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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사랑은 나를 다스리는 것

박병기/Jesusinculture.com 운영자

성경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가요로도 소개됐던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13장과 로마서 13장10절이 가장 핵심적인 사랑장과 사랑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두 가지 편지를 쓴 사도 바울은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로마서 13장10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인 것 같았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표현은 수동적인 느낌이 듭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두 아실 겁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않고 성 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나옵니다. 꽤 수동적이죠. 내 안에 있는 내면 세계를 잘 돌봄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은 보통 능동적인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대표적인 사랑 같은데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사랑보다는 정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랑이 있어야 정의도 구현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정의를 위한 사랑은 내면 세계에서 내 마음을 잘 돌봐야 생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랑과 정의를 혼합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의 행위는 사랑을 기본으로 한 정의로운 일을 할 때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내면 세계에서 사랑을 할 수 없는 나를 다스림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나를 봐야 내면 세계가 보이는데 조용한 가운데 묵상은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히틀러를 살해하는데 동참했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와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뒤집었던 예수님은 이웃에 해를 끼치는 자가 아닌가요?'라는 질문입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히틀러는 우리의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회악을 조장하는 거대한 파워였습니다. 개인이지만 그의 영향력과 존재는 이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악이었습니다.

약간은 폭력적인 예수님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이 썩은 것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집단 전체의 악으로 봤기에 예수님은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이웃에게 해를 끼친 것도 무례히 행한 것도 아닙니다. 악에 대해 무례히 한 것입니다. 결국 그건 무례함이 아니겠죠.

대통령이 악을 조장하고 있으면 그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례히 행하는 게 아닙니다.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닙니다. 이유는 그들의 그 특정 행위에 대해서는 이웃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 정의인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할 때는 이웃인지 아니면 이웃 차원을 넘어선 큰 악의 중심인지를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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