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교차로] 그리운 것들은 돌아온다
이기희/윈드화랑 대표·작가
계절이 바뀔 때 꽃향기가 뒤뜰을 적실 때 가랑잎이 발아래로 떨어질 때 까닭모를 슬픔이 차오를 때 그리운 사람은 그리운 추억되어 기억의 문을 두드린다.
나는 시골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낙동강이 굽이쳐 돌아서는 나루터 끝머리에 현풍할매곰탕으로 유명한 동네가 있고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엄마 등에 업혀 한 시간정도 가면 동지미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지금은 현풍시내에서 택시타면 5분정도 걸리지만 기억 속의 고향집은 하루에 두 번 오가던 삼천리 완행버스의 뽀오얀 먼지 속에서 가물거린다.
1년에 두 번 산과 들로 소풍가는 날은 신이나 밤잠을 설치곤 했다.
삶은 계란과 사이다에 김밥말은 봉지를 들고 산중턱에 오르면 조막손을 입가에 대고 제일 먼저 '야호'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산들은 약속이나 한듯 '야호'하고 대답을 했다.
동무들과 여럿이 소리를 지르면 발아래 모든 산들이 잇달아서 대답을 했다.
산은 말없는 산이 아니었다. 산들은 내가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대답하며 다가오는 정겨운 모습이었다.
메아리는 산울림이다. '월인석보'에 '뫼사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ㅅ' 탈락돼 뫼아리가 됐다. '뫼'는 산이고 '사리'는 소리와 어원을 같이한다.
메아리는 뫼소리 산의 소리라는 뜻이다.
메아리는 산이나 골짜기에서 소리가 진행하다가 다른 산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현상이다.
소리는 다른 매질을 만나면 흡수 반사 굴절 회절 등의 물리적 특성을 보인다.
대리석 강철같은 것은 잘 반사되지만 나무나 옷감은 소리를 흡수한다.
울창한 숲속보다 민둥산에 메아리를 잘 들을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메아리는 반사한 음향이 음원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어야 생긴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메아리를 들을 수 없다. 사랑처럼.
사랑의 말들을 주고 받기 위해선 조금은 거리를 두어야 한다. 메아리가 대답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반사된 소리가 원래의 소리와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사랑의 메아리를 가슴 속에 담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숲의 요정 에코는 나르키소스라는 미남 청년을 사모했으나 거절 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슬픔과 비통에 빠진 에코는 날로 몸이 여위어져 결국 흔적마저 없이 사라졌는데 연인을 애타게 부르는 에코의 소리가 메아리가 됐다는 신화다.
사랑은 메아리다. 돌아오지 않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던 것처럼. 추억의 되새김질로 가슴 저미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도 너무 떨어져 있어도 사랑의 메아리를 들을 수 없다.
파동이나 입자가 물질을 통과할 때 마찰이 강해지고 거리가 멀어지면 흡수되거나 에너지나 입자의 수가 줄어드는 감쇠현상이 일어난다.
메아리는 대기 속에서 소리의 감쇠작용이 작을 수록 잘 들린다. 마음의 파문이 거세게 일고 욕망의 파도가 높아지면 마음 속 메아리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불러도 대답없는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 될지언정 나는 오늘도 메아리를 찾아 헤맨다.
여린 바람 속에 혹은 생의 거센 파도 속에 실려오는 그대 목소리를 듣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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