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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믿음의 거부

중국의 고전 〈맹자>에 보면 양호라는 사람이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부자가 되려고 하면 어진 행동을 하지 않고 어진 행동을 하려고 하면 부자가 되지 못한다"(陽虎曰 爲富不仁矣 爲仁不富矣)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어질게 사는 사람은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정말 그런가? 성경을 보면 이삭에 대한 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하였다(창세기 26:13). 이삭은 매우 경건하고 어질게 살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자가 되기 위해 어떤 야비한 방법이나 속임수를 쓴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면 부자가 되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살던 곳에 흉년이 들자 기근을 피해 이방 땅 블레셋에 와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 백배나 되는 소출을 얻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부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부자들이 대부분 부자가 될 만한 그릇이 아닌데 단지 부모를 잘 만났거나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자신의 재산 가운데 85%에 해당되는 374억 달러를 5개 단체에 나누어 기부하였다. 특히 그는 그의 기부금 대부분을 빌게이츠 부부가 운영하는 〈게이츠 재단>에 보내기로 하였다. 빌게이츠의 기부금과 워렌 버핏의 기부금을 합치면 〈게이츠 재단>의 규모는 무려 6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후진국 교육 사업과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 퇴치 사업을 벌이고 있다. 세계적인 갑부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이 만나 지구촌의 어려움을 위해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자신들의 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학창시절 신문배달 등으로 어렵게 모은 9800 달러를 밑천으로 50년 만에 거부가 된 워렌 버핏은 이렇게 엄청난 돈을 기증하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아직도 네브라스카주 오마하 작은 집에서 살고 있으며 중고차를 타고 12 달러짜리 이발소에서 다니고 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며 우리는 한국사람 중에는 "왜 이런 부자가 나오지 않을까?" 묻는다. 그동안 우리는 '돈 버는 법'은 배웠어도 '돈 잘 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돈을 벌면 호위호식하고 편법을 써서라도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지만 사회에 환원시킬 생각은 거의 해보지 못했다. 우리의 자녀들이 앞으로 미국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사람이 되려면 돈도 잘 벌어야 하지만 돈을 멋지게 사용하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본다. 한국은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들어가는 강국이지만 기부하는 문화를 보면 아직 후진국이다. 이제 한국 사람들도 국제 사회에서 '돈을 악착같이 버는 민족'이라는 평가보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가장 멋지게 돈을 사용하는 민족'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9-09-29

[이민목회] 현장감 있는 목회

이민목회는 전문적인 목회이다. 전문적이란 말은 신학적인 이론에 입각한 실천적인 학문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이민교회 현장에 적용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민목회는 현장을 중요시하는 목회로 실천력을 강조하여 적용할 수 있는 목회이다. 어떻게 전문적인 목회가 되는 것인가? 첫째 이민교회의 현장과 일체감이 있는 목회이다. 일체감이란 마음이 일치하는 감정을 말한다. 이민교회 지도자로서의 일체감은 하루 아침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민교회의 무수한 경험과 다양성이 있는 포괄적 느낌이 바로 일체감이다. 즉 이민교회라고 하면 이민자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그들을 향한 관심과 소망이 일체감속에 들어있다. 이민교회 일원으로서의 느낌과 마음이 통하는 일체감을 말한다. 이러한 일체감이 이민목회의 초석이 되는 것이다. 둘째 이민교회의 현장과 동질감이 있는 목회이다. 동질감이란 같은 형태로 지속하는 감정을 말한다. 이민교회의 동질감이란 이민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이야기들속에 자신이 벗어나지 않고 주체적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민교회의 일이 바로 나의 일이요. 나의 과정이요 나의 삶의 목표라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민교회의 동질감이 바로 마음을 묶는 기초가 되고 하나 되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셋째 이민교회의 현장과 생동감이 있는 신학이다. 생동감이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고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물체가 되어 활동하는 것이다. 즉 이민목회는 이민교회의 현장과 연결되어 있어 살아 움직이는 신학이다. 이민교회 현장을 깊이 이해하는 목회 이민교회 현장을 세우는 목회 이민교회 현장을 살리는 목회 이민교회 현장을 사랑하는 목회 이민교회 현장을 섬기는 목회 이민교회 현장과 함께 하는 목회이다. 그러므로 이민목회는 이민교회의 현장과 일체감 동질감 생동감이 있을 때 이민교회에서의 활발한 목회가 될 것이다.

2009-09-29

[사목의 향기]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이 되게 하라

지난 여름 휴가 때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미사 중에 하신 강론 말씀을 전하는 신문 보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듣기 좋게 하기 위하여 본 뜻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말씀의 본 뜻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수난하고 죽고 부활할 것을 예언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붙잡고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강요했다. 제자가 스승을 강요했다는 뜻은 배우기를 거부했다는 것과 같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셨다. 그러시면서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누구든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다. 왜 십자가일까? 십자가라는 처형 방법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페르시아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다고 본다. 로마에서도 4세기경까지 즉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뜻으로 금지 시킬때까지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 처형 방법에 따르면 죄인의 손목과 발목을 줄로 묶거나 못으로 박아 십자표의 나무에 매달고 숨을 완전히 거둘 때까지 두는데 숨을 완전히 거둘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하루 반나절이나 길면 사흘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그 동안의 고통을 상상해 보라. 몸의 운동이 정지되면서 혈액 순환이 둔화되고 심장에서 먼 곳부터 산소 공급이 끊기며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뇌가 살아 있는 동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다 인식할 수 있을 것이고 시정 잡배들의 저주와 냉소를 견디는 정신적 고통이 육체의 고통보다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잔인한 방법이 또 있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이해된 십자가는 수치와 치욕의 상징이며 고통과 비탄 그리고 실패와 희망 없음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사람이 스스로 원할 수 없다는 뜻에서 반어법적으로 하느님 뜻 찾기의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신비이다. 요약하여 십자가의 신비는 비움의 신비라 할 수 있겠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날 자리를 마련하는 비움의 신비 높여지기 위한 낮아짐의 신비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셨지만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을 터 주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여 스스로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것이 십자가의 두 날개 중 한쪽의 의미이고 그렇게 하느님의 뜻에 복종한 아들의 비움의 자리에 못하실 것이 없으신 하느님의 권능이 작용하여 승리와 영광이 드러나 부활이 준비되었다는 것이 십자가의 다른 쪽 날개의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는 온갖 형태의 세속적 힘의 유혹을 끊고 온전히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살겠다는 선택과 결심의 표지이다. 그런 뜻에서 십자가는 사람의 뜻과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시금석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의 자기 희생과 사랑의 표지이며 성덕에 오르는 길이며 구원의 상징이며 승리의 표지이고 그렇기 때문에 희망의 징표다. 그렇다면 거짓 설교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아도 될 달콤한 말하기를 이젠 그만두어야 한다.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하느님의 말씀의 진의를 정직하게 가르치고 가르치는 자가 스스로 실천하여 다시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이 되게 해야 한다.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기 위하여 희생과 고통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그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2009-09-29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남편에 대한 집착에 힘든데

Q: 남편에 대한 집착을 놓고 싶습니다. 이 집착 때문에 힘든데 어떻게 해야 놓아질까요? 겁나는 것은 내가 이 집착을 놓게 되면 대신 아이들한테 집착이 가지 않을까요? A: 중생이 갖는 특징이 집착입니다. 집착은 의지심에서 오지요. 집착이 강한 것은 의지심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집착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괴롭고 힘듭니다. 수행은 이런 의지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집착을 놓으려면 인생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남편이 돈을 얼마나 벌어오느냐 나를 얼마나 사랑해 주느냐 집에 언제 들어오느냐 등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의 희로애락을 좌우하는 데서 벗어나야 됩니다. 남편을 하나의 독립적인 사람으로 인정하면 그 집착이 자식으로 옮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집착은 그냥 놔두고 남편에 대해 실망을 해서 남편을 외면하면 집착하는 마음이 증폭되어 자식에게로 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식에게 큰 짐이 되고 부모자식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수행정진을 해서 의지심을 버리는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남편에 대한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일찍 들어오느냐 늦게 들어오느냐 술을 마셨느냐 안 마셨느냐 건강하나 안 하나 돈을 많이 벌어오느냐 적게 벌어오느냐 나를 사랑한단 말을 해 주느냐 안 해 주느냐'라며 지나치게 남편에게 집착해서 요구하면 자기 삶이 늘 힘들지요. 그렇다고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오거나 일찍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라는 게 아닙니다. 일찍 들어온다면 좋지요. 사랑해 준다면 좋고 맛있는 걸 사 주면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형식적인 잣대에만 매달리게 되면 자기 인생도 불행하고 남편에게는 지나친 간섭을 하게 되어 피곤하게 됩니다. 결국은 서로가 불행하게 됩니다. 외로울 때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남편 혹은 아내가 있으면 서로 의지처가 되어 좋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에만 너무 의지하면서 살면 오히려 서로가 상대방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립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결혼'이 오히려 속박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속박하는 것 같고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속박하는 것 같아지지요. 외출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하거나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자기가 뭘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아내는 늘 남편의 눈치를 보고 남편도 아내의 눈치를 봅니다. 그러다보니 결혼 생활에 대해서 회의적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 생활 자체가 해탈의 장애가 되는 게 아니고 직장생활 자체가 해탈의 장애가 되는 게 아니고 사회생활 자체가 해탈의 장애가 되는 게 아니라 집착이 해탈의 장애입니다. 결혼했기 때문에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속박을 받는 게 아니고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속박을 받는 겁니다. 그러므로 의지심을 버리고 집착을 놓아버리면 결혼 생활 직장 생활 등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괴로움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언제 어디에서라도 걸림 없는 사람인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2009-09-29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일상 속의 장좌불와

'수행'이라고 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르세요? 깊은 산중에서 가부좌를 틀고 면벽수도(面壁修道)하는 수행자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1주일씩 혹은 열흘씩 한숨도 자지 않고 버티는 '용맹정진'인가요? 그도 아니면 10년이고 20년이고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인가요? 그럼 '삼매(三昧)'하면 어떤 상태가 떠오르세요? 정신을 집중하고 집중하고 또 집중해서 '고~옹!'한 상태를 만나는 건가요? 아니면 나도 잊고 너도 잊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경지를 체험하는 걸까요? '깨달음'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번쩍!'하는 순간 중생이던 내가 부처로 탈바꿈하는 걸까요? 10년씩 20년씩 바닥에 눕지 않는 장좌불와 깨닫기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결코 일어서지 않겠다는 불퇴전(不退轉)의 결심 등. 듣기만 해도 근사하죠. '이런 게 진짜 수행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부작용도 큽니다. 왜냐고요? 그걸 상식처럼 여기는 이들에게 수행은 결국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마니까요. 재가자는 말하죠. "우리는 못해. 그건 출가한 스님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야." 출가한 스님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못해. 그건 선방의 수좌들이나 가능한 일이지." 선방의 수좌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못해. 그건 정말 목숨을 내놓고 수행하는 일부 스님들이나 가능하지." 그래서 수행은 '나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 되고 맙니다. 왜냐고요? 수행과 깨달음을 너무 '신화화(神話化)'했기 때문이죠. 수행담이 '땅 위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 너머의 이야기'가 돼버린 거죠. 수행을 위해 손가락을 태우고 토굴에 들어가 하루 한 끼만 먹고 수십 년간 자리에 눕지 않고 죽을 때도 앉은 채로 입적하는 것을 마치 '깨달음의 필수 조건' 혹은 '깨달음의 징표'처럼 여기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누워서 돌아가신 스승을 일으켜 앉혀서 사진을 찍고 'ㄴ'자로 관(棺)을 짤 정도가 돼버린 겁니다. '좌탈입망(座脫立亡)'이란 신화를 만들기 위해서죠. 그런 '신화 만들기'는 생활과 수행을 서로 멀찌감치 떼어놓습니다. 결국 '생활 따로 수행 따로'가 되고 말죠. 그런데 붓다는 달리 말했습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했거든요.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얘기죠. 가령 금고문을 열 때는 어떻게 하나요? 무턱대고 도끼나 망치로 "쾅쾅" 부수나요? 그렇지 않죠. 금고의 다이얼을 왼쪽으로 "딸깍 딸깍" 오른쪽으로 "딸깍 딸깍" 하면서 번호를 맞추죠. 그렇게 다이얼을 맞추어 나갈 때 두꺼운 철문도 "덜커덩!"하고 열리는 겁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죠. '나의 마음'을 '우주의 마음'에 하나씩 둘씩 맞추어가는 겁니다. 그걸 통해 '나에 대한 오해'를 '나에 대한 이해'로 '우주에 대한 오해'를 '우주에 대한 이해'로 돌리는 겁니다. 그럴 때 우주와 내가 함께 숨을 쉬죠. 법의 등불이 "깜박깜박"할 때 내 마음의 등불도 "깜박깜박" 하는 거죠. 그게 바로 수행이죠. 법의 등불과 나의 등불이 함께 깜빡이는 순간이 바로 삼매죠. 그러니 가장 치열한 수행의 장이 어디일까요? 그렇습니다. 지지고 볶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나와 우주에 대한 오해'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죠. 거창한 얘기가 아닙니다. 집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하나씩 대입하며 살펴보세요. 내 욕심을 태우는 게 소신공양이고 쉼 없이 나의 오해를 깨닫는 게 장좌불와이고 금고(마음)의 문을 다 열어 젖히는 게 좌탈입망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죠.

2009-09-29

[이민목회] '영문교사' 훈련

1세교회의 특징을 1세중심 한어권 열심 헌신으로 규정한다면 2세교회의 특징은 2세중심 영어권 복합문화권 다양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1세교회가 예배의 강조와 교회당이나 교육관을 세우는 일에 매진을 해왔다면 2세교회는 교사훈련교재를 제작해야 한다. 교사훈련교재는 미국교재가 아닌 '영문교사 훈련교재'를 의미하는 것이며 한인2세를 위한 전문적인 교사훈련교재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미주한인교회는 교사훈련에 대한 관심을 두어야 하는 시기로 교육전문가들이 모여 협의하고 머리를 맞대어 교사훈련교재 만들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장래의 이민교회의 방향을 예측하는 것으로 전심으로 교사훈련교재 제작에 투자를 해야 한다. 차세대에게 꼭 필요한 사안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교사훈련교재를 만들어 그 교재를 통해 2세들을 인물로 키우는 일일 것이다. 교사훈련교재는 다음과 같은 컨텐츠를 고려할 수 있다. 1.한국의 역사진술 2. 교사됨의 신학적 성서적 배경 3.이민교회 역사요약 4.교사의 사명 5. 청소년및 어린이 이해등이다. 하나씩 설명해보자. ▷한국의 역사진술이 필요한 이유는 교육교재를 통해 한인2세들의 민족관과 역사관을 바로 정립한다는 취지이며 ▷교사됨의 신학적 성서적 배경이 필요한 것은 성서가 강조하는 교사의 중요성에 대해 이민자적인 렌즈로 해석해야 하며 ▷이민교회 역사가 들어가야 하는 것은 한인2세들이 이민교회의 역사를 배워야 한인선조들의 신앙계승을 한다는 의미이며 ▷교사의 사명이 필요한 이유는 한인2세들의 비전과 역사적인 사명감으로 한인2세와 3세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며 ▷청소년및 어린이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교사가 한인차세대의 민족적사회학적인 배경을 이해해야 한인2세들의 방향을 알고 지도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2세들이 한민족의 자산이요 우리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1세와 2세들이 힘을 합쳐 2세들이 영문교사훈련교재를 만드는데 일조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일에 이민신학연구소는 뜻이 있는 분들을 찾고 있다.

2009-09-22

[생활 속에서] 드라마 '찬란한 유서'서 말씀 읽기

얼마 전 한국에서 종영된 인기 주말드라마 '찬란한 유산'은 시청률 40%를 넘나들며 '막장 드라마가'가 아닌 '착한 드라마'가 대박을 터뜨린 드문 경우라고 TV 전문가들은 분석했습니다. 설렁탕 집으로 대기업을 일궈낸 장숙자 회장은 선우환(이승기)의 할머니인데 손자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겨주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선우환은 할머니 말을 잘 듣지 않고 망나니처럼 삽니다. 장 회장이 길거리에서 쓰러졌을 때 만난 고은성(한효주)은 생면부지의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돌봅니다. 나중에 자신이 모 대기업의 회장임을 밝힌 장 회장은 은성에게 기업 경영권을 물려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은성이 이를 거절하자 할머니 회장은 직원들에게 주식을 모두 나눠줍니다. 할머니의 말씀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신명기 8장과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도 할머니 말씀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장 회장의 말씀은 큰 차이가 있겠지만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이것이 좋은 예인 것 같습니다. '신명기' 8장과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게 아니요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내용은 비기독교인도 한 번쯤은 들어봤던 내용일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말씀은 장회장의 말씀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장 회장의 말씀으로 은성과 우환 그리고 직원들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실제 이 내용이 나오기 직전에 신명기 저자는 하나님이 배고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manna)'를 내리시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만나가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떡과 하나님 말씀은 결국은 인간을 살리는 것입니다.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4장에는 사탄이 예수를 시험할 때 '돌을 떡이 되도록' 해보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게 아니다'라는 '신명기' 내용을 인용합니다. 예수는 40일 동안 금식 기도를 마치고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이 말은 '내 생명은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뜻입니다. '신명기'와 '누가복음'의 내용은 인간의 먹고 사는 일 생명을 유지하는 일은 조물주의 뜻에 달렸는데 사람은 눈 앞에 있는 먹고 마시는 일에만 집중해 그 것을 못 보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장 회장의 손자인 우환은 자신이 창업주의 혈육이라는 것을 너무 과신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할머니가 재정적인 지원을 해줬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손자를 훈련시키기 위해 카드 사용을 중단시키고 설렁탕집 분점에서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혈육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환에게는 아마도 이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우환은 혈육으로만 살 게 아니요 장 회장의 말씀으로 산다'고. 창업주 장 회장의 말씀에는 혈육도 빵도 명예도 지위도 다 포함하는 큰 틀이 있습니다. 창조주의 틀은 더 크겠죠.

2009-09-22

[사목의 향기] 신앙은 깨어남이다

며칠 전 신문에 보도되었던 내용이다. 어떤 환자의 집 앞에서 기도를 하다가 경찰에 잡혀간 사람이 있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그 환자의 가족이었다. 교회의 목사님과 신도들이 집에 여러 번 찾아와 기도를 해 준다고 했지만 싫다고 했다 한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지 않자 몇몇 열심한 신도들이 집 앞에 자리를 잡고 기도를 하더라는 것이다. 집요하게 기도를 강행했던 사람들을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그들을 연행했다. 경찰에 잡혀간 신도들은 그 환자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황당하지만 열심한 신도들 사이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열심하다는 무모함"이라 해야 할까. 이런 태도가 거북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짐작하게 하는 좋은 예가 있어 소개하려 한다. 성모병원의 원목활동을 하던 시절에 목격한 일이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말기 암을 앓고 계셨다. 그런데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물을 달라고 하셨을 때의 일이다. 정말 효자였던 큰 아들은 얼른 자기가 준비해 온 보온병에서 잘 다려진 찻물을 따라 드렸다. 그런데 큰 아들이 따라드린 물을 한 모금 드시다 말고 갑자기 뱉어 버리시는 것이 아닌가. 다들 놀라고 당황했는데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물 말고 그냥 시원한 물 달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큰 아들이 암에 좋다는 영지버섯을 넣고 다리고 가장 마시기 좋은 온도를 맞춰서 보온병에 담아온 이 특별한 찻물이 할아버지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큰 아들은 깨달아야만 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왜 몰랐을까? 상대방의 요구에 깨어나지 않고 혼자만의 지극정성이란 정말 얼마나 무모한가를 잘 보여준다. 신앙은 이같이 깨어남이다. 신앙은 이같이 세상과 이웃과 하느님께 대한 알아차림이다. 자신이 설계한 이기심의 장벽을 헐고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하여 눈 맑고 귀 밝아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기심의 장벽을 헐고 마음을 연다는 특성 때문에 신앙을 회심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행위를 이루는 세가지 근본적 요소를 생각해 보자. 첫째 인간만이 신앙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느님을 알아 볼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났고 그래서 인간은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묻는 존재이며 하느님을 찾는 존재이다. 둘째 하느님은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찾고 있는 인간에게 하느님께서 먼저 다가오시고 그분을 감싸고 있는 신비의 가리개를 열어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신다. 셋째 이와 같이 먼저 다가와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시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하느님께 자유의지로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를 신앙이라고 하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행위의 역동성을 깨어남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한마디로 신앙은 들은 말씀에 대한 사랑에 찬 복종이다. 골고타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고 피와 물을 쏟으셨다. 피와 물은 성체성사와 세례성사를 상징하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열려짐은 이기심의 장벽이 깨짐을 의미한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에게 외치시는 그 침묵의 강론에 귀를 기울여 보자; "말하는 자는 나다. 너희는 나의 말을 들어라. 나의 말을 들으면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게 된다. 나의 말을 듣기 전에 알아들은 척 하지 말고 내 뜻을 모르면서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라.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네가 알아서 네 맘대로 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라. 내가 그렇게 했듯이…"

2009-09-22

[지혜의 향기] 욕설은 쏟아 놓은 그대의 것

부처님께서 라자그리하 근처 대숲의 처소에 계실 때다. 하루는 어느 바라문이 성이 머리끝까지 올라 부처님을 찾아와서는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자기 친척 한 사람이 부처님을 따라 출가한 것이 분해서였다. 갖은 험한 소리를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부처님은 이윽고 좀 잠잠해진 틈을 타 바라문에게 물었다. 바라문이여 그대의 집에도 때때로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가? 물론 있소. 그렇다면 음식을 대접하는 일도 있겠구려. 그럼 있지요. 대접을 했는데도 만약 손님이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그야 아무래도 도로 내 것이 되겠지요.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그대가 방금 내 앞에 차려 놓았던 그 많은 욕설들을 나는 하나도 먹지 않았다. 이 말씀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낀 그 바라문은 곧바로 출가하여 열심히 닦고 행한 끝에 마침내 응공 즉 아라한이 되었다는데 응공이란 능히 대접받을 만한 자라는 뜻이고 줄여서 나한이라고도 한다. 이는 잡아함경에 실린 이야기로 남이 성을 내더라도 바른 생각으로 자제를 하는 것이 능히 자기를 이기는 동시에 남을 이기는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렇듯 부처님은 우리가 무슨 일에나 화를 누르고 성을 내지 말 것을 당부하셨는데 성냄은 욕심 어리석음과 함께 우리 불자들이 가장 조심하고 삼가야 할 세 가지 독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복잡한 현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루하루 너무나 화날 일이 많다는 것이다. 새벽에 잠자리에서 눈을 떴터 밤에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화를 내고 성깔을 부리자면 어느 것 하나 트집 잡지 못할 것이 없다. 우라질 아침은 왜 이리 빨리 찾아오나 입맛은 왜 이리 없나 식구들 태도는 왜 저래 오늘 따라 길은 왜 이리 막혀? 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일에 사사건건 화를 내어 봐도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 오고 밥맛은 더 달아나 버린다. 식구들은 가시 돋친 말로 더 화를 돋우게 되고 지각은 맡아 놓은 당상이다. 누워 하늘을 향해 침 뱉는 것이며 바람을 향해 흙을 던지는 꼴이다. 그 침은 내 낯에 떨어지고 흙먼지는 내 눈에 날아든다. 이렇게 꾹꾹 속을 삭이고 있는데 누가 맞대놓고 내게 욕설이라도 퍼붓는다면 까짓것 잘 만났다 웃통 벗어젖히고 한 판 붙는 게 정신건강에 나을지도 모른다. 조국이 망한다 해도 눈 하나 꿈쩍 않겠지만 내 귀에 거슬리는 한 마디는 그냥 못 넘어가는 게 또한 우리 본색이니깐. 하지만 특히 이 미국에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며 맞대거리 했다간 낭패를 입고 덤터기를 뒤집어쓰게 마련이다. 혹시 상대가 이를 노려 올가미를 쳐 놓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에 휘둘리지 않는 슬기를 가져야 한다. 서로 화를 돋울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도록 환경과 조건 인간관계를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 항상 좋은 말로 서로를 대하며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대화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생긴 오해는 빨리 풀고 혹시 화를 돋울 만한 빌미를 준 일은 없을까 상대의 처지에서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현실에 윤활유를 칠하는 일이요 상대의 구업을 미리 막아 주는 선업 쌓기다. 하지만 이리저리 애를 썼는데도 아랑곳없이 내게 험한 소리를 퍼질러 놓는다면 어쩌겠는가 악업을 보탠 중생을 가여이 여기며 우리도 부처님 흉내를 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쏟아 놓은 그대의 것이라고.

2009-09-22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생활 속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불교의 경전은 팔만사천에 달합니다. 어마어마하죠. 그걸 270자로 요약한 게 '반야심경'이죠. 그래서 부처님 법의 골수가 '반야심경'에 다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 '반야심경'도 딱 여덟 자로 요약할 수가 있죠. 그게 뭘까요? 맞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입니다. 그런데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색은 뭐고 공은 또 뭐야?"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 주로 이런 반응이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은 더 황당하게 여기죠. "역시~불교는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잖아." 과연 그럴까요. 살아있는 물고기를 손에 쥐면 어떻게 되나요? '펄떡펄떡' 뛰죠. 마찬가지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도 펄떡펄떡 뛰면서 '슉슉'하고 숨을 쉬는 말입니다. 살아있단 말이죠. 이제 두 손으로 그 '물고기'를 잡아보세요. 그리고 나의 일상을 향해 '휘~익!' 던지세요. 지지고 볶는 일상 속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들여다볼까요. #풍경1 : 먼저 '색즉시공'입니다. 바쁜 아침 출근길 옆차가 느닷없이 끼어들죠. "빠~앙!"하고 경적을 울립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오죠. 그 화가 '색(色)'입니다. 그런데 색을 붙들면 항상 나만 괴롭죠. 게다가 '옆차도 분명 급한 이유가 있겠지'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브레이크를 밟고 양보를 해줍니다. 순간 화는 사라지고 말죠. 어디로 갔을까요.'공(空)'으로 들어간 겁니다. 색이 공이 되는 순간이죠. 그게 '색즉시공'입니다. 컴퓨터로 따진다면 일종의 '포맷'이죠. 이제 질문이 들어오겠죠. "왜 포맷을 해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죠. 화가 난 마음을 계속 붙들면 어찌 될까요. 회사에 가서 점심을 먹고 퇴근을 할 때까지 '아침의 짜증'을 안고 있다면 '색즉시공'이 될 수가 없죠. 왜일까요? 내가 계속 '색'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색'이 쌓이고 쌓여서 나의 업(業)이 되는 거죠. 그래서 '툭! 툭!' 내려놓는 겁니다. 출근길의 짜증뿐만 아니죠. 칭찬 후의 뿌듯함도 이별 뒤의 아쉬움도 성공한 뒤의 자만심도 '툭! 툭!'내려놓는 거죠. 그렇게 마음이 포맷될 때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출렁이는 창조의 바다로 다시 들어가는 겁니다. 다시 볼까요? "탁!"하고 화를 내려놓는 순간을 들여다보세요. 더 이상 '옆차'에 마음이 묶이지 않게 되죠. 그래서 공간이 생기는 겁니다. 이젠 어떠한 마음도 일으킬 수 있는 창조의 공간이 내 안에 생기는 거죠. 그렇게 포맷한 마음의 자리가 '공(空)'입니다. #풍경2 : 그럼 '공즉시색'은 뭘까요. 간단합니다. 공(空)이 색(色)으로 화(化)하는 거죠. '지지고 볶는 마음'이 아니라 '포맷된 마음'에서 생각과 행동을 내는 거죠. 거기에는 출근길의 짜증 남편과의 말다툼 아이의 성적표를 보고 난 실망감 등으로 인한 연쇄 파도가 없습니다. 짜증의 연장선이 아니라 내게 정말 필요한 마음을 골라서 쓰는 거죠. '오늘 회의에선 어떤 아이디어를 낼까?''올 추석 부모님 선물로 뭐가 좋을까?''어제 다퉜던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 사과하지?' 결국 출근길의 생산성이 달라지는 겁니다. 출근길뿐만 아니죠. 나의 하루 나의 일상 나의 삶에 대한 생산성이 달라지는 거죠. 온갖 색깔과 모양으로 마음을 그리고 다시 백지로 돌아가고 다시 마음을 그리고 다시 백지로 돌아가고. 그렇게 창조와 포맷 창조와 포맷을 거듭하며 마음을 굴리는 일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자연을 보세요. 저 앞의 나무와 새 바람과 구름 산과 들도 매 순간 색으로 또 공으로 색으로 또 공으로 몸을 바꾸며 존재하죠. 그래서 여름이 간 자리에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간 자리에 겨울이 오는 겁니다. 이 거대한 우주가 그렇게 숨을 쉬는 거죠. 그 호흡법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2009-09-22

[이민목회] 겨레목회

이민목회는 이민사회 한민족 한인동포를 아우르는 겨레의 목회이다. 이민사회를 위한 목회라함은 이민목회가 이민사회의 지도자들에게 중심이 된다는 것이요. 한민족을 위한 목회라함은 한국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바탕으로 백의민족의 기상을 드러내는 목회라는 말이요. 한인동포를 위한 목회라함은 미주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인들을 위한 겨레의 목회라는 것을 시사한다. 첫째 이민교회를 위한 목회이다. 북미주의 한인교회는 약 4000여개가 된다.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LA의 한인교회 분위기가 다르고 NY이나 워싱턴 DC에 산재한 이민교회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이 말은 이민교회를 하나의 개체개념의 교회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이 모인 민족교회라는 틀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민교회를 정의하는 기준이 인원이나 재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도시안에서의 민족적인 이동으로 발생한 민족교회라는 이민신학적인 해석을 내려야 한다. 둘째 한 민족을 위한 목회이다. 한 민족은 한국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성장하고 한국의 문화속에서 경험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한민족은 단일민족이요 하나의 민족임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민족을 자랑하고 싶은 것은 하나의 단일 언어로 배우고 익힌 한글의 힘이 미국땅에서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크고 작은 도시마다 아주 작은 한인교회에서도 한글학교 내지는 한국문화학교를 운영하면서 민족문화를 계승하고자 하는 지대한 노력을 쏟고 있다. 그래서 이민목회는 한민족을 위한 목회인 것이다. 셋째 한인동포를 위한 목회이다. 한인동포들은 한인사회속에 산다. 미국사회 중심부에 들어간 통계는 15%정도이다. 그렇다면 15%를 제외한 85%는 한인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러기에 동포를 위하고 동포를 아우르는 목회가 시대적으로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를 소개하면 2004년 미국 알라바마주에 있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세워진 이후 한인이민자가 늘었는데 203명이 정식 한인이민자임이 밝혀졌다. 즉 한인동포들이기에 이들을 위해 목회를 하는 것이 이민목회이다.

2009-09-15

[생활 속에서] 최고의 교사는 누구?

매일 아침 일터에 나가면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지금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존 F. 케네디를 미국이 낳은 매우 위대한 대통령 가운데 하나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취했던 결정적인 실수는 공립학교에서 기도시간을 폐지한 것입니다. 케네디의 이러한 결정은 사실상 미국의 사회와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버린 엄청난 사건이 되었으며 미국 사회의 모럴이 뿌리째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미국의 청소년 범죄는 200배로 증가하였고 교실 안에는 마약 성범죄 폭력 사건 총기사고가 난무하는 공간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세계 초일류 강국인 미국에서는 하루 2740명의 아이들이 가출하고 하루 6900명의 십대들이 성병에 감염되고 하루 3000명 가까운 소녀들이 임신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보고 있는 TV 프로그램에는 폭력이 정당화되고 지나치게 선정적인 드라마로 인해 정상적인 어린이의 경우 태어나서 16세가 될 때까지 3만3000번의 살인 장면을 포함 20만회에 해당되는 성범죄와 폭력 장면을 자연스럽게 보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사실 경제의 위기가 아니라 교육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 자녀 교육에 실패하면 공룡이 자기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멸종한 것처럼 언젠가 미국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 깨어있는 시간이 약 11만5000 시간인데 그 중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은 7000 시간에 불과하고 나머지 9만7000 시간은 가정에서 보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이 깨어있는 시간의 93%는 가정에서 보내고 7%만 학교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생각 "학교만 보내면 교육이 저절로 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녀들의 공부는 학교가 아니라 가정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최고의 교사는 바로 부모입니다. 자녀들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교사도 부모입니다. 일도 중요하지만 자녀들과 가능하면 시간을 조금만 더 함께하십시오. 그런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학교에만 자녀 교육을 맡기지 마십시오.

2009-09-15

[사목의 향기] 겸손과 교만

요즘 우리 아이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꿈을 꾸는 것 같다. 스포츠 스타 영화 배우 가수들에 열광하고 그들의 모양을 흉내 낸다. 그래서 그들이 광고하는 신발과 옷이 불티나게 팔린다. 이런 모습을 보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야구 선수 되고 싶다고 말할 때와 별로 다르지 않게 소방대원이 되겠다고 대통령 되겠다고 하듯이 말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의 아이들도 특별한 사람 영웅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한편으로는 기쁘다. 그런데 그들 방식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저 스타들의 삶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더구나 그들을 무조건 모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살까지도 모방하는 것을 지켜보는 우리들은 참 영웅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인생의 참된 의미와 행복을 가르쳐야 할 의무와 책임을 느끼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별들이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일 때는 깊은 밤이다. 한 밤중에 도시의 빛이 없는 사막이나 바다 한가운데 같이 짙은 어둠에서나 별빛이 돋보인다. 대낮에는 너무도 당연해서 태양 빛 자체에도 관심이 없으니 별빛이 돋보일 이유가 없다. 대낮에는 오히려 빛에 비춰진 세상이 아름답다. 여기 예로니모성인께서 은유 하신 빛의 이야기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라틴말로 성경을 번역하시면서 샛별을 일컬어 루치펠(Lucifer)이라 하고 이 이름을 타락한 천사에 적용하셨다. 모든 피조물 위에 탁월하게 창조되었던 천사가 하느님께 대항하여 대립했고 그 결과 모든 특권을 빼앗기고 버려졌다는 사탄의 우두머리 이야기이다. 루치펠이라는 단어의 말뜻은 '빛을 지닌자'라는 뜻이다. Lucem(빛을)과 Ferre(지니다)의 합성어로서 명사로 사용되고 '스스로 빛을 지녔다'하는 '교만'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새벽 하늘의 어둠이 깨지면서 태양이 솟아 오를 때 서쪽에 매달려 있는 샛별을 본적이 있다면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쪽 하늘에 빛의 근원인 태양이 솟아 오르고 있는데 반대쪽 서쪽하늘에 매달려 자기도 스스로 빛이라고 맞서고 있는 이미지를 상상해 보라. 가소롭지 않은가. 교만은 이와 같이 자기를 터무니 없이 높임이고 그 결과 참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대적하는 결별이고 추락이다. 교만은 이같이 어떤 빛나던 스타들의 추락의 이유였고 상대적으로 그런 위기를 극복했던 스타들의 겸손을 돋보이게 한다. 이 때 말하는 겸손(humility humilitas)이라는 단어는 흙(soil humus)이라는 단어와 상관 있다. 땅 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드린 사람을 그려보라. 그것이 겸손이 뜻하는 "깊숙한 그곳에 내려가 낮아짐"이다. 그러나 이 낮아짐은 목적이 있다. 하느님을 높이기 위하여 낮아지는 것이다. 동시에 하느님께서 높여 주시기를 바라는 자기의탁의 낮아짐이다. 그런 뜻에서 치욕과는 엄밀히 구별된다. 예수님처럼 하느님 때문에 "깊은 구렁 속(시편 1301)"에 내려간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그가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고 비로소 기도하는 사람이다. 마음은 사람의 숨겨진 중심이며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만이 감지하고 살피시는 장소다. 이 신비의 자리 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결단의 장소 하느님과 계약이 맺어지는 장소에서 기도가 솟아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월의 원리가 겸손이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에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보면 안다. 제 스스로 빛은 아닌데 빛나는 광채를 발산한다. 그리스도께서 비춰주신 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냉담했던 마음이 훈훈해 지고 생기를 느끼게 된다. 그런 사람이 참 영웅이며 스타가 아닐까.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되라고 하고 싶다.

2009-09-15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양보해놓고 부글부글 끓는데…

Q: '분별심을 내지 말고 이기기보다는 지면서 살라'는 기도문을 받았습니다. 동생과 함께 TV 시청하면 오락 프로와 교양 프로를 같은 시간에 할 때가 있고 그럴 때면 동생과 저는 생각이 달라 다툽니다. 다투다가 그 기도문이 생각나서 동생한테 양보하고 의미 없는 오락 프로를 보게 되는데 이럴 때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요. A: 기도문대로 한 번 해보려 한다면 동생에게 지면 됩니다. 동생이 오락 프로그램을 보겠다 하면 '그래라' 하는 마음 내는 게 '지고 살라'는 기도문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 순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내 업대로 하는 것이고 그 순간 나는 수행자니까 져 준단 말이에요. '그래? 오락 프로 봐라' 했는데 왜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요? 그것은 기도를 안 하는 겁니다. 그럴 때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문대로 수행한다는 것은 교양 프로 보겠다고 우기다가도 기도문이 탁 생각나면 '아차 져 주는 게 지금 내 기도지' 하고 돌이키고는 "오락 프로 보고 싶니? 그래 봐라" 이렇게 마음 내는 것입니다. 이를 수행이라 하고 기도라 하는 것이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박박 우기다가 그 시간 지난 뒤에 혼자서 "지고 살겠습니다 지고 살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게 기도가 아니에요. 마음 속 밑바닥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것은 하는 척 하는 것이지 기도가 아닙니다. 동생에게 오락 프로 보라고 해 놓고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것은 겉으로 말만 그렇게 한 것이지 진짜 마음 내어 한 행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기도하는 사람은 괴로울 수가 없어요. '그래 봐라' 하고 마음 내면 괴롭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할 때 내가 졌다는 생각이 있어요. 내가 졌다는 생각 속에는 '내가 이겨야 하는데 졌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겨야 되는데 졌으니 패배 의식이 생겨서 괴로워요. 동생과 나는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이지 누구 생각이 옳고 누구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각자는 다 자기 생각대로 하고 싶겠지요. 그러나 실제 세상 일은 자기가 하고 싶다 해서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루어질 때도 안 이루어질 때도 있는데 이루어질 때 느끼는 기분을 '락(樂)'이라 하고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느끼는 기분을 '고(苦)'라고 해서 우리는 늘 고락 속에서 왔다 갔다 해요. 그런데 사람마다 하고 싶은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는 것이 현실의 세계입니다. 하고 싶은 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은 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하고자 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고와 락이 윤회하지만 내 생각이나 내 욕구가 그럴 뿐 이루어질 수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현실을 인정하면 이루어진다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서 기뻐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 고락의 윤회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앞으로는 나 혼자 있을 때는 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동생과 같이 있을 때는 나는 이것을 보고 싶다고 의견을 말해 보고 동생이 자기 보고 싶은 것을 보겠다면 '그래라' 하고 같이 보든지 보고 싶지 않으면 다른 일 하면 됩니다. 보든 보지 않든 그것으로 동생을 미워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2009-09-15

[신앙 상담] 분쟁 등 교회 비판 들을땐 어떻게?

Q: 뉴스를 보다보면 교회 분쟁이나 목사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기사를 자주 접하곤 합니다. 그럴때 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직장 동료들이 '교회 나가면 뭐하냐 기독교인들이 안좋은 일은 더 많이 하는 것 같다'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얘기를 합니다. 그럴때마다 어떤식으로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신앙심도 흔들림을 느낍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교회 분쟁이나 목사들의 잘못된 행동 등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대할 때마다 목사인 저도 마음이 답답합니다. "이것은 아닌데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피 흘리시고 교회를 세우신 것은 아니며 주님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이래서야 어떻게 사명을 감당하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물론 분쟁하는 교회마다 나름대로의 사정은 있겠지만 덕스럽지 못하고 전도의 길이 막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도 안타까워하시고 전도의 길을 막는 교회의 분쟁은 그쳐져야 합니다. 동료가 그런 일들을 인하여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비난하면 먼저 그 분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 잘못이다. 부끄럽다. 할 말이 없다. 우리가 다 부족해서 그렇다." 분명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며 우리가 교회에 나가는 목적을 알려야 합니다. "교회는 천국 비자를 받는 곳이며 우리는 다 죄인이기에 지옥을 갈 수밖에 없고 인간의 죄를 지시고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죄 용서받는데 예수님을 믿는 자는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이야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죄용서는 받았으나 부족한 죄인들이 모이다 보니 성화되는 과정에 마찰이 생긴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래도 예수님은 믿어야하고 교회는 나가야한다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교회 직분자들 중에도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똑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들 중에는 사기치는 사람도 있고 못된 사람도 있고 더구나 언론에서 타락한 목사의 소식을 접할 때는 저를 전도하려던 친구에게 심한 말로 "너희나 잘하라"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와 보니 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사람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분들도 많이 있음도 보았습니다. 교회 밖에서 볼 때는 문제점들만 보였는데 교회 안에 들어와 보니 귀한 분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일으키는 목사나 장로 집사들 중에는 은혜를 받지 못한 가짜들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은혜를 받았으나 자신의 약한 부분을 이기지 못하여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도 있고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 변질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닮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선한 쪽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내 주변의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 책임을 누가 집니까?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분쟁은 피해야 합니다. 그 일로 인하여 실족되는 영혼은 누가 책임을 집니까? 그리고 직장 동료에게 전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부족하고 나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도 부족하지만 교회 안에는 변화된 분들도 많다. 또한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는 믿어야 한다. 믿지 않으면 나만 손해다. 지옥을 가는 것은 나 자신이다"고 말입니다. 성도님의 삶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상담참여:[email protected] (213)368-2639

2009-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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