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교차로] 소나무가 쓰러지던 날
이기희/윈드화랑대표·작가
흰 눈이 내리면 다른 활엽수들이 앙상한 가지를 비비고 있는 동안 짙푸른 녹색을 온 몸에 두르고 독야청청한 모습을 뽐냈었다.
20년 전 새 집으로 이사 온 뒤 애들과 함께 작은 소나무를 사다 심었다. 핼로윈이 오면 나무 아래 호박도 갖다 놓고 크리스마스가 때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알록달록하게 등을 매달았다.
나무는 애들보다 훨씬 빨리 늠늠하게 키가 자랐다. 아이들이 대학에 간 후론 사닥다리 타고 오르기 힘들어 이젠 장식을 하지 않는다. 대신 솔잎 사이로 애들과 함께 매달았던 추억의 방울 소리를 듣는다.
애들이 모두 떠난 마당을 홀로 지키기 외로왔을까. 잎이 무성해 땅 속 깊히 뿌리를 내린 줄 알았는데 잔뿌리가 몹시 상해 있었다. 그토록 깊히 상하고 병들 때까지 나무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버티고 있었던 게다.
소나무의 '솔'은 나무 중에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수리'라고 부르다가 '술'로 바뀌었고 '솔'로 변했다. 유럽이 오크 지중해는 올리브 일본은 편백이라면 소나무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나무로 칭송을 받아왔다.
목재와 건축재료는 물론 뿌리 줄기 잎 꽃가루 나무 속껍질 새순 솔씨 송진 관솔 등 버릴 것이 없다. 죽어서도 소나무 관에 묻혔으니 민족의 삶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자기끼리 모여 살아야 잘 자란다. 소나무 뿌리에 살고 있는 공생균은 뿌리의 영양분을 분해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다른 활엽수가 군락에 침입하면 이 균이 소멸된다. 그래서 소나무는 잎을 나무 아래로 떨어뜨려 두껍게 쌓아서 다른 나무의 씨앗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만일 다른 씨앗이 들어와 싹을 틔울 경우 송진을 분비하여 아예 싹을 죽여버린다.
겉으로 의젓하고 품위가 있어 보이지만 뿌리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뿌리는 식물의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땅 속의 물이나 무기 염류를 흡수하여 시들지 않고 잘 자라도록 하는 일종의 영양기관이다. 뿌리가 약하거나 병들면 꽃이 아무리 화려하고 잎이 무성해도 결국은 죽게 된다.
나무는 나무마다 향기가 다르다. 사람처럼. 살아 있을 때도 나무 고유의 향기가 있지만 죽어서도 향기를 남긴다. 싸리나무는 달콤하고 향나무는 향냄새가 나고 은행나무는 텁텁하고 소나무는 송진 냄새를 풍긴다. 소나무는 죽어 솔향을 남기는데 나는 무슨 향기로 기억될까.
쓰러진 소나무를 살릴 방도가 없으니 애들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겉보다는 속이 단단한 나무가 돼야 한다고 말해줘야 겠다. 다른 나무를 밀어내지도 말고 밀려나지도 않는 튼튼한 나무로 자라라고 부탁할 생각이다.
어디서 왔는지 널 존재하게 하는 뿌리의 근원에 대해 더 이상 아파하지도 상처받지 말라고 말해야 겠다. 속이 튼실한 건강한 뿌리내리는 아름다운 나무로 자라야 한다고.
잘 가거라 소나무야. 헤어짐을 위하여 만남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청춘의 푸른 꿈과 염원를 담았던 늘 푸르렀던 나의 소나무여. 뽑히지 않을 나무로 자랄 아이들이 있기에 눈물없이 너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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