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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샘] 평범 이상의 삶!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Chemistry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서로에 대한 호감 다른 용어로 매력 포인트를 의미합니다. 어떤 이는 외모에 대해서 서로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내면적인 마음에 매력을 느낍니다. 어떤 이는 등산이나 요리 운동 등 같은 취미가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같은 관심이나 공통점이 있어야 친해 지기가 쉽고 관계가 형성되며 계속되면 결혼이야기로 발전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부터 매력을 느끼시는 부분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천만인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 한 분의 도움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평범 이상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시고 택하신 이유가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력을 느끼신 부분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들의 매력 포인트는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기 때문이었습니다(신7:7). 다시 말해 그들은 다른 민족보다 강한 것이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십니다. 약함을 고백한 바디매오를 예수님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소경이었던 바디매오는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앞을 다시 보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는 평범 이상의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막 10:46-52). 그러나 강함을 나타내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셨던 날에 그 분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말로하는 사람의 귀을 베어 버렸습니다(요18:10). 그의 강함은 또 하나의 예수님의 사역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고의 귀를 치료해 주십니다(눅22:51). 하나님은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고백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시 72:13). 여기서 명확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약한 것이나 가난한 것 그 자체를 좋아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가난한 마음 상태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의 문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마도 연약함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힘이 너무 강해서 문제일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될 만큼 힘이 강한 것이 문제일 수 있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아도 될 만큼 힘이 강한 것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기도와 말씀 묵상의 삶을 즉 경건의 시간을 주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어도 승리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연약함을 통해서 강해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약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들을 찾아 가시며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담대함을 주십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평범 이상의 삶을 누린 사람들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연약함을 하나님께 올려 드렸을 때 그의 연약함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도구가 되었고 그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을 가지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감으로 평범 이상의 삶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2009-03-17

[목회 칼럼] 주의 인자함에 몰입을

요즈음은 좀 걱정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 계발에 혈안이 된 듯하고 이 물결은 교회의 메시지도 점령한 듯한 상실감 때문이다. '대화의 기술 긍정적 사고 더 나은 자신 만들기' 등. 기독교인들이 선호하는 책도 말씀에 대한 풀이보다는 자기 계발에 관련된 주제를 성경 말씀 몇 구절로 살짝 치장해 놓은 서적들 같다. 사람들이 온통 자기 계발에 관심을 두다 보니 강단의 메시지나 기독교 서적도 이에 부응해야 관심을 끌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해 여름 한국에 갔을 때였다. 국민일보에서 사역하는 분이 최근의 기독교 저술 동향에 관해서 이야기 하면서 '자기 계발'에 관한 책만이 히트를 친다는 분석을 했다. 그리고 곧 독자들의 관심이 '몰입'이란 주제를 향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 했다. '몰입'은 고도의 자기 계발이며 성공을 보장하는 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를 애써 계발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계발이냐는 것이다. 자신의 경쟁력 향상인지 하나님의 기쁨인지가 너무도 불분명해져 있다. 얼마 전 TV를 우연히 보았는데 패리스 힐튼이란 유명인에 대한 보도가 나왔다. '힐튼 호텔' 상속녀로 알려진 자유분방한 이 아가씨의 유명세는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날로 더 해만 가는 듯하다. 내 관심을 끈 방송의 이야기는 유명인에 대한 정의였다. 유명인(celebrity)은 '유명해져서 유명한 상태로 있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라고 소개한다. 기가 막혔다. 이 시대에 누구나가 관심을 주고 누구가가 부러워하는 그 유명인은 결국 유명한 것이 목적이란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애써 자기를 계발하는 사람들의 목적도 '계발' 자체에 있는지 모르겠다. '나의 성취'를 넘어선 하나님의 기쁨은 생각도 안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도의 자기 계발은 '자아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봉사와 희생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익히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야만 한다. 베드로 전서 2장 3절에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는 권면이 나온다. 주의 인자하심은 맛보는 대상이며 맛 본 사람 안에 무엇인가를 불러 일으키는 동기부여의 힘이란 의미다. 바로 앞절을 보면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한다. 갓난 아이들이 엄마의 젖 맛에 길들여 있고 이 젖에 대한 욕구를 통하여 성장하듯 인자하심을 맛보면 영적인 성장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는 뜻이다. 인간의 비약적 성장은 어떤 일에는 '몰입'할 때 이루어진다. 성경은 이 몰입의 방법을 가르쳐 준다. 어떤 기술이나 훈련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경험인데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그 맛에 온전히 취하는 것이다.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몰입됨으로 비약적인 영적 성숙을 경험할 수 있다. 인생살이는 그렇게 쉽지 않다. 바른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온통 조미료로 뒤범벅된 맛의 타락 속에서 주의 인자하심의 맛을 제대로 알고 이 맛에 길들여진 성도들을 만나기 쉽지 않아졌다. '나'만이라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 만이라도 주의 인자하심의 맛보는 일에 몰입되어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9-03-17

[기독교인의 삶]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지금 우리 집 마당에는 커다란 오렌지 나무가 퍼트리는 꽃 향기가 요란하다. 한국에서 맡아보던 아카시아 꽃 향기 같기도 하고 미국의 쟈스민 향기 같기도 하다. 나는 하얀 꽃가루를 뒤집어쓰고 꽃 향기 요란한 마당 오후의 오렌지 나무 그늘에서 두 손을 포개어 나무에 얹고 손등 위에 얼굴을 묻는다.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 이렇게 불러본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는다. 어릴 적 숨바꼭질하면서 외치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아이들 주문대로 아주 천천히 부르고 돌아서면 어둑어둑해진 동네는 쓸쓸했다. 아이들은 혼자 도망가지 않고 여름의 태양까지 데리고 갔다. 거기 긴 갈래머리 소녀의 그림자도 사라지고 담벼락에는 두 손을 얌전히 포개고 눈을 꼭 감은 기다란 무궁화 꽃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얼굴을 감춘 작은 목소리가 무궁화 꽃잎을 세고 있다.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의 주인공인 어린 '에밀 싱클레어'가 거기 두려움으로 서있다.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나는 때때로 기괴한 형태를 가진 자연물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냥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마력 그 얽히고 설킨 깊은 언어에 온통 몰두하여 관찰했다."(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서) 나는 비즈니스를 처음 시작하면서 마당에 직원들과 함께 대추나무를 심었다. 햇살이 뽀송뽀송한 3월의 봄날이었다. 나무에 이름표도 달아 주었다. 대추나무는 아직 작달막하다. 나무엔 뽀쪽한 가시가 예민하게 곤두서있다. 누구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지 쉽사리 매만지기 겁이 난다. 대추가 열리고 무성하던 잎도 졌다. 가시는 여전히 날카롭다. 연약한 나무를 보호하려나 보다. 연휴에 LA로 온 딸이 뉴욕으로 돌아가던 날 오후 나는 마당에 단감나무를 심었다. 2월 7일 토요일이었다. 단감나무에 거름을 주려고 참기름 집에서 깻묵을 두 포대나 사왔다. 사 온 깻묵을 흙과 골고루 섞어서 듬뿍듬뿍 나무 밑에 묻어주고 감나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잘 자라야 해~.' 나의 말을 하늘이 들었는지 올 봄에는 비가 풍성하게 '오신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연의 변화를 존대어로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나 그리고 이제는 딸에게 그런 언어를 물려주고 싶다.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 봄볕이 골고루 배어있는 오후의 오렌지 나무 아래서 천천히 다시 불러본다. 뒤 돌아본다. 등 뒤에 따스한 봄 햇살도 그대로 멈추어 있다. 이제 겨울을 이겨내고 힘겹게 잎을 올려보내는 키 큰 늙은 단감나무가 위에서 미소로 내려다본다. 석류나무 가지가 도망치다 붙잡혀 숨을 헐떡거린다. 대추나무 밑에 숨은 수선화는 노란 머리카락을 미처 가리지 못했다. 이제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찾았다. 해가 지는 어둠에도 나의 그림자였고 나를 지키시던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는 손으로도 만져진다. 그는 한 번도 술래인 나를 혼자 두지 않으셨다. 그래도 나는 늘 외롭고 두려웠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 그 중심에 이르시되 /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 땅이 있을 동안에는 / 심음과 거둠과 / 추위와 더위와 / 여름과 겨울과 /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세기 8:21-22)

2009-03-17

[사목의 향기] 위대한 한민족

요즈음 어디를 가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살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미국이 기침을 하면 우리나라는 감기를 앓는다고 말할 정도로 미국과 한국은 경제적으로 많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래도 우리의 경제는 많은 발전을 해왔다. 한 나라의 GNP가 2만 달러가 되었다면 상당한 수준이 아니겠는가?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3만 달러는 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이 정도로만 살아도 과거에 비하면 수백배 잘 사는데 그런대로 괜찮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이다. 625 전쟁이후 GNP가 70 달러도 되지 않던 나라가 세계 경제 13위의 나라가 되었으니 부자가 되었다고 자랑하는 이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더구나 전쟁 후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필리핀이나 파키스탄에 학생들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 나라의 사람들이 직장을 찾아 우리나라로 오고 있으니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이렇게 뛰어나다. 사실이다. 6400Km에 달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는 중국의 만리장성이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축조되었다고 하니 위대한 민족임엔 틀림없다. 은근과 끈기를 바탕으로 한 국민의 근면성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불행하게도 하강일로로 치닫던 국운이 1985년에 끝나고 그 다음 해부터는 상승일로라고 주장하는 단체도 있다. 그들은 86년 아시아 올림픽과 88년 국제올림픽 개최에 이어 월드컵 유치와 4강까지 한 우리나라를 자랑하기도 한다. 사실이다. 우리 민족의 뛰어난 면은 서서히 국제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내어 왔다. 지난 해 북경 올림픽만 해도 그렇다. 금메달 10개를 목표로 하여 우리 선수들이 열심히 뛰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13개를 따내어 200개국이 넘는 국제 사회에서 7위란 놀라운 성적을 일구어내었으니 국수주의자가 아닌 나 같은 사람이라도 우리 민족의 우수성에 긍지를 느끼며 자랑할 만하다고 본다. 최근에 접한 보도 중에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 저 멀리 아프리카 북단의 이집트에서 크게 드러나 흐뭇한 마음 금할 길 없다. 건축 분야에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집트에서 우리 기업이 놀라운 일을 해냈으니 더욱 더 우리의 우수성이 돋보인다.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에 취직하려고 미국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장면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는 "기아 자동차 회사를 우리 마을에 오게 하신 예수님 감사합니다"라는 팻말을 세운 것을 보면 미국의 경제가 힘든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다. 한편 우리의 국방력도 대단한 수준이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창군 63년만에 이지스함을 보유한 해군의 자부심은 대단하다고 한다. 현대과학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이지스함! 양보다는 질을 중시하는 현대전에서 세종대함 한 척이 우리 해군의 자부심을 한껏 고양시켜놓았으니 이를 수단으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으리라.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뛰어난 IT 산업에 도전하려고 여러 나라가 합동작전을 편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또 한 번 우리 민족의 우수성에 감탄한다. 이 외에도 우수한 원자료 발전기 세계 제일의 조선사업 등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우뚝 솟아난 기적의 나라임을 증명하지 않는가? 여기에 우수한 우리의 글자가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으니 머지않은 장래에 국제용어로 인정받을 날이 오리라 기대해본다. 이런 물질적인 기적만이 아니다. 종교국가라고 할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우리의 전통적인 종교심과 부합되어 종교 대국으로 부상되고 있고 큰 갈등 없이 상호 공존하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뛰어난 장점이자 지혜로운 국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민족이므로 최근에 닥쳐온 경제 불황 정도는 적절히 대처하고 극복하리라 본다.

2009-03-17

[지혜의 향기] 나도 부처, 너도 부처

불교는 우주의 이치(진리)를 다 알아버리는 통쾌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불법(佛法)이라고 또는 부처님이라고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만 부처요 그 가르침만 불법이라고 하지만 부처님과 불법은 석가세존 탄강 이전부터 무량겁 전부터 있었다. 중생이 내 마음의 불성을 보고 미혹을 벗고 성자가 되는 길은 염불 참선 명상 삼매에 들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 길은 나도 부처요 너도 부처임을 확연히 믿어야 속히 증명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때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어떠한 마음가짐이 중요한가? 그것은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부처님으로 보는 것이다. 서로가 부처님으로 대접하고 부처님으로 생각할 때 가정의 화합과 평화가 오고 가화만사성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웃과 만인을 부처로 보는 것만큼 더 편안한 마음은 없는 것이다. 염불참선을 바로하게 되면 마음이 맑아지고 생리도 바뀌게 된다. 욕심이나 치심으로 얼룩진 몸뚱이 지수학풍 사대가 청정한 사대광명으로 바뀌는 것이다. 밝고 깨끗하게 바뀌는 우리 마음이 점점 정각으로 다가가게 되며 염불참선이란 1시간 또는 100시간 하면 한 만큼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는 것이다. 참선을 할 때는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우주에 충만한 불성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 실상에 안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는 한 우리 마음을 생명의 본바탕 근원에다 두어야 하는 것인데 화두를 왜 드는가? 가령 '이 뭐꼬' 화두를 든다고 할 때 끝끝내 '이 뭐꼬' 화두만 의심하는 것이 아니고 '이 뭐꼬'를 빨리 타파해서 진여불성 생명의 근원자리 내가 부처임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염불참선을 할 때 마음을 실상(불성)에 두고 내가 부처임을 확실히 믿고 염불참선을 하게 되면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있던 병도 내 몸의 자정능력에 의하여 우주에 충만한 살리는 힘인 생기에 의하여 자연치유가 되는 것인데도 소위 선객(禪客)이라고 하는 스님네나 재가불자들이 이 선방에서 참선을 하다가 두통이 생겼다 위장병이 생겼다 하는 분들은 제 아무리 곤륜산이 떠나갈 정도로 자기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큰 소리로 외쳐대도 올바른 참선 즉 실상에서 내가 아미타불이라는 것을 믿고 우주 생명의 본체와 합일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면 필자가 옛날 우리 큰 스님 따라서 3년 결사(3년간 두문불출 참선수행)를 할 때 매일 8시간씩 정진을 쉬지 않고 하였는데도 1년이 지나도록 번뇌망상이 떨어지지 않고 영 진전이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입산 초기라 "아 나는 정진해서 성불하기는 틀렸나 보다"하고 단단히 마음먹고 나의 머리에다 강제로 힘을 가하고 하룻동안 정진을 했는데 그 날부터 두통이 오기 시작하였다. 말도 못하고 혼자만 몇 시간 고민하다가 다음날 숨을 들이마시며 "우주의 살리는 기운이 머리로 들어와서 가슴으로 해서 배를 지나 발바닥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면서 호흡법을 3시간 하고 두통이 없어진 경험이 있다. 염불선이든 간화선이든 내 마음을 본체에서 떠나지 말고 정진하게 되면 이보다 더 편안한 행복과 안심입명은 없는 것이다. 그까짓 가상인 재물 보석 같은 것은 애써 구하지 않아도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2009-03-17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소크라테스의 유언 '빚진 닭 대신 갚아주게'

4대 성인의 유언은 참 놀랍습니다. "모든 형상은 무너진다"는 붓다의 유언에도 침묵을 통해 '침묵 너머의 소리'를 전한 공자의 유언에도 이 무한한 우주가 담겨 있죠. 그럼 소크라테스의 유언은 어떨까요. 거기에도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풍경1 : 2400년 전이었죠. 아테네의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악법도 법이다"가 그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알고 있죠. 실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죽기 직전에 "여보게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의술의 신)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네. 자네가 대신 갚아주게"란 말을 남겼습니다. 참 아리송하죠. 의술의 신에게 닭을 빚졌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말이네요. 그런데 이 한 마디에서 삶과 죽음을 훌쩍 뛰어넘는 소크라테스의 내공이 엿보입니다. 더 아리송하다고요? 그럼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하루를 살펴볼까요. #풍경2 : 사형 집행일이었죠. 지인들이 동굴 감옥으로 소크라테스를 면회하러 왔습니다. 사람들은 슬픔과 위로의 말을 던졌죠. 소크라테스는 여자들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낸 뒤 남은 이들과 함께 '영혼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 여부'에 대해 철학적인 토론을 벌였습니다. 대단하죠. 자신의 죽음을 코 앞에 두고서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은 존재하며 불멸한다"고 설했죠. 이를 지켜보던 친구 크리톤이 걱정스럽게 말했죠. "여보게 간수가 오늘 만큼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군. 말을 많이 하면 독약이 잘 듣지 않는다는 거야. 그럼 독배를 두 잔 세 잔을 마셔야 할 수도 있다네." 소크라테스가 말했어요. "걱정하지 말게. 두 잔이고 세 잔이고 마시면 되지 않나." 소크라테스는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의 상태에 가깝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이 막상 죽음에 당면해서 (죽음을) 마다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라고 말하곤 독배를 가져 오라고 했죠. 그가 차분한 표정으로 독약을 마시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렸죠. 그리고 감방 안을 걷기 시작했죠. 온몸에 독기운이 퍼지게끔 말입니다. 발과 다리가 무거워지자 소크라테스는 자리에 누웠습니다. 마지막 순간이었죠. 소크라테스는 "여보게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자네가 대신 갚아주게"라고 말한 뒤 숨을 거뒀습니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병이 나면 약과 의술의 신(아스클레피오스)에게 기도를 했죠. 병이 나으면 감사의 표시로 닭 한 마리를 신전에 바쳤습니다. 이제 감이 오시죠.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유언은 유머입니다. 그는 "독약의 약발이 제대로 받는군. 한 잔만 마셔도 충분해. 신에게 고맙다고 전해줘"라며 농담을 던졌던 겁니다. '현문우답'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농담에 주목합니다. 그런 유머를 빚게 한 그의 시선에 대해 묵상합니다. 남의 죽음을 놓고 말하긴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놓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은 '자신의 죽음'을 놓고 말을 했다는 겁니다. 말 뿐 아니라 행동까지 말이죠. 그게 왜 가능했을까요. 소크라테스가 이미 깨어있었기 때문이죠. 그가 말한 '죽음의 상태에 가까운 삶'은 '에고의 죽음'을 말한 겁니다. 그가 귀를 기울였다는 '이성의 소리'는 바로 '진리의 소리'죠.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죠. 소크라테스는 이미 삶과 죽음 그 너머에서 '육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유언의 순간에도 유머를 던진 거죠. 어때요. 우리의 유언에도 유머가 섞일까요?

2009-03-17

[사목의 향기] 신의 존재와 체험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한 때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철학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자기가 믿는 신을 위해 한 생을 몽땅 바치는 사람들도 있다. "유한한 인간이 감히 신에 대해 논할 수 있는가?"라는 말로 신 존재에 대한 어떠한 시도나 증명도 부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인간의 추리 작용을 이용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한 이들도 있다. 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맹목적인 신앙으로 사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하는 이들은 "너희들이 신에 대해 아무리 논해보아도 부처님 손 안에 있는 손오공의 존재가 무엇이나 되느냐?"라고 하면서 비웃기도 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사실이다. 한편 신의 존재를 철저히 인정하고 일생동안 수도자와 학자로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을 위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 성 토마스 아뀌나스는 인간의 추리로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학대전(I 2 3)에서 다섯 가지 방법으로 신 존재 증명을 시도했으니 운동이라는 경험적인 사실에 의한 증명 능동인에 의한 증명 우연성에 의한 증명 완전성의 단계에 의한 증명 세계의 질서에 의한 증명을 제시했다. 그는 이러한 철학적인 고찰을 통하여 종교적인 신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으나 어느 날 그가 증명한 신을 직접 체험하고부터는 펜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는 "이제까지 내가 해놓은 것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인 철학자들은 토마스 아뀌나스의 이런 태도에 놀랜다. 그리고 내리는 결론은 피조물인 인간이 어느 정도 조물주인 신에 대해 논할 수는 있으나 그 존재 앞에서 연약한 인간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태도다. 한편 성경은 신에 대한 많은 체험들을 전해준다. 어느 날 신을 체험한 아브라함은 너무나 강렬했던 그 체험에 따라 여생을 살았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네 고장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한 마디로 강렬한 체험 신앙이다. 그 체험이 어떤 식으로 왔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너무나 강렬하여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추종의 삶은 고난을 수반했으나 의미 있는 삶으로 전환되어 갔다. 기적적으로 아들도 얻고 이해할 수 없는 예언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점점 끌려가는 삶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상황이 그를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바로 체험 신앙이었다. 초자연적인 힘에 사로잡혔던 인물들 중 요나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그 힘을 체험했으나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도망치고 만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거니와 자신의 상황과는 너무 다른 삶의 조건이었으므로 피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었다. 주어진 사명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단 요나라는 인물만이 아니다. 구세주의 어머니로 간택된 마리아도 마찬가지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남녀의 결합이 없는 자녀출산이 있을 수 있는가? "성령께서 그대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라고 천사는 말한다. 무슨 뜻인가? 신의 영역은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인간의 계산법을 초월하는 신의 계산법이 작용한 것이다. 일찌기 성 아우구스띠노는 신과 인간의 관계는 쇠붙이가 자석에로 끌려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사랑이라는 강력한 힘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체험 신앙' 만이 말해 준다고 한다. 체험 신앙은 아브라함과 마리아에게 작용한 위로부터 오는 힘에 의해 일어나기도 하지만 성 베르나르도처럼 "나는 체험하기 위하여 믿는다"라는 신에 대한 순수한 믿음에서 나오기도 한다.

2009-03-10

[지혜의 향기] 언제 놓아야 할까?

불교에서 자주 듣는 말로 무얼 자꾸 분별하려 들지 말고 다 놓아 버리라는 것이다. 알듯 말듯 참 헷갈리는 말씀이다. 세상살이에 아무 분별을 안 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그보다도 다 놓아 버리면 당장 뭘 먹고 사나? 스님이야 절이라도 있겠지만 나는 바로 홈리스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을 판인데. 그러니 덮어 놓고 분별하지 말자 놓아 버리자 할 것이 아니라 분별이란 게 뭐며 어떤 분별을 하지 말 것이며 무엇을 언제 어떻게 놓을 건지 제대로 알아야 우리 같은 아둔한 중생은 실행에 옮기려고 애라도 써 볼 것이다. 사실 무명 속에서 태어났다는 우리들의 인생 역정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지각이 들고 소견이 들면서부터 바깥세상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분별해 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봄과 여름이 다르고 여름이 겨울과 다른 철이라는 것을 분별하면서 우리는 철이 들었다. 어른이나 부모는 함께 장난치는 골목 친구와는 다르다는 것 좀 커서는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으니 잘 분별하여 그에 맞게 행동해야 실속이 있다는 것을 안 것도 좀 철이 든 후다. 그러니 우리의 정신적 성장이나 자연 인문 사회과학 등 학문이라는 것도 한 마디로 나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 삼라만상을 어떻게 잘 분류 분별하고 기억 활용하는가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지겹도록 받아들었던 그 많은 시험지들 긴장되는 면접들과 피하고 싶었던 성적표 인사고과들은 이러한 분별의 점검 과정이요 그 그림자들이다. 이것들을 무시하고는 세속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으니 교육을 잘 받고 스스로 자기 분야의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분별력을 잘 길러 두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사실 가르친다는 말은 헷갈리는 점을 잘 갈라서 잘 분별해서 말해 준다는 뜻일 게고 배운다는 말은 그런 가르침을 받아 서로의 차이를 환하게 밝히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가르치고 배운다는 점에서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사슴과 말을 분별할 줄 알고 내 마음과 네 마음을 분별하여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알아 바보 소리를 면하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별력은 세상을 좀 더 평화롭고 고루 잘 살게 만드는 방편이 되어야 바람직하다. 그늘 속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이 많음을 파악하는 분별력도 없다면 아둔한 것이고 혹시 그런 불행한 사람을 만나 나와는 관계없는 동떨어진 존재라 여기고 가까이 하기를 꺼린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분별심이다. 겉보기에는 차이가 있고 독립 된 별개의 개체로 보이지만 사실은 너와 나 사이에 무수한 인연과 연결이 있어 한 몸이나 다름없다 즉 동체대비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네가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 다르지만 사실 같다. 이것을 아는 것을 슬기라고 하고 지혜라고 하며 부처님이 말씀하신 반야 반야지다. 무얼 잘 가려내고 기억하는 분별력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우리는 우선 세상을 위해 분별력부터 잘 길러야 할 것이다. 세속적인 공부로 지식을 쌓고 부처님 공부도 또렷이 잘 해야 한다. 부처님 공부에는 글공부 몸공부 마음공부가 있겠지만 어느 하나 가벼이 여기지 말고 균형 잡힌 알음알이가 필요하다. 그런 다음 그러한 알음알이에 끄달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음알이만 파먹고 살면 우리는 분별심에 사로잡히고 세상을 좋게 만들려던 방편이 목적이 되어 버린다. 언제 놓아야 할 것인가? 분별력이 분별심으로 되려는 찰나 우리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부처님 전에 엎드려야 할 것이다.

2009-03-10

[기독교인의 삶]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시간이 깊어지고 친밀해질수록 그 사랑의 관계를 끊을 자(롬 8:335)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요일 4:16) 말씀을 통해 사랑하는 관계를 지켜주는 믿음은 그 대상을 알아가므로 형성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내가 알고 믿을 때' 두려움과 의심의 소리를 내어 좇을 수 있다는것을 배웁니다. 하나님 뜻은(롬 12:2) 현재에 만족하고 머무르기보다는 변화를 받아 새로와지는 것을 원하십니다. 제가 알고 믿는 하나님은 새로운 길에 도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말씀에서 갈 바를 몰랐던 아브라함에겐 분명 믿음도 있었겠지만 한 편으론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과 두려움이 내 안에서 싸울때 저는 (시45:10-11)말씀이 떠오릅니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찌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찌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찌어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왕에게 시집을 간 딸이 친정식구들을 생각하고 의지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며 왕이 마음 안타깝게 바라보는 마음을 느낍니다.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책임져줄 것인데 왜 그리 너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느냐 네 백성과 아비집을 잊어버리라' 라는 말씀은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내어쫓아 줄 수 있는 능력이 왕에게 있음을 알고 믿으라 하시는 제가 주인 삼은 왕의 음성입니다. 이사야서 큐티와 함께 3월을 시작하며 제가 알아가고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자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무리가 그것을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은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창조한 바인 줄 알며 헤아리며 깨달으리라'(사 41:1820)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저의 삶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풍성한 은혜를 기대하게 하시니 이 말씀이 제 삶에 역사하시어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폴 투르니에의 글 중 '마음 속에 품은 소원은 반드시 불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빛에는 반드시 그늘이 따르는 것처럼 바라는 바가 없으면 불안도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믿음과 함께 불안함이 마음 속에 있을 때 두려움이 남아있지 않도록 하나님을 알아가기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요일 4:18) 저는 제 멘토이신 사모님의 시를 읽을때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기쁨을 얻곤합니다. '너를 나는 깊이 사랑하노라' 라는 왕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모님의 '매화'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토록 춥고 비가 내리는 데 너는 끝내 피어 났구나 맑고 고운 너의 꽃잎은 비를 맞아 더 영롱하고 매서운 추위로 인해 너는 창백하리 만큼 순결하구나 가냘프고 연약하나 너의 내면은 어느 꽃보다 강하고 정한 너의 마음은 어떤 추위와 비 바람에도 흔들임이 없구나 사랑을 지키고 봄을 피어내는 너를 나는 깊이 사랑하노라' 우리가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 음성'(시 45:10)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추위와 비바람 가운데 있을 때 '너를 나는 깊이 사랑하노라' 라고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고 믿을때 우리 마음은 따뜻해질 겁니다.

2009-03-10

[목회 칼럼] 버들피리

봄철 노회가 마침 샌디에고에서 있어서 그 곳을 가게 되었다. 가는 고속도로 주변에는 봄기운이 만연해 있었다. 눈앞에 가끔 보였다가 사라지는 바다도 봄의 향기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옆에 산들에서는 숨었던 생명들이 대지위로 올라오듯이 초록빛깔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갔는데도 모임이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익숙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이른 아침부터 나와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친교실로 안내를 받아가서 보니 멀리서 오신 노회원들이 몇 분이 계셨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커피를 들고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다가 무심코 테이블 앞에 놓인 꽃 데코레이션을 보게 되었다. 꽃보다는 나뭇가지였다. 나뭇가지에는 금방 터져 나올 것 같은 몽우리들이 달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몽우리들은 검고 붉은 색의 솜털들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봄내음을 힘껏 품어내고 있었다. 옆에 계신 목사님에게 물었다. 목사님 저게 무슨 나뭇가지인가요? 봄내음이 가득합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의 말씀이 "저것은 버드나무가지입니다. 저 나뭇가지를 잘라 비틀면 하얀 속대가 나오고 줄기로는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죠 그 소리가 봄이 오는 첫소리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무 것도 없었죠 저 피리소리가 사람들에게 소생하는 생기를 주었죠." 그러고 보니 나도 어렸을 때에 버들피리를 불었던 기억이 났다. 물이 오른 버드나무가지를 잘라서 비틀면 껍질과 하얀 속대가 분리되었다. 하얀 속대는 기억에 맛이 달콤했었고 줄기를 피리처럼 입에 물고 불면 노랫가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호루라기를 부는 수준은 되었었다. 왜 그랬던지는 몰라도 버들피리를 불면서 강아지처럼 이곳저곳 마냥 다니면서 봄소식을 전했던 기억이 났다. 나는 갑자기 버들피리가 불고 싶어졌다. 봄이 물오른 버드나무처럼 완연히 다가왔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은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은행의 선두주자였던 시티뱅크의 주가가 1불 이하로 폭락했다는 소식도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있다. 오늘 신문에는 남가주 어느 목회자 단체에서 한국에 모병원에만 가면 무료진료를 받게 되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최고의 병원과 의료진을 지척에 놔두고도 한국까지 가서 그것도 무료로 건강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이민 목회자의 현실이 그나마 남은 자존심을 아프게 하고 있다. 그래서 피리를 더 불고 싶다. 예수님도 마11장에서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 당시도 어려운 시대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피리를 불고 싶으셨다. 왜냐면 당신 자신이 세상의 길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26장을 묵상하다가 보니 이삭은 극심한 흉년으로 인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려다가 머문 '그랄' 땅에서 같은 해에 농사하여 '백배'의 수확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상황은 그 땅에 머물면 백배는 고사하고 백번 망해도 할 말이 없는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사이코 패스'의 기질을 가진 왕이 이삭의 아내를 탐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애굽 행을 포기한 이유가 '애굽에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함에 있었다. 나는 거기서 퍼즐을 생각했다. 백배가 숨어있는 퍼즐이었다. 우리는 그 퍼즐이 어느 시점에 어떻게 숨어있는지 알지를 못한다. 아는 방법이 이삭에게 있었다. 이삭은 삶의 순간마다 순종하고 또 순종하고 순종하며 살았다. '그랄'에서도 계속 순종하다보니 그 속에 백배의 축복이 숨겨져 있었다. 그렇구나 나도 내 몫인 순종을 해야겠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버들피리를 불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해야겠다! 삘리리~ 주님이 곧 오십니다 삘릴리~.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4:2)

2009-03-10

[신앙의 샘] '아하!'의 기쁨

인수 분해를 처음 배울 때 수학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방법이 생각이 납니다. (a + b)²=a²+2ab+b²이라고 칠판에 쓰시고는 암기하라고 하시며 이것이 왜 이렇게 되는지는 나중에 증명하시겠다며 일단 맞는 공식이니 외워 두라고 말씀 하셨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선생님 이니까요. 그리고 약속대로 후에 선생님께서 그 공식을 증명해 주셨을 때 우리는 모두 "아하!"하며 무조건 외웠던 것이 저렇게 증명이 되는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자주 수학 공식보다 더 이해되지 않고 믿기 어려운 '공식' 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특히 요즘처럼 앞이 한치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을 때에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의 고난이 앞으로의 축복의 시작이라는 수 많은 말씀도 지금의 현실에서는 이해도 마음으로도 오지 않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죽어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높아지기 원하느냐? 낮아져라…살기 원하느냐? 죽어라…작은 믿음이 있다면 이산을 들어…저리로…받기 원하느냐? 주어라….' 이해되지 않는 이런 공식들을 우리의 '스승'되신 예수께서는 그저 믿고 받아들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면 그분이 '증명'해 주시겠다고…. 하지만 우리는 자주 "이해가 되지 않으니 증명부터 해주시면 믿겠습니다"하며 반문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수학을 가르치신 선생님에게 보다 더 적은 신뢰를 우리의 온전한 '스승'이신 예수께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의 진리는 참으로 오묘하기 때문에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명철과 지혜를 의지말고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언3장5절) 힘들고 어렵지만 이해 되지 않지만…지금의 상황에서 도저히 하기 힘들지만 믿음으로 '그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받아들이고 행할 때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우리 모두 다 "아하!" 하며 그 일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을…. 성경엔 그러한 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과 뜨거운 풀무 이야기' '다니엘과 사자굴의 이야기' '물 위를 걸은 베드로' '다시 살아난 나사로'. 이시대의 우리는 왜 이들이 될 수 없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신 예수께서 계시는데 왜 우리라고 "아하" 하며 살 수 없겠습니까? 이해되지 않는 일들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혹시 여러분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경제적인 문제로 가족의 문제로 신분의 문제로 육신의 약함의 문제로라면 더 더욱 "믿으십시요!" 단순히 '그 분'의 약속을. 그러면 여러분도 큰소리로 "아하" 하며 우리의 신실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증명해주시는 증명을 통해 그를 더 더욱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아하!의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마음에서 기도합니다.

2009-03-10

[신앙의 샘] 모든 것에는 심장이 있다

지난 달(2월 1일)에 열린 43회 수퍼보울(Super Bowl)은 손에 땀을 쥐게하는 경기였다. 특히 한인 선수인 하인스 워드 때문에 한인에게 더욱 친숙한 피츠버그의 스틸러스가 엎치락 뒤치락 끝에 마지막 35초를 남기고 터치다운을 성공해 롬바디 트로피를 차지하였다. 수퍼보울은 미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스포츠 축제다. 풋볼 게임 자체도 흥미진진하지만 다른 볼거리도 함께 제공한다. 미국민의 시선이 TV에 몰려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업들이 300만 달러를 지불하는 30초짜리 광고도 볼거리 중의 하나다. 이번 수퍼보울 광고 중에 눈길을 끌었던 광고가 있었다. 바로 데니스 식당 아침 식사의 대명사같은 그랜드 슬램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광고였다. 데니스는 광고대로 2월 3일 화요일 오전 6시부터 오후 2시까지 미국 전역에서 200만개의 그랜드 슬램을 제공했다. 데니스의 CEO인 넬슨 마키올리스는 1200만 달러의 식사비와 300만 달러의 광고비를 포함해 총 1500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전하면서 광고의 취지를 설명했다. “경제가 어려우면 사람들은 패스트 푸드를 먹으며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할 지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아니면 편리하기 때문에, 아니면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 패스트 푸드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데니스에 오면 식사같은 아침식사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우리 광고의 촛점이었습니다.” 이 30초짜리 메시지는 수백만명의 발걸음을 데니스로 옮기게 하였다. 잊혀져가던 데니스가 사람들 기억 속에 새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마케팅 회사 사장인 데이빗 앤더슨이 표현한 대로 “데니스가 미국과 다시 친해졌다.” 사람들은 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주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꼭 물건이나 선물을 주는 행위 외에도 친절이나 관심이나 웃음과 같은 작은 행동을 주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세상에서는 받는 대가로 그 사람의 가치를 정한다. 한 번은 어느 분이 자신의 조카를 소개하는데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어느 회사에서 연봉을 얼마 받는다고 말해서 순간 당황한 적이 있었다. 그 분에게 사람의 가치는 일년 수입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사람이 일한 대가로 받는 연봉이나 수입이 그 사람의 가치를 말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얼마나 많은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이런 사람은 자석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과 인맥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 이 네트워크가 그 사람의 가치를 세워주는 배경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심장이 있다. 박동하는 심장이 있기에 생명력이 있다. 줄 수 있는 행동의 심장은 받을 수 있는 여유로움에 있다. 들숨과 날숨을 갈라 놓을 수 없듯이 주고 받는 것을 가르지 못한다. 누구에게 주었다면 누구에게 받을 것이다. 받을 수 있는 여유로움에도 심장이 있다. 베푸는 사람에 대한 감사와 받아드리는 겸손이다. 받을 때 진정한 감사는 베풀 수 있는 원천이 된다. 주고 남겨진 빈 자리를 채워주는 역활을 한다.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한다면 교만이 내면의 균형을 깨뜨린다. 하지만 받아드리는 겸손함은 내면의 균형을 잡아간다.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하시려고”(요 10:10) 몸과 피까지 다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절약하고 살 만하면 저축한다. 그리고 넉넉할 때 베풀려고 한다. 절약과 저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시점을 다시 선택하자는 뜻이다. 우리 시점을 바꿔서 베풀 수 있다면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위기의 문제들이 풀리는 기적의 비결을 볼 수 있지 않을까?

2009-03-03

[기독교의 삶] 아내가 운동을 시작했다

와이프가 운동을 시작했다. 근 5년동안 아이 둘을 낳고 일하랴 살림하랴 바쁘다가 드디어 큰 맘을 먹고 시작했다. 계기는 올 1월 와이프 생일에 2년짜리 피트니스 센터 회원권을 구입하는 것을 허락하고 애들은 내가 잘 돌볼 테니까 일주일에 적어도 2~3번 한 두 시간씩은 다녀오라고 했다. 내가 저녁시간에 애들을 봐주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는지 와이프는 7시에 일을 마치면 바로 운동하러 가기 시작했다. 내심 뭐 한 두 주 길면 3주 하다가 말겠지 라는 생각도 있어서 혼자서 아이 둘 저녁을 먹이고 데리고 있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 주겠다고 했다. 근데 웬걸 이제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잘 참다가 이번 주부터는 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 좀 너무 한 거 아닌가? 일주일에 3일씩 애들 먹이고 재울 준비시킬 가장 바쁜 시간에 2시간씩 갔다가 오면 너무 한 거 같은데.' 그렇다고 생일 선물로 회원권을 사주고 가지 말라고 그럴 수도 없고 참 진퇴양난이었다. 물론 내가 나를 볼 때 집안 일들을 와이프 혼자 하라고 놔두고 나만 쉬고 노는 스타일은 아니다. 와이프도 같이 맞벌이로 일하니까 일도 많이 도와 준다. 그런데도 가끔씩 싸울 때가 있다. 와이프는 내가 도와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나는 집안일을 하면서 특별 서비스를 하는 것처럼 뉘앙스를 풍길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번 주 초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좀 일찍 마치고 오라고 짜증을 한 번 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묵상 후에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짜증만 낼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와이프가 운동을 열심히 하면 본인에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둘째로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은 내가 아닐까? 원래 와이프는 점심을 먹은 뒤에 자주 체하는 편이다. 한번 속이 안좋다고 하면 저녁도 입맛이 없으니까 그저 그런 식단이 나온다. 그리고 등도 두드려줘야 하고 그 날은 아이들도 내가 더 많이 돌봐야한다. 근데 아직 한 달 밖에 안되었지만 운동을 시작하고 부터는 소화불량 증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화가 잘 되니까 기분도 좋아지고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 식단을 미리 준비해 놓으니까 메뉴도 좋아졌다. 그리고 운동을 통해서 와이프가 건강해지고 살이 좀 빠져서 좋은 몸매를 유지하게 되면 결국에는 내가 좋은 것이 아닐까? 지금의 희생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비록 내가 3일 정도 저녁시간에 아이들을 보지만 멀리 보고 참아야겠다라고 결심했다. 이방인으로서 성경의 한 책을 이루는 룻은 먼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보잘 것 없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지 않고 자기의 고향에서 쉽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생소한 땅에서 자기의 미래를 투자하는 룻의 믿음은 그를 통해 예수님의 계보를 잇게 한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로 갔고 거기서 참수형을 당했지만 그로부터 300년 후에는 로마제국의 역사가 뒤집어졌다. 미래를 위해 자기의 삶을 투자한 것이다. 'Keep Mama's happy then everybody is happy'라는 이야기가 있다. 집안을 평화롭게 하려면 엄마를 행복하게 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일생을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고 싶은가?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된다. Keep our heavenly Father happy then your life will be unforgettable.

2009-03-03

[목회 칼럼] 예수는 '옴무 파탈'

신조어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갓 오신 분들이나 유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르는 단어들이 너무 많아서 어리둥절해 질 때가 자주 있습니다. '훈남' '캐안습' '흠좀무' '짤방' '썩소' 등 밑도 끝도 없이 전혀 알 수 없는 의미의 단어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혹시 내가 딴 세상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조어는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많은 언어학자들은 20년 안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의 3배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신조어 중의 하나가 '팜무 파탈'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이 단어에 반대되는 의미로 '옴무 파탈'이라는 단어가 제조되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팜므'(Femme)는 여자라는 뜻이고 '옴므'(Homme)는 남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파탈'(Fatale)이라는 단어는 '숙명'을 뜻하는 프랑스어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자"를 가리킬 때는 '팜무 파탈'이라는 단어를 쓰고 반대로 그런 남자를 칭할 때는 '옴무 파탈'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동양에서 이야기하는 '살'(殺)이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뇌쇄적인 눈빛과 관능적인 몸매로 남자를 꼼작 못하게 만드는 악녀(bad girl)들이 '팜무 파탈'입니다. 이런 여자들에게 걸리면 남자들은 작살납니다. 평생의 수련으로 성불(成佛)했다는 존경받는 스님을 한 순간에 땡중으로 전락시켜 버린 '황진희'가 바로 팜무 파탈의 전형적인 여인입니다. '옴무 파탈'도 물씬 풍기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여자를 그 자리에서 얼어붙게 만드는 남자입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나쁜 남자'(bad boy)들이 대부분 이 옴무파탈의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똑하고 잘난 여인들이 왠지 모를 마력에 사로 잡혀 뻔히 나쁜 남자인 것을 알면서도 거부하지 못하고 함께 망가집니다. 팜무 파탈과 옴무 파탈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 순복'(Absolute Obedience)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카리스마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영적인 힘에 눌려 끌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존재들 중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들이 있는데 하물며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파탈'(Fatale)이 될 만한 존재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더욱이 우리를 '사망의 길'이 아닌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은 우리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복종하고 충성해야 할 '절대 지존자'이십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최고의 인물이라고 하는 세례요한도 "나는 망하고 그는 흥하여야 한다"고 선언했던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숙명적인 주인이십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팜무 파탈' 그리고 '옴무 파탈'은 누구입니까? 입술이 아닌 가슴으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당신은 축복받은 신앙인입니다.

2009-03-03

[사목의 향기] 어느 줄서기

우리나라에서는 추석이나 설 명절이 가까워 오면 대도시 특히 서울에 사는 분들은 고향에 가는 표를 사기 위해 대합실 앞에서 100미터나 200미터 정도 줄을 서는 것은 보통이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새치기라도 하면 야단난다. 고성이 오가고 쌍소리가 터저 나온다. 귀성표를 사기 위해 서는 이런 줄도 있지만 또 다른 줄도 있다. 주택 청약표를 사기 위한 줄이다. 당첨이 되어야 하니 초초하고 긴장이 감도는 줄이다. 월드컵이 개최되었을 때 표를 구하기 위하여 줄을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마냥 기다려도 좋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명당 성당 안에 안치된 그 분을 보기 위한 조문 인파가 40만을 넘었다고 한다. 엄동설한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벽 2시부터 3킬로미터나 이어지는 긴 줄을 본 기자의 표현은 한 마디로 놀람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 분의 죽음을 애도하고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그 분의 얼굴만이라도 보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에게는 영하의 추위도 꼭두새벽도 상관없었다. 그 분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누워있는 그 분의 시신을 찾아 애도를 표했을까?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 사실이다. 이번 김수환 추기경님의 죽음을 보고 다시 한 번 이 말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사무실 앞에 줄을 서는 것도 아니었고 배고픈 이들이 한 끼 식사를 얻어먹기 위해 선 줄은 더 더욱 아니었다. 단지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줄을 서게 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노인들이나 젊은이들 그리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 누워계시던 추기경에게 이승에서 마지막 존경과 사랑을 드리기 위한 줄이었다. 그 대열에는 네 편 내 편도 없었고 새치기나 밀치기나 고함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위인을 보러 가는 기쁜 줄이었으니 이기적인 생각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분이 누구며 무엇을 하였기에 그 추운 겨울에도 그 분을 마지막으로 보고자 했는가? 그 분은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을 가르치신 웅변가나 설교가도 아니었다. 그 분은 가르친 대로 사신 성직자이셨다. 대주교요 추기경이셨으니 가톨릭 교회의 종교 지도자였고 학생시절에는 "만일 조국이 나를 부른다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라고 한 애국자셨다. 택시 기사들이 세상 민심을 가장 잘 안다고 한다. 어느 날 서울 시내에서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아래 위로 내 복장을 보던 기사 양반 왈 "천주교 신부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인가 하는 분 있지요.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시시하고 이기적이니 그 분 대통령에 출마하면 안 됩니까?" 교회에는 법이 있다. 그 법에 따라 성직자는 공직을 맡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기사의 말은 서민들을 대표하는 말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이제 김수환 추기경님은 가셨다. 하지만 그 분의 유지는 지속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민족과 개개인을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는 보금자리가 있으나 머리 누울 곳조차 없이 청빈하게 사신 예수님처럼 살다 가신 추기경님의 삶과 그 분이 외치고 마지막까지 실천하신 정의 사랑 애국심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깊게 뿌리내려 실천할 덕목들이다. 특별히 예수님의 정신을 산다는 종교인들에게는 재물에 초연한 자세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외치는 정치가들에게는 진정한 애국심이 필요하다. 사기와 부정에는 정도를 고통에는 인내를 실망하는 이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신 추기경님 앞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2009-03-03

[지혜의 향기] 없지만 있다

진공묘유란 허공이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허허한 가운데에 진실된 것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것 생명이 충만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 말씀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셨다. 물질은 곧 공으로 되어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요 그러나 이 또한 허허한 가운데에서 내가 되고 지구가 생성하고 우주만유가 탄생한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물질은 없다 오직 에너지 뿐이다'라고 단정하고 그 에너지의 파동 즉 기는 불멸의 법칙이라고 한다. 지구의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을 예로 들어보자. 네가지 겁은 각각 20소겁(200억년) 씩 흐른다. 성겁의 시초에는 우주먼지 즉 원자 양자 산소 수소 탄소 질소 등이 모여서 운동을 하고 다시 응축되었다가 비행을 하고 블랙홀을 만들어서 더 큰 덩어리들을 집어삼키고 빙설의 냉각기와 수천도의 고열의 시기를 거치는 세월(20소겁)이 지나서야 생명체가 살아갈수 있는 땅덩어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겁 초에 먼지들은 어떻게 모여지는가 하면 좋아하고 싫어하고 판단하는 인류의 마음들(공업력)이 이리저리 파동을 치면서 우주먼지들이 모이고 모여서 운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땅덩어리가 만들어지고 다음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주겁이 도래하는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생명체가 살아온 세월은 50억년이 지났다. 우리 인류가 지구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150억년(15소겁)이 남아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지구의 생성이 15억년이다 20억년이다 제 각각 학설이 분분하다. 몇 년 전 영국의 어느 학자가 "지구의 나이는 40억년이다"라고 말한 것을 신문에서 일었다. 이 과학자가 가장 근사치로 맞춘 것이다. 앞으로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세월 150억년 동안에 지구는 약 30만번 정도의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생명체는 거의 멸종에 이르렀다가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남게되어 원시시대로 환원하였다가 5만년 동안에 종족이 늘어나고 문명이 발달하여 그 문명시대가 200년쯤 지나서 생명체가 지구상에 포화상태가 되면 지구는 병들어가고 병이 들면 지구는 자연치유하는 자구책으로 지각변동을 해서 다시 원시시대로 되돌아가는 자연의 생멸의 순환법칙을 따라 윤회를 계속하다가 지구는 퇴화해서 무너지는 괴검이 되면 200억년 동안에 지구를 태워서 먼지를 날려버린다. 그 후 공겁 즉 텅 비어있는 시기가 또 200억년이 지난 다음 다시 성겁이 되고 이렇게 해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우주의 순환의 주기는 무시무종이라 처음도 모르고 끝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의 본체인 진공묘유는 불성이요 마음이다. 우리가 금생에 그렁저렁 살다가 죽어간다 하더라도 몸뚱이는 못 가져가고 마음만 가는 것이니 우리의 마음은 무시 이래로 영원한 미래까지 우주 생명의 주인공이요 진공묘유요 불성인 것이다. 기독교에도 부처님 가르침과 비슷한 대목이 있다. "마음이 맑은 자는 행복할지니 그들은 하느님을 볼 수 있느니라." 마음이 청정하면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부처님이라든가 하느님이라든가 하는 언어의 표현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마음이란 것은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인데 중생이 억지로 지어서 마음이라고 이름을 한 것이다. 마음부처를 바로 보아서 실상 불성진리를 바로 아는(깨치는) 것이 업장이 무거운 중생이 업장을 녹이는 것이다.

2009-03-03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동그라미 너머의 동그라미

#풍경1 : 오랫동안 수행의 길을 떠났던 젊은 스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장경(章敬)선사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습니다. 장경 선사가 물었죠. "이곳을 떠난 지 얼마나 되었느냐." "8년쯤 지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장경 선사가 '제자의 공부'를 물었죠. "그래 그동안 자네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러자 젊은 스님은 꼬챙이를 하나 집었습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땅에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하나 그렸습니다. 이 모습을 쭉 지켜보던 장경 선사가 다시 물었죠. "그래 그것뿐인가. 다른 것은 또 없는가." 그러자 젊은 스님은 발로 동그라미를 '쓱싹쓱싹'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절을 나가버렸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입니다. #풍경2 : 원불교 교당에는 '불상(佛像)'이 없습니다. 대신 교당의 벽에는 큼지막한 '동그라미'가 하나 걸려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일원상(一圓相)'이죠. 그럼 '부처' 대신 '동그라미'를 모시냐고요? 아닙니다. '동그라미'는 그냥 '동그라미'일 뿐이죠. 그 너머를 향하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진리의 '형상'을 붙들지 말고 진리의 '본질'에 들라는 소태산 대종사(少太山 大宗師.1891~1943.원불교 교조)의 가르침 때문이죠. 2500년 전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다시 왔다면 어떨까요. 그에게 "'부처의 자리'를 그려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면 어찌하셨을까요. 아마도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았을까요. 왜냐고요? 이 무한한 우주를 몽땅 담을 수 있는 도형이 달리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진리를 뜻하는 '동그라미'는 그냥 동그라미가 아니죠. 여기에는 테두리가 없습니다. 시간적 테두리도 없고 공간적 테두리도 없습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이곳-저곳'이란 공간의 나뉨도 없죠. 그럼 무엇이 있을까요. 테두리조차 없는 동그라미 그 하나만 온 우주에 꽉 차있을 뿐입니다. 그럼 그냥 차 있기만 할까요. 아닙니다. 끊임없이 숨을 쉬고 움직이고 변화하며 차 있죠. 살아 있으니까요.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와 이튿날 거실 소파에 앉아 이 글을 읽고 있을 여러분도 그 '하나의 동그라미' 안에 녹아 있는 거죠. 젊은 스님이 그린 '동그라미'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장경 선사가 "그뿐이냐 달리 무엇은 없느냐"라고 되묻자 젊은 스님은 동그라미를 지워 버렸죠. 실은 그 순간 '진짜 동그라미'가 드러난 겁니다. 살아 숨 쉬는 '부처'가 드러난 거죠. 그게 어디냐고요? 동그라미를 지운 곳에 '남은 곳'이죠.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이 세상 전부입니다. 그럼 또 물으시겠죠. "동그라미를 넘지 않아도 이 세상이 있고 동그라미를 넘어도 이 세상이 있다면 왜 힘들게 그걸 넘느냐"고 말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동그라미 이쪽의 삶에는 '고통'이 있지만 동그라미 너머의 삶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죠. 이쪽에선 '나'와 '동그라미'의 간격이 있지만 저쪽에선 '나=동그라미'가 되니까요. 그때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람이 되고 꽃이 되고 온 들판의 푸름이 되겠죠. 그래서 원불교의 '일원상'도 붙들면 안되겠죠. 놓아야겠죠. 그래야 동그라미 너머의 '동그라미'를 만나겠죠.

200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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