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교차로] ‘결혼신용’ 불량자
이기희 / 윈드화랑대표·작가
신혼 때 열렬했던 불같은 사랑도 업데이트를 안하면 식은 죽처럼 맛이 없어진다. 가끔 낯 간지러운 사랑 고백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선물도 주고 받고 다독거리며 관계를 다져놔야 비상시에 펑크가 안난다. 매일 한 푼 두 푼 저축도 안하는 주제에 한꺼번에 큰 돈을 인출하면 단 번에 초비상사태에 돌입하게 된다.
서양 사람은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별거 아니다’며 내 반 쪽은 흉잡길 좋아하지만 입에 발린 소리라도 듣고 싶은 게 안 들어본 사람의 마음이다. 서로 마음만 알면 됐지 함께 살면서 무슨 선물질이냐고 얼렁뚱땅 넘기는 사람들도 양심에 구멍 난 간 큰 남자들에 속한다. 지금 잘 참는다고 영원히 참는다는 보장없고 여차여차해서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어찌 감당할 건지 미래가 걱정된다.
은행도 잔고가 딸리면 처음 한 두 번은 봐준다. 하지만 부도가 잦으면 크레딧에 금이 간다. 부부 간에도 부도가 잦으면 신뢰에 금이 간다. 갖고있는 자산보다 부채비율이 커지면 크레딧 점수가 하락된다. 사랑보다 상처가, 믿음보다 불신이 커지면 빨간불이 켜진다.
그나마 비상시에 대처할 저축형 예금 종목을 사둔 사람은 모면할 구실이 생긴다. 자식, 부모, 형제, 직장, 친구, 동료, 이웃과의 관계에 점수를 따두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신뢰가 바닥이 나서 신용불량자로 찍히기 전에 점수를 축적해야 한다. 그러려면 평소에 내공을 쌓아 놓는게 가장 효과적이다. 한 푼 두 푼 저축하듯 정성스레 상대를 대하고 감싸주면 ‘사랑의 적금통장’에 잔고가 늘어날 것이다.
동양에서 인륜도덕의 시원이며 만복의 근원인 결혼의 유래는 서양에서는 탈환과 거래로 시작됐다. 신랑이 신부를 납치해 달아나면 친구들이 종족으로 부터 피신하도록 도와주었다. 신부가 임신해서 신부쪽에서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숨어지냈는데 ‘허니문’의 기원이 여기서 시작됐다고 한다. 웨딩(Wedding)의 웨드(Wedd)는 신랑이 신부에게 맹세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신랑이 신부 아버지에게 지불하는 돈을 말한다. 번식의 목적으로 신부를 샀다는 얘기다.
은행에 새 계좌를 열면 우유 팔러가는 처녀처럼 가슴이 설렌다. 우유 판 돈으로 달걀사서 병아리 까면 그 걸 키워 새 옷 사입고 축제에 갈 꿈을 꾼다. “남자들이 다투며 춤을 추자고 졸라도 ‘흥’ 하며 춤을 안 출거야”하며 머리를 흔드는 순간 우유통은 깨지고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인생을 ‘꿈 깨’로 요약한 이솝 우화다.
망가진 꿈의 사금파리에 찔려 허우적 거리더라도 결혼이라는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계속 넣을 생각이다. 달콤한 밀어와 선물공세가 없었다고 더이상 닦달하지 않을 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이들과 내게 버팀목으로 세월을 견텨 준 그 듬직한 어깨에 조용히 박수를 보내고 싶다. 목 돈 한 번 만지지 못하고 이 구멍 저 구멍 막느라 주름진 그 손에 사랑의 통장을 쥐어 줄 작정이다. 영원히 잔고가 마르지 않는 믿음의 통장을 줄테다. 처진 어깨가 더 내려가지 않도록 이번에는 내가 사랑을 저금할 차례다. 사랑을 내가 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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