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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에서] 칭찬만으로 부족하다

한동안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Whale done)는 책이 있었다. 이 책은 고래 조련사가 고래를 길들일 때 사용하는 칭찬 기법을 자신의 회사의 조직과 가정에 적용하여 보다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칭찬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이와 반대로 '양육 쇼크'(Nurture Shock)라는 책이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주장과는 달리 오히려 "칭찬은 아이를 병들게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교육가들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자신감을 키워주려면 칭찬을 많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요즈음 부모들은 아이들의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 무조건 칭찬해 주므로 버릇없이 자라나는 부정적인 모습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무조건 칭찬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뉴욕의 20개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를 근거로 이런 주장을 내 세우고 있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며 아주 쉬운 퍼즐을 완성하도록 하였는데 그 과제를 모두 마치자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똑똑하다"고 칭찬을 해주었고 또 다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단지 "열심히 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열심히 노력했다"는 말을 들었던 아이들 90%는 다음 실험 과정에서 보다 난이한 과제를 선택했지만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던 아이들은 대부분 쉬운 과제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위 '똑똑한 아이들'은 오히려 어려운 문제를 피하는 경향이 있고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배우는 것은 아이들을 무조건 "똑똑하다"고 칭찬해주면 그 아이들은 자신이 '잘 난 사람'으로 보이려고 실수 할 수 있는 모험을 덜 시도하므로 자기 발전이 중단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칭찬이 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이 되어 부정적인 쇼크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사람을 칭찬할 때 어떤 면에서 무조건 칭찬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칭찬도 중요하지만 어떤 칭찬을 해주는가?"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게 단지 "너 잘 났다"고 말하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또한 "무조건 잘한다"고 말하는 것도 결코 칭찬이 아니다. 이제는 칭찬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네가 이런 부분에서 노력하는 모습 너무 좋다!" "네가 부족하지만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너무 아름답다!" 이런 내용과 근거가 있는 칭찬이 필요하다. 이렇게 칭찬하면 뭔가 부족한 아이들 좌절과 절망 속에 있는 아이들이 격려를 받을 수 있고 때로 그들의 내면에 있는 존재하는 상처를 치료해주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2010-02-23

[변화] 삶의 '페어 플레이'

이번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어부지리로 은메달을 딴 '안톤 오노' 선수가 또 억지주장으로 우리선수들을 자극했다. 경기도중 선두인 '성시백'의 왼팔을 잡아당기는 장면이 SBS 취재진 카메라에 생생하게 잡혔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선수들의 방해로 금메달을 놓쳤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해 다시 공공의 적 'Oh No!'가 되었다. 고대 올림픽 정신은 로마시대에 와서 폭군 '네로'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 자기 맘대로 대회를 2년씩이나 늦추는가 하면 규정에도 없는 '음악 경연'을 신설해 우승도 한다. 또 전차 경기에서는 도중에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고만 없었다면 우승이 확실했다고 억지춘양으로 우승컵을 갈취한다. '네로'가 죽은 뒤에야 이 우승은 취소되었지만 '페어플레이' 정신은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고 역사학자들은 평가한다. 지난달 25일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에덤 반 하우텐'이라는 선수에게 '지난 10년간 최고 스포츠맨십상'을 수여했다. '애덤'은 2005년 주 고등학교 골프 챔피언십 대회에서 2위에 7타 차 앞선 1위로 경기를 끝마쳤다. 그는 경기 뒤 10번홀 타수가 6타가 아니라 5타로 한 타 적게 잘못 적힌 것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주최 측에 신고해 실격처리 된다. '에덤'은 안타깝게 우승컵은 놓쳤지만 5년 뒤에 SI가 선정한 '최고 스포츠맨십상'을 타게 된 것이다. 우승컵보다 값진 정직의 승리이다. 사도 바울이 21세기에 살았다면 그가 가장 애독했을법한 잡지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 이다. 그는 성경의 곳곳에서 신앙생활을 레슬링과 마라톤과 각종 경주에 자주 비유한다. 스포츠맨정신과 신앙생활은 일맥상통하는 바가 크다. 목표를 향해 올곧게 달려가는 것 하며 정직한 '페어플레이'를 해야하는 부분이 그렇다. 삶의 경주에서 '페어플레이'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 많지 않다. 교회 안에서의 삶과 세상에서의 삶이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허다하다. 이중장부를 만들어 세금을 속이고 임금을 착취하는 기독교 관련기관들과 기독 실업인들이 너무나 많다. 이들이 사업에 성공해서 십일조를 많이하고 건축헌금을 많이 한들 지어진 교회가 과연 거룩한 성전이 될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는가?

2010-02-23

[사목의 향기] 공동체 분열 가져오는 싸움닭

닭을 잘 훈련시켜서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키우는 닭을 투계라고 말한다. 투계는 싸움닭이다. 어느 동물도 내기를 하지는 않지만 인간만이 내기를 좋아한다. 자기가 응원하는 닭이 싸움에서 이기면 돈을 버는 것이다. 그래서 투계장에 나서는 싸움닭은 상대하는 닭이 도망갈 때까지 쪼아 대며 싸우는 것이다. 닭이 겁이 많은 것 같지만 싸움닭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싸움닭을 사람에게도 비유하는데 용감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대개는 아무 장소에서 아무나 하고 다투는 전투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이러한 싸움닭 기질이 있는 사람이 속한 단체나 모임은 대체로 분위기가 살벌하다. '오늘은 누가 싸움닭의 표적이 될까?'하고 다들 긴장하니 말이다. 성당에서는 남자는 형제 여자는 자매라고 부른다. 어느 본당에서 이러한 싸움 닭 기질이 다분한 신자자매를 만난 적이 있다. 대체로 이야기가 되지 않고 이야기도 도전적이며 끝에는 기분이 상한 채로 이야기가 끝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그 자매와 이야기를 섞으려 하지 않게 되고 또 피하게 된다. 어느 날 그 자매의 투쟁적인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저하고 이야기 좀 하시죠!' 남편들이 제일 무서워한다는 말을 저도 듣게 된 것이다. 보통의 신자들은 '신부님 언제 시간되시죠? 제가 상담할 일이 있는데요'라고 공손하게 묻는데 이 자매의 첫마디는 저를 잔뜩 겁먹게 만드는 도전장처럼 들렸다. 그래서 시작한 이야기는 처음에는 긴장 그리고는 불안 급기야는 불쾌한 감정만 남기고 끝났다. 공동체 안에서 닥치는 대로 싸우다가 급기야는 그 상대가 바로 내가 된 것이다. 그 이후로 그 자매를 보는 내 시선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다른 신자들도 불편해했고 그 자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라온 환경과 여러 가지일 들로 사람들을 대하는 관계에서 문제가 생겼지만 본인이 고치려는 노력이 없다면 힘든 것이다. 더군다나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자신의 잘못된 성격을 고치려는 노력도 없이 나온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고스란히 옮기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그 자매와 둘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매에게 '왜 성당에 나오세요?'하고 물었다. '자존심과 오기로 나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참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로서는 처음 듣는 대답이었다. '그것이 이유라면 앞으로는 나오지 말라'고 말했다. 의외의 반응이었는지 당황하던 자매는 '그럼 앞으로 나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그 자매는 성당에 나오지 않았고 싸움닭이 없어진 공동체에는 걱정거리가 사라졌다. 신앙공동체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하고 싶은 대로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심한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이다. 그래서 신앙공동체는 끊임없이 현재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마음을 잊고 산다면 그 신앙공동체는 결코 화목하지도 못하고 항상 다툼과 분열이 있을 것이다. 한 공동체의 사목을 맡은 사목자로서 자매에게 성당에 나오지 말라고 말한 것은 결코 잘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지금 나에게는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오는 싸움닭 기질이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죄와 죄로 유혹하는 마귀여야 한다.

2010-02-23

[지혜의 향기] 인도 말 '붇다'는 '깨달은 이'

무슨 공부를 하든지 그 분야에서 쓰는 용어를 먼저 정확히 알아듣고 알맞게 쓰는 것이 기본이다. 사실 용어를 다 파악하여 써먹을 줄 안다면 그 쪽 공부는 거지반 다 한 것이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어받자면 먼저 불교에서 쓰는 말을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 있어서는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불교가 전해 오면서 성격이 전혀 딴판인 여러 어족들의 말이나 글자들이 뒤섞인데다가 여러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마구 녹아들어 있다. 게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기 자신의 말과 글로 제대로 소화 시키지를 못한 상태에서 선불교 사상이 덮씌워졌다. 그렇지만 오늘은 우선 불교라는 한 낱말만 가지고 국어 공부를 좀 해 보자.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불이 곧 부처인데 본래는 인도말 붇다(Buddha)에서 왔다. '붇다'에서 '부텨'가 되었다가 입천장소리되기로 결국 '부처'가 되었다. 디귿이나 티읕 같은 혀끝소리는 홀소리 'ㅣ'를 만나면 지읒이나 치읓 등 입천장소리로 변하기 쉽다. 알다시피 'ㅕ'는 'ㅣ'와 'ㅓ'가 합쳐진 소리이다. 그렇다면 한자의 불(佛)은 뭔가? 원래는 중국에 그런 글자가 없었고 아니 불(弗=不) 자만 있었는데 불교가 전해지자 '붇다'에 해당하는 외래어 표기가 필요해서 불(佛) 자를 새로 만들어 불타(佛陀)로 표기했다가 줄여서 불(佛) 자만 쓰곤 했다. 한자로 쓰여 있다고 다 본래부터 중국말은 아닌 것이다. 본래 디귿 소리와 리을 소리는 서로 넘나들기 쉬우므로 불(佛) 자의 그 당시 중국 발음이 '붇'에 가까웠을 것이다. 원음에 상당히 가까운 소리베낌이 된다. 인도 말 '붇'은 깨닫는다 깨친다는 뜻을 가진 말줄기이며 '붇다'는 '깨달은 이' 또는 '깨친 이' 라고 새길 수 있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인생과 우주의 실상에 관한 거룩한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았으며 중생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를 수 있는 여덟 겹의 바른 길을 깨치신 것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이 홀로 있지 않고 서로 맞물리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법을 깨치신 것이다. 어쨌든 인도말 '붇'은 '깨닫다'나 '깨치다'로 멋지게 번역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말 '깨닫다'를 좀 더 파 보자. '깨닫다'는 '깨다'와 '닫다'가 합쳐진 말이다. 깨는 것은 알 껍데기를 깨듯이 본래 있던 것을 부수고 새로운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닫는 것은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다다르다' 할 때처럼 어떤 상태에 닿아 이르는 것이다. 그러니 깨닫는다는 것은 기존의 관념을 깨부수고 새로운 앎의 상태에 다다르는 것이다. 혹시 무엇을 깨기는 했지만 더 높고 새로운 상태에는 다다르지는 못한 분들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깨치다' 라는 말은 '깨다'와 '치다'가 합해진 말이 아니라 깨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치'라는 힘줌 도움줄기를 집어넣어 생긴 말이다. '밀다'와 '밀치다' '놓다'와 '놓치다'가 어떻게 다른지 보면 알 것이다. 그냥 깨지 말고 단단히 깨란 소리다. 중국 사람들은 '붇'을 각(覺)으로 번역하여 쓰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 불교에서도 각(覺) 자를 많이 쓴다. 일제 때 한국 불교가 너무나 피폐함을 보고 크게 깨달으신 용성 스님은 불교 중흥을 위해 한 때 불교 대신 대각교(大覺敎)라는 이름을 내거시기도 했다. 영어로는 인라이튼(enlighten)이나 어웨이큰(awaken)이란 말로 많이 옮긴다는 것도 알아 두면 좋다. 부처님은 더없이 높은 진리를 깨치신 이(The Enlightened)요 깨달으신 분(The Awakened)인 것이다.

2010-02-23

[변화] 게으른 '루저'

요즘 사람들은 이런 착각을 하면서 산다고 한다. 여자들의 착각: 남자가 자기한테 먼저 말걸면 관심있는 줄 안다. 남자들의 착각: 여자가 쳐다보면 자기한테 호감 있어 보는 줄 안다. 연애하는 남녀의 착각: 결혼만 하면 깨가 쏟아질 줄 안다. 엄마들의 착각: 자기 애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해서 공부 못하는 줄 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착각: 자기는 여기에 안 속하는 줄 안다. 지난주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한 백만장자 '카를 라베더(47)'씨는 '돈'이 자신의 행복을 막았다며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기 위해 전 재산 300만 파운드(약 54억6천400만원)를 모두 기부하고 알프스의 고급 빌라에서 단칸셋방으로 이사할 예정이라 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더 많은 부가 곧 더 많은 행복을 의미한다고 착각했지만 인생을 살면서 진짜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삶에서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착각에서 벗어난 것이다. 미국 교회들의 3분의 2는 주일예배 출석 교인이 100명이 안된다. 그리고 50명에 못 미치는 교회만 해도 10만 개가 넘는다. 한국의 교회들의 80%는 교인 수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들이다. 모든 교회가 큰 교회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 착각한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게으른 '루저'들이라는 결론이 난다. 요즘 교인들은 이런 착각을 하며 산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교인들의 착각: 사람이 없어서 한 사람이 여러가지 봉사를 하는 줄 안다. 담임목사가 교인 수 늘릴 욕심에 전도를 강조하는 줄 안다. 내가 빠지면 교회가 문 닫는 줄 안다. 좋은 프로그램이 없어서 믿음이 안 자라는 줄 안다. 담임목사가 영력이 부족해서 작은 교회 하는 줄 안다. 큰교회 섬기는 사람들의 착각: 주일날 조용히 예배만 드려도 그리스도인으로써 할일 다 하는 줄 안다. 큰 교회 다니면 자기 믿음도 큰 믿음인 줄 안다. 교회만 데려다 놓으면 애들 신앙 교육은 저절로 되는 줄 안다. 유명한 교회 다니면 자신도 유명인사 된 줄 안다. 장로되는 것이 벼슬하는 것보다 더 큰 가문의 영광인줄 안다. 담임목사가 명령만 하면 날아가는 새도 떨어지는 줄 안다.

2010-02-16

[생활 속에서] 기다림도 예배다

한국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미국에서 산 기간이 더 길어진 시점에 '나는 미국에서 무엇을 배웠을까'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여러 가지 중에 배운 것은 '기다림'이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결론을 냈다. 한국문화는 '빨리빨리'가 사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문화가 미국 이민 사회에도 넘어와 한국인 고용주와 함께 일하는 히스패닉계 노동자들은 '빨리빨리'라는 단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정도다. 미국도 '급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기다림이 사회의 시스템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맞지 않은 시스템이지만 어찌하랴 우리가 이민자이니 '로마의 법'에 맞춰 사는 수밖에. 그런데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은 미국에서 기다리면 언젠가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미국 사회에서 소위 성공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다림의 대가들이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기다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에게서는 삶의 여유로움이 엿보인다. 한국인의 기질대로 '빨리빨리' 밀어붙이면 당장 일은 되는 것 같은데 미국 사회를 배우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결과는 '나의 능력'이고 신의 섭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은 무시하고 쉽게 지나치게 된다. 기독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기다림의 신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빨리 움직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 느리게 응답하고 느리게 역사를 이끌고 간다. 예수의 탄생을 몇 백 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예시했던 것을 보면 얼마나 차근차근 준비하는 분인지 알 수 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역사를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를 창조한 신의 능력에 맞게 세상이 돌아간다면 인간은 따라잡을 수 없을 뿐더러 허수아비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의 수준에 맞게 느리게 일이 진행되는 것은 어찌 보면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무언가 빨리 결정되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그다음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다려라'라는 메시지는 계속 이어진다. 그 다음 일을 하지 못하고 이전에 한 일을 돌아보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좀 더 견고하게 하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20년을 너무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돌아봄의 시간이 부족했다. 미국 경제 위기와 함께 굉장히 고통스러웠던 지난 1년은 어쩌면 돌아볼 시간을 우리에게 제공해준 것 같다. 사실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에게 기다림의 시간은 매주 한 번씩 찾아온다. 예배 시간에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중단하고 듣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것은 기다림의 중요한 훈련이다. 예배란 우리의 분주함을 드리는 것이다. 예배란 우리 생각을 내려놓고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온갖 잡념과 내 생각으로 가득 차 예배 때 뿜어지는 신적 에너지를 받지 못할 때가 있다. 예수님은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다"라고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했던 것 같다.

2010-02-16

[사목의 향기] "그냥 머무르는 거야"

1. "들숨 따라 흡입된 영혼의 비타민. 너무~우 맛있어. 숨이 붙어 있는 한 어찌 날숨질 하리요." 담배를 끊었습니다. 사는 게 아닙니다. 딱 한 대면 모든 걸 용서할 것 같은데 딱 한 모금이면 강론 준비가 잘 될 것 같은데.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들려주신 귀한 말씀. 당신도 스무 살에 시작했고 예순 넘어 끊으셨다고 그러시면서 싱긋이 웃으시며 담배 끊는 방법 하나 가르쳐 줄까. "그냥 끊는 거야 그냥 그냥 끊는 거야." 그렇습니다. 도둑놈처럼 힐끗거리며 결국은 한 모금 피우고만 부끄러움에 땅을 치며 괴로워하다 문득 깨어보니 그게 꿈이었음에 한없이 감사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그냥 끊는 것입니다. 2.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네 안에 머무르겠다. 나도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제로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다 보니 그 육신 또한 진실하고 정직하게 꾸며진다. 그러니까 먹은 만큼 정직하게 나온다는 얘기다. 이미 고인이 되신 어머니가 언젠가 성탄 카드를 보내셨다. 아주 귀한 표정을 가진 아기천사가 그려져 있었는데 배 쪽이 너무 통통했다. "배가 좀 나왔지만 사랑하는 아들 콘스탄틴 신부에게 하느님과 일대일로 기도하며 늘 그 분 안에 머무르는 나날 되세요. 이 못난 엄마의 간절한 소망이로소이다." 그런데 사제관에서 상당까지는 몇 마일이나 되나? 사형수 감옥에서 사형장까지를 '그린 마일'(green mile)이라고 한다는데.... 제자들이 주님과 나눈 약속 아들과 어미가 나눈 약속 그 모두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것 그 분의 현존 앞에 있는 것. 부활하신 분의 거룩한 영이 내 안에 채워짐으로써 내 속된 영이 비워지고 가난해지는 것이거늘. 사제관에서 성당까지의 거리가 '그린 마일' 같을 때가 있음을 감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안에 머물러라' 어떻게 머무는가. 따로 노하우(know how)가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추기경님 식으로 말해 볼 수 있겠다. "그냥 머무르는 거야. 그냥 기도하는 거야." 그렇다. 그래 정답인 것 같다. 아니 정답이다. 아멘.

2010-02-16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자꾸 욕심이 생기는데

Q: 자꾸만 욕심이 생깁니다. 재물 이성친구 등에 대한 욕심이 자꾸 생깁니다. 애인이 있어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보이면 그쪽으로 눈이 갑니다. 이런 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A: 사람은 누구나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싶다거나 좋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해서 다 욕심이 아니에요.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지요. 노력은 안 하고 그것이 공짜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죠. 그건 인과법칙에 어긋납니다. 노력하지 않으니 이루어질 수가 없고 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데 이룰 수가 없으니까 화가 나고 괴로워집니다. 이렇게 욕심은 화와 괴로움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라는 거예요. 100m 높이의 산을 오르고 싶으면 슬리퍼를 신고 올라가도 돼요. 그러나 1000m 높이의 산을 오르고 싶으면 슬리퍼를 벗고 운동화를 신어야 해요. 4000m 높이의 산에 오르려면 등산화를 신어야 합니다. 이것처럼 내가 무엇이 되고 싶으면 그에 맞는 준비와 노력을 하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보다 돈도 많고 학벌도 좋고 인물도 잘나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은 상대를 사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첫째는 그런 사람을 찾기가 어렵죠. 둘째는 그런 사람을 찾는다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의 마음에 들까요? 설령 그런 사람을 사귀어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결혼 생활이 행복할까요? 늘 질투심을 느끼고 의심하고 전전긍긍하고 열등감을 느끼며 살게 될 겁니다. 욕심은 불행을 자초합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회사 다니다가 월급을 더 준다고 하면 저 회사로 갑니다. 이 가게에 물건 사러 왔다가 저쪽 가게의 물건이 품질도 더 좋고 값도 더 싸면 그쪽으로 가지요. 그처럼 이 사람보다 저 사람이 더 좋으면 좋은 사람에게로 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때 먼저 인연 맺었던 사람은 친구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자기 좋은 데로 찾아다니는 거예요. 이 점을 인정하게 되면 타인의 행동 때문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등의 내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쪽 주식을 좀 사놓았는데 저쪽 주식이 좀 오르면 저게 더 좋아 보이고 직장도 저쪽에서 월급 더 준다고 하면 그게 더 좋아 보이는 것처럼 아직 총각이니까 이 여자를 사귀는데 저 여자가 더 좋아 보여 마음이 끌리는 건 보통 사람의 심리예요. 그러나 인생을 똑바로 살고자 한다면 직장을 한 번 정했으면 일단 3년은 꾸준히 다녀보고 그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더라도 내가 한 번 다닌 직장과는 원수 맺지 마세요. 그처럼 사람을 한 번 사귀었으면 한 3년은 사귀어보세요. 그리고 한 번 사귀었던 사람과는 원수 맺지 마세요.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났다고 휙 돌아서면 사람들은 상대가 배신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증오심이 일어나고 그게 다 나중에 나에게 재앙으로 돌아오게 돼요. 그러니까 결혼에도 진중하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남의 인생에 기웃거리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자기 인생을 잘살아야 합니다. 남이 무엇을 인생의 행복으로 생각하는지는 나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그건 사람마다 다르거든요. 지금 나에게 괴로움도 번뇌도 없으면 그게 행복이에요. 행복이라는 걸 자꾸 다른 곳에서 찾지 마세요.

2010-02-16

[변화] '키덜트 신앙'

얼마전 영국의 유력 일간 더 타임(The Time)은 한국 부모들의 지나친 자식사랑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영국은 밤 11시 이후 술집 영업을 허용할지를 두고 국가적 논쟁을 겪었지만 한국에서는 밤 10시 이후 학원들의 심야 수업 허용 여부를 놓고 국가적 논쟁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바다에는 '해삼' 땅에는 '인삼' 집에는 '고삼'이 있다고 하소연하는 한국부모들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1980년대 미국에서 시작돼 세계에 퍼진 '딩크족'(DINK; Double Income No Kids)이 요즘 중국땅에도 퍼지고 있다. '산아제한법'을 피해서 하나라도 더 낳으려했던 중국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딩커쭈"라 부른다. 중국식 '헬리콥터맘'의 과도한 자식사랑이 홀로 서기에도 버거워하는 나약한 젊은 '키덜트'들을 양산해낸 것이다. 작년에 몰아닥친 신종플루로 노인들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망한 이유를 전문가들은 부모 품에서만 곱게자란 젊은 세대에게 면역력이 부족해서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마보이''키덜트'등의 신조어는 몸은 성인이 되었지만 속은 아직 자라지 않은 온실 속에서만 자란 '어른애'를 일컫는다. 목회를 하면서 영적으로도 '마마보이' '키덜트'들이 많이 있음을 발견한다. 신앙생활의 경력이나 횟수로 보면 다 성숙한 어른 같지만 시험이 불어닥치거나 고난이 다가오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과거 우리 선배들은 시험과 고난에 더욱 강인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가? 완벽한 온실같은 시스템을 구비한 환경에서 자라온 성도들은 광야같은 이민교회에 정착하면서부터 '영적 키덜트'로 자란 자신을 발견하게된다.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던 목회자들 훌륭한 제자훈련 프로그램과 각종 성경공부 그리고 언제든 마음을 터놓고 상담할 수 있던 훈련된 믿음의 선배들의 품을 떠나자마자 '홀로 서기'는 커녕 '홀로 버티기'마저 버거운 '영적 마마보이'인 자신을 발견하게된다. 현재 다니는 교회에 문제가 생기거나 목회자에 대해 불만이 생기면 곧 옛날 생각이 나서 모든 프로그램이 완벽히 갖추어져있는 대형교회로 말씀 좋다고 소문난 옆집 개똥이네가 다니는 큰 교회로 우루루 떼지어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0-02-09

[생활 속에서] 이슬람교는 선교의 실패한 흔적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이 지구상에는 이슬람교를 따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역사가 가장 짧은 세계적 종교 이슬람교는 짧은 시간 안에 무서운 속도로 전 세계 140여개 국가에서 15억의 인구라는 거대한 추종자를 확보하였다. 이슬람교는 알라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모하메드의 주장을 따라 7세기에 형성된 종교이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그가 받은 계시도 거짓에 기초한 것으로 보아왔다. 더 나아가 중세 십자군 전쟁에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 세계는 이슬람 세력을 정복하기 위해 엄청난 무력을 사용해 왔다. 그 때부터 기독교를 향한 모슬렘의 증오는 1000년 이상 계속되었던 것이다. 모하메드는 570년경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불행하게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알라(Abd Allah)는 그가 태어나기 전 6개월 전에 사망했고 여섯 살 되던 해 어머니마저 잃어 그는 고아로 자라났다. 모하메드는 힘겨운 성장을 거쳐 25세 되었을 때 15세나 연상인 부유한 상속녀이며 미망인이었던 카디자와 결혼을 하였으나 종교적인 번민에 빠져 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러던 그가 40세 되던 어느 날 그는 초자연적 신비한 종교 체험을 하였고 그 때부터 신의 예언자로 활동하며 아바리비아 반도에 새로운 종교 이슬람교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가 형성된 것은 기독교 선교의 실패의 결과로 본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슬람교는 기독교 선교가 실패한 곳에서 언제나 그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였다. 만일 모하메드가 종교적 갈등과 번민 속에 있을 때 참 신앙을 가진 기독교 선교사가 그의 곁에 있었다면 아마 기독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아라비아 세계는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버려진 땅이었다. 그곳에는 단지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의 수도사들이 살고 있었고 참 진리를 전해줄 기독교 선교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말로 번역된 성경도 없었다. 모하메드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을 때 그 곳에 성경이 있었다면 그의 계시는 아마 설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곳에는 위경 외경 기독교에 대한 왜곡된 가르침만이 넘쳐나고 있었다. 따라서 모하메드는 자신이 받은 계시가 옳은지 검증 받을 기회가 없이 당시 영적으로 깊은 갈증을 느끼고 있던 아라비아 세계로 급속하게 퍼지게 되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진리를 모르고 인생의 깊은 고뇌 속에서 그 해결책을 찾다가 잘못된 종교에 빠져드는 사람이 많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는 한 무명인의 종교적 고뇌를 통해 형성된 이슬람교가 기독교 증가율보다 더 빠르고 강력하게 세상에 퍼지는 것을 보며 큰 충격을 받고 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종교적 번민이 때로 기독교를 대항하는 또 다른 종교를 잉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거룩한 선교적 부담감을 강하게 느낀다.

2010-02-09

[지혜의 향기] 가부좌와 불교수행

서양 사람들이나 신세대들이 동양식 불교 수행을 실제로 따라하면서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참선방이나 법당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 것이다. 걸상이나 벤치 하다못해 무슨 울타리든 난간이든 그 위에 걸터앉지를 않고 곧장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라는 것은 많은 미국사람들에게는 좀 색다른 요구사항일 것이다. 마치 수저 없이 음식을 집어먹는 것처럼 어색하기도 하고 뭔가 빠진 것 같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바닥에 앉더라도 두 무릎을 세우거나 비스듬히 눕거나 벽에 기대어 두 다리를 쭉 펴는 편이 한결 낫지 부처님처럼 가부좌를 틀거나 일본 무사들처럼 꿇어앉는 것은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같은 동양이라고 해도 또 다르다. 앞이 터진 기모노를 입은 일본사람들은 두 무릎을 모아 다다미 위에 꿇어앉을 수밖에 없었다. 핫바지의 한국 남자들은 편안하고 점잖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는데 긴 치마를 입은 여자들은 대개 한 쪽 무릎을 세우고 다소곳이 앉아 눈을 내리깔았다. 중국 사람들도 본래는 바닥에 앉았는데 당나라 때 서역에서 걸상에 앉는 풍습이 들어와 그 후로는 주로 의자와 침대 생활을 하게 되었고 가구도 그에 따라 발달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들 양복을 입고 사니 방바닥에 무심코 쿵 내려앉았다가는 자칫하면 지붕에서 떨어진 박 같이 엉덩이 솔기가 터지기 마련이다. 앉았다 일어섰다 애써 여민 허리춤도 비어져 나오기 십상이고 특히 양장의 여자들은 가히 몸 둘 바를 알기 어려울 지경이다. 인도에서는 예부터 요가가 발달하여 그랬는지 특이한 몸자세가 많았는데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주로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고서는 명상에 잠기곤 하였다. 가부좌란 것은 양반다리로 앉아 종아리를 서로 꼬아 오른 발은 왼 무릎 위에 왼 발은 오른 무릎 위에 놓는 것이다. 익숙해지면 윗몸을 꼿꼿이 세우고 오래도록 명상하기에 편한 자세다. 반가부좌란 한 쪽 발만 다른 쪽 무릎 위에 놓고 다른 발은 반대쪽 종아리 밑에 꼬불치는 것이다. 가부좌는 다리가 짧고 통통한 동양 사람들에겐 쉽지 않고 반가부좌가 훨씬 편하다. 인도의 수행자들은 대개 몸이 마르고 다리가 길어서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부처님 상은 대개 가부좌에다 두 손은 여러 가지 수인을 하고 계시는데 이 손 모양은 그 불상의 계보를 알리는 주된 단서가 된다. 얼마 전 LA의 예술 박물관에서 모셔와 전시했던 것으로 신라시대의 '금동 미륵 반가 사유상'이란 특이한 자세의 국보가 있었다. 전문 지식이 없다면 한글로든 한자로든 이 이름이 뜻하는 바를 쉬 알기 어려울 것이다. 이 불상은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한 쪽 다리는 꺾어 다른 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 쪽 팔로 턱을 고이고서는 잔잔히 웃음 지으며 생각에 잠긴 미래 세계를 구하러 오실 보살상이다. '한 무릎 꺾고 생각하는 미륵보살님 금동 상'이라고 처음부터 우리말로 부르면 쉬울 텐데. 좀 기나? 쉬운 걸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이 불상은 같은 모양이 나무로도 만들어져 일본의 유명한 보물이 되었는데 지금도 신비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나무의 재질이 일본에는 없는 한반도 산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이 생각하는 보살님의 자세는 따라 하기가 쉽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모두 이 미륵 보살님이 한 번 되어 보자. 이 풍진 사바세계 비록 죽을 맛일지라도 오른 다리를 여유롭게 터억 꺾어 왼 무릎에 얹고설랑 오른 팔은 안으로 굽혀 갸웃한 턱을 고이고서는 잔잔한 미소 속에 홀로 한 가닥 생각에 잠기면서….

2010-02-09

[생활속에서] 스포채니티가 필요한 이유

크리스채니티 투데이 최신호(2010년 2월호)에 재미난 특집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스포츠 매니아(Sports Fanatics)'였고 기독교가 과연 스포츠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2월 커버스토리였다. 요즘 프로풋볼(NFL) 플레이오프가 한창이라 이 잡지는 이런 특집 기사를 게재한 것으로 보였다. 스포츠는 그동안 미국 기독교와 적대적인 관계였다. 많은 남성이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대신 스포츠를 즐기자(직접 하는 것과 보는 것) 교회 지도자들은 스포츠를 불편하게 여겼다. 그러는 사이 스포츠는 이 사회에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거인이 됐고 팝문화의 중심에 섰다. 마이클 조던의 복귀가 월스트리트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스포츠 스타들의 움직임은 사회적인 현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교회가 뒤늦게 스포츠에 동참했다. 일부 목회자들은 스포츠 경기장을 찾아가 기도요청을 하는 선수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성경공부반을 열기 시작했다.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는 '스포츠 선교'를 시도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기독교 정신으로 세운 대학들은 학생 스포츠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텍사스 크리스천 베일러 노터데임 바이올라 아주사 퍼시픽 리버티 등 미국 내 기독교 학교들은 모두 주요 스포츠에 참여했다. 수퍼보울이 열리면 많은 미국 교회는 대형 스크린에 비춰지는 경기 장면을 보며 스포츠를 즐기고 재미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스포츠는 단순히 공을 차고 공을 던지고 주고 받는 그런 일의 차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여전히 스포츠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은 초보 수준이다. 크리스채니티 투데이지는 '스포채니티(Sportianity)'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스포채니티란 스포츠(Sports)와 크리스채니티(Christianity)의 합성어다. 스포채니티는 스포츠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과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 두 가지 모두 위험한 발상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스포채니티는 스포츠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 스포츠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잃는 것 스포츠가 미치는 영향 등을 균형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개념을 말한다. 2010년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 열풍이 불 것이고 2001년 남아공 월드컵이 시작하면 많은 교인이 축구에 몰두할 텐데 목회자들은 이에 대한 적절한 '스포채니티'를 염두에 두고 있을까. 워낙 많은 사람이 스포츠에 매료돼 있고 삶이 스포츠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기독교는 문화선교적 스포채니티가 필요한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스포츠라는 분야는 신이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선교사 중 한 명인 사도 바울도 편지 글에서 자주 스포츠와 관련된 용어를 거론한 대목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너무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는 의미다. 그동안 인류는 스포츠를 좋고 싫음이 너무 지나쳤다. 이에 대한 적절한 균형을 잡아줄 때가 된 것 같다.

2010-02-02

[변화] '소금과 빛' 인가? '빛과 소금' 인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작년 장기 기증 서약자가 17만7000명으로 2008년보다 2.4배 늘어난 사상 최대라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기적같은 일들이 벌어졌는가? 작년 2월 "고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기증 소식이 알려지면서 각막기증을 포함한 장기기증에 동참하려는 움직임이 급속도로 확산된 것이다. 지난 하반기 갑자기 등장한 '신종플루'로 한국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곤란을 겪은 곳이 병원의 '응급실'이었다한다. 피가 모자라서다. '신종플루'가 발생하자 너도나도 헌혈을 중단한 것이다. 한국 헌혈운동의 선구자인 '김준곤 CCC 명예총재'가 소천한 뒤 '신종플루'로 헌혈이 급감하자 CCC 전국 간사모임 600여명이 헌혈을 자청해 그분의 나눔의 정신을 이어갔다. 가난하고 못살던 시대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고 받았다던 '복'에 환호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누구도 그 '복'에 환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받았다는 이기적인 간증에 돌팔매질을 한다. 사실 우리는 '40일 기도'를 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가진 98%의 복은 이미 다 받았다. 단 2%를 놓고 목숨걸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식들도 건강도 물질도 '강청기도'를 드려서 얻어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2%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증언부언'의 기도를 하지말라고 했던 것이다. 세상은 작은 예수를 자처하는 그리스도인의 '희생'과 '피흘림'에 감동의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이 손해 안 보면 세상에 손해 보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시면서 '나와 같이 피흘리라!'고 십자가 형틀을 우리 각자의 목에 걸어주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3-14)" 성경의 순서를 따지자면 소금이 먼저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화려한 빛을 먼저 말하고 있다. '진정한 희생'은 '지갑의 피흘림'을 통해 나타난다. 지진으로 초토화된 '아이티'에 35만 이상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얼마나 많은 '작은 예수들'의 지갑이 피흘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2010-02-02

[사목의 향기] 있는 그대로의 당신

해바라기는 데이지 꽃이 아니고 멜론은 장미가 아니다. 왜 모두들 자기 이외의 무엇이 되려 애쓰는 것일까? 심어진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당신이 아는 한 최선을 행하라. 〈있는 그대로의 당신 중에서> 제가 이런 시를 옮겨 적은 이유는 참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우리가 산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 산이 크고 장엄하다는 이유 하나로 그 산이 못생긴 것들 투성이란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고 말합니다. 산에 있는 꼬부라진 소나무는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소나무 밑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한 커다란 바위도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위 위에 붙어있는 이끼도 이름 모를 풀들도 심지어는 꽃들도 하나씩 보면 화려하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각자는 결코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서로가 어우러질 때 아름다워집니다. 산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우러진 조화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해서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삼는 척도 자체가 이미 아름답지 못함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저에게 이런 농담을 들려주셨습니다. 하루는 손가락들이 서로 잘났다고 자랑하고 있었답니다. 엄지손가락이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최고를 말할 때 '으뜸이다.'라고 말하면서 늘 나를 꼽는다. 그래서 내가 최고다" 둘째손가락이 이어 말합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란 그림에서는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과 맞붙어 있으니 내가 제일 거룩하지 그러니 내가 최고다." 셋째 손가락이 말합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제일 길으니 내가 최고야." 가만히 듣고 있던 넷째 손가락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가지지 못한 비싼 것을 가지고 있어 늘 반지는 내게 끼우지 않니? 내가 제일 부자니까 당연히 내가 최고야!" 다른 손가락들의 자랑을 다들은 다섯째 손가락이 조용히 말합니다. "그래 너희들 모두 다 잘났다. 난 thumb up 도 아니고 거룩하지도 않고 거기다가 짧기까지 하고 비싼 것도 없지. 그런데 너희들 이거 아니? 너희들이 아무리 잘났어도 못 생긴 나 없으면 우린 모두 손 병신이 되는 거야!"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나쁜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 덕에 뽐냅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 덕에 행세할 수 있고요.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 못하는 사람 덕에 거들먹거립니다. 그래서 좋은 차는 나쁜 차를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공부 잘 하는 사람은 공부 못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요. 그게 뽐내는 도구가 아니고 서로의 필요를 아는 지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쁜 차가 없고 가난한 사람이 없으며 공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 사회는 병든 사회 장애 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병든 가정 병든 교회 혹은 병든 사회는 서로가 어울리지 못하는 성급함일지도 모릅니다. 늘 우쭐거리는 마음이 앞서 남보다 낫다는 교만한 생각에 다섯째 손가락을 업신여기는 병든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급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새로운 해에 늘 새로운 마음을 다져보지만 올해는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알아가도록 노력해봄이 어떨는지요? 그것이 가정을 복음화 시키는 일이고 그것이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우리 사회에 선포하는 일이며 그것이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뵙게 하는 지혜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밝아온 새해 하느님의 복 많이 받으시고 그 받은 복으로 다시 하늘에 복 짓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2010-02-02

[법률스님의 즉문즉설] 사소한 짜증

Q.가족들의 행동이 제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사소한 일에도 자꾸 짜증을 내게 됩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정리정돈을 잘 하지 않고 어질러 놓기만 하는 그런 것들이 많이 짜증스럽습니다. A.짜증을 내니 남편과 아이들이 정리정돈을 잘하게 되었습니까? 본인 마음만 괴롭고 답답할 따름이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자신에게나 가족들에게나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행동을 왜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까? 왜 자신이 그런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지금 질문자가 하는 행동은 자신의 마음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가족 관계도 나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그 깨달음이 가슴 깊이 탁 꽂힌다면 그 동안의 어리석음은 오늘 지금 길로 즉시 고쳐질 수 있습니다. 또 다시 같은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되거든 그 길로 방에 들어가 문 닫고 108배를 하세요. '부처님 정말 제가 바보 같습니다. 이 백해무익한 짓을 또다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가슴 깊이 참회합니다' 하고 참회기도를 하십시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깊이 자각하게 되면 단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즉시 습관이 끊어질 것입니다. 짜증을 내면 본인의 마음이 괴로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까지 엄마처럼 되어 갑니다. 아이들은 엄마처럼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자라서 그 어머니와 똑같아집니다. 따라 배우는 것이지요. 그 아이들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모두 이런 식으로 수없이 많은 것들을 부모에게서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니 본인의 인생뿐 아니라 아이들의 인생까지 생각한다면 정신을 딱 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음을 여기서 멈추는 것이 지금 질문자가 해야 할 수행입니다. 오늘부터는 '치우는 것은 다만 나의 일'이라 여기십시오. 집에 일하러 온 가사 도우미가 저번에 치워놓고 간 집안이 다시 어질러졌다고 신경질 내며 가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꾸 더럽혀져야만 치울 일이 있고 그 지저분한 것을 치우라고 월급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주부의 일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치우는 것이 내 일이니 가족들이 정리정돈을 잘 하든 안 하든 그런 것에 상관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생활습관일 뿐이고 치우는 것이 나의 몫입니다. 이처럼 치우는 것을 내 일로 받아들인다면 짜증이 좀 줄어들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노력을 하면서도 뭔가 좀 억울하다는 마음이 여전히 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 두세요. 치워주면서 짜증내는 것보다는 치우지 않고 마음 편한 것이 자신에게도 좋고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좋습니다. 치우지 않는다고 어지러놓는 것이 한없이 더해질까요? 어느 정도까지는 어질러지겠지만 일정 수준에 이르면 계속 어질러지지는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그대로 보아 넘기는 것도 공부입니다. 아무 분별심 없이 치워주는 것이 보살행이라면 어질러진 모습을 다만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들이 좀 치워달라고 엄마에게 부탁할 때가 옵니다. 그런 요청을 받고 그 때에 비로소 치워주게 되면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것입니다.

201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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