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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아빠! 한 시간에 얼마나 벌어요?

어느 늦은 시간 일에 지쳐 피곤한 얼굴로 퇴근하는 아버지에게 다섯 살 난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빠! 한 시간에 얼마나 벌어요?" 갑자기 질문을 받은 아버지는 "그건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퉁명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집요하게 매달렸습니다. "아빠! 그냥 알고 싶어서 그래요. 말해주세요!" 아들의 끈질긴 요구에 아버지는 "한 시간에 20달러란다"라고 하였다. 그 때 아들은 "아빠 저에게 지금 10달러만 빌려 주세요?" 아버지는 귀찮은 듯 "가서 잠이나 자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말없이 자기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 아버지는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아들아 자니? 아빠가 좀 심했던 거 같구나. 오늘은 힘든 일이 있어 네게 화풀이를 했던 것 같다. 자 여기 10달러!" 아들은 벌떡 일어나 "고마워요 아빠!" 소리치며 자신의 침대 베개 밑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었습니다. 아들은 천천히 돈을 세더니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빠 저 이젠 20달러가 있어요. 그래서 내일 아빠의 1시간을 사고 싶어요!" 아들은 상기된 모습으로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바쁜 이민 생활에 자녀들과 지내는 시간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손 잡을 수 있을 때 까지는 잡아주라. 어차피 놓아야 할 때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못하면 아이들은 어느새 커 아버지의 곁을 떠나갑니다. 미국 학교에서는 윤리교육이나 삶의 지혜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런 교육은 부모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불행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자녀들이 아빠를 찾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살만하게 되었다"고 그들을 찾으면 그 때는 이미 아빠의 품에서 떠난 뒤가 될 것입니다. "아빠 한 시간에 얼마 벌어요! 아빠의 한 시간을 사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는 아직 가능성이 있는 때입니다. 너 늦기 전에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며 인생을 배우게 하십시오. 자녀들을 위한 가장 소중한 투자가 될 것입니다.

2009-07-21

[이민목회] 이민성도의 다양성

이민교회의 모습은 다양하게 비춰진다. 그 내용이 다양한 이유는 모여든 사람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복잡하다는 의미이다. 미국생활 30년된 이민자와 1년된 유학생이 공존하는 공간이 이민교회이고 보면 겉으로는 교제를 하지만 실제적으로 마음의 교제가 힘든 곳이 이민사회이기도 하다. 30년의 이민생활속에 자신도 모르게 달라진 사고방식생활방식문화의 인식등이 차이가 나므로 선듯 누가 나서서 설명을 해주어도 이민경험의 차이를 이해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이 현상을 우리는 문화차이(Culture Gap)이라고 부른다.이처럼 이민교회안에는 수많은 문화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민목회가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도들의 문화차이도 크지만 그 렌즈로 이민교회를 보는 시각도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 체험한 문화의 높이 만큼 다른 시각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민자들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맞추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이민목회자들은 이민성도들을 대할 때 조심스러워진다. 단순히 조심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차이가 크기에 대화를 잘 해야 한다는 부담감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부담감이 있는 곳이 이민교회가 아니다.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다른 시각으로 목양해야 하는 곳이기에 상호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조절의 의미는 인격적으로 대하여 상대로 하여금 편안한 느낌을 주어야 원만한 신앙생활을 잘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민교회에서 이민신학이 요청되는 이유는 이처럼 다양한 성도들이 모여있는 공간이기에 효율적인 방향에서 이민자들을 안내해야 하므로 전문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민신학은 일반신학과 문화해석이 다르다. 문화해석이 다르다는 것은 뛰어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이민사회의 여건이 내포되어 있다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그래서 이민신학이 이론적인 접근보다 실천적인 접근이 앞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민교회가 이민성도들의 다양한 눈물을 가치있게 생각하는 이유는 고난의 바람이 불면 불수록 마음이 시리고 고통스럽겠지만 오히려 이것때문에 마음이 더 강해지고 단단해 질수 있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2009-07-21

[사목의 향기] 삶과 죽음, 그 거룩함에 대하여

날씨 탓인지 요 며칠 연로하신 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부고가 부쩍 많았다. 이어지는 장례 미사 때 마다 기도하는 기도문 중에 여운으로 남는 말씀들이 되새겨진다.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며 그래서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위로를 삼는다'고 기도할 때면 슬픔에 잠겼던 유가족과 조문객들은 깊이 공감하며 죽음의 추루함과 허망함을 넘어서서 저 거룩함마저 느낀다. 거룩함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의 존엄성 때문이지 죽음 자체가 그러하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창조될 때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살아난 존재'가 거룩한 것이며 그 '생명 자체'가 존엄한 것이고 죽음 자체는 거룩하지도 존엄하지도 않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거룩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죽음이 삶과 삶을 즉 현세와 영생의 삶을 이어주는 문지방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 죽음이 그 자체로 찬미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자살을 범죄로 여기고 자살처럼 죽음을 직접 지향하는 어떤 행동도 살인에 해당하는 범죄로 여긴다. 교회가 안락사를 교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 동기가 무엇이건 존엄한 생명을 정면으로 거스른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반면 지나친 치료 즉 비용이 크게 들고 위험하며 특수하거나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의료 기구의 사용을 중단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여긴다. 이 같은 '연명치료중단'의 경우는 병자나 신체적 장애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막을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병자 자신의 선택권이 우선적이고 차선으로 보호자가 "연명치료중단'을 결정할 경우가 생기더라도 병자의 타당한 소원과 정당한 이익을 존중하는 가운데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존엄사법 제정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는 반대하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는 서명을 통하여 존엄사법은 안락사법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존엄사법 제정'을 적극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왜냐하면 '존엄사'라는 표현에서 '존엄'이라는 말로 윤리적 책임을 교묘하게 피하되 결국 '죽게 하자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공호흡기 제거가 명백한 '연명치료의 중단'이라는 확실성이 있어야 하고 또한 인공 호흡기의 제거 후라도 그 병자가 영양분과 수분의 소화 흡수의 생리적 기능이 있다면 그 병자가 의식이 있든 없든 영양과 수분 공급은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는 죽음이 삶의 마지막 시기이며 이 시기를 맞이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다가온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아들이면서 실현된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태도 표명이다. 또한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열망하는 이유가 아니면 그 죽음은 거룩함의 속성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에 이 법의 제정을 적극 반대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나누일 수 없는 영생을 향한 순례의 한 편의 여정이며 죽음이 삶의 완전한 실현이라는 뜻에서만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장례미사의 예식을 통해서 천국의 문을 열며 고인을 떠나 보낼 때 생을 가르는 죽음이라는 문지방을 넘어가려는 고인의 삶을 기억하고 그 삶을 축복하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아직 살아 남아 있는 우리들도 서로 위로하며 살다가 언젠가 때가 되면 영원한 천국의 집에서 다시 서로 만날 것을 희망하며 삶과 죽음 그 거룩함에 고개 숙인다.

2009-07-21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직장에서 늘 불안합니다

Q: "저는 일을 할 때 늘 긴장을 하고 일을 안 할 때는 일을 시킬 것 같아 불안합니다. 또 상사가 있을 때는 긴장이 되어 일도 못하고 항상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퇴근할 때도 눈치 보면서 퇴근하고 상사가 특별히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예민하게 반응을 하고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니까 머리도 아프고 힘도 많이 빠집니다." A: "아버지 계세요?" "예." "아버지하고 관계는 어때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불화가 많아서 싸우시고 그런 속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불안한 마음이 많고 어렸을 때는 항상 제대로 나가서 못 놀고 집안에서 통제된 상황에서 자랐어요." "어릴 때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많이 놀랐는데 증오라기보다는 원망하는 마음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 아침이든 저녁이든 시간을 정해서 아버지에 대해 참회를 하세요. 결혼해서 살아 보면 알게 되겠지만 밖에서 일도 잘 안 되고 힘든데 집에 오면 아내가 잔소리하고 이러니까 화가 나기도 하고 부모가 자식에게 집착하면 남한테는 안 그러는데 자기 자식한테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버지 입장으로 돌아가서 '아버지가 살기 힘들어서 그렇게 행동했을 수도 있겠다. 내가 어려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워했구나. 죄송합니다' 하고 아버지에 대해서 참회 기도를 하십시오. 지금 이런 마음을 없애지 않으면 직장에 나가서는 상사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조마조마하고 자꾸 피해 의식이 생깁니다. 나를 따돌리는 것 같고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고 이렇게 되어 관계가 안 좋아지고 또 결혼을 하면 부인하고 갈등이 생기고 또 자식을 낳으면 아버지가 나한테 한 것과 똑같이 자식한테 하게 됩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안 하겠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똑같이 행동하게 되거든요. 아버지에 대한 참회 기도를 정말 간절하게 하세요. 내가 어리석어서 내가 잘 몰라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워하고 눈치보고 그랬는데 그것이 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거라고 참회를 하셔야 됩니다. 우선 100일 정도 하루에 108배씩 하면서 마음속으로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어서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버지를 미워했는데 이제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고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참회하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하여 내면에서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걸림이나 저항감이 없어지면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하고 표현해서 아버지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존경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정진을 해야 합니다. 이게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되면 직장 문제나 결혼 문제가 다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2009-07-21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마음 쓴 뒤 '툭툭' 내려놓기

#풍경1 : 중국의 남전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죠.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조주 선사가 답했죠. "평상심이 도다." 아리송하죠? 사람들은 말합니다. "평상심이 도라고? 그럼 왜 수행을 하는 거지?" "그냥 평상시처럼 있으면 되잖아. 그럼 그게 깨달음인가?" 중국 불교사에선 실제 '평상심'을 놓고 격한 논쟁이 붙기도 했습니다. 그들도 헷갈렸다는 얘기죠. #풍경2 :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죠.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올리브산에서 체포되기 전에도 예수는 말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풍경3 : '금강경'의 첫 대목을 기억하세요? 이렇게 시작하죠. '식사 때가 되자 붓다는 가사를 입고 발우(밥그릇)를 들고 탁발을 하고자 사위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성안에서 차례로 걸식한 후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했다. 그런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은 다음 자리를 펴고 앉았다.' 선사들은 말합니다. "이 대목에 '금강경'의 핵심이 모두 담겨 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죠.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붓다의 식사 풍경'일 뿐이거든요. 그런데 선사들은 "이게 바로 평상심이다"라고 하죠. 점점 더 아리송합니다. "내가 밥 먹는 풍경과 붓다가 밥 먹는 풍경 둘은 어떻게 다른 거지?" 사실 '풍경3'는 놀라운 풍경입니다. 왜냐고요? 거기에는 '머무름'이 없기 때문이죠. 붓다의 마음은 가사를 입을 때도 발우를 들 때도 탁발을 할 때도 강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레 흘러가죠. 머물지를 않습니다. 성안에서 걸식할 때도 차례 차례 흐름을 따르죠. 어떤 순간에도 붓다의 마음은 머물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의 마음은 어떨까요? 가사를 입으며 탁발을 걱정하고 탁발을 하면서도 가사가 구겨질까 염려하죠. 식사를 하면서도 탁발했던 집 주인을 생각하고 모든 걸 마치고 자리에 앉아서도 '내일 탁발'을 걱정합니다. 그게 평상시 우리들의 마음이죠. 그럼 물으시겠죠. "이 무한경쟁 시대에 계획도 없이 전략도 없이 마음도 쓰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말이죠. 마음을 쓰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붓다도 마음을 썼고 우리도 마음을 쓰죠. 마음껏 쓰라고 있는 게 마음이죠. 다만 마음을 쓴 후에 뒤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도 끊임없이 강조했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라." 무슨 뜻일까요. 영광된 일을 하고서 그 일에 젖지 말라는 겁니다. 나의 뿌듯함 나의 영광으로 붙잡고 있지 말라는 거죠. 그때그때 영광을 놓고 그때그때 영광을 돌리라는 겁니다. 왜일까요? 그래야 '평상심'이 되기 때문이죠. 그게 붓다의 마음이고 그게 예수의 마음이죠. 가령 마음의 도화지를 생각해 보세요. 알록달록 그림(마음)을 그린 뒤에는 꼭 지우라는 거죠. 그래야 다음 그림(마음)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마음껏 그릴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도화지가 지저분하면 새롭게 그림(마음)을 그릴 때마다 걸리게 마련이죠. 그래서 쓱싹쓱싹 그때그때 지우는 겁니다.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앉아서든 서서든 누구나 할 수 있죠. 마음을 쓰고서 "툭! 툭!" 내려놓기. 그럼 여러분도 말할 수 있죠. "평상심이 도다!"

2009-07-21

[이민목회] 디아스포라의 사명

역사를 회상해보면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신앙인들이 밀려 들어왔다. 권력을 좋아하는 사람들 특권계급에 속한 지배자들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즉 영적 공동체가 물질적 제국과 혼합되어 점차적으로 교회가 세속화되고 기구화되어 영성이 탈진되었을 때 강력한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대항하여 로마천주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핍박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믿는 성도들을 핍박한 것은 그들의 판단과 행동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수많은 역사가 흐른 뒤 지금의 영적상황을 진단해보면 유럽의 기독교국이 몰락하면서 기독교 후시대(Post-Christian Era)가 되는 것을 불안해왔던 그 시대가 오고 말았다. 결국 이 시대는 세속화 종교의 다원화시대가 되었다. 크리소스토모스(Johannes Chrysostomos)는 말하기를 "우리를 불행속에 던져 넣는 것은 죄가 아니고 절망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세속화된 사회에 대해 절망감을 가지지 말고 약속을 즐기자. 필자가 앞서 언급한 것들을 정리한다. 첫째로 하와이에 도착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가졌던 하나님의 약속의 정신을 계승하자. 둘째로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무한한 인내심과 복합문화속의 새 문화 창조의 지혜를 배우자. 마지막으로 미국인이 가지고 있는 대화와 타협에 의한 약속의 의미를 배우자. 결론적으로 지구촌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미래로 나아가자.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한국 민족을 들어 사용하고 계시지 않은가? 지구촌의 선교현장을 보라. 세계는 우리 한국 민족을 기다리고 있다. 복음의 진리와 정의와 평화를 위해 섬길 수 있는 민족은 한인 디아스포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위에 다시한번 눈물의 씨앗을 뿌리고 헌신을 하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미래의 지평을 열어가자. 이것이 하나님이 한민족 디아스포라에게 주시는 사명일 것이다.

2009-07-14

[생활 속에서] 잘못은 댓가부터 치러야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이영애 분)는 감옥에서 빨리 풀려나기 위해 신실한 신앙인인 것처럼 위장합니다. 금자씨는 원하는 것을 이룬 후 자신을 도왔던 목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나 잘하세요." 감옥에서 형을 치르는 사람들 중에는 이처럼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소위 말해 '용팔이'로 불리는 김용남 씨와 살인마 강호순이 요즘 성경에 빠져 산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쇼 하고 있네~~." 이들은 영화 속의 금자씨처럼 쇼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신은 그들을 용서하실까요? 용서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실한 스데반 집사는 예수를 전한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축출에 나섰던 자가 바로 바울입니다. 오늘날 사도 바울로 알려진 그 바울은 예수쟁이들을 무척이나 싫어했고 스데반처럼 예수를 전하는 자들을 잡아넣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나중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크게 쓰셨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바울을 슬슬 피해 다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강호순도 용팔이도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용서를 받고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댓가만큼은 톡톡히 치러야 합니다. 정의(공의)를 위해 치러야 할 댓가가 분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것에 대해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바울도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강호순이 용팔이가 평생 짊어져야 할 짐이 있는 것입니다. 강호순의 경우에는 평생 감옥에서 무기수로 살면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의인 것입니다. 사형을 당해버리면 어떻게 대가를 치릅니까.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다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이 땅에서 그래야 합니다. 영화 '밀양'에서 남자 아이를 유괴해 죽인 후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아이의 엄마(전도연 분)에게 "나는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분노했습니다. 정의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대가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 사랑의 빚을 진 자는 그에 대한 정의의 빚을 진 자입니다. 빚을 갚기 전에 우리는 빚을 졌는지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2009-07-14

[사목의 향기] 사제의 해를 맞으며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 지난 2009년 6월 19일부터 2010년 6월 19일까지 이어지는 한 해를 '사제의 해'로 선포하셨다. 2009년 3월 16일 교황청 성직자성 정기 총회 때에 하신 연설에서 사제의 해 선포의 취지를 요약하시기를 "무엇보다도 사제 직무의 효력이 달려 있는 영적 완덕을 향한 사제들의 노력을 북돋우고자"하신다 하셨다. 이러한 취지로서 사제의 해는 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선종 150주년을 기념하시며 2009년 6월 19일에 교황 성하의 개막으로 시작되었다. 유감스럽지만 가톨릭교회가 지나간 역사를 통하여 일부 봉사자들의 불충으로 고통 받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 있었고 그때 세상은 교회를 비방하고 신앙을 거부할 구실을 찾았었다. 비록 그런 불충한 봉사자들이 소수에 그치고 대다수의 훌륭한 인품과 성덕들 지닌 사제들이 성무에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었더라도 그때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하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교회 봉사자들의 나약함과 허물을 솔직하게 인정 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헌신적인 사목자들의 모범과 지혜로운 통찰력과 인내력을 갖춘 영성 지도자들의 모범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위대하신 은총을 새롭고 기쁘게 인식하는 것이었다. 이런 뜻에서 아르스의 본당 신부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가르침과 모범이 사제의 해를 살아가는 길잡이로 제시된 것이다. 전 세계 본당 사제의 수호 성인이신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천상 탄일 150주년을 기념하시며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는 사제의 해를 선포하시는 서한에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사제직은 예수 성심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동적인 구절을 해석하시며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닮은 사제들이 교회뿐 아니라 세상에게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설명하시고 사제직의 거룩함을 그 직무의 정점인 성체성사와 연관 지어 해석하시며 사제들의 성화를 촉구하셨다. 우리 사제들은 이러한 취지를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비천하고 보잘것없고 무능한 우리를 사제로 불러 주시고 축복해 주시어 귀하게 여겨 주시고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주시어 파견해 주셨음을 감사하며 이 한 해를 시작했다. 우리는 가난하고 병들고 낮아진 사람들과 세상 곳곳으로부터 어디론가 이주하여 살게 되어 떠돌이가 된 이 시대의 또 다른 의미의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가 된 이민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라고 "제2의 그리스도"라는 이름까지 선물로 주신 하느님의 축복을 가슴에 불붙은 사랑으로 감사하며 이 한 해를 시작했다. 우리는 또한 복음을 전하는 중에 겪게 되는 어려움들이 예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사랑과 자비를 힘입어 해결될 것을 믿고 실천했던 성인의 삶을 모범으로 삼고자 한다. 냉담한 신자들이 속죄하고 돌아서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작은 보속을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대신 했다는 요한 비안네 성인을 생각한다. 이것이 생각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된 하나의 좋은 모범이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이 그의 영성의 샘이었다. 그래서 6월 19일이다. 이 날을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로 기려왔고 이 날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내며 기도해왔다. 우리 사제들은 이 새로운 사제의 해를 맞으며 세상을 위해서도 사제일 것이고 세상이 또한 우리가 그러하기를 바라도록 사제이고자 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2009-07-14

[지혜의 향기] '반야의 세계' 엿보기

불교에서는 반야라는 말을 자주 쓴다. 본래 옛날 인도의 산스크리트 말로 프라즈냐 라고 하던 것인데 중국 사람들이 그 소리를 한자로 베끼면서 반야가 되었다. 반야가 뭐냐고 한다면 여러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내 나름으로 간추리고자 한다. 반야란 지혜 또는 슬기라는 뜻인데 이는 곧 공을 아는 것이다. 공이 뭐냐고 하면 세상에 언제까지나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씀이고 따라서 뭐는 반드시 이렇다 이래야 된다고 하는 고정관념을 갖지 않는 것이다. 고정관념은 왜 생겼을까? 그게 편하고 경제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대할 때마다 밑바닥부터 다시 살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나 세상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여기고 있는 대로 그냥 따라가도 맞을 확률이 높고 머리 쓸 일이 적어 에너지를 적게 소비한다. 따라서 살아남고 번성하기에 유리하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생물학적으로 불리할 확률이 높아졌다. 자신이 살아남기에도 고달프고 자식을 낳아 키워 결혼시키고 때맞추어 손자 손녀를 볼 기약도 멀어지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세상이 지리적으로 확대되면서 이전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별 희한한 일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 다양성과 복잡성 때문에 이전의 고정관념만으로는 난마와 같은 세상사를 갈피조차 잡기가 어려워졌다. 일례로 머리칼 하나만 해도 그렇다. 다 검거나 나이 들어 세면 흴 줄만 알았지 무슨 귀신도 아니고 처음부터 노랗거나 붉은 것도 있을 줄 알았던가! 한 마디로 뭘 모르는 촌놈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100년 걸리던 일이 몇 달 며칠 사이에 이루어지니 어지러울 지경이다. 이제 할아비는 손자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고 할미는 손녀의 짓거리를 눈 뜨고 못 볼 지경이 되었다. 유행도 너무 빨리 바뀌니 웬만한 물건이 몇 달 안에 구닥다리가 된다. 사내애는 이렇다 계집애는 이래야지 하는 따위가 씨알도 잘 안 먹힌다. 속된 말로 자칫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귀찮은 꼰대가 돼 버린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고정관념이며 공이란 것은 이런 세태보다는 더 근원적으로 말과 개념에 얽힌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의 참 모습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무엇이 좋다 나쁘다고 할 때 그 말이 나타내는 늘 정해진 고유한 자리가 있는 줄 안다. 하지만 누구에게는 좋은 일이 동시에 누구에게는 나쁠 수 있으며 같은 사람에게라도 어제까지는 그게 좋았는데 오늘부터는 싫은 일이 되기도 한다. 비가 오고 날씨가 으스스하면 비디오 가게가 잘 되는 날이다. 하지만 바로 옆의 리커 스토어는 파리를 날려야 한다. 어느 날이 좋은 날인가? 어제까지 비디오 가게를 하다 새로 리커 스토어를 열었다면 이제부터는 날마다 쨍쨍 더워서 사람들이 허겁지겁 음료수를 찾아야 흐뭇할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나는 더위를 좋아하는 자인가 추위를 반기는 자인가? 도대체 날씨라는 것에 좋고 나쁜 게 있기나 한 것인가? 날씨라는 앞대가리는 빼고 그냥 좋음이라는 것과 나쁨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인가? 있더라도 다 상대적인 것이고 정도의 차이가 아니던가! 이렇듯 좋다 나쁘다 따위의 한 가지에만 달라붙어 오직 절대적으로 그런 줄 안다면 고정관념이요 그렇지만은 아닌 줄 눈치채면 공을 엿본 것이리라. 더 나아가 쨍하고 해 뜬 날엔 비디오 가게가 마음에 켕기고 으스스 찌푸린 날엔 건너편 리커 스토어가 염려된다면 그대는 이미 반야의 세계를 조금 훔쳐 본 자라 부르고 싶다.

2009-07-14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고정된 잣대' 버려야 '중도'

요즘 우리 사회는 숨바꼭질 중입니다. 다들 '중도(中道)'를 찾고 있죠. 그런데 '머리카락'도 보지 않고 "중도를 찾았다"고 외치는 이들도 꽤 있네요. '중도'는 아직도 꼭꼭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 중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판이든 이해든 가능한 거죠. #풍경1 : 종교에선 진리를 우주에 빗대죠. 무한대 우주는 테두리가 없습니다. 울타리가 없죠. 그럼 질문을 하나 던질게요. "이 우주의 정중앙을 찾아서 점을 '콕' 찍어 보세요. 과연 어디가 무한대 우주의 정중앙이 될까요?" 막막하세요? 아님 황당하세요? 어렵지 않습니다. 콕! 콕! 콕! 어디를 찍어도 우주의 중앙이 됩니다. 우주는 테두리가 없으니까요. 거기가 '중도의 자리'입니다. 좌파와 우파의 중간이 중도가 아닙니다. 중도는 그렇게 평면적이고 기계적인 자리가 아닙니다. 이 우주에서 중도는 어디로든 달려갈 수 있죠. 좌든 우든 앞이든 뒤든 위든 아래든 말이죠. 왜일까요? '고정된 잣대'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죠. 세상과 우주는 매순간 변화합니다. 숨을 쉬죠. 하나의 생명체니까요. 끊임없이 바뀌고 끊임없이 숨을 쉬며 세상과 우주는 돌아가죠. 거기에 대해서 열려 있는 게 중도입니다. 주위를 보세요. 역사를 보세요. '고정된 잣대'와 '닫힌 이념'은 항상 박제가 되고 말죠. 그게 세상과 헛돌기 시작하는 순간이죠. 그래서 중도의 자리는 늘 깨어있는 자리여야 합니다.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우주에 대해서 말입니다. #풍경2 :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놀라운 시도를 하고 있죠. 그는 '고정된 잣대'를 두지 않습니다. 진보와 보수 백인과 흑인 여성과 남성 부자와 빈자 민주당과 공화당을 자유롭게 넘나들죠. 그러면서 "하나의 아메리카(One America)"를 가리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하나의 거대한 자동차죠. 자동차에는 네 개의 바퀴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사람 나의 편 나의 이데올로기 나의 고집만 따진다면 하나 혹은 두 개의 바퀴밖에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쳐놓은 울타리 안의 에너지밖에 쓸 수가 없으니까요. 그럴 때 자동차의 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달랐죠. 그는 자신의 울타리를 먼저 허물죠. 그리고 상대를 안습니다. 그게 포용력이죠. 그럴 때 나와 상대는 소통을 하고 공유점을 찾습니다. 중도의 리더십은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좌측 바퀴나 우측 바퀴 앞바퀴나 뒷바퀴가 아니라 하나의 자동차를 굴리는 네 바퀴다." 자동차를 구성하는 숱한 부품들도 거기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럼 달라지죠.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와 네 바퀴로 가는 자동차 그 경쟁력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죠. 그게 중도의 리더십이죠. 그게 중도의 힘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강화론'을 선언했죠. 그런데 중도의 길은 선언만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조건이 있죠. 중도의 길을 가는 지도자는 중도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안아야 합니다. 그렇게 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모아진 에너지를 굴리는 겁니다. 좌파의 말뚝도 우파의 말뚝도 훌쩍훌쩍 넘어서며 말입니다. 사안 사안에 따라 가장 지혜롭고 가장 조화롭고 가장 역동적으로 '대한민국'이란 자동차의 네 바퀴를 굴리는 거죠. 그게 바로 중도의 길입니다.

2009-07-14

[생활 속에서] '기쁨은 하나님의 힘'

1998년도에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독일 정신과 의사 미하엘 티체 박사는 "웃음이 스트레스를 진정시키고 혈압을 낮추고 혈액순환을 개선하고 면역체계와 소화기관을 안정시킨다"고 보고 하였습니다. "웃을 때 사람에게는 통증을 진정시키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웃을 때 사람 몸에는 모르핀의 300배 이상의 효과를 가진 호르몬(엔케팔린)이 분출되고 따라서 스트레스나 분노가 완화되며 면역체계가 높아진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훨씬 신체가 약한데도 남자보다 평균 7년 정도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자주 웃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수명을 대체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얼굴이 굳어있거나 화가 난 얼굴로 사는 사람은 수명이 짧습니다. 그들은 얼굴만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도 굳어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에콰도르에 살고 있는 116세의 할머니에게 장수 비결을 물었더니 음식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기쁨과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비결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104세에 임종하신 할머니 한 분을 기억합니다. 양로병원에 계신 그 분을 방문 할 때 마다 의식은 전혀 없지만 그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모습보다는 잔잔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 할머님이 이렇게 오래 사신 이유가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즈음은 웃음이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웃음치료사'도 생기고 심지어 대학에 '웃음치료학과'도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웃음치료 전문가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웃음치료를 경험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표정만 보아도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는 경우가 많은데 후진국의 경우에는 아는 사람이 아니면 잘 웃지도 않고 얼굴이 굳어 있습니다. 서로 만나면서 웃고 이야기하는 사회는 그 만큼 사회 커뮤니케이션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사회일수록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 모든 것이 힘겨운 이 때 이민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미소로 대하여 건강하고 보람 있는 모습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9-07-07

[이민목회] 합의와 관용

리챠드 H. 니이버는 미국의 초기이민자들의 정신을 해석하면서 1621년에 미국에 건너간 이민자들은 신대륙에 신정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고 한다. 즉 유럽이 지향했던 기독교국에서 그리스도왕국의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유럽이 조직 기구 법 질서를 강조했다면 미국은 신앙 회개 중생을 강조했다. 플리모스에 도착한 청교도들 로드아일랜드에 정착한 로저 윌리암스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 윌리암 펜을 중심으로 펜실바니아에 정착한 퀘이커들 독일에서 이민 간 사람들 뉴욕 주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 이후의 이민대열에 들어가 합류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계통의 장로교인들 이분들은 프로테스탄트의 구호였던 교회개혁의 논리에 따라 신대륙에서의 신정정치를 구현하고자했던 이민자들이었다. 그래서 니이버는 신정정치를 실현하기위해 17세기의 이민자들이 가졌던 세 가지 합의사항을 이렇게 정리했다. 1)기독교입헌주의를 확립한다. 2)교회의 독립을 보장한다. 3)인간능력의 상대성을 인정한다. 사실 미국은 이 세 가지 방향으로 국가가 조직되고 발전되어 왔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사항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미국은 자유주의 전통을 합의적으로 공유한 독특한 사회요 미국의 역사적인 흐름에는 미국인들이 합의(consensus)를 이룬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사유재산의 신성시 인권의 존중 개인주의 경제적 자유등으로 사실 이러한 가치를 공동이념으로 하여 미국인은 사회적 동질성을 유지해왔으며 미 국민이 관용정신이 강한 것은 유럽에 비해 대화와 타협에 기반을 둔 민주제도를 이끌어갈 역량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리고 미국인은 능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무한한 기회가 주어졌는데 실용과 타협의 정신에 따라 사는 관대한 국민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민교회의 영적 리더쉽을 살펴보라. 우리는 과연 이러한 미국인들이 가진 "합의와 관용"사상이나 "대화와 타협"의 사상을 인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한국적인 유교정신이나 한국적인 철학으로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지? 결국 한인교회에 필요한 정신은 독선이나 독재가 아닌 대화를 통한 합의사상으로 관용적이고 건강한 이민교회를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2009-07-07

[사목의 향기] 육체가 판치는 세상에

7월 6일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마리아 고레띠라는 성녀를 기념하는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일이다. 그녀의 부모는 이딸리아 북동부에 서 살다가 로마 근교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아버지는 말라리아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5남매는 어머니가 돌보고 있었다. 어려운 살림이었다. 하지만 온 가족은 그 당시 평범한 이딸리아 사람들처럼 신앙의 정신에 따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마리아 고레띠가 12살이 되었을 때 악몽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제법 처녀티가 나는 그녀를 옆집의 열 여덟 살 먹은 알렉산더라는 청년이 흑심을 품고 호심탐탐노리고 있었다. 그는 성폭행을 하려고 자주 덤벼들었다. 마리아 고레띠도 알렉산더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리고는 기도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했다. 번번이 거절당한 알렉산더는 어느 날 작심한듯 혼자 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던 그녀를 덮치고는 옆방으로 끌고 가 완력으로 옷을 벗기면서 성폭행을 하려했다. 소리를 지르면서 완강히 거부한 그녀는 남자의 말을 듣고 승낙하면 죄를 짓는 것이므로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다. 청년은 뜻대로 되지 않자 사정없이 마리아를 때리고는 칼로 그녀의 온몸을 사방에 찌르고는 도망쳐 버렸다.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신음하는 그녀를 들에서 돌아온 가족들이 병원으로 옮겼으나 중태였다. 그날 밤과 그 다음 날 병원에서 드러난 그녀의 언행은 신앙인으로 보여준 감동적인 행위였다 온몸이 아파 신음하면서도 마리아! 고레띠는 기도하면서 그 청년을 용서해준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친지들과 본당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영성체를 한 후 그들이 올리는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도망을 간 알렉산더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30년 형을 받았다. 그는 오랜 동안 개정의 정이 없이 지냈다. 성격이 더욱 사나워져 교도소 안에서도 문제아로 지내다가 어느 날 밤 마리아 고레띠가 나타나 꽃다발을 건네준 꿈을 꾼 이후로는 갑자기 달라져 모범적인 생활을 하자 3년이 감형되어 27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제일 먼저 마리아 고레띠의 모친을 찾아가 용서를 청했다. 딸을 죽인 원수지만 신앙의 정신으로 용서해주었다. 교회는 신앙을 위해 순교한 이들과 거룩하게 살아간 이들의 삶을 조사하여 복자나 성인품에 올린다. 마리아 고레띠의 생애를 연구한 교회는 "죄를 짓기보다는 죽음을 택한" 그녀의 행위를 순결을 지키기 위한 영웅적인 행위로 평가했다. 열 두 살 먹은 어린 아이가 성에 대해 뭘 알고 있었을까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병상에서 한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은 이들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항거하다가 죽어갔다고 증언했다. 육체를 즐기자고 팡파레를 울리는 세상이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눈을 조금만 돌려도 사방에 이런 내용들이 판을 치고 있고 스와핑을 법적으로 처벌할 근거가 없어 고민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분명히 증언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성적인 타락에 있었고 로마제국 멸망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고. 그런가하면 순결 서약을 하는 이들도 있고 일생동안 자발적으로 행한 순결서약에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성이 건전한 사랑과 하느님 창조사업에 기여하는 수단이 될 때는 좋은 것이로되 노예가 된다면 타락이다. 타락은 멸망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2009-07-07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초발심 사라져 답답한데···

Q: 초발심 때는 부처님 만난 것으로 행복하고 기뻤고 불교 서적을 대하면 대할수록 마음으로 다가와 머리 속에 그대로 남았는데 몇 해 전부터 몸도 마음도 흐려지고 기도도 별로 감응이 없고 책을 봐도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A: 책도 보지 말고 기도도 하지 마세요. 하기 싫은 걸 뭐 때문에 합니까. 그건 자꾸 붙들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겁니다. 기도할 때 계속 졸리면 억지로 참으면서 하지 말고 한 번 자 보세요. 며칠까지 자는지 한 번 푹 자 보세요. 눈이 저절로 뜨이거든 그 때 일어나서 기도를 해 보세요. 기도를 하는데 또 졸리면 그 자리에서 엎어져서 또 자 버리세요. 이렇게 하면 언젠가는 잠이 끝이 납니다. 졸리는 것을 억지로 참고 기도를 하면 10년을 해도 10년 내내 졸면서 하게 돼요. 그러니까 졸리거든 그 자리에서 엎어져 자 버리세요. 그리고 눈 뜨면 거기서 또 기도를 하세요. 또 졸리면 또 자고요. 참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다가 졸리면 그냥 엎어져 자고 잠에서 깨면 일어나서 다시 하세요. 그런데 자고 일어나서 딴 짓 하면 안 됩니다. 이 졸음의 뿌리를 뽑으려면 졸리면 자고 깨면 다시 정진해야 합니다. 그러면 잠은 언젠가는 끊어지고 그 다음에 여일하게 됩니다. 그렇게 끈질기게 해 보면 잠이 버릇이라는 걸 알게 돼요. 지금은 여러분이 그게 버릇 때문에 그런 건지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졸리면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서 다시 딱 시작하면 되는데 '이러다가 몸이 아프면 손해 아닐까? 좀 자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자꾸 이렇게 번뇌가 일어나지요? 그러니까 그걸 용납하지 말고 졸리면 벌떡 일어나 세수하고 와서 하다가 또 졸리면 또 일어나 세수하고 또 앉고 하는 식으로 밀어붙이면 열 번만 왔다 갔다 하면 딱 끊어집니다. 아니면 그냥 엎어져 잤다가 일어나서 하고 졸리면 또 잤다가 일어나 하든지 양단 간에 분명하게 하는 게 필요합니다. 인생살이를 늘 헤매면서 계속 그렇게 가면 안돼요. 보기 싫으면 보지 말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기도한다고 밥이 생깁니까 돈이 생깁니까? 뭐 때문에 해요. 불교 책 그거 봐서 외워서 뭐 하려고 그러세요? 시험 치러 갈 것도 아닌데 머리에 안 들어오면 잊어버리면 되지요. 뭐 때문에 의무감을 갖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신문 다 읽었는데도 기억이 잘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과 똑같아요. 그냥 쓱 읽어 보고 '응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하면 되지 그걸 외워 가지고 뭐 하려고요? 집착을 놓으세요. 그러면 행복해지고 번뇌가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러면 된다고 믿고 그냥 하세요. 다 욕심 때문에 그래요. 노력은 안 하고 결과만 바라니까 그렇지요. 안 되면 다시 하면 되는데 무엇이든지 한 번만에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안 되면 좌절하지요. 그냥 해 보세요. 안 되면 다시 하세요. 그렇게 하면 삶에 생기가 돌아요.

2009-07-07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마음 운전' 잘하시나요?

#풍경1 : A는 자동차입니다. 날 때부터 자동차였죠. 그래서 늘 운전법을 익혔죠. 집에서든 학교서든 말이죠. 기어를 넣고 브레이크를 밟고 전조등을 켜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야 자동차의 인생이 굴러가니까요. A는 그렇게 자신을 굴리며 조금 더 행복한 길 조금 더 풍족한 길 조금 더 탄탄한 길을 찾아서 끊임없이 핸들을 돌렸습니다. 과속을 하다가 앞차를 들이받고 모퉁이를 돌다가 옆차를 긁고 도로 한가운데서 타이어에 펑크가 나기도 했죠. 이유도 모른 채 차가 멈추기도 하고요. 그래서 자동차의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됐죠. 그래도 A는 자신을 위로합니다. 묘한 일은 이뿐만 아닙니다. 어떤 때는 분명 고속도로로 갔는데 정작 자신은 덜컹대며 비포장 도로를 달리고 있었죠. 또 어떤 때는 부산을 향해 달렸는데 도착해보니 목포였습니다. A는 이렇게 읊조리죠. "인생이란 게 그렇지. 불가사의한 거잖아. 이렇게 달리다가 결국 모든 자동차가 폐차장으로 가는 거 아니겠어?" #풍경2 : A의 친구 B도 자동차입니다. 마찬가지로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됐죠. 그런데 B는 자신에게 물었어요. "뭔가 이상해. 왜 나는 항상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달려야 하는 걸까? 좌회전을 하고 싶은데 왜 차는 항상 오른쪽으로 도는 걸까?" 그래서 B는 찾기 시작했죠. '새로운 운전법'을 말입니다. 높은 산과 험한 광야를 다 뒤졌죠. 결국 두툼한 책을 한 권 찾았어요. 제목은 '모토경(Motor經)'. 아주 먼 옛날 '깨친 카'라는 이름의 자동차가 남긴 '운전 설명서'입니다. B는 책을 한 장씩 넘겼어요. 그런데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감탄'이 터졌죠. 지금껏 '내가 알던 나'가 무너져 내렸거든요. '깨친 카'의 한 마디 한 마디에 B자동차의 생각 B자동차의 주관 B자동차의 상식 B자동차의 시선이 하나씩 무너졌죠. 결국 최고 속도 최고 파워 최대 주행거리 등 B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내려놓았죠. 그리고선 책을 따라 시동을 걸었죠. 그랬더니 자동차는 "쉬~이~익!"하며 바람처럼 날아갔죠. 또 멈출 때는 솜털보다 부드럽게 섰죠. 그제야 다른 자동차와 부딪칠 일도 없어졌습니다. 순간 B는 깨달았죠. "그동안 '나'를 몰랐구나.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겐 '마음'이 있죠. 작동도 하죠. 마음의 시동도 걸고 마음의 핸들도 돌리고 마음의 경적도 울리죠. 그런데 수시로 사고가 납니다. 아내와 남편 아들과 딸 친구와 직장동료 등 주위에 있는 차들과 시도 때도 없이 부딪히죠. 왜 그럴까요? 우주를 채우는 마음을 갖고도 나만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우주선을 타고서도 자전거 페달만 밟고 있는 셈입니다.

200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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