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과 제자들이 슈라바스티에 이르렀을 때 그 고장에는 아지바카 교라는 외도가 성행하여 백성들을 그르치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거리로 나가 바른 법으로 깨우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새 등불 밑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추종자들을 빼앗긴 외도의 우두머리들은 단단히 앙갚음을 꾀했다.
그 때 그 곳에는 순다리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수행을 하고 있었다. 외도들은 이 여인을 꾀어 부처님이 계시는 정사 주위에 자주 나타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이렇게 얼마가 지난 후 그들은 이 여인을 참혹하게 죽여 정사 근처 숲에 몰래 버리고는 임금에게 가서 여인의 발자취가 종내 사라졌다고 아뢰었다.
임금은 소문을 좇아 정사 둘레를 뒤져 순다리의 주검을 찾아내었으니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단박에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말았다.
다음 날 부처님과 제자들이 탁발하러 거리로 나서자 사람들은 저 자들이 여인을 죽였다면서 문을 걸어 닫고 돌팔매질까지 하였다.
놀라고 실망한 제자들이 이제 슈라바스티를 떠나자고 부처님께 여쭙자 부처님은 조용히 타이르셨다. 사람들이 너희를 버릴지라도 너희가 어찌 사람들을 버리겠느냐? 삿된 길이 어찌 부처의 길을 막겠느냐? 이러한 비방은 이레를 넘지 않으리니 이레만 참고 기다려 보자.
이렇듯 여인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삿된 이들이 잘 써먹는 무기였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부처님의 법이 이때도록 끊이지 않고 내려옴을 보니 아마도 그 소문은 이레를 넘기지 않고 진실에 자리를 내어줬나 보다.
동서 냉전이 한창일 때 미국에서는 매카시 선풍으로 빨갱이 사냥이 한창이었고 소련에서는 반동분자 인간사냥이 벌어졌었다. 온 지구촌도 덩달아 두 편으로 쫙 갈라졌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그 일에 얽힌 자가 내 편인지 네 편인지만을 따졌다. 내 편이면 무조건 편들었고 네 편이면 볼 것 없이 쓸어버릴 대상이었다.
그 냉전이 사라진 지 한참이 되었건만 후유증은 아직 도처에 남아있다. 작은 나라 주변 국가일수록 마지막 기승을 부린다. 왕초들은 이미 악수하며 점잖게 거래를 끝냈는데 뭘 모르는 똘마니들은 아직도 골목에서 악다구니하는 모양새다. 이는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데 종교란 좀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결국 죄 짓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없어도 상관없는 게 종교가 아닐까? 여인을 죽여 몰래 버린 슈라바스티의 외도들같이 시샘을 부려 앙갚음을 하고 편을 갈라 폭력을 동원하는 것이 종교라면 도대체 그런 종교가 왜 있어야 하는 것일까?
지난 시절 불행히도 한국 사람들은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은 탓으로 냉전의 희생양이 되어 숱한 목숨을 버렸다. 그 상처가 조금씩 아물고 있는 이 때 그보다 더 큰 희생이 따를지도 모를 종교 냉전의 꺼림칙한 불꽃이 여기저기서 이따금 혀를 날름거린다.
냉전이든 종교전이든 세상의 참사들 중에는 별 것 아닌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 많다. 혹시 다른 종파니 이단이니 타종교니 외도니 하는 곳에서 말도 안 되는 뜬소문이 흘러나오거든 군중심리에 흥분하거나 조건반사적으로 나서지 말고 차분히 기다릴 일이다.
부처님처럼 적어도 이레는 참고 기다리자. 소문은 차차 잦아들면서 조금씩 진실은 드러나고 세상도 내 가슴도 어느덧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 090818_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