'을 받습니다. 눈물은 귀한 것이지만 빨리 마를 수 있고 입맞춤은 그 순간 따뜻하고 애정이 담겨 마음을 찡하게 하지만 그 따뜻함도 그 순간뿐이라는 목사님의 깨달음이 저에게 지혜를 줍니다.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붙잡았던 룻의 지혜를 배우며 저도 하나님만을 꼭 붙잡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을 크게 즐거워 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약속하신 (시 112:1-2)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2009년에 어떤 하나님의 복을 받을지 정말 기대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2009-01-13

[사목의 향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09년 새해를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복이 가득 내리도록 기원합니다. 새해 첫날은 평화를 기원하는 날입니다.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보우하심으로 온 세상이 평화를 누리도록 기도드립시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신국론"에서 평화를 "질서의 고요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고요한 질서는 시끄럽거나 소란하지 않고 무기를 든 군인들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는 이승의 삶을 하직하기 전에 멀리서 들려오는 야만족들의 함성을 들었습니다. 그 함성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전쟁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도래하면 영원한 평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환시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는 그때는 성서적으로 보아 메시아의 왕국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날일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온 세상이 전쟁으로 얼룩지고 상처 받아 왔습니다. 세계 제1차.2차 전쟁은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나라가 짓밟힌 임진왜란 동족상잔의 6.25 전쟁 월남전 중동전 요 며칠 전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인해 수백명이 죽고 난민들이 이집트로 향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전쟁은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이 해롭다는 것을 절감한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부르짖습니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유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수 천년 동안 전쟁을 해왔습니다. 적어도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2천년 이상은 전쟁을 했습니다.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수없이 많은 전쟁을 한 결과를 놓고 그들은 조용히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유럽 공동체(european community)를 결성했습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화폐를 하나로 통일하였습니다. 그것이 유로화입니다. 그리고 유럽 국회를 만들었고 이제는 유럽 헌법을 만들어 유럽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려고 하며 현재 있는 기존 국가들은 미국처럼 하나의 주(state)가 되는 것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2천년동안 전쟁을 하면서 피해를 본 그들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큰 일을 해 낸 것입니다. 물론 그 저변에는 그리스도교 문화권 이라는 공통분모가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국가와 종족의 분쟁이 심한 아시아와 아프리카도 이런 모범을 배우면 좋으리라 봅니다. 그리고는 점차적으로 전 세계가 아니 지구촌이라고 하는 이 세계가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 건설을 위한 지구촌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의 이상입니다. 그 이상이 실현되도록 우리는 다방면으로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면서 가정의 평화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며 더 나아가서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나라가 하루빨리 평화통일을 이루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유엔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된 두 국가이나 민족적 차원에서 본다면 하나의 나라입니다. 그것이 두 동강이 난 이후 갈등을 겪어온지도 어언 60년이 지났습니다.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그 평화스러운 날이 하루 빨리 도래하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2009-01-13

[지혜의 향기] 보살의 뜰

한국 절에 가면 보살들이 참 많은데 어떤 분들은 나무를 깎거나 녹인 쇳물로 만들어져 금칠을 한 채 불단에 점잖게 앉아 계시고 다른 분들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불단의 그 보살님들이나 부처님을 향해 열심히 절을 하거나 부엌에서 밥을 푸거나 찬불가를 부르거나 마루에 걸레질을 하시는데 대개 아주머니 아니면 나이가 좀 드신 할머니들이다. 조각이나 조상으로 만들어져 불단에 앉아 계시거나 탱화 속에 그려져 있는 보살님들은 남자인 듯도 하고 여자인 듯도 한데 같은 이름일지라도 장소나 시기에 따라 그 겉모습과 들고 계시는 물건들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관세음보살이니 지장보살이니 약사보살이니 하는 이 분들은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는 중생의 쓰라림 가운데 대략 한 켠을 어루만지고자 어느 때고 좋다 가부좌를 하고서는 지긋이 기다리고 계신다. 반면에 절간을 드나들며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보살님들은 대개 큰 스님들이 이전에 어떤 인연으로 지어 주신 세 자짜리 불명을 갖고 계신데 무슨 행이니 무슨 화니 심이니 하는 멋진 이름들이다. 이렇게 뜻 좋고 부르기 좋은 것만 고르다 보니 같은 이름이 이 절에도 있고 저 절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고 바다 건너 한국에도 있다. 어떤 이는 다다익선 한 사람이 두 세 개도 가진다. 이렇게 주어진 이름 하나하나의 뜻을 새겨 그 뜻대로 행하고 닮기를 애쓰기만 해도 더 이상의 공부가 필요 없을 만치 훌륭한 이름들이다. 옛날 유학자들이 지어 쓰던 자나 호 천주교의 세례명도 나름대로 깊은 사연과 뜻이 있겠지만 나는 이런 살아 있는 보살님들의 세 잎사귀 불명들이 참으로 그윽하고 정겨워서 이들로 인해 더욱 영롱하고 장엄해진 사부대중 네 자락 부처님나라의 뜨락을 영영 여읠 수가 없을 뿐더러 살아생전 내 뇌리에서마저 지울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불단에 계시는 보살님들과는 달리 살아 움직이는 이러한 보살님들은 혈통이 다 한국이다. 한국 불교에서만 이러한 재가 불자 여신도님들을 통상 보살이라고 일컫는다. 보살이란 말의 본뜻을 조금만 아신다면 가히 한국만큼 한국 불교에서만큼 여성을 받드는 곳은 지상 어디에도 없다고 할 만하다. 우리 수행의 마지막 목적지 열반을 이룬 부처가 될 수가 있는데도 이를 미루고 괴로움에 빠진 중생을 도와 먼저 이들을 건져 내겠다고 서원하신 분이 보살님이 아니던가! 다른 나라 불자들이 들으면 헷갈릴 법도 하고 너무 과분한 이름이라고 불편해 할지도 모르겠으나 내 느낌엔 참으로 적합한 이름이라 당연한 것을 짚어 본다는 게 오히려 새삼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눈가림으로 이름만 멋지게 불러 주고는 실제로 대하기는 어땠는지가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불단에 계시는 보살님들이 그 옛날 부처님에게서 각각 명받은 바에 의하면 무릇 보살이라면 여섯 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바라밀이란 저 편 언덕으로 건너감이니 고통에 빠진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건져내어 맞은 편 부처님 나라의 기슭에 이르게 하는 여섯 갈래의 길이다. 그 첫째가 베풀라는 것이요 다음이 계율을 지키라는 것이요 참으라 열심히 갈고 닦으라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라 그리고 참된 슬기를 가지라는 것이 그 다음들이다. 이 여섯 가지를 구태여 펼쳐 놓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불단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보살님들 마루에는 남의 몸도 당연히 제 몸인 양 하는 세 잎사귀 보살님들 이들이 자리하여 섞여 피어난 뜨락에서 뎅 뎅 뎅 쇠북소리와 함께 일요 법회가 시작된다.

2009-01-13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추기경의 '오병이어' 재해석

#풍경1: 예수와 5000명이 넘는 군중이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 있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었죠.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예수는 50명씩 혹은 100명씩 무리지어 풀밭에 앉게 했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죠. 그리고나서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두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마르코복음 6장30~44절) 일명 '오병이어' 일화죠. 예수의 대표적인 '기적'으로 꼽히는 이야기입니다. #풍경2: 지난해 12월 29일이었죠. 신년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정진석 추기경은 '오병이어' 일화를 꺼냈습니다. 정 추기경은 "성경을 보세요.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불어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어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없어요. 그럼 뭘까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리신 기도를 듣고 감동한 사람들이 품 속에 숨겨둔 도시락을 꺼냈던 겁니다. 낯선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마음을 연 거죠"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현문우답'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얘길 처음 들었느냐고요? 그건 아닙니다. 그런 해석은 익히 들었죠. 그건 일부 신학자와 아주 유연한 목회자들 사이에서나 오가던 얘기였죠. 설사 그렇게 생각하는 성직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개 석상에서 '도시락' 이야기를 밝히긴 쉽지 않은 거죠. 왜냐고요? '오병이어' 일화는 예수님이 보이신 완전한 기적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칫하면 '십자 포화'를 맞기 십상입니다. 그런데도 한국가톨릭의 수장인 정 추기경은 "'오병이어' 일화에는 숨겨둔 도시락이 있다. 꽁꽁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연 것이 바로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글자 하나 단어 하나라도 무의미한 게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무엇이 78세의 추기경으로 하여금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오병이어의 비밀을 밝히게 했을까.' 그건 다름 아닌 '울림' 때문이죠. 무슨 울림이냐고요? 깊고 깊고 깊은 묵상에서 우러나는 '울림'이죠. 그런 묵상에서 길어올린 '울림' 속에 예수의 메아리가 담기는 법이니까요. #풍경3: 정 추기경의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죠. "2009년은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이라며 '진화론' 얘기를 정면에서 다뤘습니다. "신학과 과학의 영역은 별개"라며 논쟁 자체를 회피하는 신학자와 목회자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죠. 게다가 정 추기경은 우주의 생성과 빅뱅 자연의 섭리와 신의 섭리를 함께 논하며 진화론을 다독거렸습니다. 정 추기경은 진화론을 향해 '펀치'를 날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걸 껴안더군요. '현문우답'은 거기서 진리의 속성을 보았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진리는 모든 것에 통해야 한다는 거죠. 과학이든 철학이든 종교든 천문학이든 말이죠.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탓이 아니겠죠. 인간의 탓이겠죠. 인간의 과학 인간의 종교가 아직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정 추기경과의 인터뷰는 파격이자 감동이었습니다.

2009-01-13

[기독교인의 삶] '네 마음을 지켜라'

해마다 새해가 오듯이 새해마다 나에게 늘 격려와 감동의 편지를 보내주시는 분이 계신다. 이메일이 없던 시절에는 손수 손으로 써서 보내주시고 이메일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이메일로 보내주신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새해를 맞을 때 공부에 힘들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 할 때도 신기하게 이분의 편지를 받으면 늘 새로운 용기가 나고 다시 한번 해보자 라는 소망이 생기며 하나님은 내편이신데 사람이 내가 어찌하리요 하는 담대한 믿음이 생겼다. 올해도 어김 없이 나에게 희망의 편지를 보내주신 그분은 바로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다. 이런 믿음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라서 난 참 행복하다. 어렸을 때부터 신앙을 가르쳐주시고 몸소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셨던 아버지가 해마다 신앙으로 업그레이드된 삶을 나눠주심에 감사하다. 새해를 맞이해서 이 편지를 같이 나누고 싶다. 할렐루야! 새해를 맞는 너희 부부와 예찬 예람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리고 어머니와 사돈 내외분들께도 동일한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지난 한해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어려운 한 해가 되었겠지만 너희 가정도 오늘 이 시간 까지 지켜주신 참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린다. 2009년을 맞으면서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은 언제나 너희들을 위해 새로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너희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끝이 없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최종 목적지까지 잘 도달할 수 있도록 항상 문을 열어 놓고 계신단다. 비록 우리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우리들에 대한 첫 번째 계획 두 번째 세 번째 계획을 넘어 무한한 계획까지 세워놓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 큰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행여 조금이라도 조바심하지 않도록 해라. 하나님의 때는 지금 진행 중일 뿐이란다. 무엇보다 먼저 새해에는 믿음의 불길로 분연히 일어서기를 바란다. 눈에 보이는 것 없고 손에 잡히는 것 없으며 앞길이 칠흑같이 어둡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면 상황은 바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삶을 다스리시고 너희에 대한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는 점을 기대하고 믿기를 바란다. 지금은 너희가 초승달처럼 작게 떠오르고 있지만 곧 보름달과 같이 크고 둥글게 환하게 떠오를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는 발버둥치며 원망이나 불평 절망이나 좌절 보다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서 현재의 상태에서 항상 감사와 찬송 그리고 기쁨과 소망을 갖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단다. 잠언 4:23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의 불평장이가 아니라 승자가 되기를 원하신단다. 원수 마귀를 물리치고 완전히 승리하기를 원하신단다. 아무쪼록 2009년도에는 주님의 축복을 따라 새로운 도약과 함께 너희 가정에 보람찬 성장이 있기를 기대한다. 예수님의 보혈을 너희들에게 믿음으로 뿌린다. 샬-롬! 서울에서 아버지가.

2009-01-06

[목회 칼럼] 비운만큼 채운다

어렸을 때 동네에 거지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습니다. 정신을 놓은 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아주머니도 항상 히쭉히쭉 웃으면서 돌아다녔습니다. 머리카락은 언제부터 안 감았는지 밧줄을 꽈 놓은 것처럼 두껍게 떡이 져 있었고 얼굴과 손은 까마귀도 혀를 내 두를 만큼 새까맣게 때가 껴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이 아주머니를 바보라고 놀려대며 나뭇가지나 돌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 아주머니는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거지로 살아가는 것이 타고난 사명인 양 깡통을 들고 이 집 저 집 기웃기웃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데에 만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항상 작은 수레에 큰 가방 세 개를 싣고 다녔습니다. 큰 짐 보따리도 머리에 이고 있었습니다. 밥 만 빌어먹는 것도 쉽지 안았을 텐데 케케묵은 짐들을 전부 끌고 다녔습니다. "도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것일까?" 어린 나이에도 많이 궁금했습니다. 그 분은 한 여름인데도 긴 팔 소매의 두꺼운 코트를 입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체구가 항상 크게 보였습니다. 그 거지 아주머니를 딱하게 여긴 동네 어른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하고 그녀를 도와 주기로 결정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동네 아주머니들 서 너 분이 강제로 달라붙어 그녀를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옷을 벗기는데도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설득을 하고 달래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위협까지 하면서 옷을 벗겼는데 삼복 더위에 다섯 벌의 옷을 껴 입고 있었습니다. 보따리와 가방을 뒤져보니 수 십 년 동안 묶은 옷가지와 잡동사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곳 저곳 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준 것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싸 들고 다녔던 것입니다. 이 아주머니는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재활센터로 옮겨졌습니다. '거지'라는 말의 뜻은 '받을 줄만 알고 줄 주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거지는 항상 달라고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가난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일단 자기 손에 들어 온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놓을 줄을 모릅니다. 거지는 충분히 주어져도 정신적인 공복감 때문에 '욕심이 이끄는 삶'(Desire Driven Life)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현실적으로는 절대빈곤을 경험하지 않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거지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거지처럼 한번 입력된 감정은 도무지 버릴 줄을 모릅니다. 영혼에 새겨진 문신처럼 나쁜 기억들과 해 묵은 상처들을 가슴 깊이 되새기며 힘들게 살아 갑니다. 섭섭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 불안한 마음 그리고 온갖 깨어진 마음들을 다 품고 새해를 시작합니다. 이들이 바로 영적인 거지들(spiritual beggars)입니다. 하나님은 묵은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들에게 새 것을 채워 주십니다. 믿었던 형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몇 푼의 돈에 이방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린 요셉(Joseph)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훗날 애굽의 최고 통수권자가 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자신의 아픈 상처와 기억을 벗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 요셉에게 하나님은 미래의 꿈과 비전으로 그 빈 자리를 채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애굽과 열국을 축복하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200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제 지난 일은 단지 지난 일일 뿐입니다. 아픈 감정들은 다 털어버리고 새롭게 새해를 시작합시다. 얼마만큼 자신을 비우든지 우리는 비운 만큼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9-01-06

[신앙의 샘] 세 사람이 하늘을 쳐다보면···

집안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인사로 나를 맞는 아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다. 옷을 갈아입는데 아내가 들어와서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또 F를 받아왔어요. 학원에 보내든지 가정교사를 붙여주든지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며 말꼬리를 흐린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큰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기가 어려운지 공부하는 수준이 높아져서 그런지 계속해서 F학점을 받아오고 있었다. 나름데로 열심히 하는 것같은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언제 시험이 또 있니?" 저녁 식사를 하면서 물어보았다. "내일 모레요." 아빠에 대한 두려움과 미안함이 무질서하게 섞인 표정으로 잠깐 내 얼굴을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떨군다. "아빠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모르겠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럼 시험보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기도하면서 공부해 보자. 단번에 A학점을 받는다는 욕심은 버리고 C학점을 목표로 이틀만 해봐. 그래도 안되면 학원에 보내줄께. 하지만 아빠는 너를 믿는다. 너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어." 그날 밤 아들 방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 지난 여름에 블락버스터 (Blockbuster)로 나온 영화 중에서 '쿵푸 팬더 (Kung Fu Panda)'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가족과 본 적이 있다. 쿵푸의 창시자인 우그웨이 (Oogway)라는 거북이는 쿵푸의 마지막 경지를 담은 용의 두루마리 (Dragon Scroll)의 주인을 찾고 있었다. 마을에 있는 국수집 아들인 포 (Po)라는 팬더 곰이 쿵푸대회를 관람하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자신이 두루마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계시받는다. 쿵푸 사범인 너구리 시부 (Shibu)는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자신이 오랫동안 훈련시켜온 5명의 제자을 제치고 엉뚱하게 게으르고 뚱뚱한 팬더가 쿵푸 달인의 칭호인 '용의 무사 (Dragon Warrior)'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술지도를 거부하던 시부는 포가 가진 다른 재능을 보고 그의 가능성을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부 자신이 지도하던 훈련 방법을 깨고 포에게 맞는 맞춤형 무술지도를 시도한다. 무술훈련을 다 받은 포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용의 두루마리를 받고 당황한다. 두루마리에는 반사된 자신의 얼굴만 비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는 아버지와 대화를 통해 쿵푸 달인이 되는 비밀은 자신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절대 상대하지 못할 강적인 표범 타이 롱 (Tai Lung)을 물리치고 마을의 평화를 지킨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어느 누구도 뚱뚱한 팬더 곰을 '용의 무사'로 믿지 않았다. 다만 우그웨이와 시부와 포 자신인 세 사람만 믿었다. 하지만 세사람의 믿음은 한 사람의 가능성을 극대화 시켰다. '삼인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한 두사람은 어렵지만 세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하면 군중이 그 사람들을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연구를 위해 한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도 한 가운데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전혀 관심없이 지나쳤다. 두번째 사람이 길 가운데서 처음 사람과 똑같이 하늘을 함께 쳐다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세번째 사람이 등장하여 앞에 두사람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신기하게 군중이 그들이 쳐다보는 하늘을 보기 시작하면서 "뭐가 보인다는 거야?"하며 서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군중의 심리를 변화시키는 '삼인의 법칙'을 역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세 사람이 한 개인에게 똑같은 가능성이나 재능을 말해준다면 그렇게 믿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며칠 후 아내에게 전화를 받았다. "오늘 시험 성적이 나왔는데 A를 받았데요." 흥분된 목소리가 전화 반대편에서 들려온다. 문제는 내가 믿을 수 없었다. "C만 받아도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반신반의 한 마음으로 믿는다고 했는데 아들이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아들은 주님과 부모가 자신을 믿어 준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공부 못하는 자녀를 가진 부모는 속상하고 누구에게 말하기도 창피하다. 그래도 믿어주고 격려하면 자녀가 작은 성공을 맛보며 변해간다. 자신감을 되찾아 저조했던 성적을 한 단계씩 끌어 올리는 자녀를 바라보는 것도 나에게는 큰 행복이다.

2009-01-06

[사목의 향기] 새해를 맞으며

참으로 세월이 빨리 지나갑니다. 2009년이 밝은지도 벌써 1주일이나 지났습니다. 대망의 한 해가 밝았다고 하면서 한 해를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75일이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적인 표현으로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했고 로마인들은 호전적인 민족답게 "시간은 화살처럼 도망간다"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화살보다 더 빠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많은 철학자들에게 큰 주제였습니다. 전통적인 그리스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시간에 대한 정의를 전제한 후 다른 견해를 전개합니다. 그는 시간을 "먼저 것과 뒤에 것을 재는 기준"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앞뒤를 재는 기준이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속을 하여 날짜를 정하고 달력을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에는 기준 설정이 중요한데 일찍이 머리가 먼저 깨인 민족들이 달력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사용하고 있는 음력은 대단히 정확한 달력입니다. 지구와 가장 가까이 있는 달의 운행을 측정하고 절기를 상세히 조사하여 달력을 만들고 24 절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원래 24절기는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난 것을 보면 지혜로운 우리 선조들이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85)가 주관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4년마다 하루 정도의 오차가 있다고 하여 2월이 4년마다 29일이 됩니다. 어떠하든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2시간도 2-3분처럼 짧은 것 같고 지루한 시간은 1시간이 10시간도 더 되는 듯합니다. 군대생활을 한 한국의 남자들에게 3년간은 10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집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3시간도 1분처럼 짧은 것 같고 1박 2일도 잠시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므로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십시오. 한해를 보내면서 어떤 이들은 10년 감수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너무 짧았다.' '너무 빨리 지나갔다. 아쉽다'라고 합니다. 상대적이라고 하는 이 시간은 삼차원 세상에서만 통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되지만 차원을 달리하면 하나 더하기 하나가 셋도 되고 넷도 될 수 있습니다. 이는 현대 수학의 이론인데 이런 점에서 수학을 통해서도 영원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천년이나 하루 등 유한하고 제한적인 시간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루 이틀 사흘 같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영원한 분이십니다. 시간은 삼차원의 세상에서만 통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2008년이라는 숫자는 다분히 인간이 만들어 놓은 약속에 불과합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영원을 동경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하느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 수 없으므로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살이에 충실하면서도 영원을 동경하는 우리는 '영원한 순례자'이자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는 변하더라도 내 말은 변하지 않으리라."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에 희망을 두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다 충실히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돌이켜보고 잘못 된 것은 뉘우치고 주님의 용서를 빌며 좋은 결심을 세워 새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2009-01-06

[지혜의 향기] 불성은 무엇일까

우주의 진리 곧 부처님의 법신은 심심미묘하고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인긴들이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제한된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우주의 생명 에너지 생명의 광명 본래면목 진여를 부처님께서는 혜안으로 있는 그대로 보신다. 몽매한 중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지 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필자가 그 동안에는 진여불성에 대하여 비유로만 제시를 했으나 오늘은 있는 그대로를 써보고자 한다. 우주의 시작은 언제부터고 끝은 언제일까? 사실 이 물음 자체가 우문이다. 그것은 무시무종(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인 것이다. 직설로 말해 보자. 불성이라고 하는 생명의 광명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해도 된다. 본래 우주의 진리는 일원이요 둘이 아니지만 몽매한 인간들이 부처님이요 하나님이요 만들어 놓고 싸우는 것이다. 생명의 광명은 온 우주에 빈틈도 없이 충만해 있다. 인간이나 지구나 태양이나 은하계나 그 무엇도 불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 몸을 한 번 생각해 보아도 60조개나 되는 엄청난 숫자의 세포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 세포는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그것은 산소 수소 탄소 질소 등으로 되었고 그러면 이러한 입자는 무엇으로 되었는가. 그것은 전자.양성자.중성자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 7개가 돌면 수소가 되고 전자 1개가 돌면 탄소가 된다고 한다. 요즘은 쿼클이라고 하는 가장 작은 입자까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토록 작은 입자는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생명 에너지 혹은 생명의 광명인 영원불멸의 생명에너지 즉 진여불성이라고 하는 우주에 충만해 있는 생명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면 결국에는 광파만 남는다는 것은 오늘날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증명한 일이니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물리학 박사 프리초프 카프라의 말처럼 우주는 오직 에너지 뿐이다. 물질은 없고 오직 에너지 뿐이다. 보이지 않는 광파 에너지가 곧 불성이요 그 불성은 우주에 항상 가득차 있다. 그건 곧 우리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 불성은 우주가 파괴되는 괴겁이라 해도 절대로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는 심심미묘하고 불가사의한 것이다. 이러한 우주의 묘리를 명예욕만 위해 치달리고 폭력만 일삼는 승속을 망라한 중생들이 어찌 알겠는가. 다만 막연하게 그럴 것이다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진실로 불성을 알고 말하는 건지 모르고 하는 건지 아리송하다. 또한 상대적으로 있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나를 비롯해서 바다 산천 일월성수 등 그 무엇도 진여불성으로 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는 공부를 해도 이러한 이치를 분명히 알고 정진하면 더 쉬운 길로 속히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오직 진여불성 뿐이요 물질은 없다. 잠시간 200억년 동안 생명체가 살아가는 지구도 인연따라 생성되었다가 파괴되곤 하는 것이니 무상하고 무상하도다.

2009-01-06

[백성호 기자의 현문 우답]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만 흔드실래요?

간만에 책꽂이에서 시집을 한 권 꺼냈습니다. 무심코 펼쳤더니 청마 유치환(1908~67)의 '깃발'이란 시가 나오네요. 중학생 때 국어시간에 외던 시입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이란 구절이 가슴에 꽂히네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죠. 베란다 너머에 깃대가 보이네요. 그 끝에서 쉬지 않고 깃발이 펄럭입니다. 사람들에겐 '지향'이 있습니다. '저 푸른 해원'을 향한 끊임없는 '바라봄'이 있습니다. 종교와 명상의 오솔길에선 그걸 '목마름'이라고 부르죠. 사람마다 강약의 차이는 있겠죠. 그러나 그런 '목마름'은 모두의 가슴 속에 이미 숨 쉬고 있는 거겠죠. 다시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직도 깃발은 펄럭입니다. 다시 보니 참 강고합니다. 뭐냐고요? 저 빳빳한 깃대 말입니다. 쉬지 않고 펄럭이는 깃발을 끊임없이 울어대는 깃발을 깃대는 끝내 놓질 못하는군요. 그게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겠죠. 저 깃대가 바로 '나'라는 에고니까요. 나의 집착 나의 가짐 나의 욕망이 그렇게 깃발을 움켜쥐고 있는 거죠. 그러나 '제자리걸음'으로는 저 푸른 해원을 향해 날아가지 못하죠. '나'를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깃대의 끈을 끊는 순간 깃발은 비로소 날아가겠죠. 몸소 저 푸른 해원 그 청정한 숨결에 가 닿겠죠. 그럼 사람들은 묻겠죠. "대체 '저 푸른 해원'이 어디냐"고 말이죠. "거기선 어떻게 숨을 쉬고 어떤 풍경을 보고 어떤 생각으로 사느냐"고 말입니다. "에고의 너머에 도대체 무엇이 있느냐"고 말이죠. 과연 어떨까요. 깃대를 떠난 깃발이 해원에 닿는 순간 어찌 될까요. 답은 뜻밖입니다. 눈을 뜨는 순간 깃발은 여전히 깃대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죠. 바람이 부는 대로 여전히 펄럭이고 있는 자신을 볼 뿐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묻겠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잖아. 똑같이 매여 있잖아. 그런데 왜 수행을 하지? 왜 기도를 하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이죠. 깃발은 더 이상 '예전의 깃발'이 아니죠. 깃발과 깃대는 이제 '하나'가 됐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펄럭이지 않게 되죠. 왜냐고요? 깃대에 매달린 이 시간과 이 장소 바로 '지금 여기'가 '저 푸른 해원'이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깃대는 이제 '저 푸른 해원'의 삶을 살게 되죠. 이젠 깃대 안에도 깃대 밖에도 온통 '해원'만 차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앉아도 누워도 매달려도 펄럭여도 온통 '해원' 뿐이죠. 만공 스님은 그것(해원)을 꽃에 빗댔습니다. 삼라만상 모두가 한 송이의 꽃 한 덩어리의 해원으로 이뤄졌기 때문이죠. 기독교 성서에는 이렇게 표현됐죠.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예수가 사는 것이다(갈라디아서 2장20절)." 무슨 뜻일까요. 바로 '깃발과 해원이 하나가 되었으니 이제 깃발이 사는 것이 아니요 깃발 안의 '저 푸른 해원'이 사는 것이다'라는 말이죠. 그러니 깃발은 이제 '깃발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해원의 삶'도 살게 되죠.

2009-01-06

[기독교인의 삶] 사랑의 종소리

"맘! 나 LA에 22일 밤11시 올거야." 뉴욕에 있는 딸이 LA공항에 도착한다는 전화다. 딸의 한국말을 엄마는 잘 알아들어야 한다. 그래야 공항에서 만날 수 있다. "제인 수민이 언니는 16일에 온대. 너도 좀 일찍 출발하지 그랬니? 그런데 백집사님은 수민이 언니 온다고 김치 담그고 갈비 재고 그러더라. 넌 뭐가 먹고 싶니?" "응 난 한국음식 아무거나 다 먹을래. 너무 너무 먹고 싶어." 딸은 한국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한국음식이 너무 너무 먹고 싶단다. 음식은 집을 떠난 타향살이 흔적이다. 딸은 직장 초년생이다. 연휴에다 휴가를 얹어서 뉴욕생활 9개월 만에 나들이를 한다. 이제 타지에서 홀로 선 아이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온다. 먼 여행지에서 만난 한 해의 시간들을 뿌리고 거두어서 아버지의 품에 내려놓고 가족과 예배를 드리려고 나선다. 우리 주위에는 또 다른 가족과 가정들이 있다. 올 여름에는 재활원에 있는 유리가 마약에서 회복되어서 가족을 찾는 기사가 양대 신문에 큰 기사로 나왔었다. 내가 만난 유리는 나이가 40살이었지만 처음 마약을 하던 18살 나이에 그대로 멈춰있다. 그리고 재활원에서 책을 제일 열심히 읽고 늘 웃고 예의가 바르고 착했다. 나는 유리와 같이 영화관도 가고 샤핑도 다니고 우리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유리와 나는 또 다른 가족인 것이다. 그런 유리가 지금 어느 감옥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유리는 가족을 만날 기대가 컸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엄마와 언니가 기다리는 집을 그리워하면서 "언니가 나를 알아볼까요?" 묻곤 했다. 이들은 가족에게 버림받은 가해자요 피해자다. 유리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한 가족이다. 유리도 인생의 여행길에서 이제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축복이 가득하기 바란다. 내 기억의 언저리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그림 같은 시간이 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무엇에 놀란 아이었다. 44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언덕의 빨간 기와 지붕집으로 들어서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동네였다. 그런데 아주 낯설었다. 두려웠던 건 아마도 엄마가 아닌 친구의 손을 잡고 집을 벗어났기 때문이었고 더 놀라운 건 친구가 데리고 간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데 무언가를 잔뜩 받아들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시엔 먹거리가 흔하지 않았는데 내 손엔 삼립에서 나온 크림빵과 학용품이 들려있었다. 한마디로 신기했다. 어린 마음에도. 처음 찾아온 아이에게 공짜로 선물을 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던 사람들이 너무도 놀라웠다. 그 후로 세월이 지나 그날이 크리스마스였고 그곳이 예배당이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주인공처럼 아직도 신기루같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언덕의 그 빨간 지붕의 크리스마스에 젖어있다. 아버지 올 한 해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계셔서 아픔도 이길 수 있었고 지금은 이렇게 웃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강한 것 같으나 너무나 연약합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당신을 의지하고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제인이 뉴욕에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감옥에서 언니와 형부를 그리워하는 유리도 가족이 버린 재활원의 유진이도 내가 유년기에 만난 교회의 종소리를 듣게 하소서. 살아계신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2008-12-23

[목회 칼럼] 은혜로 시작하는 2009년!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주인공의 대사 중에서 이런 말이 있지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성도들은 살고 죽는 문제를 이미 해결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최상의 선물인 영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들의 관건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마 6:31). 이제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느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을 합니다(고전 15:10).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저는 은혜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은혜가 없으면 판단만 하게 되고 재물이 많아도 은혜가 없으면 헛되게 사용하게 되며 건강이 있어도 은혜가 없으면 죄 짓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또한 예배는 드리지만 은혜가 없으면 기쁨과 감격이 없으며 교회는 참석하지만 은혜가 없으면 쓰임 받지 못하며 성경은 읽지만 은혜가 없으면 마음을 지키지 못하게 됨으로 평강을 잃게 됩니다. 매 새해가 되면 많이 사용하는 공통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입니다. 그러나 복은 받고 싶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분께서 주셔야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영적 원리입니다. 물론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노력만을 가지고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을 받는 자는 은혜 안에 있는 자입니다.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하시면서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자는 삶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4-5).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 2009년도에 많은 열매가 삶에 맺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두려움을 묵상할 때와 말씀을 묵상할 때 똑같은 에너지(energy)가 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두려운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나 똑같은 에너지가 소모된다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면 앞으로도 책임지실 것을 믿으십시오. 계속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을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불평 불만하는 사람과 교제하는 것보다는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하십시오. 염려는 타락한 상상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입니다. 두려움을 생각하면 인생이 불안전해 집니다. 행복이 없게 됩니다. 두려움 때문에 행복과 기쁨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으십시오. 마귀에게 속지 마십시오. 마귀는 좋은 것을 나쁘게 보이게 하며 또한 나쁜 것을 좋게 보이게 하는데 수천 년의 경력을 가진 전문가입니다. 말씀을 의지함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채우시기를 소망합니다. 2008년도를 감사로 끝내시고 2009년도를 은혜로 시작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08-12-23

[특별 기고] 경제와 혈액순환

오늘날 미국과 전세계의 경제가 불황기에 접어들었다고 아우성들이다. 그러면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였는가.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른다. 하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 본다면 경제란 우리 몸으로 비교하면 혈액순환과 같다고 본다. 혈액순환이란 피가 정상적으로 잘 도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경제란 혈액과 같은 돈이 정상적으로 잘 돌기만 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혈액이 너무 빨리 돌아도 좋지 않고 너무 늦게 돌아도 좋지 않듯이 경제의 혈액인 돈이 너무 빨리 돌아도 좋지 않고 너무 늦게 돌아도 좋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미국의 경제는 부동산으로 인하여 돈이 너무나 빠르게 돌고 돌았다. 그래서 버블이라는 거품경제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너도나도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부동산에 투자하여 이익을 남기려고 혈안이 되었었다. 그러다보니 비우량 크레딧을 가진 사람들도 은행이나 모기지 회사로부터 싼 이자로 돈을 대출받아 집을 사는 바람에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집값이 오르니 다른 원자재 값도 덩달아 뛰고 뛰었다. 마치 혈액이 너무 빨리 돌면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게 되고 그 결과 심장이 마비되든가 약한 혈관 어느 부분이 터지든가 하여 심장 마비 동맥경화 뇌경색이 일어나는 것처럼 오늘날 세계 경제가 버블(거품)이 터지게 되니 부동산 폭락과 주식 폭락 기업 부도 직장 폐쇄 실업자 증가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지금은 혈액이 멈추어서 돌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듯이 돈이 딱 멈추어서 돌지않고 정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제가 막히고 돈 줄이 막히고 산업이 정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런 현상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나는 이런 경제 마비 현상이 아주 필요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런 불경기가 없이 계속 경기가 좋고 돈이 잘 돌아서 경제 활황이 계속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번 생각해 보았다. 먼저 온갖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뛸 것이다. 집값이 계속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고 오일 값이 계속 올라서 서민들의 개스값은 점점 더 압박을 받을 것이고 나중에는 서민들은 차를 타지 못하고 귀족들과 부자들만 차를 타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오일 산업은 무너지겠지만. 그리고 계속 돈이 있어 투자만 잘 하는 사람은 돈을 벌고 투자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뒤처지게 된다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 질 것이다. 이제 이런 경제 불황을 통해서 그 동안 너무 과도하게 된 경제는 열을 식혀야 하고 숨고르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부동산 투기로 인하여 불로소득이 많이 생겨서 흥청망청 하면서 산 사람들은 이제 그런 과소비를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 매어야 할 것이며 서로가 함께 적절히 나누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경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경제학자가 말했던가. 공산주의 경제는 의인들을 위한 것이고 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죄인들을 위한 경제라고. 그래서 욕망에 붙잡힌 죄인들이 판을 치는 시장경제는 널뛰기식으로 발전했지만 의인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공산주의 경제는 텅텅비고 거미줄 치고 망하는 경제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젠 죄인들이 좀 의인들로 변화되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설사 의인이 되지는 못했을지라도 의인 행세나 흉내라도 좀 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나만 머리 잘 굴려서 돈 잘 벌면 된다는 개인주의 식의 경제이론으로는 너도나도 다 망하는 때가 올 것이다. 남을 배려하고 사회 전체가 한 몸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함께 더불어 조금씩만 발전해 가는 경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2008-12-23

[지혜의 향기] 견성오도, 쉽다

우리가 견성오도라 하면 먼저 나와는 성관이 없는 저만치 있는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은 감히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은 견성오도는 그러치만은 않아서 우리가 깨우치고자 하는 대상인 불성은 우리 인간이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지니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용수보살님이나 원효대사나 서산대사나 진묵대사나 대통령이나 노숙자나 모두 같은 부처님 성품과 그 성품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견성오도의 길은 대단히 어려운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가장 쉬운 길이기도 하다. 견성오도라는 말 가운데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비유를 들어서 표현하면 도토리와 참나무는 같은 성품이라는 것이다. 도토리는 비록 작은 열매이지만 커다란 참나무의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산중에서 몇 백 년을 살아온 아름드리 참나무나 손톱만한 도토리 열매나 같은 성품으로 그 열매로 인해 큰 나무가 되었고 나무의 열매가 도토리이듯이 서로 다르지 않는 성품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불성은 부처의 성품인 것이다. 우리들 또한 부처님과 다름없는 성품을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도토리와 큰 참나무가 한 성품이듯이 부처와 우리 또한 같은 성품일 뿐인 것이다. 어느 도반은 불성이 무엇인가 알아보기 위해 사전을 보고 많은 서적을 뒤졌지만 도저히 모르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견성오도란 성품으로 보아서 도를 깨닫는다(깨친다)로 해석이 되지만 본래 나에게 있는 근본자리인 부처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와 다르게 범부 중생으로 불리는 것은 근본성품인 불성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내 안에 있는 부처를 보려고 하는 일은 많은 수행이 따라야 하고 또 수 만생을 수행하고도 이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반면에 '마음' 한 번 비우고 억겁전생의 습을 단번에 녹여버리면 앞이 훤하게 보이고 활연 대오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도인이 말씀하시기를 견성오도를 하기는 세면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 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생활을 해 나가면서 도를 깨우친다는 것은 무조건 어려운 일이고 우리에게는 감히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지레 겁을 먹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 한번 잘 정리해나가면 우리의 마음 속에 근본자리인 불성이 있고 참 나가 존재하고 더 나아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우주 만물이 모두 한 생명체인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견성과 함께 도를 이루는 견성오도에는 사선근을 닦고 10지나 18지등에 오르는 여러 수행의 단계가 있지만 이런 이치를 너무 유식론적으로 풀어가다 보면 번쇄하기도 하거니와 문자에 걸려서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런 단계나 이치를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견성오도를 이룬 후에도 끊임없는 수행과 정진을 통해 빈틈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도라고 함은 본래 말로서 전할 수도 없고 말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부가 익어지면 자연히 터지게 되므로 재가나 출가불자를 가리지 않고 현재 처한 위치에서 변함없고 쉬임없는 정진이 필요한 것이다.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던 그저 묵묵히 정진해야 한다. 끊임없는 정진만이 습을 녹이는 유일한 길이다. 마지막으로 성탄절을 맞아 아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2008-12-23

[백성호 기자의 현문 우답] 나와 함께 깨어있어라

#풍경1 : 겟세마네 동산. 죽음을 예감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있어라." 그리고 홀로 앞으로 나가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쿨~쿨' 잠이 들고 말았죠. 돌아와서 예수는 말했습니다.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있어라. 깨어서 기도를 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가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또 잠들고 말았죠. 예수는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시간이 되었다.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풍경2 : 기독교 영성가인 다석 유영모(1890~1981)는 '머무름'에 대해서 말했죠. "우리는 일정하게 머무를 곳이 없다. 그래서 무주이다. 머무를 곳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일 뿐이다. 우주 공간이 우리의 주소이다. 사람은 모두 머무를 곳을 찾는다. 그러나 머물면 썩는다. 주라야 살 것 같지만 무주라야 산다. 머무르면 그쳐 버린다. 산다는 것은 자꾸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풍경3 : 당나라 때 가난한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무를 해서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꾸렸죠. 어느 날 나무꾼이 객점에 나무를 갖다놓고 나올 때였죠. 한 손님이 읽는 불경 소리가 들렸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금강경'의 한 대목이었죠. 그 구절을 듣는 순간 나무꾼은 크게 마음을 깨쳤습니다. 그리고 출가를 했습니다. 결국 그는 깨달음을 얻고 달마 대사로부터 내려오는 '선맥'을 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육조 혜능(638~713) 대사입니다. 예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를 하라"(마가복음 14장38절)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혹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잠이 듭니다. 그럼 어디일까요. 우리는 대체 어디를 향해 잠이 드는 걸까요. 그렇죠. 선악과의 후예인 '나' 속으로 잠이 드는 거죠. 거기는 가짐의 유혹 집착의 유혹 욕망의 유혹이 끝없이 넘실대는 곳이죠. 그래서 예수는 '나' 속으로 잠들지 말고 "깨어있어라"고 말한 겁니다. 예수의 '깨어있음'을 다석 유영모는 '무주'로 표현했죠. 머물지 말라는 거죠. '나'라는 에고에 머물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는 이렇게도 말했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런데 우리의 일상을 보세요. 우리는 진정 어디에 거하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나' 속에 머물고 '나' 속에 거하는 거죠. '나'속에 거하는 이는 결코 '예수' 안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석은 "머물면 썩는다"고 말한 겁니다. 붓다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했습니다. 머무는 곳에 집착이 있고 집착하는 곳에서 우리는 늘 머물기 때문입니다. '나'에 머물면 '나의 마음'이 나오고 '나'에 머물지 않으면 '부처의 마음'이 나오는 거죠. 혜능 대사는 그걸 깨친 거죠. 그러니 "깨어있어라"는 예수의 메시지도 "머물지 말라"는 붓다의 메시지도 우리에겐 '길'입니다. 그 길에 '썩지 않는 법'이 있기 때문이죠.

2008-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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