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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향기] 호미를 든 관음상

이원익/재불련 이사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59년 한국은 여러 면에서 참으로 황폐한 시절이었다. 무려 세 해 동안이나 온 나라의 땅과 사람을 제멋대로 할퀸 동족상잔의 모진 발톱은 여기저기 벌겋게 헤벌어진 처참한 생채기들을 그대로 남겨 두고 있었다.

썩을 대로 썩어 군내마저 가신 정권은 이미 무감각과 마비의 말기 증상을 드러내고 있었고 남북은 이전보다 더 날카롭게 이빨을 갈고 서로를 노려보며 어느 틈에라도 다시 상대를 찌를 듯 칼자루를 뽑아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풀뿌리 나무껍질까지 찾아 씹으며 하루하루의 목숨을 우선 이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종교는 무얼 하고 있었던가? 특히 불교의 모습은 어떠했던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지만 그 때의 불교계는 이승만 대통령이 촉발한 비구와 대처승의 소모적인 싸움에서 헤어 나오기는커녕 점점 더 한심하고 극단적인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니 중생들의 아픔과 신음소리에는 일단 등을 돌리고 있을 수밖에.

이러고도 한참이 지나 그 소용돌이는 겨우 가닥이 잡혔는데 얻어진 결과를 보자면 좋게 말해 종단의 정화였고 달리 말해 갈라짐과 제길 가기였다. 이렇게 얻은 것이 있었으니 분명 잃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부처님의 아들딸들은 왕조와 외적의 박해로 거의 망가졌던 불교를 손잡아 다시 일으킬 황금 같은 시간을 잃었다. 외래 종교를 맞닥뜨려 적절히 대처하고 대세를 결정지을 기회를 놓쳤다.

요긴한 방편으로 쓰일 막대한 재산들은 소송이다 뭐다 하여 흩어 버리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마저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아픔은 이제 사람들은 불교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고 기대를 거두기 시작한 사실이었다. 꼭 그 탓만은 아니었겠지만 더욱이나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불법의 효능과 매력을 못 미더워하며 자신과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살릴 묘약을 찾아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해 봄 동국대학교에 남다른 젊은 불교학도 서른 한 명이 있었다. 이들이 일단 혈기를 누르고 정관 속에서 뚜렷이 현실을 살펴보매 머리를 내리친 것은 부처님의 크나큰 맡기심에 대한 깨우침이었다.

이리하여 이들은 불교혁신의 깃발을 들고 떨쳐 일어섰으니 그 증표와 상징으로서 힘 합쳐 새로운 관음상을 하나 먼저 세우기로 했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몸과 마음을 개발하고 아울러 사회 경제 및 사상을 새로이 일구자는 원력으로 일하는 관음보살상을 김해 봉화산에 모셨으니 세계에 유례가 없는 호미 든 관음상이다.

편안히 앉아 쉬는 보살님이 아니라 거칠고 묵은 땅을 일구며 일하시는 보살님이시다. 이 세상 중생의 어둠과 고통을 김매듯 뽑아 버리고 희망의 씨앗을 심어갈 호미다. 그리고 어느덧 쉰 해가 흘렀다. 비록 덕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이제 불법은 무르익어 온 누리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 혹시 들었는가?

최근 어쩌다 그 관음상이 다시 한국의 주류 언론에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나마 제대로 그것을 만들어 세운 참뜻을 전달한 보도는 드물었다.

코리아타운 어느 상가 뜰의 벤치 누군가가 두고 간 신문을 펴며 문득 지면의 한 귀퉁이에 실린 사진을 바라보니 아침 햇살에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관음보살님이 마치 그리피스 공원 산등성이에 서 계신 것 같다.

그리고 미국이라고 와서 먹고 산다는 핑계로 제대로 신행도 못하고 있는 내 황폐한 가슴밭을 그 호미날로 찍어 일구시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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