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의 향기]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이 되게 하라
한상만 신부/성 크리스토퍼 한인성당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듣기 좋게 하기 위하여 본 뜻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말씀의 본 뜻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수난하고 죽고 부활할 것을 예언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붙잡고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강요했다.
제자가 스승을 강요했다는 뜻은 배우기를 거부했다는 것과 같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셨다. 그러시면서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누구든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다. 왜 십자가일까?
십자가라는 처형 방법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페르시아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다고 본다. 로마에서도 4세기경까지 즉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뜻으로 금지 시킬때까지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 처형 방법에 따르면 죄인의 손목과 발목을 줄로 묶거나 못으로 박아 십자표의 나무에 매달고 숨을 완전히 거둘 때까지 두는데 숨을 완전히 거둘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하루 반나절이나 길면 사흘까지도 걸린다고 한다.
그 동안의 고통을 상상해 보라. 몸의 운동이 정지되면서 혈액 순환이 둔화되고 심장에서 먼 곳부터 산소 공급이 끊기며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뇌가 살아 있는 동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다 인식할 수 있을 것이고 시정 잡배들의 저주와 냉소를 견디는 정신적 고통이 육체의 고통보다 결코 덜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잔인한 방법이 또 있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이해된 십자가는 수치와 치욕의 상징이며 고통과 비탄 그리고 실패와 희망 없음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사람이 스스로 원할 수 없다는 뜻에서 반어법적으로 하느님 뜻 찾기의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신비이다.
요약하여 십자가의 신비는 비움의 신비라 할 수 있겠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날 자리를 마련하는 비움의 신비 높여지기 위한 낮아짐의 신비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셨지만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을 터 주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여 스스로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것이 십자가의 두 날개 중 한쪽의 의미이고 그렇게 하느님의 뜻에 복종한 아들의 비움의 자리에 못하실 것이 없으신 하느님의 권능이 작용하여 승리와 영광이 드러나 부활이 준비되었다는 것이 십자가의 다른 쪽 날개의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는 온갖 형태의 세속적 힘의 유혹을 끊고 온전히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살겠다는 선택과 결심의 표지이다. 그런 뜻에서 십자가는 사람의 뜻과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시금석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의 자기 희생과 사랑의 표지이며 성덕에 오르는 길이며 구원의 상징이며 승리의 표지이고 그렇기 때문에 희망의 징표다.
그렇다면 거짓 설교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아도 될 달콤한 말하기를 이젠 그만두어야 한다.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하느님의 말씀의 진의를 정직하게 가르치고 가르치는 자가 스스로 실천하여 다시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이 되게 해야 한다.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기 위하여 희생과 고통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그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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