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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장수 업체] 베스트컴 오효환 대표···사업 성격 맞춘 '전화시스템' 제공

"27년동안 통신기술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1982년에 설립된 베스트컴(Bestcom.대표 오효환.사진)은 대표적인 한인 통신기술회사 중 하나다. 한인 업체 가운데 베스트컴을 통해 전화를 구입 설치하고 수리를 부탁하는 곳은 상당수다. 베스트컴은 지난 1982년부터 사업용 전화 판매 설치 이전 수리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정부 기관에서부터 항공사 대기업 중소기업 호텔 병원 등까지 전화 시스템 설치 및 정비 서비스를 맡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회사 설립이나 이전 시 전화 시스템 구축 및 변경 수리와 서비스 시스템 업그레이드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베스트컴이 꾸준하게 성장하며 입지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고객을 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용과 고객 맞춤 서비스를 가장 중요시 여겼다. 공인딜러십을 획득 고객들에게 신뢰를 심어줬다. 정확하고 꼼꼼한 서비스에 고객들은 만족해했다. 특히 고객 맞춤 서비스의 경우 그 사업체에 가장 알맞은 프로그램을 추천해 사업 운영에 있어 시간은 물론 인건비 사업비 등을 적절히 절약할 수 있게 도왔다. 또 한인 뿐만 아니라 주류 시장을 적극 공략하면서 한인 통신 업계에서 장수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전화 시스템 설치는 매우 중요한데 업주들이 충분한 자문을 받지 못해 곤란을 겪습니다. 하지만 베스트컴과 같은 공인딜러에 의뢰하면 믿을 수 있는 제품과 사업체에 제일 적당한 프로그램을 소개해드립니다." 베스트컴은 현재 토시바(Toshiba)와 딜러 계약을 맺고 모든 장비에 있어 정품을 사용하고 있으며 미국 최대 통신 업체인 AT&T에서도 베스트컴의 전통과 신용을 인정해 전화라인 설치 대행 업무를 맡기는 등 협력업체로도 함께 일을 하고 있다. 무료상담 및 견적은 물론이고 리스 프로그램을 통해 전화시설 설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도 장수기업으로 설 수 있는 요인이다. 웰스파고의 각종 융자 옵션과 고객 예산 사업성격에 맞도록 가장 합리적인을 리스 프로그램을 제공한다는 것은 베스트컴만의 특징이다. 베스트컴의 최대 장점은 고객과의 계속되는 소통이다. "전화시스템 설치 후에도 고객이 문의 또는 상담하면 함께 의논하고 숙고한 뒤 고객에게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사업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한국어 뿐만 아니라 영어 스패니시 등 다중언어 문의전화가 많은 LA한인타운내 한 병원이 기존의 전화 시스템으로는 효율적 업무가 불가능하다고 최근 의뢰해왔다. 베스트컴은 언어별 자동 응답서비스를 설치했다. 병원측은 업무가 매우 편해졌다고 만족해했다. 끊임없는 고객과의 대화를 통해 가능했던 일이다. 이제 베스트컴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나홀로' 통신기술회사가 아닌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입지를 더욱 단단히 다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고객들도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회사와 연결이 되어야 안심하고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베스트컴은 기존 사업용 전화 시스템 뿐 아니라 컴퓨터 네트워킹 데이터 케이블 CCTV 등을 설치해 운영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 각종 사무용 기기 설치까지 그 영역을 확대 중이다. "믿을 수 있는 통신기술회사와 연결이 되는 것은 사업체를 운영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더욱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회사가 되겠습니다." ▷문의: (213)384-5400 장열 기자 [email protected]

2009-01-30

[한인 장수 업체] 뮤직커넥션 하대용 시장 '노래방 기계' 한우물만 팠죠'

"고객의 만족이 먼저죠." 노래방 기계 전문업소인 뮤직커넥션의 하대용 사장은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노래방 기계인데 구입후라도 후회하면 안될 일"이라고 말했다. 뮤직커넥션은 가전업소로는 독특하게 노래방 기계만 전문으로 판매해왔다. 지금은 음반이나 한국 영화 드라마 DVD도 함께 취급하고 있지만 주력은 역시 가정용과 업소용 노래방 기계. 제품은 한국의 금영 태진과 저가용으로 중국산 기계를 다루고 있다. 하 사장은 "한국 노래방 기계 제조업체가 6~7개정도 이었는데 지금은 금영과 태진만 남았다"고 설명했다. 평소 오디오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하 사장이 노래방 기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대 중반. 우연히 일본의 레이저 디스크로 된 가라오케 기계를 접하면서 '이거다'라는 가능성을 확신하고 1994년 8가의 현 로젠노래방 건물에서 출발했다. TV나 오디오 등 일반 가전제품을 취급하려면 규모와 자금력이 필요한데다 주류 업체들과도 경쟁을 해야 한다. 하지만 노래방 기계는 한국 등 아시아권에서 큰 인기를 끈 기계. 따라서 대형 가전업체들도 쉽게 다루질 않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후 99년에 현재 위치인 8가와 옥스포드 코너의 옥스포드 센터로 옮겼고 3년 전에는 부에나파크에도 지점을 열었다. 고객은 남가주 뿐만 아니라 타주에서도 몰린다. 오픈 후 타주에서 온 고객만 해도 3000여명에 달할 정도다. "노래방 기계만 10년을 넘게 취급하다보니 어느덧 노하우가 생겼죠. 전화통화만으로도 먼 곳의 손님들이 쉽게 노래방 기계를 쉽게 셋업할 수 있도록 설명하곤 합니다." 고객들에게는 노래방 기계들의 장.단점에 대한 자세히 설명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모델이 단종된 노래방 기계의 경우 가격이 저렴한 대신 신곡 업데이트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런 모델은 신곡보다는 주로 옛날 노래를 즐기는 노인층 고객들에게 주로 권한다. 반대로 자녀가 있는 가족들에게는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신곡을 쉽계 업데이트 할 수 있는 기계를 추천한다. 또 1년 무상워런티 구입 3개월내 문제가 생기면 노래방 기계 교환 등의 애프터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런 서비스 덕에 단골과 입소문을 듣고 온 고객들도 많다. 하 사장은 "특히 타주로 배달되는 경우 배달 과정에서 기계가 문제가 생길 때가 있다"며 "그런 경우 2일안에 새로운 기계와 리턴 레이블을 함께 보낸다"고 말했다. 즉 손님들이 새로운 기계를 최대한 빨리 받을 수 있고 작동하지 않는 기계를 보내기 위해 번거러운 걸음을 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성의를 보내니 기계가 고장나 실망을 했던 손님들의 마음도 쉽게 풀어진다. 하지만 이같은 일은 연 1~2회일 정도로 드물다. 현재 뮤직커넥션은 연말을 맞아 다양한 세일을 하고 있다. DVD 기능이 있는 노래방 기계가 199달러부터 시작한다. DVD/노래방 기계의 정가는 399달러부터 시작한다. 또한 500달러하는 태진 노래방 구형을 350달러부터 시작한다. 신형과 외부 디자인은 다르지만 기본 성능은 똑같은 제품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할인 이벤트를 준비했다. 하지만 하 사장은 내년 2월이면 15주년을 맞은 뮤직커넥션을 더 성장시키고 싶은 욕심이다. 특히 이제 막 노래방 기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 주류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하 사장은 "최근들어 베스트바이 등 주류 가전업체에서도 노래방 기계를 판매하고 있지만 그 성능은 많이 뒤떨어져 있다"며 "우수한 품질을 앞세워 공략하면 주류 시장에서도 노래방 기계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문의:(213)385-0202 글.사진=서기원 기자 [email protected]

2008-11-28

[한인 장수 업체] KLG스포츠센터 김순혜 대표

1988년 LA한인타운 피코와 하버드 코너에 문을 연 KLG스포츠센터(대표 김순혜)는 한인들의 건강 지킴이다. 한인이 운영하는 스포츠센터가 없던 시절 코리안 레저 그룹(KLG)을 선보인 것이다. 처음엔 스키 전문점이었다. 스키 장비를 팔고 실내에서 스키를 타볼 수 있도록 스키덱까지 설치한 한인 스키 인구가 많지 않았기에 다소 생소한 하지만 스키 매니아들에게는 반가운 곳이었다. 이후 1990년 웨이트 트레이닝과 피트니스를 할 수 있는 헬스클럽으로 확장했다. 92년에는 실내수영장을 추가했다. 지난해에는 여성 스파&사우나를 올초에는 남성 스파&사우나를 신설했다. 타운 최초로 여성 전용 노천탕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2만5000스퀘어피트 규모의 KLG는 이제 운동과 건강에 관한 한 원스톱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피트니스 센터와 수영장 강좌가 진행되는 스튜디오 사우나와 스파 네일케어 및 스킨케어샵까지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사시사철 수영과 요가 태보 및 토닝 에어로빅 라인댄스 등 건강 및 스포츠 강좌가 열리고 여름에는 웨이크보드와 제트스키 등 물놀이 겨울에는 스노보드 및 스키 투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또 여름에는 수영복 등을 겨울에는 스노보드&스키 장비를 판매한다. 간이식당까지 있다. 식사까지 해결되니 마음 먹고 한번 들어가면 나올 일이 없다. 운동하고 밥먹고 사우나하고 온종일 보내도 시간이 모자를 것 같다. 그렇게 종합 레저스포츠를 즐길 수 있고 종합 여가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 KLG다. 해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지만 마음은 한결같다. 장소도 20년동안 같은 자리를 지켰다. 항상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 KLG. 지루할 틈이 없기에 바글바글 북적북적 활기가 넘친다. 회원은 500명 정도. 수영 강좌 수강생이 많은 여름에는 1000명이 넘는다. 11월 추수감사절 연휴부터 다음해 2~3월 이어지는 겨울에는 평균 500명이 로컬(빅베어) 스키투어에 참가한다. 20년 회원도 있다. 매년 멤버십을 갱신하는 것을 10년 이상 해온 회원도 30%는 된다. 부모 손을 잡고 왔던 초등학생이 결혼해 부부가 같이 오거나 이번엔 부모가 돼 자녀의 손을 잡고 오기도 한다. 세대를 달리하며 가족 회원이 KLG를 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KLG는 오래된 때문도 있지만 가족같은 분위기 집처럼 드나드는 친근하다. KLG의 또다른 축은 강사. 실력있는 강사진은 KLG의 자랑이다. 사실 KLG를 오픈하고 첫 10년은 고전했다. 운동이나 건강에 대한 관심도 저조했고 사실 웰빙이라는 개념조차 미미하던 시절이었다. 힘들 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초급반에서부터 고급반까지 가르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 강사를 확보한 덕이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회원 및 이용 한인들이 확 늘어났다. 수영을 배우려면 KLG로 가라는 입소문이 났고 수영 뿐 아니라 다른 프로그램을 배우려는 회원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일년내내 다양한 스포츠와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었다. 그래서 취미로 시작했다가 회원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달 회원을 끊었다가 1년 회원이 되는 경우는 90%. 5년 10년 회원이 된다. "다 선생님들 덕분이에요. 자리를 지켜준 힘들 때 도와준 선생님들이 고마울 따름이죠." 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고객들에게 좋은 것 편안한 것을 선사하려는 노력은 회원 유지 방법이자 20년을 이끌어온 원동력이다. 스파&사우나를 신설한 것도 고객이 좀더 편하게 한곳에서 스포츠와 여가를 즐기기 바란 때문이다. 수영장이 메인이지만 사우나&스파를 오픈하면서는 수영장-사우나 피트니스 센터-사우나 등 새로운 상품을 개발했다. "시설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요. 그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서비스가 뒷받침돼야죠. 고객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이런 발전도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김순혜 대표와 KLG 강사들은 일년내내 바쁘다. 일을 분담하고 회원들을 케어하고 시설을 관리하려면 마음부터 뛰어야 한다. 유행에 민감한 스포츠 비즈니스이기에 항상 고객들이 원하는 바를 찾아 고민해야 한다. 지금까지 목표해온 그림이 맞춰져가고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온가족이 좋아하는 운동이나 사우나를 즐기면서 또 여가시간을 함께 공유하며 동시에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그런 곳이다. KLG스프츠센터는 그렇게 한인들 곁에 있을 것이다. ▷문의: (323)735-0111 이재희 기자 [email protected]

2008-11-21

[한인 장수 업체] 불란서 안경원 이중자 사장···'신용 A+' 손님들이 알아줘요

‘손님의 눈은 밝게, 얼굴은 아름답게….’ 지난 20년간 올림픽 불러바드와 킹슬리의 불란서 안경의 한결같은 모토다. 불란서 안경은 지난 1989년 오픈해 올해로 꼭 20주년을 맞는다. 이중자 사장은 “‘불란서(프랑스)’하면 패션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유행에 앞서가는 나라”라며 “불란서처럼 패셔너블한 제품을 주로 다룬다는 의미로 ‘불란서 안경’이라고 업소명을 지었다”고 말했다. 현재 불란서 안경은 2000스퀘어피트 규모로 이 사장을 포함, 9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안경점 내부에는 검안소도 마련돼 있다. 위치와 매장까지 20년전 그대로다. 현재 불란서 안경은 까르띠에, 스와로브스키, 불가리, 티파니, 팬디 등 30개 이상의 유명 브랜드의 딜러십을 보유하고 있다. 유명 브랜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급에서 저가까지 손님들의 원하는 가격대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을 구비해놨다. 이 사장은 “지난 20년간 불란서 안경을 찾아 안경이나 선글라스를 구입한 손님들 수만해도 셀수 없을 정도”라며 “손님들에게 정직한 서비스를 손님들에게 제공하니 한번 찾은 손님들이 나중에 다시 찾는 곳이 불란서 안경”이라고 전했다. 나날이 경쟁이 치열해지는 안경업계다. LA한인타운에서 운영되는 안경점만해도 60여개에 달한다. 그런 안경업계에서 20년을 지내왔다. 이 사장은 불란서 안경의 장수 비결로 주저없이 ‘신용’을 꼽았다. 정직하게 손님들에게 딱 맞는 최적의 안경을 제공한다는 손님들에게서의 신용, 비즈니스 거래에 있어서 은행이나 서플라이 업체들로부터 신용이 바로 장수 비결이라는 것. 거래 은행이나 서플라이 업체들 사이에서 불란서 안경의 신용등급은 ‘A+’라는 게 이 사장의 자랑이다. 이 사장은 “가격보다는 좋은 퀄러티의 제품을 제공한다는 초심을 잃어본 적이 없다”며 “20년간 꾸준한 서비스가 고객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방침이 꾸준하게 지켜진데는 묵묵하게 근무하는 직원들이 있다. 이 사장을 포함 9명의 직원 중 반이상인 5명이 10년 이상 불란서 안경에 몸을 담았다. 한 직원은 17년이 됐다. “직원들이 워낙 오래되다 보니 어떤 손님은 오래된 직원이 사장인 줄 알고 ‘사장님’이라 부르시더군요.” 부침이 심한 안경업계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불란서 안경에서 근무해준 직원들에게 ‘고마운 마음’ 뿐이라는 이 사장이다. 따라서 불란서 안경은 ‘가족적인 분위기’가 진하다. 그만큼 이 사장과 직원들과의 관계가 각별하다. 특히 이 사장은 직원들이 편안하게 일하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오래된 직원들이 많다보니 매장을 찾는 손님들도 낯익은 직원이 있으면 보다 더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불란서 안경을 부담없이 찾는 손님들도 제법된다. 이 사장은 “10년만에 불란서 안경을 찾아도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하곤 곧 편안함을 느끼시는 손님들이 많다”고 전했다. 지난 20년간 불란서 안경을 경영하며 스스로의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해왔다는 이 사장. 불란서 안경을 찾은 손님이 만족하고 나설 수 있도록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불안서 안경의 근본 방침이다. 그녀는 “손님이 불만을 느끼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손님을 안 내보낼 정도로 고객들의 만족도를 높이는데 가장 신경을 써왔다”고 말했다. 최근 불란서 안경은 20주년을 맞아 고객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특별한 프로모션 3가지를 시작했다. 첫째, 12월 말까지 구찌, 에스카다, 페레가모, 팬디 등 명품 브랜드 안경테를 99달러에 판매한다. 둘째, 오늘(15일)부터 안경테, 시력검사, 일반 렌즈 패키지를 59달러, 99달러, 159달러에 준비했다. 셋째, 현재 매장에 마련돼 있는 경품응모함을 통해 연말 경품 추첨을 해 푸짐한 선물을 한다. 상품은 LCD TV, 김치냉장고, 명품 안경 등 다양하게 준비됐다. 20년간 꾸준하게 한 장소에서 비즈니스를 해 온 이 사장이지만 앞으로는 지점을 늘리고 싶다는 계획이다. “20년간 지켜왔던 한결같은 서비스를 보다 더 많은 한인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싶을 뿐입니다.” ▷문의:(213)487-1001 서기원 기자 [email protected]

2008-11-14

[한인 장수 업체] 삼성 제품으로 시장 재공략

'스마트 사무기(대표 대니엘 이)'는 30년 됐다. 1978년 LA한인타운 웨스턴에서 '메리트 사무기'로 시작했다. 대니엘 이 사장은 "타운의 첫 사무기기 업체였다"며 "한동안 유일했고 그래서 독보적이었다"고 말했다. 30년동안 같은 전화번호(213-386-8282)여서 올드타이머들 가운데 아예 외우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 LA다운타운과 한인타운의 사무실 은행 교회 등 거의 모든 고객들이 스마트를 거쳐갔다. 당시 사무기기란 한영 겸영 타자기. 그 다음이 워드프로세서였다. 80년 즈음에는 복사기가 나왔다. 곧이어 나온 팩스도 스마트 사무기가 첫 보급했다. 새 사무기기가 나올 때마다 상호명도 조금씩 바뀌었다. 메리트에서 '카피어랜드'로 그리고 지금의 '스마트 사무기'에 정착됐다. 이름이 바뀔동안 이사도 했다. 웨스턴에서 라브레아쪽으로 이사했다가 2006년 지금의 자리(2500 Wilshire Blvd. #108)에 둥지를 틀었다. 30년 세월동안 취급하지 않은 사무기기 브랜드가 없다. 타자기 복사기 팩스를 거쳐 컴퓨터와 함께 프린터가 나왔다. 그리고 스캐너까지. 최근엔 복사기 프린터 스캐너 등이 하나로 해결되는 멀티 기능의 복합 사무기기가 대세다. 성능 및 기능도 업그레이드를 거듭하고 있다. 도시바 카피스타 캐논 쿄세라 패나소닉 등 일본과 미국 브랜드를 취급했다. 다양한 브랜드 가운데 엄선해 지금은 3개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한국 브랜드 삼성의 시대를 열려한다. 이번에 삼성 사무기기의 한인 공인딜러 및 공인 서비스 센터로 지정된 것. 삼성은 일본에 비해 10~20년 늦게 사무기기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이제 일본의 기술 품질을 뛰어넘을 태세다. 사실 삼성 사무기기는 10년 전부터 주류 시장에서 판매돼 왔다. 하지만 주로 개인용이었다. 이제 오피스 커머셜용으로 확대해 복사기로 미주 시장에 본격 진출을 노리고 있다. 같은 성능 비슷한 품질에 가격은 40% 정도 저렴하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시장 점유를 위해 가격으로 경쟁하는 것. 하지만 나중엔 삼성 TV처럼 돈을 더 주고라도 사야할 지도 모른다. 불경기에 고객들은 절약할 수 있어 좋고 한국 브랜드를 알리고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살리는 차원에서 삼성에 주력할 계획이다. 이 사장은 "소니 등 일본 브랜드에 밀려 기를 펴지 못했던 삼성 TV며 가전이 이젠 다른 브랜드보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한국 대표 브랜드에서 나아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며 "기술력 향상 참신한 디자인 각고의 노력 결과로 삼성 사무기기도 가전 반도체 분야에서처럼 복사기 시장에 판도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스마트 사무기가 이쪽 업계의 선두주자이기에 가능하다. 부침이 심한 사무기기 업계를 30년동안이나 이끌었고 특히 일찌감치 타인종 및 주류 시장을 개척해왔다. 이 사장은 20대 중반부터 사무기기 딜리버리 등 밑바닥부터 시작해 고지식하게 버텼다. 오래된 만큼 함께 일했던 직원이 나가 같은 사무기기 업체를 차리면 가슴이 무너져내리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타격도 입었다. 그러는 사이 많은 사무기기 업체들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가격 경쟁도 치열했다. 그래서 80년대 중반부터 타인종 및 주류 시장 개척에 나섰다. 지금은 UCLA와 USC 등 대학 NBC방송국 티켓매스터 다저스 스테디움 등 주류 고객 80% 중국계 은행 일본 필리핀 알메니안 등 소수계 10% 그리고 한인 고객이 20%를 차지한다. 여기에는 신용과 정직으로 정품만을 취급하고 정확하게 서비스한 덕이다. 한순간도 눈가리고 아웅한 적 없다. 크레딧이 쌓이면서 매뉴팩처 및 본사가 먼저 고객들에게 스마트 사무기를 소개 추천했다. 이 사장은 "부동산 투자 식품 비즈니스 등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잘 안됐고 '죽으나 사나 이게 내 길이구나' 알았다"며 "앞으로는 삼성으로 고객들의 고정관념 일본 미국 브랜드 사무기기에 익숙해진 틀을 깨는 작업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email protected]

2008-11-07

[한인 장수 업체] 왕글로벌넷 김희곤 미주본부장···한인식탁 지키는 식품계 '왕'

'왕!' 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었을 한 식품업체의 광고 끝에 나오는 경쾌한 소리다. 어느 업체 무슨 광고인지 흘려듣다가도 그 끝에 '왕!'은 기억하게되는 그 식품업체다. 왕글로벌넷(미주본부장 김희곤). 30년이 넘게 한인들의 식탁을 지켜준 종합식품 도매회사다. 사실 왕글로벌넷은 1970년부터 해외 거주 한인들에게 한국의 전통음식을 공급하고자 수출을 시작한 한국 종합식품회사 삼진글로벌넷(삼진물상)의 미주 지사다. 1974년 시카고에 미주 지사를 설립하며 시작됐다. 이후 77년 샌프란시스코 78년 LA 81년 뉴욕 84년 휴스턴 등 미전역 12개 지사를 두고 있다. 1998년 미주 본부로 승격된 LA지사는 올해로 꼭 오픈 30년이다. 처음엔 코리안 아메리칸 푸드 즉 한미식품이었다. 회사와 브랜드 이름을 일치시키고자 3년전 한미식품에서 왕글로벌넷으로 회사명을 바꿨다. 미주에 뿌리를 내린지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때문도 있지만 그만큼 한인들에게 친근하게 파고들어 한국 지사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 세월만큼 대표적인 한인 종합식품도매업체로 성장했다. 왕글로벌넷은 한국 식품 기업 지사 또는 사무실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농심에서부터 CJ까지 내셔널 브랜드를 수입 유통했었다. 몇년 전만해도 왕글로벌넷이 취급하는 아이템은 2300여가지에 달했다. 정육과 프레시 수산물 채소 빼고 전부 다였다. 쌀 김치 라면 장류와 양념류 등 다루지 않는 그로서리가 없었다. 배와 포도도 수입 유통하고 냉동 수산물도 선보인다. 한미식품이 공급하는 제품만으로도 마켓 하나 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1500여가지 아이템을 다룬다. 한창시절보다는 취급 브랜드가 줄긴 했지만 지금도 동아제약 박카스 빙그레 등은 왕글로벌넷을 통해 한인들을 만난다. 내셔널 브랜드가 직접 들어오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취급 브랜드 및 아이템이 줄면서 매출이 주춤한 것. 하지만 자체 브랜드와 상품 개발로 위기를 돌파했다. 전통을 내세운 '왕'은 그동안 탄탄하게 쌓인 기반으로 전체를 받쳐줬고 신세대를 겨냥한 프리미엄 브랜드 '수라상'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국시랑'(면류) '만두촌'(만두) '찬바다'(냉동 수산물)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안 시장을 겨냥한 '수키나' 등도 자리를 잡아갔다. 상품에 주력했다. 새상품 개발에 전력투구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수라상 밑반찬. 마켓 반찬부나 반찬가게에서 사먹을 수 있는 반찬이 아니라 이를 규격화해 포장반찬을 내놓았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좋았다. 또다른 돌파구는 유기농 라인. 점점 거세지는 웰빙열풍에 착안 국수와 군밤 등 유기농 제품을 개발 선보였다. 기존 제품도 차별화했다. 만두의 경우 그냥 김치 부추 만두가 아닌 알새우 삭스핀 등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5~6년 사이 매출이 2배 이상으로 껑충 뛰었다. 올해는 기존보다 3배가 큰 9만스퀘어피트 규모의 건물을 1150만달러에 매입해 사옥을 옮겼다. 올 매출액은 1억달러.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30년동안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왕글로벌넷의 30년 노하우가 있어 가능했다. '한인의 한인을 위한 한인에 의한' 식품업체였기에 한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인 시장에서 물건을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알았다. 소비자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찾아내서 상품을 개발하고 이를 구매로 연결시키는 노하우가 있었다. 물론 연방 식품의약국(FDA) 등 각종 규정을 준수하고 철저하게 품질을 관리하고 회사를 안정적으로 현지화한 것도 큰 몫을 했다. 식품업계에서 선두주자로 인정받고 미주에서 한국 식품 시장을 개척했으며 한인 커뮤니티에서 먹거리와 식문화 트렌드를 이끌며 기여한 것에는 자부심도 크다. 올해로 30년. 사옥도 근사하게 옮긴 터다. 비상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불경기 모두가 어려운 때다. 여기서 멈출 왕글로벌넷이 아니다. 내셔널 브랜드로 왕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 것 맞다. 그래도 신뢰를 보내준 고객들 덕분에 매출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늘고 있다. 고객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 앞으로도 믿고 먹을 수 있게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양질의 먹거리를 선보여 사랑에 보답할 것이다. 상품 개발과 시장 확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주류 시장을 겨냥한 브랜드 '프리미엄'으로 유자차가 트레이더조에 주문자생산(OEM)으로 참기름과 빵가루가 랄프스와 크로거에 들어가고 있다. 아시안 및 주류 시장에 나가고 있는 아이템을 현재 30~40가지에서 조금씩 늘리면서 시장을 키울 계획이다. LA의 경우 아직 타인종 및 주류 시장에서의 매출 점유율이 5%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과 기회가 있다. 20%를 올리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와 휴스턴에서의 경험이 있어 든든하다. 이렇게 차근차근 나아갈 것이다. 5년 안에 매출을 2배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도 세워뒀다. "왕글로벌넷. 한인들의 식탁을 지키는 당신이 진정한 '왕'입니다." 이재희 기자 [email protected]

2008-10-24

[한인 장수 업체] 한미피아노 김종칠 사장 '판매·배달·조율' 직접 서비스

한미피아노의 김종칠 사장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피아노 박사' "피아노 업계에서만 42년째 종사하고 있어서 그런지 절 아는 분들은 늘 '피아노 박사'라 불러 준다"는 김 사장은 "피아노를 속속들이 알고 피아노 밖에 모르는 저에게 붙여 준 애칭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미피아노가 한인타운에 문을 연지도 18년. 그동안 문을 닫은 피아노 업체만 6개에 달하지만 한미피아노는 아직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김 사장이 말하는 비결은 '품질 좋은 피아노를 적당한 가격에 판매한 것과 후한 인심으로 단골손님은 확보한 것'. '피아노 박사'의 애칭을 얻기까지는 험난한 과정을 넘겨 왔다. 1967년에 정음피아노에 입사하면서 그의 피아노 인생은 시작됐다. 그후 삼익피아노로 스카우트되면서 외장 도장부터 케이스와 건반 제작 조율 피아노 조정까지 피아노 제작 전공정을 익혔다. 또 한창 피아노 기능공으로 이름을 높이던 중 친구를 통해 일본 피아노 제작업체로부터 취업 제의를 받고 197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앞선 피아노 제작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13년간 조립과 조율과정을 배우면서도 틈틈이 독일 미국과 남미 등 피아노 선진국을 다니며 기술을 익혔다. 1987년 뉴욕 야마하사에서 근무하다 지금은 사라진 '이병일피아노'로 옮겨 서비스 매니저로 4년간 일하면서 창업의 꿈을 품었다. 처음엔 조율학교를 열고 조율사를 양성하다 1991년 LA한인타운 노턴과 올림픽 코너에 그동안의 꿈이었던 한미피아노를 오픈했다. 사업경험 없이 창업을 한 김 사장은 초기에는 큰 손실을 보는 등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위기 극복방법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었다. "피아노 판매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34년간 피아노 회사에 근무하면서 섭렵한 각종 기술과 지식을 곁들인 서비스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죠. " 이러한 '종합서비스'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으며 장수의 비결이 됐다. 김 사장은 "일단 피아노 상자를 개봉하면 평균 6시간 동안 재조정하고 점검해야 비로소 피아노로서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면서 "피아노 재질과 메이커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관리하고 조율하느냐에 따라 피아노 음질이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피아노 선율이 전하는 터치와 필링은 피아노 속을 알고 기술이 있어야 조율이 가능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또 다른 비결은 바로 사장의 '1인3역'이다. 즉 판매.배달.조율을 혼자 해결하기 때문에 피아노 판매가에 군더더기가 붙지 않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게 김 사장의 설명. 그는 고객에게 가장 적합한 피아노를 추천하고 고객이 원하는 날에 직접 배달을 한다. 배달 거리도 캘리포니아는 물론 네바다와 애리조나 3개주를 넘나든다. 캘리포니아도 북쪽으론 샌프란시스코 남쪽으론 샌디에이고까지 제품을 구입한 고객이 원한다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사장이 직접 배달 오면 고객들이 처음엔 의아해 합니다. 하지만 피아노를 설치하면서 관리 및 보관법에 대해 알려 주고 조율까지 완벽하게 해 드리면 고객이 너무 좋아합니다. 이런 서비스에 만족한 고객이 다른 고객을 추천해주고 또 입소문을 통해 고객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단골고객까지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사장의 1인3역이 1석3조의 효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말이 쉽지 이런 일들은 성실함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그는 주 7일 오전 5시에 하루일과를 시작해 오후 8시까지 쉴새 없이 일을 한다. 월 80~90회 피아노 조율 출장을 다녀야 하고 어떤 때는 타주로 직접 배달까지 가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요일에도 교회가는 시간만 잠깐 매장 문을 닫을 뿐"이라는 김 사장은 "중간에 쉬면 일의 연속적인 흐름이 깨져 다음 일을 연결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피아노 박사'라는 애칭이 싫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피아노 장인'이고 싶다며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생활의 활력소인 피아노 판매와 조율에 매진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진성철 기자 [email protected]

2008-10-10

[한인 장수 업체] 베가 하워드 김 대표 '손님 기대치 보다 하나 더'

다양한 상품의 제품설명서로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만나는 라벨. 가디나에 위치한 베가(Bega inc.대표 하워드 김)사는 만 20년 동안 이 라벨을 전문적으로 생산해 온 업체다. 전국에 확보하고 있는 고객 어카운트만도 4000여개에 이른다. 김 대표는 원래 마케팅과 세일즈로 출발했다. 한국에서 동양화학(현 동양제철화학) 마케팅팀에서 근무하다 1984년 미국땅을 밟았다. "늦은 나이에 낯선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유통에 길도 익히고 영어도 배울 겸 그로서리 홀세일 회사에서 세일즈를 시작했어요." 2년간 미국의 유통 감각을 익힌 김 대표는 86년부터는 픽업트럭을 구입해 소매업소들에 각종 물건들을 공급하는 일로 독립했다. 주 아이템은 비디오업소 관련 제품. 박스 헤드클리너 플래스틱 백 등이었다. 이 때부터 경영모토는 '하나 더' 였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고객이 주문하는 것보다 하나씩 더 챙겨주면서 신용을 쌓아갔고 그 덕분에 고객도 빠르게 늘어났다. 그러던 중 사업 확장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인이 운영하던 경쟁사가 내부 사정으로 김 대표에게 인수하라고 제의한 것. 고객에 직원까지 그대로 인수하는 조건이라 한 단계 도약이 가능했다. 88년이 되면서 한국비디오 가게들이 늘면서 비디오박스 플래스틱 백 라벨 주문도 크게 늘어났다. 늘 제조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김 대표는 오랜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수요가 급증하는 라벨을 아이템으로 선택한 것. 그리고 가디나시에 있는 공장을 인수해 이름을 베가사로 바꿨다. 생산에는 문외한이었던 김 대표는 낮에는 생산과 세일즈를 병행하고 저녁에는 기계 및 신제품 개발에 매달렸다. 적은 양의 주문이라도 최고의 품질에 납기 시간도 잘 맞추면서 신용을 쌓아갔다. 자연히 고객들이 입소문을 내주면서 조금씩 회사가 성장할 수 있었다. '사람'에 대한 투자도 계속했다. 한번 찾은 고객이 다시 찾도록 신용과 품질 가격 콘드롤에 역점을 뒀다. 또한 세일즈의 어려움을 알고 있어 세일즈맨들의 큰 실수도 너그럽게 감싸 안아준 결과 고객은 꾸준히 늘어났다. 기계 등 생산설비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꾸준한 재투자를 통해 6가지 색상 풀컬러를 지원하는 기계 3대 3가지 컬러를 지원하는 기계 2대 금박 은박 효과를 낼 수 있는 기계를 갖추는 등 경쟁사들을 압도해 갔다. 그러던 중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인 고객이 행운을 안겨준 것. 도시락 회사에 김을 납품하던 이 고객은 처음 주문량이 150달러 정도에 불과했지만 '하나 더'의 마음으로 주문을 받았다. 그러던 이 고객이 어느 날 대형 도시락 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다면서 라벨 주문량이 30만개 50만개 100만개로 늘어나더니 현재는 매달 200만개로 급증했다. 현재는 베가사의 가장 큰 고객중 하나가 됐다. 김 대표는 "주문량이 작다고 납품을 안 했다면 이런 큰 행운도 잡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동안의 설비투자도 이를 뒷받침했다"고 강조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베가사의 경영모토는 두 가지로 압축됐다. 하나는 '손님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 더(Better than Expectation)'와 '사람과 제품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다. 김 대표는 "주변에 베가사를 소개해 주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고객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제품 가격 납기를 최상의 조건으로 서비스해 보답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개인이 운영하는 인터넷 쇼핑몰이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라벨을 직접 프린트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는 것에 착안해 2년 전부터 고객이 직접 프린터로 인쇄할 수 있는 '블랭크 라벨'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에 착수해 최근 홈페이지(www.begalabel.com)를 런칭하고 직접 소비자 판매에 나섰다. 레터 사이즈 용지에 원 사각 등의 모양으로 다양한 사이즈를 지원하며 크게는 CD 및 DVD 택배용 주소 등 대형사이즈 프린트도 가능하다. 라벨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들이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사이즈와 형태를 클릭해 주문하면 편하게 집에서 배송받을 수도 있다. "과자 음료 식품 등 유통기한이 있는 제품들의 라벨이 기한에 따라 색상이 변하는 라벨을 개발해 보는 것이 또 다른 목표"라는 김 대표는 "이미 기술이 개발됐음에도 여러 조건상 상용화되기 어려워 주춤하고 있는 이 제품을 내 손으로 개발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백정환 기자 [email protected]

2008-09-26

[한인 장수 업체] '한국 전통 살리는 일에 보람'

“삭막한 이민사회에서 한인들의 향수를 달래주고 싶었습니다.” 올림픽과 놀턴 코너의 태양표구사 정재덕(72) 사장은 동양화를 다루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올해로 오픈 26년. 1982년 이민와 베버리와 웨스턴길에 오픈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84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 지금까지 꾸준하게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다. 정 사장이 표구 비즈니스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부산시청에서 20여년을 근무했어요. 전공도 법학이었죠. 표구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민 초기 페인트공으로 잠시 일을 하다가 우연히 표구를 접하게 됐다. 정 사장은 “한인 화가를 알게돼 그 분 작품을 표구하는 것을 됐죠. 낮에는 페인트를 하고 밤에는 표구를 했어요. 그래도 손재주가 있었던 모양인지 표구를 빠르게 배웠어요.” 그리고 태양표구사를 오픈하며 본격적으로 표구업에 뛰어들었다. 기술이 부족해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 했다. 표구 장비를 잘못 다뤄 손가락 봉합 수술을 받기도 했다. 어깨 넘어로 기술을 배우고 공부하며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한번은 한 고객이 병풍을 주문했다. 정 사장은 인근에서 헌 병풍을 구입, 이를 뜯어 병풍 조립하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남이 만들어논 병풍을 연구해가면서 주문받은 병풍을 만들었는데 손님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시라구요. 그때부터 표구에 대해 조금씩 자신감이 붙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렇게 5년을 운영하다 한국 인사동 출신의 표구사를 영입했다. 지금도 인사동 출신의 표구사 3명이 함께 근무하고 있다. 태양표구사는 일반 표구 및 액자 업체와는 성격이 다르다. 서양화보다는 한국화, 서예 등 액자, 족자, 병풍을 위주로 만들고 있다. 처음부터 동양화를 위주로 시작했다. 정 사장은 “당시만해도 동양화 전문 표구사가 없어 가능성이 있어보였다”며 “또한 한국을 늘 마음에 품고 사는 한인들에게 동양화로 향수를 달래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동양화 액자, 족자, 병풍 재료도 모두 인사동에서 직접 구입해 들여오고 있다. 지금도 태양표구사 작업의 70%가 동양화다. 한국의 정취가 물씬 풍겨나는 산수화, 꽃과 새가 있는 화조, 멋들어진 서예 글씨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좋은 그림이나 글씨를 족자나 병풍으로도 만들 수 있다. “보통 손님들이 미국에 오면서 가져온 그림들을 많이 들고 오는 편”이라는 정 사장은 “한국에서 동양화를 구입해 오는 고객도 있다”고 전했다. 게다가 지정 화가를 통해 고객이 원하는 동양화를 그려, 표구도 해준다. 보통 동양화하면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태양표구사에서는 20달러부터 동양화를 구입할 수 있다. 정 사장은 지난 26년간 태양표구사가 영업을 할 수 있었던 비결로 ‘성의’, ‘정직’, ‘성실’을 꼽았다. 손님이 주문을 하면 성심성의를 다해 제작하고 정확하게 약속한 날짜를 지킨다는 것이다. “바쁜 이민생활에서 1분 1초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고객들이 귀중한 시간을 내 표구사를 방문했다가 허탕을 치지 않도록 노력해왔죠.” 지금도 태양표구사를 찾는 단골 손님이 100여명은 된다. 최근들어 주류사회에서 동양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이제는 타인종 고객도 서서히 늘고 있다. 최근에는 웨스턴과 9가 IB홈마트에도 지점을 오픈, 운영하고 있다. 26년간 태양표구사를 운영해왔던 정 사장. 이제는 은퇴를 앞두고 있다. “미국에서 한국 문화의 전통을 살리고 한인들의 고달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었다는 것이 보람이었죠. 은퇴를 하더라도 태양표구사가 그런 맥락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으면 바랄 것이 없습니다.” ▷문의:(323)936-9000 서기원 기자 [email protected]

2008-09-19

[한인 장수 업체] 드림라이프 강호명 대표, 소비자 '웰빙 신뢰' 얻으니 쑥쑥

LA한인사회에 최초로 고가 청소기 레인보우를 소개한 드림라이프(대표 강호명)가 설립 20주년을 맞아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강호명 대표는 “레인보우 청소기 영업으로 시작했다 가능성을 보고 설립한 드림라이프가 어느새 설립 20주년을 맞았다”며 “그동안 발전을 거듭한 드림라이프는 이제는 웰빙제품 전문업체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했다. 드림라이프는 강호명 대표가 한인사회에 레인보우 청소기 판매를 위해 지난 1988년 설립한 종합 가전제품 판매업체. 레인보우 청소기는 청소기 전문 생산업체인 렉스에어사가 1928년부터 생산해온 청소기로 종이필터 대신 물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세균 및 진드기 제거 효과가 뛰어나며 공기청정기 기능도 갖고 있다. 설립 첫해부터 미 전역에서 최우수 딜러로 선정되는 등 한인사회에 레인보우 청소기 열풍을 일으킨 드림라이프는 이후 건강냄비, 공기정화기, 콩사랑 두유기 등 웰빙 관련 제품들을 잇따라 소개하면서 웰빙제품 전문업체로 성장했다. 강 대표는 “1990년대만 해도 웰빙이라는 개념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때”라며 “그러나 갈수록 소비자들의 관심이 건강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판단, 과감하게 투자한 것이 적중해 90년대 후반부터 사세가 급속도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드림라이프는 자체적으로 A/S부서를 두고, 사후 관리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고객들이 구입한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지체없이 수리하고, 문제가 반복해서 발생하면 자진해서 새제품으로 교환해줬다. 이러한 전략이 고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드림라이프는 믿을만한 업체로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성장을 거듭하던 드림라이프에도 2000년대 중반 위기가 찾아왔다. 최고의 베스트셀러 제품이었던 콩사랑 두유기를 제품 생산업체와의 불화로 더 이상 판매가 힘들어진데다 레인보우 청소기도 판매가 한계에 이르면서 성장세가 꺽인 것. 고심하던 강 대표는 한국에 진출키로 하고 2006년부터 한국 시장조사에 들어가 2007년부터 한국 초고가 청소기 시장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강 대표는 “비록 회사의 명운이 걸린 선택이었지만 오히려 큰 기회가 될 것으로 믿었다”며 “조급하지 말고 차근차근 한국 시장을 공략하자는 생각으로 첫 1년 정도는 직원들 교육 및 조직망 정비 등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전략은 적중해 레인보우 청소기가 320만원(3000달러)에 이르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청소기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드림라이프는 한국 시장 진출 1년만에 월 판매대수가 1000대를 넘어서는 등 급성장을 기록중이다. 지금은 오히려 미국 본사가 제품 공급을 제대로 못할 정도다. 더욱이 최근에는 한국원자력발전연구소에 납품을 시작하고 한국 전역의 유명백화점 20여곳에 전시판매장을 오픈하기로 하는 등 제품의 성능을 인정받고 있다. 이와 함께 미주지역에는 콩사랑 두유기 신제품을 출시했다. 한국에는 레인보우 청소기, 미국에는 콩사랑 두유기로 주력 제품을 정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중인 셈이다. 강 대표는 “어차피 웰빙 추세는 갈수록 강화될 수 밖에 없다”며 “드림라이프는 대형 웰빙제품 판매업체보다는 소비자로부터 신뢰받는 웰빙제품 판매업체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현우 기자 [email protected]

2008-09-12

[한인 장수 업체] 용궁 왕덕정 사장 '맛·서비스' 지켰더니 저절로 유명

“한가지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손님상에 올리겠다는 일념이 지금의 용궁을 만들었습니다.” 부침이 심한 요식업계지만 28년 동안 한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식당 ‘용궁’의 왕덕정 사장이 전하는 장수 비결이다. ‘용궁’이 올림픽과 버몬트에 자리잡은 것은 1980년 8월. LA한인타운과 함께 성장해온 셈이다. 왕 사장은 “음식 맛과 청결, 서비스를 식당 운영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음식 맛 식당의 첫째 조건은 뭐니뭐니 해도 음식의 맛. 왕 사장은 “음식 맛의 출발은 뭐니뭐니 해도 식재료”라며 “나와 내 가족이 먹는 음식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항상 가장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엄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이 주방장의 손 맛. “음식의 깊은 맛은 좋은 재료와 그것을 조리하고 다루는 주방장의 경력에서 우러난다”는 왕 사장은 “5명의 주방장 모두 10년이상의 중식 요리경력을 가진 베테랑들”이라고 소개했다. 때문에 한국식 정통 중화요리의 참 맛을 고객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더해 음식 맛이 항상 똑 같다면 변해가는 고객의 미각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게 그의 지론. 따라서 왕 사장은 요리 서적 뿐 아니라 식당이 새로 생기면 꼭 가서 시식해 보는 등 음식 맛의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왕 사장은 “웰빙 트렌드에 맞춰 건강에 좋은 음식재료를 사용해야만 고객들에 입맛을 따라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청결 식당 위생등급제 시행 이후 줄곧 A만을 유지해 왔을 정도로 왕 사장은 식당 위생에 민감하다. 오전 11시에 시작해 오후 10시에 끝나는 하루 일과 중 출근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주방의 위생을 챙기는 것이다. 왕 사장은 “식사를 하러 식당을 찾았을 때 음식 맛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식당이 청결하지 않으면 그 곳을 두번 다시 가지 않게 된다”면서 식당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선 주방은 고객에게 보이지 않는 장소라도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서슴없이 주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왕 사장의 원칙.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방을 크게 만들고 큰 냉장고를 들여놔 주방 환경을 쾌적하게 만들었다. 왕 사장은 “돈 더 벌겠다는 욕심에 주방을 작게 만들면 이것저것들을 쌓아 놓게 돼 정작 신경을 써야할 청결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고 말했다. 또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깨지거나 부서져 보기 흉한 곳이나 비위생적인 곳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식당 전체의 청결도 체크한다. 용궁은 5년마다 주기적으로 내부공사를 실시하고 있다. 인테리어 뿐 아니라 낡은 테이블 및 의자 교체, 카펫 등 완전히 바꾸는 공사다. 이처럼 정기적으로 리모델링을 하는 것은 식당의 분위기를 바꾸는 효과도 있지만 식당 전체의 이미지를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크다고 왕 사장은 설명한다. ▷서비스ㆍ직원 음식 맛과 청결 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직원들의 친절한 서비스다. 친절한 서비스는 손님을 단골 손님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무기인 것이다. 고객서비스의 기본은 미소와 친절하고 신속한 고객 접대다. 이를 위해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왕 사장을 포함한 전 직원이 참석하는 모임을 통해 서비스의 장점과 문제점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이 모임을 통해 50여명의 직원들은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장점은 강화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문제점은 개선방안을 모색한다. 왕 사장은 “용궁이 28년동안 장수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열쇠는 바로 직원들에게 있다”면서 “정기모임을 통해 식당의 발전을 위해 자율적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내놓는 직원들 덕에 지금의 용궁이 존재하고 있다”고 웃음지었다. 그는 또 단골손님이 용궁을 장수할 수 있게 한 숨겨진 일등공신이라고 귀띔했다. 전체 손님의 60%이상을 차지하는 단골손님들 덕분에 힘든 시기도 쉽게 넘길 수 있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의 말대로 부모의 손에 이끌려 식당을 찾았던 꼬마 아이들이 성장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용궁을 찾고 있다. 그 동안 식당을 찾았을 단골손님의 수가 엄청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왕 사장은 “중식 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달려왔다”며 “더욱 몸에 좋고 더욱 맛있는 한국식 정통 중화요리를 한인들에게 선보일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문의: (213) 387-8833 진성철 기자 [email protected]

2008-09-05

[한인 장수 업체] 옴니푸드 제임스 채 대표 '끊임없이 주류 입맛 연구 개발'

오하나 하우스(Ohana House) 브랜드를 생산하는 옴니푸드(대표 제임스 채)의 지난 27년은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의 연속이었다. 1981년 하와이에서 미국 최초로 만두 생산 공장으로 시작했다. 1966년 이민온 채경석 창업주는 당시 식당에서 손으로 빚어 만두를 판매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한정된 생산양을 대량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일본에서 보고온 만두 대량 생산 시스템을 도입했다. 하와이 호텔들에 만두를 공급하며 핑거푸드의 하나로 주류 시장에 소개했다. 비행기로 뉴욕에까지 만두를 보내기도 했다. 1993년 본사와 공장을 옮겨 남가주 파라마운트에 자리잡았다. 10년 정도 미주 유일의 만두 공장이었지만 일본계 데일리, 대만계 웨이첸 등이 남가주에 만두 공장을 세우면서 경쟁이 시작됐다. 고민 끝에 더 넓은 시장, 풍부하면서 가격 경쟁력이 있는 남가주를 찾았다. 이때부터 휴즈 에어크래프트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큰아들 제임스 채 사장이 합류했다. 먼저 로컬화에 집중했다. 2004년에는 사우스 게이트에 국수 생산 공장을 인수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만두에서 면류까지 주력 아이템이 늘어났다. 유통망을 확장하고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2005년에는 마케팅을 전공한 둘째아들 앤드류 채 마케팅 담당이사가 조인했다. 주류 시장 진출을 본격 착수했다. 한인 시장에서의 한계를 넘어 주류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2006년에도 변화가 많았다. 오개닉 만두를 런칭하며 오개닉 라인의 기반을 닦고 시장을 테스트했다. 11월에는 지분의 85%를 CJ에게 매각했다. 2007년 초부터 주류 시장에서 반응이 나타나더니 1년6개월 만에 성과를 거두고 있다. 채경석 창업주는 CJ에 지분을 매각하면서 옴니푸드를 제임스 맡기고 은퇴했다. CJ가 한인 및 아시안 시장을 담당하지만 회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운영하기로 했다. 2008년 8월 현재 홀푸드 마켓 미전역 180여개 매장에서 오하나 오개닉 만두와 면류를, 코스트코 북가주 50개 매장에서는 오개닉 우동을 만날 수 있다. 코스트코 동부 매장에는 만두도 들어간다. 또 타겟 미전역 매장에는 조만간 올 내추럴 한입 크기 원톤(Bite Size Won Ton) 납품을 시작한다. 지역, 시장, 제품별로 테스트하는 과정을 거쳐 이제 2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2008년 8월 현재 새벽 5시30분부터 시작되는 옴니푸드 공장에서 쏟아지는 만두와 국수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공장은 각각 2만 스퀘어피트 규모로 하루 35~40만개의 만두가 생산된다. 한달이면 800~1000만개. 국수는 또 어떤가. 하루 2만 파운드, 그릇으로 치면 4만 그릇이 나온다. 한달이면 80만 그릇이다. 아이템은 수십가지. 만두만 해도 한인 시장에서는 고기, 부추, 야채 군만두와 물만두 등이 판매되고 주류 시장쪽에는 두부&버섯 교자 군만두를 비롯해 새롭게 개발한 한입 크기 원톤으로 야채 인도 카레, 치킨&실란트로 등을 선보였다. 옴니푸드가 생산하는 만두는 크게 일반 라인과 오개닉 라인, 원톤은 최근 올 내추럴 라인을 완성하고 다음달부터 시판한다. 여기에 주문자상표부착(OEM) 만두까지 하면 회사, 브랜드, 제품 이름은 다르지만 마켓에 나온 현지 생산 만두의 상당 부분은 옴니푸드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면류도 마찬가지다. 한인 시장에서는 칼국수 등이, 주류 시장에는 초메인 스타일, 재패니스 우동, 소바, 그리고 모찌 라이스 플래이크(떡국떡) 등이 있다. 반조리가 특징. 주류 시장에는 오개닉 참기름과 오개닉 간장도 출시했다. 지금까지 사업과 시장을 확장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한국 먹거리가 일본 제품을 대신해서 주류 소비자들에게 소개되고 호평을 받으면 흥분되는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주류 소비자들이 만나는 한국 먹거리가 불고기와 김치에서 아이템이 추가, 저변 확대에 보람을 느낀다. 큰 위기는 없었지만 2003년 만두 파동 당시에는 힘들었다. 만두 파동 이후 1개월동안은 제품이 진열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지 생산이란 것이 알려지고 연방농무부(USDA) 검사관이 상주하고 가주보건국에서 추가로 검사를 받는 등 위생 면에서 엄격했던 부분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만두 파동의 반사 효과로 매출이 2배 이상 늘기도 했다. 지금은 오하나가 아니더라도 USDA 라이선스 번호를 통해 옴니푸드에서 생산한 것을 확인하는 소비자들이 생겼다. 27년을 장수할 수 있었던 것, 미주 최초이자 한인 유일의 만두 생산 공장으로 경험이나 노하우를 전수받거나 기댈 곳 없이 파이오니어(pioneer)로 앞서갈 수 있었던 것은 제품을 특화하고 틈새 시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주류 시장에 진입할 때에는 무조건 한국식을 고집한게 아니라 떡국떡으로 떡국을 만들기 보다는 간장 떡볶이로 맛을 보이는 등 주류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맛을 찾았다. 그동안 쌓았던 신용은 소비자, 협력업체들이 믿음을 보내게 했다. 2008년 8월 이후에도 옴니푸드의 변화와 도전은 계속된다. 먼저 냉동 식품을 다양화할 계획이다. 덮밥도 다시 시도하고 싶다. CJ의 계열사가 되면서 시스템도 체계적으로 잡히고 있다. 옴니푸드의 미주에서의 경험과 시장 및 유통망 노하우와 CJ의 기술력, 그리고 자본이 교류되면서 품질 향상과 제품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옴니푸드는 오늘도 제품과 포장 디자인 등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개발하면서 한인 시장에서 마련한 발판에 2세 등 젊은 피를 영입,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을 위해 한걸음 나아가고 있다. 이재희 기자 [email protected]

2008-08-29

[한인 장수 업체] 제일종합보험 이태형 사장 '남 다하는 친인척 마케팅 사양'

"1990년이 기로였던 것 같습니다." 올해로 32주년을 맞는 제일종합보험의 이태형(50) 사장이 회상했다. 제일종합보험은 상해 및 손해 보험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AIG 세이프코 등 미 주류회사의 보험상품을 받아 한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종업원 상해보험 자동차 보험 주택 및 비즈니스 보험 건강보험 등부터 시작해 최근 2년간은 교회 보험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제일종합보험의 보유하고 있는 어카운트수는 약 3000개에 달하고 있으며 현재 6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제일종합보험은 1976년 지금은 은퇴한 강금배 전사장이 OC지역에서 설립했다. 이후 10년간 OC를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다가 1986년 LA로 진출했다. 이 사장이 제일종합보험에 몸담은 것은 1989년. 그리고 입사 2년만인 1991에 파격적으로 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 사장은 "당시만해도 '보험에이전트는 10년 일하고 30년을 은퇴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며 보험업계 입문 계기를 밝혔다. 하지만 이 사장이 입사한지 1년만에 강 전사장이 건강문제로 쓰러지며 제일종합보험 경영을 할 수가 없게 됐다. 회사의 수장이 빠지면서 제일종합보험은 빠른 속도로 경영난에 빠지게 됐다. 그때 이사장이 회사 경영난 해소를 위해 개인적인 자금을 투자 1991년 제일종합보험을 코퍼레이션으로 새롭게 정비해 지금까지 경영해오고 있다. ▷루키에서 경영진까지=이 사장은 신입 에이전트에서 경영진으로 유례없을 정도로 빠른 시일 안에 발돋움했다. 89년 보험 업계 처음 뛰어들었고 91년 제일종합보험을 코퍼레이션 체제로 재정비하는데 까지 걸린 기간은 2년. 이 사장은 "신입 에이전트지만 빠른 시일안에 좋은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며 "그러면서 제일종합보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입사 6개월만에 3~4년차 보험에이전트의 실적을 올렸다. 제일종합보험에서 그가 첫 6개월간 올린 총보험료는 150만달러 규모다. 입사 9개월후 그의 월수입은 1만달러에 달했을 정도다. 그는 "회사에 남기로 결정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회사를 살리기 위해 개인적으로 모아뒀던 자금을 투자했다"며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영진으로 합류했다"고 말했다. ▷남들과는 다른 길=에이전트로서 좋은 성과를 올리고 경영인으로서 경쟁이 심한 보험업계에서 살아남을수 있었던 비결은 '남들과는 다른 길을 택한다'는 그의 방침 때문이다. 보통 신입보험에이전트가 보험 상품 판매를 위해 가장 쉽게 택하는 방법이 바로 친인척이다. 친인척 친구 등을 찾아 영업을 하는 것. 그러나 이 사장은 다른 길을 택했다. 무작정 모르는 사람 가게를 찾아다녔다.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손님들을 대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마케팅 방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 사장은 "긍정적인 마인드로 손님들이 '노(No)'보다는 '예스(Yes)'를 대답하도록 유도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은 "나중에 전화부탁드립니다"보다는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드리면 통화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선호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전화를 걸면 상대방과 대화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상품보다는 여러가지 상품을 정확하게 소개해 손님들이 보험 상품을 직접 고르도록 준비하곤 했다. 꼬치 꼬치 캐묻는 까다로운 손님도 마다하지 않았다. "쉬운 손님보다 까다로운 손님들이 한번 가입하면 보험을 오래 유지하시더라구요. 쉽게 보험에 가입한 손님들은 결국 1~2년이면 보험을 해약하곤 하죠." 이같은 방법은 제일종합보험 경영에서도 나타났다. 한창 봉제업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종업원 상해보험쪽을 그러다가 트럭킹 보험을 최근에는 교회보험을 가지고 소비자들을 공략했다. 각종 매체를 통해 또는 고객들을 만나면서 경제 동향을 파악하고 다른 한인 에이전시들이 잘 다루지 않는 보험 상품을 들고 틈새시장을 공략한다는 것이다. ▷함께하는 성장=이 사장의 경영철학은 '손님이 잘 돼야 보험 에이전트도 산다'다. 손님들의 비즈니스가 잘 안되면 결국 그 영향은 제일종합보험에도 미칠 수 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손님들을 직접 방문하고 좋은 아이디어를 권하는 등 함께 비즈니스가 성장할 수 있도록 상의한다. 이 사장은 "같은 가게라도 주인이 바뀌면 비즈니스의 명암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며 "잘못된 점을 함께 이야기 하면서 손님들의 비즈니스가 잘 되도록 하는 것이 제일종합보험의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손해.상해보험 전문회사에서 새롭게 '자산관리'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준비중이다. 이 사장은 "손님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제일종합보험으로 항상 한인들과 함께 남아있고 싶다"고 말했다. 서기원 기자 [email protected]

2008-08-22

[한인 장수 업체] 고바우…족발·보쌈 '변치않는 명성'

LA한인타운 7가와 버몬트 애비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고바우. 족발과 보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명가인 고바우가 올해로 25년이 됐다. 고바우는 1983년 베벌리와 웨스턴이 만나는 곳에 콩비지와 빈대떡으로 한인타운에 문을 열었다. 백금인 사장은 "데판야끼를 하던 곳이라 후드와 그릴이 있어 시설에 맞게 빈대떡을 메뉴로 정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백 사장이 미국에 온 것은 76년. 여행을 유난히 좋아하던 백 사장은 한국에서 다니던 수출회사 사장에게 부탁해 미국 비자를 어렵게 받아 여행을 위해 멀리 태평양을 건너왔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혈혈단신 호기롭게 낯선 땅을 밟았지만 먹고 사는 일마저 해결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당시는 사람사이 따뜻한 정이 있던 시기라 현재 한인타운 인근 아파트를 얻어 일하면서 여러 한인들과 정답게 생활했었다고 한다. 백 사장이 기억하는 70년대는 한 마디로 '남청여재'의 시대다. 당시 한인들은 약 3만명 정도로 직업도 많지 않아 대부분 남자는 청소부 여자는 재봉하는 것이어서 이런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요즘에도 자주 듣는 누가 공항에 마중나왔는가에 따라 이민생활의 생업이 결정된다는 것도 그 당시부터 시작된 전설(?)이라고. 백 사장이 요식업을 시작한 것은 아내를 만나고 난 후. 결혼 6개월 뒤 벨플라워에 있는 한 햄버거가게를 인수해 지금까지 식당업에 종사하게 됐다. 스테이크를 길쭉하고 맛나게 구운 '스테이크샌드위치'의 명성 덕분에 힘든 이민생활을 빨리 정착할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백 사장은 서울 종로 YMCA 근처에서 최초의 요리학원을 세운 김 할머니를 LA로 초청해 주방장을 맡겨 한식당을 열었다. 맛난 음식을 좋아했지만 요리는 잼병이었던 백 사장은 김 할머니의 솜씨를 믿고 주방을 맡겼던 것. 그러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맛과 식당에서 서비스하는 맛의 차이는 현격했다. 결국 손님들이 하나둘씩 줄어들자 백 사장이 직접 주방에 들어갔다. 몇날며칠을 맛에 대해 연구해 백 사장은 마침내 주방일을 직접 맡는 수준에 이르렀고 그러던 중 베벌리길의 일식 데판야끼 집이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계약했다. 가게이름은 고바우로 정했다. 당시 신문의 4컷 시사만화 주인공 '고바우영감'의 서민적인 이미지에서 가게이름의 영감을 받았다고. 백 사장은 "당시 서슬이 시퍼렇던 전두환정권 시절에도 서민을 대변하던 고바우영감의 시원한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면서 "고바우영감처럼 이민생활로 고달픈 한인들에게 맛으로라도 위안을 주고 싶어 메뉴도 보쌈 족발로 정했다"고 말했다. 평안도 출신이라 돼지고기에 자신있던 것도 백 사장이 메뉴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맛이 소문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자 메뉴를 추가했다. 한인타운에서 처음으로 순두부를 서비스하기 시작했다는 것. 고바우는 날로 번창해갔고 13년전인 9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원래 샤브샤브 전문집이었지만 5년간 주인이 3번이나 바뀔 정도로 고전하던 곳이지만 한인타운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렌트비도 당시 저렴했던 것도 옮긴 이유다. 백 사장이 오랜동안 터줏대감으로 한인타운을 지키니 에피소드도 많다. 백 사장은 어느 날 한 중년부부가 고등학생된 자녀를 가리키며 "우리 부부가 고바우 다니며 연애하고 결혼해서 낳은 애가 이 애"라고 인사받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또한 84년 LA올림픽 때는 한국 대표팀에 김치를 공급해 주었던 것도 보람찬 일이었다고 백 사장은 기억한다. 고바우의 장수비결은 음식의 맛이 세월이 흘러도 옛 맛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바우의 보쌈과 족발 맛이 꾸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백 사장이 주방장으로 모든 음식 레서피를 만들기 때문이다. 25년간 직접 소스를 만들고 기본재료를 손질하니 맛이 한결같을 수밖에 없고 손님은 예전의 그맛을 찾아 다시 온다는 게 백 사장의 설명이다. 백 사장은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 우선은 평안도 출신답게 냉면을 메뉴로 추가하고 싶다고 한다. 더 큰 목표는 한국의 자랑스런 문화를 한인 사회 나아가 미국 사회에 전파하는 것이다. "헐리우드에 일본을 상징하는 야마시로 식당이 있고 뉴욕 플러싱에는 전통 한정식집 금강산이 있다"면서 "한인규모가 가장 큰 LA에 제대로 된 한정식집이 없다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고 백 사장은 역설했다. 고서화와 그림 도자기 등에도 조예가 깊은 백 사장은 고바우를 한국의 맛과 문화를 알리는 식당을 만들고 싶어 2000년 한국에 들어갔었다. 오래된 한옥의 청기와 등을 미국에 가져오려고도 했던 것. 하지만 당시 LA 한인타운의 건물가격이 너무 비싸 실현할 수 없었다고 백 사장은 회고한다. 백 사장은 "한인타운에 건물을 구입해 푸른 기와를 얹어 자랑스런 한국 전통의 미와 맛을 알릴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다"며 "가격이 아니라 전통 한정식을 서비스하는 것이 오랜 꿈"이라고 말하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백정환 기자 [email protected]

2008-08-15

[한인 장수 업체] 제이타운 캐이 전 대표 '싸게 사서 싸게 팔았더니 롱~런'

여름 세일이 한창이던 7월 어느 날 제이타운. 800스퀘어피트 규모의 작은 매장은 화장품을 사려는 고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 끊이지 않고 손님이 들어왔다. 모두가 허덕인다는 불경기도 제이타운은 비껴가는 듯 했다. 한인 여성 중 제이타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제이타운이 갸우뚱한 올드 타이머들에게 세시봉이라고 하면 무릎을 딱 칠 것이고 둘다 모르겠다는 이민 초보자들에게 화장품 싼 집이라고 하면 통할 것이다. 제이타운(대표 캐이 전). 1977년 LA한인타운 웨스턴과 8가에서 세시봉으로 시작했다. 1997년 지금의 웨스턴과 9가 로데오 샤핑몰로 옮기면서 제이타운으로 바뀌었다. 1983년쯤 세시봉을 인수 지금까지 25년동안 제이타운을 이끌어온 캐이 전 사장은 "정말 잘 나갔다. 장사도 정말 잘 됐다"고 전했다. 전 사장의 말대로 제이타운은 그야말로 유명했다. 80년 90년대에는 LA국제공항에서 제이타운 주소를 대는 보따리 장사들이 부지기수였다. 한국에도 제이타운 소문이 났다. 미제가 인기를 끌던 시절 제이타운이 남대문에 물건을 주지 않으면 팔 수 없을 정도로 좌지우지했다. 한국의 유명 연예인들도 LA를 방문하면 제이타운을 꼭 들르곤 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세일 때는 하루 최고 1000명이 찾았다. 못해도 600~700명이 화장품을 사갔다. 세일이 끝나는 날에는 매장이 흔들렸다. 연말에는 매장에 들어오지 못해 그냥 돌아가는 손님도 허다했다. 한인 여성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동안 제이타운이 인기인 이유는 뭘까? 바로 가격이다. 고급 브랜드 화장품을 정말 싼 가격에 판다. 너무 싼 탓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손님도 있다. 유통기한이 지난 건 아닌지 혹 짝퉁은 아닌지. 결코 아니란다. 그렇게 장사할 순 없다는게 전 사장의 지론이다. 게다가 요즘 소비자들이 얼마나 똑똑해졌는데. 까다롭다. 날짜와 포장은 물론 내용물을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는 등 꼼꼼히 확인한다. 또 인터넷 발달로 정보가 많아 화장품에 대해 박식하다. 전 사장은 "전에는 한국의 보따리 장사 지금은 온라인 샤핑몰 등 소매 뿐만 아니라 도매를 하기 때문에 대량 구입이 가능하다"며 "컨테이너째로 물건을 싸게 사서 박리다매로 싸게 파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30년동안 쌓은 네트워크가 장난이 아니다. 구입처와 인맥이 탄탄하고 라인이 빵빵하다. 좋은 물건이 나오면 라인을 통해 먼저 제안이 들어온다. 좋은 가격으로 딜을 하기가 유리한 것이다. 전 사장은 "정품이 분명하다"며 "정품이 아니거나 터무니없이 세일하면 기껏 뚫어놓은 라인이 잘리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코스트코 등에서 브랜드 화장품을 백화점보다 싸게 파는 것처럼 비슷한 유통라인을 통해 싸게 들여와 싸게 파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 매장은 작지만 제품의 다양성 만큼은 자신있다. 싼 화장품부터 비싼 것까지 다 있다. 매장 벽면과 진열장을 빼곡히 채운 것도 모자라 3개의 창고에도 물건이 가득하다. 싼 가격과 제품구성으로 제이타운은 그동안 한인 화장품 시장을 리드했다. 제이타운이 세일을 한다고 하면 서울에서부터 전화가 오고 타주에서는 제이타운 세일에 맞춰 LA로 직접 올 정도다. 제이타운의 세일은 충분한 물량을 확보한 다음 시작된다. 싸게 사서 싸게 판다는 전 사장의 말대로 제이타운은 보통 수백개 수천개를 사기도 하지만 주로 만 단위로 산다. 만 단위로 사면 재고 부담이 클 수 밖에 없는데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 최고 히트상품은 랑콤 컴팩트. 무려 4만개를 사서 4만개를 팔았다. 이를 위해서 뒷받침돼야할 것이 있다. 바로 만 단위의 화장품을 살 수 있는 재정정 능력. 또 만 단위의 화장품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제품을 보는 눈이다. 좋은 물건이 있다며 들어오는 수많은 제안 중에 이 물건은 되겠구나 하는 감이 딱 온다. 물론 기대에 미치지 못한 물건도 있었다. 재고를 만들지 않기 위해 원가 또는 원가 이하에 팔기도 한다. 여러 아이템을 취급하다 보니 마진폭을 조절하면서 원가 이하에도 팔 수 있다는 것. 현재 55세 캐이 전 사장. 20대 중반부터 화장품 업계에 뛰어들어 세시봉 제이타운으로 잔뼈가 굵었다. 지금은 한인 화장품 업계 맏언니다. 향수만 수백종류 미국 유럽 일본 고급 화장품에서부터 선글라스와 지갑 벨트 등 액세서리 건강보조식품까지 각종 귀국선물로 이름을 떨쳤다. 올해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전만 못하다. 매상이 20%는 줄었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 신뢰만큼 큰 재산은 없다'는 신조를 따라 신뢰로 이 불경기를 헤쳐나갈 계획이다. 이재희 기자 [email protected]

2008-08-01

[한인 장수 업체] 정음사 '바른 글자 알리자' 90년 전통

"바른 소리를 전해주자는'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LA한인타운 코리아타운 플라자 1층 서점 정음사의 마크 최(40) 사장의 설명이다. 정음사는 올해로 남가주에서 32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정음사'라는 이름은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올해로 90년. 최 사장의 조부인 고 최현배씨가 1928년 한글 서적 출판사인 정음사를 세운 것이 시작이다. 최 사장은 "바른 소리(글자)를 알리자는 의미의 이름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지으신 것"이라며 "비록 출판에서 판매로 분야는 조금 바뀌었지만 그 뜻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 문을 닫은 정음사의 명맥은 남가주에서 이어지고 있다. 부친인 고 최성혜씨가 1976년 도미하면서 다시 '정음사'라는 이름으로 한글 서적 유통업으로 시작한 것. 그리고 1977년 올림픽과 아드모어 VIP플라자에서 한인들을 위한 서점을 오픈하며 소매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한인들은 한국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죠. 아버지께서 이런 수요를 느껴 소매 서점을 오픈 함께 운영을 하셨죠." 이후 1988년 코리아타운 플라자가 오픈하면서 매장을 옮겨 20년을 한 자리에서 영업하고 있다. 최 사장이 바로 정음사를 이어받았던 것은 아니다. 할리우드 음향회사 사운디럭스사에서 음향편집기사로 6~7년을 일했었다.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영화 '본아이덴터티'도 그가 작업한 작품 중 하나다. 하지만 2002년 할리우드 경력을 뒤로 하고 정음사를 이어받았다. 그는 "1994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누나가 정음사를 꾸려나가고 있었는데 힘에 부쳐하시곤 했다"며 "마침 음향편집기사로서 일하면서 많이 지친 상태여서 고민 끝에 정음사를 물려받기로 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최 사장과 부인 최보라 사장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서점 경영이나 책 선정은 최보라 사장이 담당하고 마크 최 사장은 주로 뒤에서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최보라 사장이 없었으면 정음사를 이어받는다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며 "아무래도 1.5세라 한글이 약한 편인데 최보라 사장이 그런 부분을 잘 채워주고 있다"고 전했다. 정음사는 소매 판매와 함께 USC 도서관 등 도서관 및 학교에 한국책을 유통하고 있다. 마크 최 사장이 코리아타운 플라자 정음사에서 가장 강점으로 여기는 부분은 바로 아동 서적과 영문 서적 섹션이다. 태교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아동들을 위한 다양한 서적을 준비했다. 단순히 교과서나 교재가 아닌 아동들이 자라면서 필요한 책들이 많다. 최 사장은 "두 자녀를 키우면서 '애들한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책이 뭘까' 고민을 하게 되면서 아동 서적 섹션을 따로 두게 됐다"며 "부모의 마음으로 고민한 만큼 아동 서적을 찾는 부모님들에게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아동 서적 섹션 뒷편으로는 영문 서적 섹션이 있다. 바로 한국 관련된 영문 번역 서적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한국이나 한국 문화에 대한 소개서부터 영문으로 번역된 한글 소설 등 문학 작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어가 약한 1.5세나 2세들이나 타인종 손님을 위해 준비해놨다. "정음사를 물려받으며 가장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을 알리는 것이었죠. 그래서 영문으로 번역된 한국 관련 서적을 준비했는데 의외로 미국 손님들도 이 때문에 일부러 정음사를 찾고 있습니다." 대형서점들이 앞다퉈 LA한인타운에 입점하고 있지만 정음사를 찾는 손님들은 꾸준한 편이다. 30년전 VIP플라자 시절부터 찾는 손님들이 아직까지 있다. 이처럼 정음사가 30년을 한인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이유로 최 사장은 친절함을 꼽았다. 책을 사러 온 손님이 아니더라도 매장에 발을 들이는 누구에게라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정음사다. 때로는 손님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이처럼 손님들을 친절하게 정겹게 대하는 모습은 최 사장이 어려서부터 봐온 아버지의 모습이다. 최 사장은 "어려서 부모님 비즈니스를 도우러 자주 정음사에 나오곤 했다"며 "그 당시 아버지가 손님들을 대하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요즘 대형 서점들이 LA한인타운에 입점하며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꾸준히 정음사를 찾아주는 손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부쩍 많이 든다"며 "모든 손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니 자연스럽게 더 친절하게 대하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음사를 물려받고 나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는 최 사장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꿈이 있다. 그는 "좋은 책들을 골라 한인 및 타인종 손님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정음사'의 맥을 이어 더욱 발전시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문의:(213)738-9140 서기원 기자

2008-07-18

[한인 장수 업체] 이화식품상사 조영섭 사장, 한인이 먹는 고기 60% 공급

하루 3만5000파운드 일주일 20만파운드 한달 80만파운드 일년 1000만파운드. 이화정육 아니 정확히는 이화식품상사(사장 조영섭)의 육류 취급량이다. 82년 150만달러 2007년 4500만달러. 25년새 30배가 불은 이화정육의 연매출액이다. 마켓과 식당 등 한인 정육 시장 점유율 60% 남가주는 물론 미동부와 하와이까지 미전역에 걸친 거래처는 350곳. LA한인타운에서 소비되는 육류의 절반을 이화정육이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화정육은 1982년 고기 도매상으로 시작했다. 올해로 26년째. 지금은 도매에서 나아가 연방 농무부(USDA)가 공인하는 패커로 성장했다. 한인 정육 도매업체들은 많지만 패커는 드물다. 헌팅턴 파크에 자리한 본사이자 공장 크기는 5만스퀘어피트. 3년전 LA다운타운 7가와 인더스트리에 마련한 웨어하우스 역시 5만스퀘어피트 규모다. ◇고기가 먹고 싶다 이화정육은 정육 외길을 걸었다. 주류 시장 공략 시도도 가공공장 설립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라틴계 등 타인종 및 주류 시장에서 취급하는 부위는 한인 시장과 달랐다. 수백만달러를 투자해 가공공장을 설립하고 반제품을 생산하는 것도 막상 뛰어들려니 위험이 따랐다. 생각처럼 계획처럼 쉽지 않았다. 방향을 틀거나 실행을 보류했다. 정육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사업 다각화를 위한 구상은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왔다. 육류 도매와 패커로. 하나 하기도 힘들다. 한가지라도 제대로 잘하자. 전문성을 키우자. 그게 이화정육이 업계에서 확실한 위치를 다지고 선두업체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안전경비구역EHWA 이화정육은 USDA의 허가를 받은 패커다. USDA의 위생 조사관이 상주하며 고기가 들어와 나갈 때까지 전과정을 철저히 검사한다.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이다. 이화정육이 한인 마켓과 식당에 공급하는 고기는 엑셀 IBP 등 주류의 메이저 종합정육회사의 것들. 가격 주문 등에 대한 조건이 까다롭지만 지역 브랜치보다는 본사와 거래하는 쪽을 고집한다. 엑셀 텍사스 본사 등 미전역 정육공장 및 창고로부터 부위별로 육류를 받는다. 좋은 고기를 고르기 위한 선택이다. 그만큼 품질에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노하우를 터득했고 양질의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공급할 수 있었다. ◇가족의 탄생 이화정육의 직원 아니 가족은 35명. 취급량과 매출액에 비하면 직원수가 적다. 자칭 소수 정예 부대. 그래서 가족같다. 아니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마음 분위기가 빠지면 끝이다. 10년 20년씩 함께 일해온 직원들. 동료 상사에서 친구로 지금은 가족이 됐다. 육류공장답게 점심시간에는 다함께 모여 고기를 구워먹는다. 2층 식사하는 공간과 사무실에는 구이냄새가 가득하다. 토요일에는 다함께 골프를 치러나간다. 골프를 치지않던 골프에 관심이 없었던 직원들도 이화정육에 들어와 골프를 시작했다. 가족적인 분위기 직원들은 회사를 아낀다. 이화정육. 항상 거침없이 달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92년 4.29폭동과 94년 노스리지 지진 때에는 매출이 50% 떨어지며 곤두박질했다. 그 여파로 6개월동안 막대한 적자가 났다. 허리띠를 졸라메야했다.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힘들 때 가족을 버릴 수 없듯이 이화정육은 단 한명의 직원도 해고하지 않고 함께 갔다. 그렇게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2003년 광우병 파동이 터졌다. 매출 30% 감소. 다시 위기. 그래도 이화정육의 선택은 같았다. 힘든 시기를 함께 헤쳐나가며 그렇게 끈끈해졌다. 10년 20년이 된 직원들의 경험과 노하우 기술도 그만큼 쌓였다. 35명이 엄청난 고기양을 처리할 수 있는 이유다. 지금도 좋은 환경은 아니다. 사료값 고기값 운송비 다 올라가는데 마켓과 식당에서의 소비는 줄었다. 한국으로의 쇠고기 수출 재개로 특수를 누릴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물량이 늘어나 바잉파워가 생기는 것은 맞지만 마진이 좋지 않아 이익 내기가 좋지 않은 구조다. 변수도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이화정육. 지금까지처럼 고기 하나만 보고 품질과 안전을 생각하며 가족과 함께 흔들림없이 정육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이재희 기자 [email protected]

200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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