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교차로] 봄 편지 보냅니다
기어코 오시는군요. 눈보라 한파 속에 모습조차 떠올리기 힘들어 혹시 안 오시나 마음 조렸어요. 가시덤불 속에 진 첫사랑처럼 속절없이 가버린 줄 알았어요. 마지막 편지, 혹은 두 켤레의 낡은 구두로 남은 초상화처럼 얼어붙은 계절 속에 파묻혀 버린 줄 알았어요. 떠난 것들은 먼지 낀 사진첩에서 빛 바랜 채로 흑백의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사랑도 청춘도 젊음도, 시간 속으로 떠나 간 것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언젠가 당신은 이별이 두려워 훌쩍이는 내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습니다. 떠나도 사랑은 늘 머무는 것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아픈 흔적은 지워지고 봄이 다시 돌아오듯 예쁜 사랑의 꽃망울 피울 수 있다고 했어요. 지난 겨울은 너무 잔인 했습니다. 중서부, 동부에 몰아친 폭설과 강추위로 심장마저 꽁꽁 얼어붙었지요. 추위 때문만은 아닙니다. 직장을 잃었거나 하루 벌어 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죽기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경제가 호전 된다고 하지만 온기를 느끼려면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며칠간은 무척 슬펐습니다. 믿고 사랑하는 후배가 암 수술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후배는 멀리 있어도 가슴 속 깊이 자리하고 못 만나도 생생하게 눈에 밟히는 내 삶의 희비애락을 하소연하는 살아있는 동지고 친구였지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키모세라피 때문에 머리가 홀랑 빠졌다며 남의 얘기하듯 담담하게 소식을 전했겠어요. 너무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없잖아요. 나도 숨이 막혀 제대로 위로도 못하고 유리항아리 들고 널 뛰는 심정으로 안절부절 두서없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믿고 나한테 큰일 안 생기면 전화조차 안 하는 내 나쁜 버릇 때문에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 달랑 보내고 1년 내내 연락을 안 했거든요. 사는 게 뭔지, 목숨 부지하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슴 후벼 파는 아픔으로 한동안 넋을 놓고 헤맸습니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중략)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사랑하는 후배에게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보냅니다. 봄의 살찐 기운으로 봄의 신령으로 병마와 싸우길 바랍니다. 희망, 빛, 생명, 청춘, 젊음, 용기, 소망 그리고 내일이라는 미래의 모든 가능성이 봄의 단어 속에 담겨 있습니다. 아프고 할퀸 대지로 꽃신 신고 찾아오는 이 찬란한 봄을 맞기 위해 그 모진 겨울을 담담히 견뎌 낼 수 있지 않았겠어요? 지진이 땅을 갈라 놓고 쓰나미가 천지를 뒤덮어도 봄이 오는 발자취를 거역할 수 없습니다. 중동에서도 자유와 평화란 이름으로 ‘아랍의 봄’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봄은 희망이고 생명입니다. 어떤 재난과 박해,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봄은 생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대지는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생명을 싹 틔울 사랑의 온기가 살아있는 한 봄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봄은 지금 희망의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암 치료로 민머리가 된 내 사랑하는 후배에게도 파릇파릇한 봄향기로 삼단 같은 긴 머리가 돋아나길 소망합니다. 두 팔로 가슴으로 당신의 봄을 부둥켜 안으십시오. 귀 기울이면 영원으로 피고 지는 생명의 목소리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