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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목회] 자존감 높은 집은 행복을 누린다

이민목회는 자존감을 높여준다.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만일 인간이 자기가 하는 일을 스스로 평가하는 부분에 있어 '자기 만족감'이 없다면 그 일을 지속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은 자기만족감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 일을 열심히 한다. 그러면 어떻게 자존감을 높여 줄 수 있는가? 첫째 말을 통해 자존감을 높여준다. 말은 사람의 태도를 측정하는 수단이다. 말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므로 사람의 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분의 인격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말은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은 상대의 자존감을 살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민교회에서 강조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말로서 이민자들의 자존감을 살려주는 일이다. 둘째 관계를 통해 자존감을 높여준다. 이민사회에서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일이 쉽지 않다. 북미주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귀는 일이 단순하지 않기에 친구를 만나는 것이 신중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막연한 한 친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자를 찾는 일이므로 더욱 조심스럽다. 이민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진정한 대화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나와 인격적인 관계속에서 맺어진 친구 이러한 친구야말로 힘든 이민생활의 활력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셋째 가정을 통해 자존감을 높여준다. 이민생활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은 바로 가정이다. 이민생활의 성공은 가정생활의 성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가정의 행복은 자신의 자존감을 올려주는 큰 역할을 한다. 가정의 행복과 기쁨은 곧 이민자들의 행복을 만끽하게 만든다. 행복한 이민자들을 보라! 그들의 가정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존감은 행복한 가정을 통해 나타난다.

2009-09-08

[생활 속에서] '예배만 달랑 한 번' 이라니…

"예배만 달랑 한 번…"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듣기 거북한 말 중 하나는 "예배만 달랑 한 번…"이라는 말이다.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예배만 달랑 한 번…"이라고 강단에서 말하며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 이상은 교회에 나와야 믿음 있는 사람인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예배에 자주 참여하고 교회 모임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귀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만 믿음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교회문화는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이민자 중에는 교회에 예배 달랑 한 번 드리는 것조차도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일주일에 한 번 예배에 참여하는 일은 쉽지 않다. 믿음이 있지만 예배에 한 번밖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한데 묶어서 "예배만 달랑 한 번 참여하는 믿음 없는 자"로 취급해 버리면 이 얼마나 근시안적인 발언인가. 예배만 달랑 한 번 참여해도 삶이 바뀔 수 있다. 가치관이 바뀔 수 있다. 그 예배에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소위 은혜를 받고 교회 안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선교지에서 자신이 깨달은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이 여러 상황에 있을 터인데 "예배만 한 번 달랑…"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출석하는 교회의 예배에서 필자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깊은 영적인 만남 같은 게 느껴지고 마음에 위로를 받는다. 그런데 나는 "일주일에 예배만 달랑 한 번 드리는" 사람이다. 일주일에 드리는 그 한 번의 예배가 기대가 되고 소위 말해 '영빨'을 받을 준비를 하며 달랑 드리는 그 한 번의 예배에 나는 집중한다. 다행히도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주일 예배 준비를 위해 시쳇말로 목숨을 거는 교회인 것 같다. 그래서 달랑 한 번의 예배만으로도 채워짐이 있고 세상 속에 나갈 힘을 얻게 된다. 사족을 달자면 예배는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영적인 행위다. 인간에게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12개의 신호 시스템이 있는데 예배는 바로 12개 대부분을 사용한다. 말 문자 숫자 그림 소리 몸의 움직임 시각 촉각 공간 조형적 표현 맛과 향기가 그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예배를 싫어하고 지루하게 생각하면서 그 빈 공간을 영화와 스포츠 경기로 대체한다고 한다. 아마도 예배에 12개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모두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12개 신호를 사용하는 것은 신이 주신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사용하는 영적인 행위다. 교회 지도자가 예배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인간에게 주어진 12개 신호 시스템을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12개의 신호를 최대한 사용하는 스포츠와 영화에 젊은이들을 잃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2009-09-08

[사목의 향기] 가난은 죄가 아니다

힘있고 부유한 나라 미국이라는 이미지와 크게 대조되는 것은 거리의 수많은 집 없는 사람들과 그들의 손수레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가난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용사회라는 미국에서의 삶은 보통 자기가 쌓은 신용도만큼의 돈을 은행에서 빌려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자동차와 집을 사고 가게를 사서 돈을 벌고 은행 빚을 갚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좋은 점은 비록 지금 저런 것들을 살 현찰을 모아 놓지 않았어도 소유의 기쁨을 미리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장사가 안되고 소득이 없어 빚을 갚지 못하면 저 집 없는 사람 대열에 서 있을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고 또한 이것이 실패한 사람의 현실이다. 실패한 사람의 반응은 수치심을 넘어 거의 죄의식을 느낀다. 좌절하여 온 가족이 동반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같이 한번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면 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사회구조 때문에 부만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도 세습되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저주 받은 것처럼 자신들의 삶을 비관하게 된다. 신용사회의 틀에서 신용점수가 없는 사람으로 분류된다는 것은 마치 죄인이 감옥에 갇히듯 격리되는 것이고 그 자체가 벌받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난은 죄가 아니다. 복음의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신다. (마태 53) 이때 행복한 이유는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와 현세지향적 행복론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의 소유가 과연 희망이며 행복일 수 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루카 복음(루카 620) 이 전하는 부자들에 대한 재앙 선언은 부자들이 구가하는 행복을 시샘하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 있다거나 분배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찾는 교과서일 수는 있어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면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복음적 청빈으로서의 가난의 영성적 의미를 깨닫고 가난의 행복 선언과 부자의 재앙 선언의 진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부자들은 풍부한 재산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자만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무능함과 허약함으로 인하여 낮아진 마음으로 겸손해지고 무조건 겸손한 자의 편을 드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 하늘 나라가 그들에게 선사된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하여 깨달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황제의 아들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 되셨고 왕비의 침실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이같이 시간과 공간에 제한당하는 것을 무조건 수용했던 예수님의 겸손은 하느님의 뜻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었다. 이 겸손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누릴 행복의 근거로 제시된 낮아진 마음이며 하느님을 높이는 마음이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참 인간의 태도인 것이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동참하기 위하여 배고픔과 목마름과 궁핍을 겪으셨다.마침내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령하시고 자선활동을 교회가 수행해야 할 의무로 지워주셨다. 그러므로 부의 축적이 교회의 목적일 수 없다. 하느님 백성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는데 필요한 사랑과 자선의 활동에 주어진 재화를 사용해야 한다. 복음적 가난의 정신은 하느님을 찾는 열망이며 그분을 향한 완전한 자유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난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한 특권이다.

2009-09-08

[지혜의 향기] 뜬소문은 이레를 넘지 않는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슈라바스티에 이르렀을 때 그 고장에는 아지바카 교라는 외도가 성행하여 백성들을 그르치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거리로 나가 바른 법으로 깨우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새 등불 밑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추종자들을 빼앗긴 외도의 우두머리들은 단단히 앙갚음을 꾀했다. 그 때 그 곳에는 순다리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수행을 하고 있었다. 외도들은 이 여인을 꾀어 부처님이 계시는 정사 주위에 자주 나타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이렇게 얼마가 지난 후 그들은 이 여인을 참혹하게 죽여 정사 근처 숲에 몰래 버리고는 임금에게 가서 여인의 발자취가 종내 사라졌다고 아뢰었다. 임금은 소문을 좇아 정사 둘레를 뒤져 순다리의 주검을 찾아내었으니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단박에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말았다. 다음 날 부처님과 제자들이 탁발하러 거리로 나서자 사람들은 저 자들이 여인을 죽였다면서 문을 걸어 닫고 돌팔매질까지 하였다. 놀라고 실망한 제자들이 이제 슈라바스티를 떠나자고 부처님께 여쭙자 부처님은 조용히 타이르셨다. 사람들이 너희를 버릴지라도 너희가 어찌 사람들을 버리겠느냐? 삿된 길이 어찌 부처의 길을 막겠느냐? 이러한 비방은 이레를 넘지 않으리니 이레만 참고 기다려 보자. 이렇듯 여인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삿된 이들이 잘 써먹는 무기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부처님의 법이 이때도록 끊이지 않고 내려옴을 보니 아마도 그 소문은 이레를 넘기지 않고 진실에 자리를 내어줬나 보다. 동서 냉전이 한창일 때 미국에서는 매카시 선풍으로 빨갱이 사냥이 한창이었고 소련에서는 반동분자 인간사냥이 벌어졌었다. 온 지구촌도 덩달아 두 편으로 쫙 갈라졌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그 일에 얽힌 자가 내 편인지 네 편인지만을 따졌다. 내 편이면 무조건 편들었고 네 편이면 볼 것 없이 쓸어버릴 대상이었다. 그 냉전이 사라진 지 한참이 되었건만 후유증은 아직 도처에 남아있다. 작은 나라 주변 국가일수록 마지막 기승을 부린다. 왕초들은 이미 악수하며 점잖게 거래를 끝냈는데 뭘 모르는 똘마니들은 아직도 골목에서 악다구니하는 모양새다. 이는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데 종교란 좀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결국 죄 짓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없어도 상관없는 게 종교가 아닐까? 여인을 죽여 몰래 버린 슈라바스티의 외도들같이 시샘을 부려 앙갚음을 하고 편을 갈라 폭력을 동원하는 것이 종교라면 도대체 그런 종교가 왜 있어야 하는 것일까? 지난 시절 불행히도 한국 사람들은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은 탓으로 냉전의 희생양이 되어 숱한 목숨을 버렸다. 그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는 이 때 그보다 더 큰 희생이 따를지도 모를 종교 냉전의 꺼림칙한 불꽃이 여기저기서 이따금 혀를 날름거린다. 냉전이든 종교전이든 세상의 참사들 중에는 별 것 아닌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 많다. 혹시 다른 종파니 이단이니 타종교니 외도니 하는 곳에서 말도 안 되는 뜬소문이 흘러나오거든 군중심리에 흥분하거나 조건반사적으로 나서지 말고 차분히 기다릴 일이다. 부처님처럼 적어도 이레는 참고 기다리자. 소문은 차차 잦아들면서 조금씩 진실은 드러나고 세상도 내 가슴도 어느덧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2009-09-08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미운 오리 새끼와 백조

#풍경1: '미운 오리 새끼'가 있었죠. 모두가 그를 "오리!"라고 불렀습니다. 자신도 철석같이 "나는 오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오리처럼 걷고 오리처럼 헤엄치고 오리처럼 소리를 냈죠. '꽥! 꽥! 꽥! 꽥!' 그렇게 세월이 흘렀죠. 그런데 자라면서 '미운 오리 새끼'에겐 물음이 하나 생겼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진정 무엇일까?" 물음은 갈수록 깊어졌습니다. 그러다 하늘을 날아가는 한 무리의 백조 떼를 보게 됐죠. 미운 오리 새끼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들은 대체 누구일까? 어떻게 하늘을 나는 거지?" 그러면서 자신의 겨드랑이에 붙어있는 날개를 봤죠. "왜 저들은 날고 나는 못 나는 거지?" 물음은 더욱 강하게 올라왔습니다. 오리는 그걸 깊이 아주 깊이 물었죠.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죠. "아하! 나는 본래 오리가 아니구나. 나는 백조구나." 그 순간 그는 날개를 펼쳤죠. 그리고 힘껏 퍼덕였죠. 미운 오리 새끼는 저 푸른 창공을 날기 시작했습니다. #풍경2: 사람들은 말하죠. "그건 '미운 오리 새끼' 얘기잖아? 그는 본래부터 '오리'가 아니라 '백조'였다고. 우리와 다르다니까. 우린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진짜 오리 새끼'라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못을 박습니다. "나는 날 수가 없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꽥! 꽥! 꽥!'하고 오리 소리밖에 낼 수가 없어. 왜냐고? 나는 정말 오리니까." 과연 그럴까요? '백조들'의 대답은 다릅니다. 그들의 주장은 파격적이죠. "세상의 모든 오리가 실은 백조다!"라고 외칩니다. 그런 '백조'가 누구냐고요? 2500년 전에 살았던 고타마 붓다죠. 1600년 전에 깨달음을 얻었던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입니다. "여러분은 본래 부처다. 세상의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다." 바꿔 말하면 "여러분은 본래 백조다. 세상의 모든 오리가 본래 백조다"란 겁니다. 그럼 의문이 생기죠. "내가 정말 백조라면 나는 왜 '꽥! 꽥! 꽥!'하고 오리 소리를 낼까?" "내가 정말 백조라면 나의 날개로 왜 하늘을 날지 못하는 걸까?" "내가 정말 '부처'라면 나는 왜 스트레스를 받고 짜증을 내고 번뇌를 일으킬까?" 그러고는 투덜대죠. "그러니 못 믿겠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길 대체 어떻게 믿겠어?" '백조들'은 이 물음에도 답을 합니다. "우리 안에는 무한한 에너지가 있다. 누구나 그걸 뽑아서 쓰는 거다. 오리는 오리의 에너지로 바꿔서 쓰고 참새는 참새의 에너지로 바꿔서 쓴다. 그래서 오리는 '꽥! 꽥!'하고 참새는 '짹! 짹!'하는 거다. 그러니 오리도 참새도 이미 '부처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 거다. 다만 '나는 오리다' '나는 참새다'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못 박았기에 스스로 울타리를 쳤기에 '딱 그 만큼의 에너지'만 쓸 수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백조는 그 울타리를 걷었기에 하늘을 날았던 겁니다. 그러니 오리 따로 백조 따로가 아니죠. 중생 따로 부처 따로가 아닙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이 보이네요. "나는 오리다" "나는 참새다"하며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를 걷어내는 거죠.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내게 저런 능력은 없어" "세상은 이래야만 돼"라고 하는 고정된 틀을 내려놓는 거죠. 그럼 무엇이 남을까요? 그렇습니다. 내 안에 있는 무한한 에너지만 남는 거죠. 그걸 우린 마음껏 뽑아서 마음껏 쓰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고정된 생각은 항상 에너지를 막는 장벽이 됩니다. 그래서 장벽을 허무는 겁니다. 장벽을 완전히 무너뜨렸던 붓다는 45년간 그 에너지를 뽑아서 마음껏 설법을 했던 거죠. 그게 '부처의 에너지'입니다. 그런 에너지가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언제부터? 본래부터! 보세요. 우리의 옆구리에 붙은 날개는 '죽은 날개'가 아닙니다. 퍼드덕 퍼드덕 어디로든 날 수 있는 날개입니다. 다만 "나는 오리다" "나는 참새다"라는 고정된 생각만 놓으면 되는 거죠.

2009-09-08

[생활 속에서] 아름다운 도전

지난 번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했던 역도 선수 장미란은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했던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한참 예뻐지기 위해 화장도 하고 자신을 꾸미고 싶은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장미란 선수는 피 물집과 굳은살 상처뿐인 손바닥으로 자신보다 훨씬 무거운 쇳덩이를 들어 올리는 역도 선수로 살았습니다. 그 나이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날씬해지려고 노력하는데 장미란 선수는 오히려 몸무게를 늘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미란 선수는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을 이기고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한국의 희망'을 들어 올렸던 것입니다. 장미란 선수는 바벨을 들어 올릴 때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장미란 선수는 중학교 3학년 때 역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경기에 나설 때 마다 개인적인 욕심이나 메달에 대한 부담감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들어 올렸습니다. 그 때 마다 하나님께서 그 무거운 바벨을 가볍게 들게 해주시고 좋은 결과를 주셨습니다. 요즈음 경제 위기가 계속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원망하는 예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99% 불가능해 보여도 단 1%의 가능성을 믿고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오래 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거인 장수 골리앗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골리앗 앞에 메뚜기처럼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을 때 어린 소년 다윗은 그를 향해 용기 있게 일어났습니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지만 그는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100번을 싸워도 골리앗이 이기는 것은 너무 당연했지만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쓰러진 사람은 다윗이 아니라 골리앗이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인생 앞에 거인처럼 버티고 서 있는 인생의 골리앗이 있습니까?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가능을 향한 도전 정신이었습니다. 도전 정신의 위대한 힘은 때로 1%의 가능성을 100% 가능성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역사의 승자는 언제나 불가능을 향해 도전하는 자의 것이었습니다. 불가능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할 때 인생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2009-09-01

[이민목회] 목회는 관계다

인간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이민목회현장에서 나누고 베푸는 삶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 그것은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삶을 나누고 베푸는 일이야 말로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용기를 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이민목회는 관계의 목회이며 나누고 베푸는 삶이다. 첫째 이민교회의 인물이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이민자들에게 관계가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만난 일이 없는 새로운 사람들을 교제하고 있다는 현실이 인간관계의 새 출발이 된다. 이민자중에 친인척이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이민자들은 홀로인 경우가 적지 않다. 싱글 유학생으로 와서 미국에 체류한 경우 싱글 직장인으로 와서 미국에 체류한 경우이다. 그래서 이민교회안에서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다. 이처럼 이민교회의 인물이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둘째 이민교회의 구성이 관계를 요구하고 있다. 이민자들은 이민온 시기에 따라 사고의 차이가 많다. 문화에 동화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개는 일찍 이민 온 사람들의 동화가 빠른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이민교회안에는 워낙 다른 이민자들의 모습이 있기에 좋은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이민교회는 다양한 이민자들을 격려하고 포용하며 격려하는 분위기를 연출해야 한다. 이민자의 형태가 많고 다양할수록 관계가 더욱 아름다워야 한다. 셋째 이민교회의 상황이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이민교회는 언어와 문화의 테두리속에 집단적으로 모여있는 공동체이다. 이민교회는 1세와 1.5세 2세 그리고 3세들이 함께 모여 있는 에스닉 공동체이다. 혈연적으로 보면 이민교회야 말로 민족적인 교회요. 영적으로 보면 3-4세대가 뭉쳐있는 가족영적공동체이다. 그럴수록 서로간의 친밀도를 위해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민교회의 인물이 관계로 연결되어 있고 이민교회의 구성이 관계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민교회의 상황이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적용해야 할 것이다.

2009-09-01

[사목의 향기] 거짓말은 죄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한국의 인기 여배우였던 고 최진실씨의 유골을 도둑맞았다는 기사를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유골을 도둑질 한 사람의 이상행동이나 그 배우의 죽음을 모방한다는 "베르테르 효과" 즉 모방자살이 청소년들 사이에 번져가고 있다는 황당한 사회현상에 대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 배우가 명성과 인기를 파괴 당하고 자살에 이르기까지 거짓말이 크게 작용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가 광화문 광장에서 벌어졌던 배경에도 거짓말이 있었다. 또한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 중에 일부이기는 해도 심지어 대학의 교수라는 사람도 학벌을 속이고 경력을 속이고 속일 수 있는 것은 다 속이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어쩌면 추한 진실보다 거짓말이 낫다고 정말로 믿고 있지 않은지 걱정스럽다. 그러나 아니다. 거짓말은 분명 죄이고 그만 두지 않으면 안 된다. 거짓말을 정의해 보자. "거짓말이란 속일 목적으로 진실을 거슬러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이라는 수단을 악용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을 벗어나 오류에 빠지게 한다면 그것이 거짓말이고 그 이유로써 죄이다. 그래서 요한의 복음(844)에서 예수께서는 거짓말에 악마가 활동하고 있음을 폭로하신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거짓말의 아비이다. 이 유혹자는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키며 죄를 짓게 하고 벌을 받게 만들었다. 첫 인간을 유혹한 거짓말이 최초의 거짓말이었고 이 거짓말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진실을 왜곡했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이웃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인간의 상호간의 기본 관계를 송두리째 단절시켰다. 이같이 거짓말 자체는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해 보이지만 정의와 사랑의 덕을 심각하게 해칠 수 있고 그렇게 하여 죽음에 이르는 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그 자체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거짓말은 타인에게 가하는 명백한 폭력이다. 거짓말로서 타인의 인식능력을 손상시켜 그 사람의 판단과 선택을 잘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회불화의 원인을 조장하고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어 사회 관계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파괴한다. 그렇다면 진실을 존중하고 거짓말을 그만둘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두 번 째 아담이신 예수께 답이 있다. 성령에 이끌리어 사막에 나가셨을 때 세가지 거짓말로 사탄이 유혹했지만 그분의 말씀은 하나같이 "성경에 쓰여 있기를"로 시작되었다. 이 "성경에 쓰여 있기를"에 담긴 태도 그 뜻을 풀어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과 말씀에 완전히 복종한다는 삶의 방식으로 진리를 선택하고 거짓을 거절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현명한 판단과 올바른 선택의 완벽한 지침인 것이다. 이 진리에 승복하는 태도 하느님께 뜻으로 일치하는 태도는 유혹자의 거짓말조차도 성화시켜 유익한 열매를 만들어 낸다. 오리게네스 성인께서 "기도론"에서 설명하셨듯이 유혹은 전화위복의 계기일수 있다는 것이다. 선이라고 해서 인간에게 강요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창조 때 이미 선물 받은 능력과 은총이 무엇이었는지를 유혹 받는 중에 느끼는 자신의 비참함에 비추어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 인간이기에 경험하는 우리 자신들의 추루한 진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희망이 있고 거짓말을 그만 둘 여유가 여기 있다. 진리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 행복하시라.

2009-09-01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혼자 지내는데 익숙한데···

Q: 저는 어릴 때부터 혼자서 지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공부한다고 친구들과 별로 말도 하지 않고 책만 봐서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서인지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즐겁지도 않고 공감도 안 돼 할 말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도 사람들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혼자 있어도 괜찮습니다. 큰 문제없습니다. 일부러 사람들을 사귀려고 할 필요 없습니다. 정치할 겁니까? 정치하려면 사람 사귀는 걸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이 친구를 잘 사귀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그런 욕심은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만 안 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자기식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직업상 필요해서 사람들과 대화를 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자기를 고쳐야 합니다. 그런 게 귀찮다면 그런 직업을 선택하지도 말고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생긴 대로 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업대로 살고 싶거든 혼자 살면 되고 결혼하고 싶거나 남하고 같이 살려면 서로 맞추며 살아야 합니다. 맞춘다는 것은 자기를 고치는 것입니다. 같이 살려면 좀 고쳐야 합니다. 고치기 싫으면 혼자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범부중생은 고치기는 싫고 혼자도 살기 싫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했으면 남편이나 아내에게 맞추십시오. 둘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같이 산다는 것은 맞추는 것입니다. 도저히 못 맞추겠다는 것은 자기 고집대로 살고 싶다는 뜻인데 그렇게 하려면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나오면 됩니다. 그러니 자기 업대로 살려면 혼자 살고 같이 살고 싶으면 업을 고쳐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질문 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며 사귀는 게 좋아 보이면 자기 고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상대가 찾아와서 나를 먼저 좋아하면 그때 나도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남이 먼저 나에게 잘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가서 먼저 인사를 해야 합니다. 남자가 나에게 와서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가서 나 너 좋아해 이렇게 무엇이든 먼저 하십시오. 어쩌면 그 사람도 나처럼 좋기는 좋지만 상대가 먼저 와서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질문하신 분은 자꾸 내가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야 됩니다. 그러면 금방 바뀔 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하든 운전을 하든 피아노를 치든 처음에는 다 서툽니다. 서툴기 때문에 하기 싫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많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노력하지 않고 그저 저절로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욕심입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게 욕심이 아니라 연습은 안 하고 30년 동안 연습한 사람처럼 나도 잘하고 싶다는 것이 욕심입니다. 무엇이든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대화하는 연습을 계속 하십시오.

2009-09-01

[사목의 향기] 용서와 화해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입원과 서거 그리고 6일간의 국장 소식을 전하는 신문 보도에서 눈에 띠는 단어는 용서와 화해라고 생각된다. 모모한 정치인들 특히 전직 대통령들의 문병 소식을 전하는 기사가 용서와 화해의 햇볕이었다면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대통령 아들의 기사는 그 그늘이었다. 어떤 아주머니의 용서 못할 사연을 듣고 가슴 아팠던 일이 더불어 생각났다. 그분의 딸 결혼식에 즈음하여 그분에게 앙심을 품었던 어떤 여자가 선물 상자로 위장하여 보낸 저주의 메시지는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상자 속에 들어있던 조그만 신랑 신부 인형이 마디마디 조각 나 있더라는 것이다. 열심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 아주머니는 용서를 위해 기도했지만 열심히 기도 할수록 용서 못할 이유만 더 알게 되더라고 했었다. 죄란 그런 것이다. 죄는 죄를 부르게 되어있다. 그것이 죄의 속성이다. 그것이 용서 못하고 잊지 못할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하셨다. 하지만 청하지도 않는 용서를 어떻게 하란 말인지 불평이 앞서기는 믿는 이나 아니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 용서는 우리 것이 아니다.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만의 것이다. 용서의 기원은 그래서 은총이다. 우리가 하는 용서와 화해의 시작은 이 사실을 아는 데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주님의 기도에서 다음처럼 가르치신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기도에서 구하는 일곱 가지 청원 중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이 기도는 "처럼;하오니(as; sicut)"로 연결되는 두 기도문이다. 이 "하오니"는 저희 죄를 용서하시라는 것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한다는 것이 나누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뒤의 것을 위하여 앞의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라'는 청원의 바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자각과 그 비참함에 대한 깊은 인식이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심에 의지하여 용서를 청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 일치하고픈 열망과 희망이다. 이를 동력으로 삼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한다'는 선행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와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힘이 드러나는 자리이다. 마침내 원수까지도 용서하도록 만드는(마태543) 이 "처럼(as)"의 가르침은 아주 자주 매우 적절하게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에 사용된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때 요구되는 "처럼"은 단순히 외적 모방을 의미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하느님의 거룩함과 자비와 사랑을 향한 적극적인 참여를 의미한다. 이리하여 용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구체화된다.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을 매고 푸는 것이다.이 "처럼"의 신비에 의존하여 성령께 마음을 여는 사람은 모욕을 동정으로 바꾸고 상심을 전구로 변화시켜 기억을 정화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용서와 화해의 신학이다. 한도 없고 끝도 없이 우리의 잘못을 앞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생각하며 그 "처럼" 또는 "하오니"의 신비로 세상에서 평화의 도구가 되어보자 우리.

2009-08-25

[신앙 상담] 세상속에서의 성공적 자녀양육

Q: 저는 두 아들을 둔 아빠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내심 걱정되는 부분은 신앙을 강조하면서 교육하다 보면 너무 답답하게 크지 않을까 우려입니다. 성경적으로 키우다보면 아이들이 제약 받는 부분이 많은 것 같기도 하구요. 신 목사님께서는 예수 믿기 전 사업도 해보시고 다양한 경험을 해 보셨기 때문에 목회도 더 잘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세상 속에서 성경적인 자녀 양육에 대해 지혜를 알려주세요. A: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생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요 인생 메뉴얼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지 그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책이니 성경대로 사는 것은 옳은 것이요 지혜입니다. 신앙을 강조하면 아이들이 답답하게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이 있다 보니 제한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염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강조하면 자녀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자신이 부족한 인생임을 알게 되니 겸손해집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는 복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기에 오히려 담대해집니다. 신앙은 나를 알게 할 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재능과 은사와 강점들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니 효과적으로 쓰임을 받는 인생이 됩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대로 쓰임을 받는 이상의 기쁨은 없습니다. 신앙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는 보람과 즐거움이 넘치고 이웃들에게 유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에서 금하는 것은 다 인생에게 해로운 것들입니다. 해롭다는 것은 아이들이나 어른들 모두에게 마찬 가지입니다. "미워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술 취하지 말라. 방탕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등등" 이런 일들은 우리의 그릇을 크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들입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를 째째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으니 믿음으로 나아가는 담대한 사람을 만듭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분량의 소망을 가지니 큰 그릇이 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용서하라. 축복하라. 섬겨라"라고 하시는 모든 말씀들은 나에게도 그리고 이웃에게도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신앙의 삶은 마음에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행복을 찾아 오늘도 헤매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꺼야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하면 권력을 가지면 세계 여행을 다 다니면 많이 소유하면 마음 껏 놀면 쾌락을 누리면 ... 행복할 꺼야"가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과 만족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안에서 살 때 만족도 있고 성공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부족한 인생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안에서 살며 신앙안에서 자녀들이 살도록 가르쳐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성경대로 살려고 애쓰면서 자녀들을 성경대로 살 수 있도록 신앙으로 가르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므로 반듯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귀한 은총이 귀하의 가정에 넘치기를 바랍니다. ▷신앙상담: [email protected]

2009-08-25

[생활 속에서] 세속을 바꾸는 에너지

5세기 유럽은 야만족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사회 문화 제도가 파괴되면서 소위 암흑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질서와 혼란의 한 복판에서 유럽의 문화를 보호하며 유지하던 공동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수도원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5세기부터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700년 동안 수도원은 문화의 중심이었으며 동시에 선교의 중심이었다. 수도원은 자기 중심적인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세계를 실현하는 공간이었다. 수도원의 기원은 일반적으로는 동방교회 특히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틴 사막 지역에서 고행적인 삶을 살았던 소위 사막의 교부(desert fathers)들의 삶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수도사의 의미인 'monk'는 '혼자'라는 의미의 핼라어 '모나코스'(monachos)에서 유래하였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기독교는 세상에 너무 노출되어 교회는 세속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도사들은 세속으로부터 거룩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수도원적 삶을 '백색 순교'(White martyrdom)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일 수도사들이 고립된 삶만 살았다면 세상을 바꾸는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수도사들은 때로는 다리를 놓고 길을 만들어 사회를 변화시켰고 노동을 신성시하는 수도사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삶은 야만족이 휩쓸고 간 유럽 대륙을 윤택한 사회로 바꾸기 시작하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수도원은 야만족이 파괴시킨 도시의 교육과 문화의 시스템을 간직하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수도사들은 수도원 내에 학교를 세웠으며 성경 및 고대 교부들의 작품을 사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그리하여 야만족이 휩쓸고 간 유럽에 문화를 지키는 파수대 역할을 하였다. 후에 일어난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문예부흥 운동은 사실 수도원 운동의 산물이었으며 중세 대학이 설립된 기원도 수도원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휴가철을 맞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산이나 바다로 떠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때 기독교인들은 세속의 현장을 피해 수도원이 아니더라도 조용한 공간에 머무르며 주님과 교제하고 자기 성찰과 함께 영적인 에너지를 회복하는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다.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두고 떨어져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시도할 때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금번 휴가철 우리 모두가 하던 일을 내려놓고 잠시 분주한 세속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주님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하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2009-08-18

[이민목회] 영성의 차이

교회의 뿌리는 영성이다.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기독교인이 내적으로는 말씀을 근거로 경건하게 살고 외적으로는 이웃과 사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적 행동을 말한다. 그런데 한국 코리안의 영성과 북미주 코리안 아메리칸의 영성은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한국생활에서의 영성과 미국생활에서의 영성은 같은 성경을 텍스트로 사용하지만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민자들이 거처하는 미국의 복합문화속에서의 영성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사회적구조나 환경적 요인이 영성의 내용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이민성도의 영성의 기초인 기도의 내용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1.생업안정을 위한 기도이다. 2.가족의 안전을 위한 기도이다. 3.미국에서의 성공을 위한 기도이다. 4.미국경제와 사회의 안정을 위한 기도이다. 5.세계선교및 에스닉선교를 위한 기도이다. 생업안전을 위한 기도에서는 미국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선 생활에의 안정에 있다. 한국에서는 직계가족을 위시하여 친인척이 지척에 있어 필요한 경우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그 수가 빈약하기에 가장 중심이 되는 기도제목은 생업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가족의 안전을 위한 기도라는 의미는 미국에서는 직장에서의 안전이 큰 이슈가 된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총기로 인한 사건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공을 위한 기도의 뜻은 이민자들이 미국에 온 중요한 목적이 미국사회의 성공을 염원하기에 부모님의 사업성공 자녀들의 학교및 진로성공에 큰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경제와 사회의 안정을 위한 기도란 미국이 세계의 경제중심과 경찰국가라는 역사적인 책무를 감당하도록 중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미주에 산재한 이민교회의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지구촌과 지역에 공존하는 이웃의 에스닉민족에 대해 선교하는 일이다. 이처럼 코리안 아메리칸의 영성은 미국복합문화속에서의 영성이다. 이민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민자들의 달라진 영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주어야 하여야 한다. 그것은 마치 미국과 한국문화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이민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제 3의 영성신학 즉 미국복합문화속에 존재하는 이민자들의 영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2009-08-18

[사목의 향기] 감정 다스리기와 좋은 지도자

행복을 지향하여 선을 추구하고 덕행을 실천하여 사랑을 완성하는 도덕적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남달리 감정이 풍부하고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자주 입에 오르는 한국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에는 헌법 위에 또 다른 법이 있는데 그것은 국민 정서법이라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할 만큼 이 감정의 문제는 결코 작지 않다. 그래서 그랬는지 통치의 수단으로 권위를 말할 때 권위 있음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로 늘 설명되었는데 이때 '다스림'의 내용은 '감정'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2001년 9월 11일의 사건에 대응했던 어느 대통령의 선전포고와 전쟁이라든가 한 국가의 전직 대통령의 자살 같은 일은 물론 역사적으로 재평가 되어야 할 중대한 일면이 있지만 우선 일차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감정 다스리기와 추구해야 할 감정의 도덕성 문제이다. 감정(Passio)이라는 말은 열정이나 감성을 가리킨다. 인간은 이 능력을 통하여 선을 예감하고 악을 예측한다. 선을 예감하고 악을 예측한다는 말은 움직임을 표현하는 말인데 그렇게 하거나 하지 않거나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심리의 자연적 요소로서 여러 유형이 있는데 주요한 감정들은 사랑과 증오 욕망과 두려움 기쁨 슬픔 분노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감정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다만 이성과 의지로 일어날 때 그 안에 선이나 악이 존재하게 된다. 바로 이 자리에서 다스림의 요구가 발생한다. 이성의 능력으로 감정이 조절될 때 도덕적 또는 인간적 선의 완전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고상한 감정들이 그 자체로 도덕성이나 성덕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들이 덕행 안에 올바른 의지로 받아들여지고 선한 행위에 이바지 할 때만 그러하고 선한 행위에 반대하거나 악한 의지에 의하여 무질서한 감정에 굴복하여 악습을 격화시킬 때는 아니다. 그래서 스승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그분의 지극한 고뇌와 수난에서 드러나듯이 성령께서 몸소 인간의 고통과 두려움 슬픔을 포함한 인간 전체를 움직이심으로써 인간의 감정은 하느님의 자비와 행복을 통해 완숙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완전하게 복종하셨다. 사욕편정을 이기고 느낌과 감정을 완벽하게 다스리셨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할 감정 다스리기이고 그 결과 도달하게 되는 도덕성의 완성과 성화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은 감정의 폭발도 거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분노가 그것이고 무덤에 묻혀 있던 나자로를 불러내신 눈물이 그것이고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이 그것이고 그전에 그분을 뒤따르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향한 그분의 측은지심이 그것이다. 그분의 모범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제 마음과 제 몸이 환성을 지릅니다(시편 84[83]3)'라고 노래한 다윗의 기도를 생각나게 한다. 인간의 의지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즉 영혼과 육신의 경계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에서부터 희망하고 바랄 때 완성되는 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런 좋은 지도자가 많이 태어나면 좋겠다. 편협하지 않으면서도 불 같은 열정을 가지고 사람과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그런 좋은 지도자가 많이 태어나면 참 좋겠다.

2009-08-18

[법률스님의 즉문즉설] 주위사람과 편하게 지내려면

Q 저는 주위 사람의 사소한 말에도 상처입고 그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도 느낌으로 짐작해서 괜히 움츠러듭니다. 자신이 없어서 그럴까요? 어떻게 받아들이면 주위 사람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요? A 내가 지금 안경을 끼고 흰 색깔의 천장을 본다고 합시다. 내 안경에 빨간 색이 들어있으면 이 천장 색깔이 어떻게 보일까요? 빨갛게 보이겠지요? 그런데 내가 만약 날 때부터 빨간색 안경을 끼고 있어서 안경을 한 번도 안 벗어봤다면 내 안경이 빨개서 저 천장이 빨갛게 보이는지 천장이 빨개서 내가 빨갛게 인식하는지 내가 구분할 수 없을 겁니다. '저 천장이 빨갛기 때문에 내가 빨갛게 안다'고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이 때의 이 안경 색깔과 같은 것을 업식이라고 해요. 사람들은 각자 조금씩 다른 자기 업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바깥 사물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각각 업식이 서로 다름으로 인해서 각자의 인식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상대가 문제라서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거꾸로 알고 있는 거죠. '내 안경 색깔 때문에 저 벽이 빨갛게 보인다'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인데 '저 벽이 빨갛다'고 알고 있어요. 그러면 둘이 만나서 한 사람은 빨갛다 하고 한 사람은 파랗다 하면 밤새도록 얘기해도 서로 이해가 안 돼요. '왜 빨간 걸 저 사람은 파랗다 할까? 눈이 잘못됐나?' 상대방도 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둘이 만나서는 "나는 너한테 그런 말 안했어." "네가 그랬잖아."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네가 얘기할 때 나는 그렇게 들었단 말이야." 아무리 이렇게 이야기해도 끝이 안 나지요. 이런 건 각자의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걸 알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느꼈다고 생각을 하지 않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아!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내 눈에는 파랗게 보이지만 저 사람 눈에는 빨갛게 보이나 보다.' 나는 그렇게 말을 안 했더라도 상대가 그렇게 들었다고 하면 '아 너에게는 그렇게 들렸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나는 그렇게 느꼈지만 상대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하면 바로 그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사람들이 "너 과민 반응하는 거야" 하면 '내가 과민 반응했구나' 하고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상대가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라고 하면 그냥 받아들이세요. "나는 네가 나한테 욕하는 것 같더라" 하고 느낀 대로 말해요. 상대가 "난 욕한 게 아니야" 하면 '어 안 했구나. 그런데 내가 그렇게 느꼈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렇게 자꾸 받아들이면 고쳐집니다. 계속 "아니야 네가 아까 그렇게 말 했으면서 왜 자꾸 변명해" 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면 영원히 해소되기 어렵습니다.

2009-08-18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마음의 집, 한옥으로 지어 보시죠

#풍경1 : 얼마 전 황토로 지은 한옥에 갔습니다. 놀랍더군요. 서까래가 훤히 드러난 천장과 풀이 자라는 뜰 볕이 드는 툇마루의 운치가 그만이었습니다.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죠. 집주인은 "만성비염으로 20년 넘게 고생했는데 한옥에 살면서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며 "이사온 후로 코가 한 번도 막히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왜 그렇죠?" 물었더니 "자연"이라고 답하네요. "한옥이 뭘로 지었는지 보세요. 흙과 돌 그리고 나무로만 지었죠. 그러니 한옥에 사는 건 자연 속에 사는 겁니다." 자연이 숨 쉴 때 집도 숨 쉬고 집이 숨 쉴 때 사람의 몸도 숨을 쉰다는 얘기였죠. #풍경2 : 전통 건축의 최고수로 꼽히는 이들이 대목장(大木匠)이죠. 최기영 대목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의 작업실은 한옥이었고 자택은 양옥이었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에서 자고 나면 몸이 찌뿌드드해. 아침에 안마기로 1시간은 두들겨야 돼. 그래야 좀 걸을 만하다니까." 그런데 작업실에서 잔 날은 아주 딴 판이라고 하더군요. "한옥에서 잔 날은 몸이 너무 개운해.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몸을 쓸 수가 있다니까." 참 재밌더군요. 왜냐고요? 집 얘기가 아니라 마음 얘기로 들렸거든요. 따지고 보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의 집이죠. 그런데 집집(마음)마다 생김새가 다릅니다. 어떤 집은 창문이 하나 어떤 집은 창문이 둘 셋입니다. 창문의 크기도 다르고요. 벽의 재질도 다릅니다. 어떤 마음은 부드러운 황토벽이고 어떤 마음은 딱딱한 콘크리트벽이죠. 여기서 퀴즈 하나. "그럼 나의 집(마음)은 어떤 곳일까요?" 글쎄 잘 모르겠다고요? 답이야 집주인이 제일 잘 알겠죠. 평소 주위 사람에게 내뱉던 말을 돌아보세요. "아이 답답해" "뭐 좀 시원할 일 없을까?" "동해안에 가서 넘실대는 파도라도 봤으면" "지리산 노고단에 서서 바람이라도 쐬면 가슴이 뚫릴 텐데…." 그게 바로 나의 집에 대한 거주 소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죠. 동해안도 지리산도 임시 방편이란 겁니다. 갈 때는 시원해도 돌아오면 얼마 못 가 답답해지고 말죠. 그건 동해안 지리산이 아니라 태평양 히말라야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해도 마찬가지겠죠. 결국 '나의 집(마음)'이 문제라는 겁니다. 집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밖에서 '파도 한 줌' '바람 한 줌' 쥐고 와도 소용이 없다는 거죠. 그걸 절실하게 느낄 때 우리는 들여다보죠. "어디 보~자. 나의 집은 대체 어떻게 생겼나"하고 말이죠. 그렇게 내면을 들여다 보면 다들 깜짝 놀라고 맙니다. 왜냐고요? 거기에는 창문이 없으니까요. 더구나 벽은 강고하기 짝이 없죠. 그게 뭐냐고요? 세상을 향해 내가 세운 고집입니다. 그래서 햇볕도 바람도 통하질 않습니다. 여기서 퀴즈 둘. 그럼 어찌할까요. 어떡해야 내 집(마음)에 볕이 들고 바람이 들까요. 그렇습니다. "내 집은 이래야 해" "내 마음은 저래야 해"라고 미리 못박아둔 나의 고집과 나의 기대를 걷어야 합니다. 그게 내 집의 창문을 가리고 있으니까요. 걷으면 걷을수록 창문이 드러나고 걷으면 걷을수록 창문이 더 커지죠. 답답한 내 마음에 창을 내는 일. 그게 바로 명상이고 묵상이고 수행이죠. 창 밖을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보세요. 그 집이 바로 우주입니다. 거기에는 고집이 없습니다. 가장 유연하고 가장 조화로운 흐름만 있죠. 그래서 생명이 있는 겁니다. 나의 집도 마찬가지죠. 고집을 내려놓고 창문을 낼 때 내 마음도 한옥이 되는 겁니다.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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