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재고 평가하는 틀' 깨야 이웃 비로소 '내 몸' 돼
또 안방에서 TV를 보다가 울컥하는 사연에 전화기 버튼(ARS 성금)을 누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웃 사랑은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 마디 던지죠. "그래 맞아. 이웃과 함께 살아야지. 예수님도 말씀하셨잖아.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러나 예수님의 '이웃 사랑'은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무척 험한 길을 지나야만 무척 높은 산을 넘어야만 겨우 닿을 수 있는 '사랑'이죠. 아니 어쩌면 그래도 닿을까말까한 사랑일지도 모르죠.
왜냐고요? 예수님은 그냥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거든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몸과 같이'. 이 말뜻을 가슴으로 풀어 보세요. 그 의미를 안다면 온몸이 떨릴 지경이죠. 그렇습니다. '네 몸과 같이'라는 이정표에는 '무시무시'한 목적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어디 한번 짚어 보세요. 내 이웃을 끌어다가 내 몸과 마음에 포개보세요. 그 틀에 온전히 포개지나요? 약간의 삐져나옴도 없이 하나가 되나요? 그렇게 나를 보듯이 이웃을 보고 있나요?
그렇게 나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있나요? 아무리 처절하게 몸부림을 쳐도 쉽지 않습니다. 내 틀에 딱 맞는 이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웃은 여전히 이웃이고 나는 여전히 나일 뿐이죠.
세계적인 명상가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는 이렇게 말했죠. "종교적 마음이란 사랑의 폭발이다.(The religious mind is the explosion of love)". 그리고 "그 사랑은 분별을 모른다(It is this love that knows no separation)"고 했습니다. 나와 너 나와 이웃의 구분이 없는 사랑이란 뜻이죠.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이웃을 보고 재고 평하고 분별하는 내 안의 틀을 허물어야죠. 그 틀에 막혀 그 틀에 부딪혀 이웃이 '내 몸'이 되질 못했으니 말이죠. 그 틀이 무너진 자리 거기로 이웃이 들어설 때 비로소 '내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제야 있는 그대로의 이웃과 온전히 포개집니다.
'네 몸과 같이'란 이정표 저는 그 앞에서 고개가 숙여집니다. 목적지로 가는 험난함을 아니까요. 그래도 한 가지는 명확하죠. 그 길의 끝에서 예수님과 온전히 포개질거란 사실입니다.
성경도 말합니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 등 여러 계명이 있지만 모든 계명은 한마디로 요약된다(로마서 13장9절)"고 말이죠.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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