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생활 속에서] 사랑은 나를 다스리는 것

성경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가요로도 소개됐던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13장과 로마서 13장10절이 가장 핵심적인 사랑장과 사랑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두 가지 편지를 쓴 사도 바울은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로마서 13장10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인 것 같았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표현은 수동적인 느낌이 듭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두 아실 겁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않고 성 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나옵니다. 꽤 수동적이죠. 내 안에 있는 내면 세계를 잘 돌봄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보통 능동적인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대표적인 사랑 같은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사랑보다는 정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랑이 있어야 정의도 구현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정의를 위한 사랑은 내면 세계에서 내 마음을 잘 돌봐야 생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랑과 정의를 혼합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의 행위는 사랑을 기본으로 한 정의로운 일을 할 때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내면 세계에서 사랑을 할 수 없는 나를 다스림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나를 봐야 내면 세계가 보이는데 조용한 가운데 묵상은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히틀러를 살해하는데 동참했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와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뒤집었던 예수님은 이웃에 해를 끼치는 자가 아닌가요?'라는 질문입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히틀러는 우리의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회악을 조장하는 거대한 파워였습니다. 개인이지만 그의 영향력과 존재는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악이었습니다. 약간은 폭력적인 예수님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이 썩은 것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집단 전체의 악으로 봤기에 예수님은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이웃에게 해를 끼친 것도 무례히 행한 것도 아닙니다. 악에 대해 무례히 한 것입니다. 결국 그건 무례함이 아니겠죠. 대통령이 악을 조장하고 있으면 그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례히 행하는 게 아닙니다.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닙니다. 이유는 그들의 그 특정 행위에 대해서는 이웃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정의인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할 때는 이웃인지 아니면 이웃 차원을 넘어선 큰 악의 중심인지를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2009-06-30

[이민목회] 실용과 타협의 나라

이민 초기 청교도들이 약속의 땅이라고 부르고 있는 미국이란 국가를 더 이해하기 위해 미국의 다섯 역사학자들의 말을 들어보자. 역사가 루이스 할츠는 그의 저서(Liberal Tradition in America)에서 말하기를 미국에 온 사람들은 유럽세계의 봉건적 압제로부터 도피한 사람들로 자유롭게 탄생한 사람들이기에 자유를 위해 혁명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고 하며 미국은 자유주의 전통을 합의적으로 공유한 독특한 사회이므로 보수와 자유주의의 대립이 일종의 가상싸움(Shadow Boxing)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그의 책(The Progressive Historians-Turner Beard Parrington)에서 미국 역사의 흐름에는 미국인들이 합의를 이룬 몇 가지 가치가 있다고 해석했다. 사유재산의 신성시 인권의 존중 개인주의 경제적 자유 등을 공동이념으로 사회적 동질성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책상 일어나는 갈등을 극소화했기 때문에 충돌이나 혁명으로 인한 단절현상이 없이 연속성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역사가 데이비드 M. 포터는 그의 책(People of Plenty)에서 피력하기를 미 국민이 관용정신이 강한 것은 경제적 풍요와 그에 따른 사회적 유동성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경직된 사회구조를 가진 유럽에 비해 대화와 타협에 기반을 둔 민주제도를 이끌어갈 역량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니엘 J 부어스틴은 그의 주 저서인 The Americans: The Democratic Experience)에서 매우 뜻 깊은 말을 한다. 미국인은 능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무한한 기회가 주어졌는데 "실용과 타협의 정신"에 따라 사는 관대한 국민으로 성장했으므로 미국인은 이념 중심적이나 생각하는 국민이 아닌 행동하는 국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논쟁이나 사회개혁논쟁에 낭비를 하거나 극심한 대립을 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인교회의 리더쉽을 보면 상당히 한국적인 사고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직도 미국복합문화속에서 리더쉽을 발휘하기에 큰 제약이 있음을 보면서 위대한 미국을 끌어가는 소위 '실용과 타협의 정신'을 익힐 필요가 있는데 이제는 '이민신학' 속에서 영적리더쉽을 유출해야 하는 역사적인 시점에 와 있다.

2009-06-30

[사목의 향기] 삼종소리를 들으면서 (2)

19세기 불란서가 낳은 위대한 화가 중에 밀레(J.F.Millet+1875)라는 분이 있다. 그분이 그린 그림들 중에 우리말로 '만종'(晩鐘)으로 번역된 그림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올바른 번역은 교회가 사용하는 "삼종기도"이다. 역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리라 보여지며 좋게 해석하여 그 그림의 장면이 저녁 삼종기도이니 그렇게 번역했는지도 모르겠으나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번역문은 아니다. 이 그림은 밀레가 불란서의 수도 빠리 근교 바르비종의 전원생활과 풍경을 그린 그림의 하나로 내용은 이러하다. 부부가 오후 늦게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멀리 성당에서 삼종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부부가 두 손을 합장하여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다. 그들 옆에 연장이 보이며 멀리 성당이 자그마하게 보인다. 그 아름답고 신심 깊은 장면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린 화가 밀레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계신 데 없이 곳곳에 계시는 하느님은 교회 안에는 물론이고 들판에도 계시므로 누구나 마음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착하고 순진한 농부들에게 삼종소리는 마음을 위로 들어올리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성령으로 잉태하셨나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은 하루에 세 차례 이 기도를 바친다.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 삼종소리에 맞춰 이 기도를 바치기도 하고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하기 전에 이 기도를 바친다. 이 기도문의 일부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 나머지는 교회가 묵상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 완전한 신이신 그분이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시기 위해서는 마리아라는 여성을 통해서였다. 이 내용은 루카 복음 1장에 상세히 나와 있다. 마리아는 어느 날 천사의 방문을 받고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는 어마어마한 그 일을 감히 감당하기 어려워 한참 동안 머뭇거린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이 지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하리라 믿고 감히 그 놀라운 임무를 수락한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으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다. 성모송이 6세기에 완성되었으니 삼종기도도 한참 뒤에 만들어졌다. 13세기 프란치스꼬 수도회를 중심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다가 18세기에 와서 완전히 정착되었으니 오랜 역사를 거쳐온 셈이다. 교회의 권위가 이 기도를 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공동체들이 좋아하여 바치게 되자 마지막으로 교회가 인준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기도의 내용이 풍부하여 전 교회가 바치는 기도로 확정되었다. 로마를 순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정오 교황님과 함께 이 기도 바치기를 원한다. 아직도 중세기 전통을 살려 라띤어로 이 기도를 바친 다음 순례자들에게 유익한 말씀을 들려주시니 하나이요 공번 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일치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지난 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끔 이런 표현을 쓰셨다. "사도 베드로의 무덤으로 오신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으뜸 사도로서 반석으로 번역되는 그분을 주초삼아 하나의 교회가 세워졌으니(마태 1618) 베드로에 관한 언급은 무엇보다도 갈라져 나간 형제들과의 일치를 염두에 둔 말씀이다. 아직도 이딸리아의 여러 지방을 여행해보면 삼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중임을 맡기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기도를 통해 '종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vox campanae vox Dei)라는 교회의 전통적인 영성을 묵상하게 된다.

2009-06-30

[지혜의 향기] 호미를 든 관음상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59년 한국은 여러 면에서 참으로 황폐한 시절이었다. 무려 세 해 동안이나 온 나라의 땅과 사람을 제멋대로 할퀸 동족상잔의 모진 발톱은 여기저기 벌겋게 헤벌어진 처참한 생채기들을 그대로 남겨 두고 있었다. 썩을 대로 썩어 군내마저 가신 정권은 이미 무감각과 마비의 말기 증상을 드러내고 있었고 남북은 이전보다 더 날카롭게 이빨을 갈고 서로를 노려보며 어느 틈에라도 다시 상대를 찌를 듯 칼자루를 뽑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풀뿌리 나무껍질까지 찾아 씹으며 하루하루의 목숨을 우선 이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종교는 무얼 하고 있었던가? 특히 불교의 모습은 어떠했던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지만 그 때의 불교계는 이승만 대통령이 촉발한 비구와 대처승의 소모적인 싸움에서 헤어 나오기는커녕 점점 더 한심하고 극단적인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니 중생들의 아픔과 신음소리에는 일단 등을 돌리고 있을 수밖에. 이러고도 한참이 지나 그 소용돌이는 겨우 가닥이 잡혔는데 얻어진 결과를 보자면 좋게 말해 종단의 정화였고 달리 말해 갈라짐과 제길 가기였다. 이렇게 얻은 것이 있었으니 분명 잃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부처님의 아들딸들은 왕조와 외적의 박해로 거의 망가졌던 불교를 손잡아 다시 일으킬 황금 같은 시간을 잃었다. 외래 종교를 맞닥뜨려 적절히 대처하고 대세를 결정지을 기회를 놓쳤다. 요긴한 방편으로 쓰일 막대한 재산들은 소송이다 뭐다 하여 흩어 버리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마저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아픔은 이제 사람들은 불교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고 기대를 거두기 시작한 사실이었다. 꼭 그 탓만은 아니었겠지만 더욱이나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불법의 효능과 매력을 못 미더워하며 자신과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살릴 묘약을 찾아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해 봄 동국대학교에 남다른 젊은 불교학도 서른 한 명이 있었다. 이들이 일단 혈기를 누르고 정관 속에서 뚜렷이 현실을 살펴보매 머리를 내리친 것은 부처님의 크나큰 맡기심에 대한 깨우침이었다. 이리하여 이들은 불교혁신의 깃발을 들고 떨쳐 일어섰으니 그 증표와 상징으로서 힘 합쳐 새로운 관음상을 하나 먼저 세우기로 했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몸과 마음을 개발하고 아울러 사회 경제 및 사상을 새로이 일구자는 원력으로 일하는 관음보살상을 김해 봉화산에 모셨으니 세계에 유례가 없는 호미 든 관음상이다. 편안히 앉아 쉬는 보살님이 아니라 거칠고 묵은 땅을 일구며 일하시는 보살님이시다. 이 세상 중생의 어둠과 고통을 김매듯 뽑아 버리고 희망의 씨앗을 심어갈 호미다. 그리고 어느덧 쉰 해가 흘렀다. 비록 덕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이제 불법은 무르익어 온 누리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 혹시 들었는가? 최근 어쩌다 그 관음상이 다시 한국의 주류 언론에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나마 제대로 그것을 만들어 세운 참뜻을 전달한 보도는 드물었다. 코리아타운 어느 상가 뜰의 벤치 누군가가 두고 간 신문을 펴며 문득 지면의 한 귀퉁이에 실린 사진을 바라보니 아침 햇살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관음보살님이 마치 그리피스 공원 산등성이에 서 계신 것 같다. 그리고 미국이라고 와서 먹고 산다는 핑계로 제대로 신행도 못하고 있는 내 황폐한 가슴밭을 그 호미날로 찍어 일구시는 것만 같다.

2009-06-30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자선 바자회나 시내 횡단보도 앞에서 종종 마주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웃 사랑'. 추운 연말에는 더 자주 눈에 띄죠. 우리는 동전이나 꼬깃꼬깃한 지폐를 찾으려 주머니를 뒤집니다. 또 안방에서 TV를 보다가 울컥하는 사연에 전화기 버튼(ARS 성금)을 누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웃 사랑은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 마디 던지죠. "그래 맞아. 이웃과 함께 살아야지. 예수님도 말씀하셨잖아.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러나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무척 험한 길을 지나야만 무척 높은 산을 넘어야만 겨우 닿을 수 있는 '사랑'이죠. 아니 어쩌면 그래도 닿을까말까한 사랑일지도 모르죠. 왜냐고요? 예수님은 그냥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거든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몸과 같이'. 이 말뜻을 가슴으로 풀어 보세요. 그 의미를 안다면 온몸이 떨릴 지경이죠. 그렇습니다. '네 몸과 같이'라는 이정표에는 '무시무시'한 목적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디 한번 짚어 보세요. 내 이웃을 끌어다가 내 몸과 마음에 포개보세요. 그 틀에 온전히 포개지나요? 약간의 삐져나옴도 없이 하나가 되나요? 그렇게 나를 보듯이 이웃을 보고 있나요? 그렇게 나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있나요? 아무리 처절하게 몸부림을 쳐도 쉽지 않습니다. 내 틀에 딱 맞는 이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웃은 여전히 이웃이고 나는 여전히 나일 뿐이죠. 세계적인 명상가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는 이렇게 말했죠. "종교적 마음이란 사랑의 폭발이다.(The religious mind is the explosion of love)". 그리고 "그 사랑은 분별을 모른다(It is this love that knows no separation)"고 했습니다. 나와 너 나와 이웃의 구분이 없는 사랑이란 뜻이죠.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이웃을 보고 재고 평하고 분별하는 내 안의 틀을 허물어야죠. 그 틀에 막혀 그 틀에 부딪혀 이웃이 '내 몸'이 되질 못했으니 말이죠. 그 틀이 무너진 자리 거기로 이웃이 들어설 때 비로소 '내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제야 있는 그대로의 이웃과 온전히 포개집니다. '네 몸과 같이'란 이정표 저는 그 앞에서 고개가 숙여집니다. 목적지로 가는 험난함을 아니까요. 그래도 한 가지는 명확하죠. 그 길의 끝에서 예수님과 온전히 포개질거란 사실입니다. 성경도 말합니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등 여러 계명이 있지만 모든 계명은 한마디로 요약된다(로마서 13장9절)"고 말이죠.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2009-06-30

[이민목회] 약속의 땅

영국인 디아스포라의 지도자였던 윌리암 브래드포드가 집필한 "플리머스 식민지 역사"라는 책의 첫 권에는 영국 종교개혁에서 출발하여 플리머스 교회의 기원과 북미의 케이프카드에 도착할 때까지의 순례자들의 역정이 10개의 장으로 나뉘어 기술되어 있다. 그는 신대륙에서 새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의 위험과 고난 정신적인 갈등 영국으로 다시 돌아갈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순례자들의 복잡한 심경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순례자들이 네덜란드로부터 신세계로의 이주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면서 잠언 시편 예레미야등을 인용하였다. 또한 그는 청교도들을 향해 구약성서의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성령과 하나님의 은총외에 무엇이 이들을 지탱할 수 있었겠는가?고 말하면서 이들은 거대한 바다를 건너와 이 황무지에서 소멸할 처지에 놓였으나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이 그들의 소리를 듣고 역경에서 건져주었다"고 기술하였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약을 강조하는 이 글은 1541년에 작성된 종교개혁자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서의 내용과 아주 비슷하다. 특히 순례자들이 신세계로 이주하는 것을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간 역사적인 사건에 비유하였다. 영국인 디아스포라 청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새로운 가나안땅인 아메리카로 건너간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고자 하는 신념이었다. 바로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한 이스라엘 백성의 꿈과 이상이 하나가 되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간 것처럼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이상이 더욱 가속도가 붙게 되었는데 바로 이들이 1621년에 북미로 흩어진 첫번째 영국인 디아스포라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 지구촌에 거주하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수도 약 750만명이 존재하며 한인의 발길이 머물고 한인의 숨결이 지나간 지역에 한인식당이 있다. 사하라 사막에도 한인식당이 있어 거칠게 지나가는 모래바람을 이겨낸 사람들의 위한 유일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 광야를 통과한 한인들은 결코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영국인 디아스포라의 여정처럼 거칠게 버텨왔고 지탱해온 민족이기에 우리들의 신학인 "이민신학"을 정립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2009-06-23

[생활 속에서] 혹독한 훈련이 최고를 만든다

어느 날 TV 화면에서 한 여성의 흉칙한 발의 모습을 보았다. 강수진이라는 유명한 발레리나의 발이었다. 강수진은 세계 5대 발레단의 하나로 꼽히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무용수로 발레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발레리나 상을 받은 대스타이다. 그러나 그녀의 발은 동상에 걸려 상한 모습처럼 흉하고 마치 심한 무좀에 걸린 거친 모습이어서 여성의 발이라고는 생각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과 자기훈련의 모습이 그 발에 고스란히 남은 것이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발레리나의 모습은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그 배후엔 남이 알지 못하는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강수진씨의 고백에 의하면 "나는 3시간만 자고 연습에 몰두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연습했고 밤 12시가 넘어도 연습실로 늘 향했다"고 한다. 심지어 "부상당했을 때도 연습을 계속 하였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아니면 계속 연습실로 향했다"고 하였다. 또한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어딘가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날은 내가 연습을 게을리 했구나하고 반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프로의 모습이다. 최고가 되는 것 배후에는 이렇게 혹독한 자기 훈련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 땅에서 소수민족에 불과하기 때문에 남보다 더 노력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자녀들이 거친 벌판에서 한 걸음이라도 더 밝은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자녀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주변에 훈련받지 않은 무례한 세대가 일어나고 있다. 가정에서 부모를 우습게 여기고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자신의 불만과 불평을 불특정 다수에게 쏟아 부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움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꿈과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이 되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와 혹독한 훈련의 양육 과정이 어렸을 때부터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피겨 스케이팅의 스타 김연아 발레리나 강수진 이들은 모두 남 모르는 혹독한 훈련을 통해 최고가 된 사람들이다.

2009-06-23

[사목의 향기] 삼종소리를 들으면서

이탈리아를 순례하는 이들에게는 중세기의 아름다운 전통이 사방에 남아 있는 모습들을 보고 감탄하곤 한다. 그 중의 하나는 정오와 낮 열두 시에 들려오는 성당의 삼종 소리다. 이탈리아 뻬루지아라는 소도시에서 이탈리아 말을 배울 때 도시 중앙통에서 낮 열두 시와 저녁 여섯 시만 되면 모든 성당에서 들려오던 삼종소리는 어릴 때 듣던 시골 성당의 삼종소리 같기도 했고 이 곳이 이딸리아이니 중세기 유럽의 전통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기도를 자주 바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려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Vox campanae vox Dei(종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라는 수도원의 전통적인 관습을 현대인들에게도 일깨워 주는 성당의 종소리는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마음을 위로 들어 올리는 고마운 소리이며 하느님을 멀리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외침도 될 것이다. 이탈리아 북부에 발렌띠노 아우렐리오라는 위대한 수도자가 있었다. 그분은 수도회에 들어가 훌륭한 모범을 보인 분이며 무엇보다도 이웃 사랑의 실천에 뛰어난 분이었다. 1278년에 태어나 70세를 사신 이 수도자의 청년기는 파란만장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훌륭하게 성장한 그의 어린 시절은 꿈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랑하는 동생이 결투에 연루되어 비참하게 죽고 난 후로는 매일 원한과 복수에 찬 삶을 살고 있었다. 동생을 죽인 그 사람을 죽이려고 복수심을 키우면서 매일 같이 칼과 활을 다루는 연습을 하였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매일 해오던 기도와 학업생활은 사라지고 원수를 갚으려고 하니 착한 마음은 서서히 악하게 비뚤어져가기만 했으니 주일미사 가는 것도 제처 놓고 말았다. 동생을 죽인 그 사람은 이 소문을 듣고는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어느 깊숙한 산속으로 숨어들어 산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무술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아우렐리오는 동생을 죽인 그 사람을 찾아 나섰다. 품속에는 늘 단도를 지니고 다녔고 신발 속에도 작은 비수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원수를 만날 수는 없었다. 한참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오후 해가 뉘엿뉘엿 서녘으로 넘어가고 있을 때도 원수를 찾아 헤매던 그는 뽀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긴 다리를 건넌 후 조금 더 나아가니 외나무 다리가 나타났다. 저쪽에서 사람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수도자가 입는 두건 달린 옷을 입고는 두건을 쓰고 있어 마치 수도자처럼 보였다. 수도자가 아닌가도 생각되었지만 혹시나 해서 그를 세워서는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수도자는 아니고 동생을 죽인 바로 그 원수거 아닌가?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어 그 사람을 막 찌르려는 순간 가까운 산 중턱의 수도원 성당에서 삼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원수는 무릎을 꿇고 "살려주세요" 하면서 빌기 시작했다. 삼종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 은은한 소리는 그에게 하느님의 음성처럼 들려 왔다. "왜 그를 찌르려고 하느냐? 내 아들 그리스도는 자기를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느냐?" 이런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자기도 모르게 단도를 떨어뜨리고 잡고 있던 그의 목덜미를 놓아주면서 그는 그 원수를 껴안고 한참 포옹했다. 그리고 악수를 청하면서 용서해 주었다. 수년간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 방황하던 그는 보속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수행에 힘썼고 특히 이웃사랑 실천에 큰 모범을 보여주어 오늘 날까지도 중세기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하나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2009-06-23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결혼과 마음 조절

Q: 원하는 사람과 결혼을 못 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에 주위 사람들의 반대로 원하는 사람하고 결혼하지 못 하게 되면 마음이 원수처럼 되기도 하고 또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마음을 조절해야 합니까? A: 원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잘 사는 사람도 있고 원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고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났는데 뜻하지 않게 좋아지는 사람이 있고 그것도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사람을 만나서 좋고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서 불행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원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싶다는 것은 바라는 것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바라는 것은 재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해서 살아보면 열에 아홉은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애해서 결혼하는 것이 중매 결혼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어요. 이혼율을 조사해 보면 연애 결혼한 사람의 이혼율이 훨씬 높습니다. 연애해서 결혼했다는 것은 원하는 것이 훨씬 많다는 거니까 그만큼 실망이 큽니다. 그 다음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해서 실패하는 것은 조금만 불만이 있어도 '억지로 결혼을 해서 결국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것 아니냐' 하면서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안 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은 사람하고 결혼했다는 이 한 가지 생각에 빠져서 그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지 그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원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면 생각이 어떻게 미치느냐 하면 '부모가 그렇게 반대하는데도 내가 결혼했는데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하고 생각해서 그것이 불씨가 되어 똑같이 못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원하는 사람하고 이루어졌으면 '내가 그렇게 바라던 사람과 결혼했으니 내 소원이 성취됐다. 그러니 앞으로 내 인생은 당신을 위해서 다 바치겠다'고 마음을 내면 일이 잘 됩니다. 또 원하지 않은 사람하고 결혼을 했으면 그 사람한테 바랄 것이 전혀 없지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을 했으니 미안하잖아요. 그러니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위해서 아무런바라는 마음 없이 최소한의 예의만 지켜줘도 아무 문제없이 잘 살게 됩니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으면 하는 일마다 고맙게 느껴지니 정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한테 잘해주면 마음이 확 바뀝니다. 남녀가 산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절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어려우면 돌봐주며 살듯이 부부가 그 정도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 죽도록 사랑해야 하고 너 아니면 죽는다는 식의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이 불행해지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그냥 사는 것입니다. 서로 따뜻하게 해주다 보면 정이 들고 고맙고 눈물이 나고 이래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뭐 특별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면 거기서 정이 나고 그러는 것입니다.

2009-06-23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겨자씨 속에 수미산을 넣는다?

#풍경1: 중국에 마조 선사의 법통을 이은 귀종(歸宗) 선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만권(李萬券)이란 사람이 귀종 선사를 찾아왔죠. 이만권은 책도 많이 읽고 아는 것도 많았습니다. "스님 불경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수미산에 겨자씨를 넣는다'란 말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겨자씨 속에 수미산을 넣는다'는 구절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네요. 이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아닙니까?" 귀종 선사가 말했죠. "사람들은 당신이 1만 권의 책을 읽어 출세했다고 하는데 사실이오?" 이만권이 답했죠.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자 귀종 선사가 일갈했습니다. "당신의 몸뚱이를 보니 어디에 1만 권의 책이 들어갈 수 있겠소?" 무슨 뜻일까요. 선문답 일화나 스님들 게송에서 '수미산'은 단골로 등장하는 용어죠. '한량없이 큰 산'이란 뜻입니다. 그 반대말로 '좁쌀' 혹은 '겨자씨'가 쓰이죠. 그럼 어떻게 하면 수미산을 겨자씨에 넣을 수 있을까요. 우선 겨자씨(좁쌀)의 크기부터 알아야겠네요. #풍경2: 한 제자가 설봉(雪峰) 선사에게 물었죠. "스님 우주의 크기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 말을 들은 설봉 선사가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좁쌀의 크기는 알고 있느냐?" 제자는 아주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러자 설봉 선사가 혀를 차며 말했죠. "이놈아 좁쌀의 크기는 잘도 안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우주의 크기는 모른다고 하느냐." 좁쌀과 수미산 그리고 우주. 이들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이 세상의 모든 형상은 수명이 있습니다. 풀도 나무도 바위도 사람도 지구도 숱한 별들도 마찬가지죠. 매 순간 '사라짐'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이 허무하다"고들 합니다. 사라질 운명을 알기 때문이죠. 귀종 선사와 설봉 선사는 그 '사라짐'의 바닥을 보라고 하는 겁니다. 물질의 바닥에 무엇이 있나 형상의 너머에 무엇이 있나 삼라만상이 몸을 여읜 자리에 과연 무엇이 있나. 거길 보라고 외치는 겁니다. 왜냐고요? 그곳에 '본질'이 있기 때문이죠. 거기선 좁쌀도 수미산도 거대한 우주도 몸을 비웁니다. 그럼 '공(空)' 밖에 없지 않느냐고요? 아닙니다. 모두를 비운 곳에 모두가 차는 법이죠. 거기선 좁쌀 안에 우주가 녹아있고 우주 안에 좁쌀이 녹아있습니다. 수만 아니 수억 개의 수미산이라도 좁쌀 안에 들어설 수 있는 거죠. 좁쌀과 우주가 둘이면서 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로 유명한 성철 스님은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라고도 했습니다.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인 곳.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곳. 바로 거기서 삶도 허무를 여의겠죠.

2009-06-23

[이민목회] 영국인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들이 가진 약속의 사상은 한국인 유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국교회의 핍박을 받아 북 미주로 이주한 초기 영국인에게도 약속의 신념이 있는 것이다. 흩어진 유대인이 디아스포라의 사상을 처음으로 만든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영국에서 핍박을 받아 미국에 흩어진 사람들이 바로 초창기의 영국인 디아스포라였다.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1600년대 초에 북 아메리카 지역으로 향하는 유럽인들의 이민이 활발해지면서 영국인들도 어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대대적인 이민을 시작하였다. 1607년에 버지니아 식민지가 1620년에는 플리머스 식민지 1630년에는 메사추세츠만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특히 플리머스와 메사추세츠만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영국교회의 개혁을 요구한 청교도들이었는데 그들의 별명은 분리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영국교회로부터 완전한 분리를 주장했고 프로테스탄트 교리에 따라 교회의 의식과 구조를 보다 간단한 신앙과 예배의 형태로 대치하고 자치적이고 자유로운 집회를 가졌다. 이러한 모습을 목격한 영국국교회는 이들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토지소유허가를 받은 윌리암 브래드포드를 중심으로 1620년에 북 어메리카로 이주하게 되었다. 북미로 이주한 첫 해인 1621년에 플리모스의 첫 총독인 죤 카버가 플리모스의 혹독한 추위와 식량부족등으로 첫 이주민 절반과 함께 죽자 이미 영국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31세의 브래드포드가 두 번째의 총독으로 선출되자 아메리칸 인디언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 경작기술과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워 플리머스 식민지인들을 굶어죽지 않게 하였다. 브래드포드는 죤 폭스의 책인 순교서(Acts and Monuments)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플리머스 정착후에 사유재산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 영국인 디아스포라를 목격하는 한인 디아스포라의 미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북미주 이민역사가 106년이 되는 지금이야말로 영국인 지도자 윌리암 브래드포드가 보여준 것처럼 우리 이민자들의 이야기기 담겨진 이민신학이 정립되어 이민교회를 바로 세워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2009-06-16

[생활 속에서] 오직 예수

'오직 예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이 들으면 거북한 표현입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을 잘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 같습니다. '오직 예수'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비효율적인 사랑을 한다는 뜻인 듯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문화적 물질주의(Cultural Materialism)로 인해 물질 눈에 보이는 것 제한된 자원의 분배 등으로 많은 것을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위로를 찾기 힘들고 사랑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소망입니다. 왜 소망이냐 하면 자신의 엄청난 권한을 내려놓고 십자가 처형을 당할 정도로 인간을 생각했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주의로 판단한다면 그의 행동처럼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바로 비효율에서 나옵니다. 효율적이지 않는데 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일은 비효율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왜 비효율의 사랑을 할까요? 그게 참으로 신기합니다. 오직 부모만 알 수 있는 비효율적인 사랑. 계산기 두들기며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비효율을 감당하고 자식을 사랑합니다. 비효율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수잔 보일입니다. 브리티시 탈렌트 쇼에 출연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인물입니다. 평범해 보이는 40대 가정주부가 엄청난 노래실력으로 전 세계 1억 명의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줬습니다. 그가 노래를 배우기 위해 투자한 것들은 과연 효율일까요? 비효율일까요? 주변 사람들은 "저 사람 참…." 그러면서 비웃었을 것입니다. 비효율적인데 계속 밀어부치는 이유는 사랑과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은 효율을 강조합니다. 율법은 효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비효율입니다. 예수님은 비효율입니다. 사랑 하기에 비효율을 선택한 것입니다. 효율이 고개를 들고 말합니다. "그건 아니지…" 사랑을 효율적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효율성으로 가득한 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상식을 넘어서는 것 같습니다 상식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저는 두 자녀의 부모이기에 그것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수잔 보일의 대성공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가 그렇게 되는 길에서 보여준 과정을 생각해봅니다. 그 과정은 분명 비효율적이었습니다. 그는 비웃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비효율적이면서 미련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저렇게 할까?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생각이 효율의 덫에 묶여 있을 때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만이 비효율적이면서 무한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비효율성의 사랑을 하신 분입니다.

2009-06-16

[사목의 향기] 점 보는 사람과 그리스도인

어느 날 신문을 보니 "남편에 마귀가 들어 처자식 해친다"라는 주제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느 퇴역 장군의 부인은 딸이 대입 입시를 준비하고 있어 상담을 위해 그 점집에 갔더니 "당신 남편은 성도착증 변태성욕자로 첩이 7명이고 딸도 성폭행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마귀(魔鬼)가 남편에게 들어와 처자식을 해칠 수 있다고 한 후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면 기도발이 달아난다"며 입단속까지 시키고는 "영험 있는 기도로 마귀를 막아야 한다"는 무속인의 말을 듣고 한번 기도비로 수천만원씩을 주었다. 이 후 30여 차례에 걸쳐 6억원을 주고는 현금이 떨어지자 약속어음과 차용증까지 해주고는 모두 15억을 바쳤다는 기사였다. 경제적으로 불황인 요즈음 점집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 연구소에서 구직자 155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선 59.2%가 '취업 때문에 점을 봤거나 볼 계획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하니 점은 미래를 위한 지침서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점술이 가장 활발했던 시대는 이씨 조선 말기였다고 한다. 일본을 비롯하여 서방 열강들이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때 불안한 사람들은 믿을 곳이란 무속인들 밖에 없다고 여기고는 점집으로 몰렸을 텐데 결과는 어떠했을가? 무속인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 길을 갔으며 무엇을 했을까? 독립투사가 되라고 했을까 아니면 35년 간 고난의 길을 가라고 했을까? 결과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모두 행운을 점치고 살길을 찾으려고 했을 텐데 결과는 긴 세월 동안 일본인들로부터 당한 것 밖에 없었다. 이런 신자도 있다. "시어머니가 그러는데 '남편은 국록을 먹고 산데' 진짜 용하게 알아 맞추더라"라고 하면서 농촌진흥청에서 일을 하니까 과연 국록을 먹고사는 것은 사실이며 비신자인 시어머니가 미리 사주를 봐두었으니 새로 시집온 며느리에게 요즈음 같은 어려운 때에도 든든한 직장에 나가는 자식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한 이야기이니 얼마나 흐뭇했을까? 우리나라에서 본당신부로 있을 때 어느 날 신자 집에서 장례미사를 지내고 나오는데 그 집의 막내 상주가 이런 말을 했다. "며느리가 이틀간 일을 하다가 어제 밤에 쓰러져서 오늘 장례식인데도 일어나지 못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객구 걸렸다고 야단입니다. 신부님이 가시는 길에 우리 집에 들리셔서 기도 좀 해주고 가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청했다. 그 지역 사람들은 '객귀'(客鬼)를 객구라고 한다. 나는 성당으로 오던 길에 그 집에 들렸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았더니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나는 "날씨가 더운데다 잠도 못 자고 이틀 밤이나 밤새기를 했으니 그럴 겁니다"라고 안심을 시킨 다음 함께 간 신자들과 함께 기도를 드렸다. 성가를 부르는 사이 나는 큰 소리로 구마 기도와 다른 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동안 그 여자는 울고 있었다. 알고 보니 냉담신자였다. 냉담 신자는 하느님께 미안하기도 하고 잘못이 생각나서 눈물이 난다고 한다. 초상집에서 나올 때 사람들이 "이 집 며느리는 일어서지도 못합니다"라고 했는데 벌떡 일어나면서 잘 가시라고 인사까지 했다. 기도의 힘으로 객구가 도망을 갔는지 아니면 기도를 통해 한참 눈물을 흘리고 나니 심리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여성은 정상인 듯했고 그 뒤로 건강하게 잘 지낸다고 했다. 만사를 선으로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굳은 믿음으로 만사를 맡기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강한 자들일까?

2009-06-16

[지혜의 향기] 올바른 '내 탓이오'

어느 종교 지도자가 '내 탓이오'라는 표제를 들고 나와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따지고 보면 결국 다 내 잘못이요 내 죄에서 비롯된 것이니 남이나 주위 환경 또는 지금 처해진 여건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이는 바깥보다 먼저 자신의 안을 잘 들여다보고 살핌으로써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한 좋은 업을 쌓고 나쁜 업을 씻어 나가면 결국 인과응보에 따라 우리의 삶이 차츰 좋은 쪽으로 갈피를 잡아갈 것이라는 불자들의 믿음과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내 탓부터 한다지만 주위 환경과 여건을 잘 이해하는 것마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나의 안은 물론이고 나의 바깥에서는 어떤 연유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조리있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는 제대로 된 '내 탓이오'를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된다. 누가 무엇이 잘못 됐는지도 모르면 제대로 된 용서도 해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그런 불행이나 재앙이 일어날 수 있게 방치하는 공범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내 안은 물론이요 바깥의 이해와 분별까지도 잘 한 후에 이 모두를 감싸안는 차원 높은 '내 탓이오'를 해야지 혼자 퍼질러 앉아 노는 무심한 아기처럼 아무 거나 마구 찍어 바르고 뭉갠다고 거룩하고 슬기로운 자태는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이 좋은 말씀을 무지에서건 악의에서건 잘못 쓰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불자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덫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서양 여인이 인도에 가서 비참한 상태에 빠져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팠다. 사회의 밑바닥 계급으로 태어나 제대로 못 먹고 자란 데다가 학대를 받아 불구로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최소한의 사회적인 구호나 보호망이 쳐지지 않는다면 조만간 더욱 비참한 생애로 마감되리라는 것은 뻔했다. 임시 보호소에 거두어진 이 아이들을 너무 딱해 하자 수용소의 간부가 대꾸했다. '다 쟤네들 탓이에요. 쟤네들 자신이 전생에 악한 짓을 한 탓이지 누구 잘못도 아니에요.' 이 순간 그 여인은 아이들의 해맑은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얼굴 없는 학대자들과 무지한 사회 안이한 인식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누가 이 아이들에게 아침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내 탓이오' 하고 복창을 시킨다고 상상해 보라! 물론 전생 탓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것 맞다. 하지만 이 경우 전생 탓만 하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진리도 아니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아니다. 잘못된 제도 개선해야 할 환경을 잘 인식하지 못함이거나 알면서도 귀찮고 두려워 외면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 중에 제 편한 것만 가져와 써먹는 것에 불과하다. 불교에서는 말씀의 절대불변성을 우기지 않는다. 말이란 것도 본래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아서 거품처럼 스러져 간다.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 고정된 것은 없다. 실은 말을 떠난 곳에 참이 있다고도 한다. 꼭 같은 낱말과 문장일지라도 어느 방향에서 무슨 목적으로 언제 어떻게 쏘아 올렸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이 실린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평범한 진리이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여 남의 말을 그 본뜻은 제쳐두고 토막쳐 잘라와 제 입맛대로 우려먹는다. 흔하면서도 전형적인 왜곡이며 구업을 짓는 일이다. '내 탓이오'를 다짐하거나 권할 때도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2009-06-16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마음 속 '내비게이션' 있나요

과연 어떨까요? 우리가 직접 '2500년 전의 고타마 붓다'를 만난다. 또 '2000년 전의 나자렛 예수'를 만난다. 어떨까요? 라이브로 듣는 붓다의 직설에 자동으로 깨달음을 얻게 될까요? 아니면 예수가 풀어내는 생생한 몇 마디에 천국의 문이 '스르르' 열릴까요? 놀랍게도 붓다와 예수는 이 물음에 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풍경1 : 2000년 전이었죠. 몰려든 군중을 향해 예수가 말했습니다. "나에게 '주여 주여'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21절) 그리고 이 말을 보탰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는다."(마태복음 7장24~25절) 그렇군요. 예수는 "주여! 주여!"하는 추종과 열광보다 "내 뜻대로 행함"에 방점을 찍었던 겁니다. #풍경2 : 2500년 전이었죠. 목갈라나(붓다의 제자)가 붓다에게 물었습니다. "똑같이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도 어째서 누구는 열반을 얻고 누구는 얻지 못합니까?" 붓다는 이렇게 답했죠. "라즈기르(인도의 지명)로 가려는 사람이 와서 그대에게 묻는다. 길을 가르쳐 달라고. 그대는 대답한다. '이 길을 따라가면 어떤 마을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도시가 보입니다. 더 가면 아름다운 공원과 숲 들판과 연못이 있는 라즈기르가 보일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잘못된 길로 들어서 서쪽으로 가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대의 충고와 안내를 따라서 라즈기르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다. 그 이유가 뭔가?" 목갈라나는 대답했죠.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다만 길을 안내했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붓다가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다. 어떤 제자는 나의 충고와 안내를 듣고 최상의 목표인 열반을 성취할 것이고 어떤 제자는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여래는 다만 길을 안내할 뿐이다." 그렇습니다.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은 '내비게이션'입니다. 그게 경전이죠. 어디서 좌회전하고 어디서 우회전하고 어디서 유턴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죠. 덕분에 난생 처음 보는 다리와 언덕 숲속에서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 거죠. 지금껏 한 번도 밟아보지 않았던 땅을 밟으면서도 그 길을 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내비게이션의 메시지를 오차 없이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이 참 중요하죠.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선 자칫하면 '미아(迷兒)'가 되기 십상이니까요. 사람들은 그래도 투덜대죠. "경전의 양이 너무 방대해." "핵심만 콕콕 찔러줘." 당시 사람들도 그랬을까요? 예수는 '요약 총정리'도 내놓았죠. '성서 중 성서'로 불리는 '산상수훈'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팔복(八福)'이죠. 그 '팔복'이 바로 우리를 온전히 '예수' 안에 거하게 하는 구체적인 길입니다. 그럼 붓다의 '요약 총정리'는 뭘까요.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죠. 한자어라 좀 어렵죠? 그중 하나만 꼽으면 '정견(正見.바른 견해)'입니다. 인간과 세상 그리고 우주의 이치에 대한 바른 이해가 '나'를 허물기 때문이죠. 그걸 통해 붓다와 하나가 되는 거죠. 그러고 보니 둘 다 '8(팔)'이네요. '여덟'로 겹치네요.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죠. 거기에 주파수를 맞추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옆구리에 낀 내비게이션(경전)도 "삐리~릭!"하고 작동을 시작하겠죠. 거기에 맞춰 한 걸음씩 발을 떼는 겁니다.

2009-06-16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