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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교차로] 마이너스에서 다시 시작을···

이기희/윈드화랑대표·작가

고백은 아무에게나 하는 게 아니다. 사랑 하지 않는 남자 어깨에 매달려 울어봤자 헛 고생일 뿐이다. 이심전심, 마음의 끈이 닿아있어야 상처를 드러낼 용기가 생긴다. 어릴 적엔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혼자있을 땐 울지 않았다. 마을 어귀로 달려가 프라타너스 나무 밑으로 엄마 얼굴이 보이면 그 때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살아가면서 속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는 증거다. 3년 가까이 칼럼을 쓰면서 두 자식이 단골 메뉴로 등장했지만 큰 딸에 대한 얘기는 별로 쓰지 않았다. 굳이 감추고 덮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새라 페일린처럼 유세장에 안고 다니며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딸 리사는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났다. 새 해 첫 칼럼에 그 애 이야기를 쓰는 건 나보다 더 힘든 분들에게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후 12시간에 창자를 뚫는 수술. 심장 판막에 동전 크기의 구멍 확인. 발육부진 장애아. 움직이지 못하고 여덟 살을 못 넘긴다는 의사 진단. 18개월부터 장애아 센터에서 재활교육. 심장판막 이식수술 성공. 지능지수 70. 명문 고등학교 특수반 졸업. 장애아 올림픽 수영선수, 레고게임과 퍼즐맞추기 신동(?), 베이커리에서 10년 근무. 감성지수 150(?), 행복지수 만점, 대충 추린 큰 딸의 이력서다.

우리 식구는 새해를 ‘리사 구하기(?) 작전’으로 시작했다. 지난해 말부터 감기 증세가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방학이라 모처럼 집에 온 동생들과 늦게까지 비디오 보고 게임을 즐기며 다소 무리를 했는지 기관지염이 악화돼 폐렴 증상를 보이기 시작했다. 리사가 아프면 우리 식구는 긴장한다. 새해 전야제를 위해 준비한 캐비아와 샴페인 대신 항생제와 기침약을 들고 애들은 순번을 정해 밤 세워 간호를 했다. 온 식구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응급실을 방불할 정도로 손 발이 척척 맞아 떨어졌다.

모두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콜록거리며 뜬 눈으로 밤을 세고 맞은 새 해 아침은 드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피곤했지만 너무 행복했다. 지키고 지켜줘야 할 가족들이 있다는 고마움에 목이 메였다. 그동안 허망하게 높히 쌓았던 욕망의 바벨탑을 부수며 낮은 곳에서 솟아오는 작은 희망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출발도 무성한 숲이 될거라는 희망의 목소리를 들었다.

첫 남편을 암으로 잃었을 때 호스피스 간호사가 ‘착한 사람에게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선물했다. 랍비인 저자 헤럴드 쿠쉬너는 조로증을 앓는 아들이 10대 초반에 죽은 뒤 이 책를 썼다.

‘선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진 짓하며 산 적도 없는데 왜 내게만 이런 불행이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의 해답은 없다. 분명한 것은 내가 당하는 불행은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 옭아메는 죄의 덫에서 풀려나는 길은 스스로 죄의 덧에서 놓여나는 길 밖에 없다. 인생은 거래처가 아니다. 이만큼 잘했으니 잘 살고 복을 받아야 한다는 공식이 없다.

마이너스에서 출발한 딸의 삶이 많은 플러스를 선물했다. 리사는 짐이 아니라 우리를 묶어주는 단단한 끈이고 축복이다. 짐은 버거워 하는 자에겐 무겁고 힘들다. 하지만 그 무게를 감당하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삶엔 깊이와 용기를 준다.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함께 껴안으면 털코트처럼 따뜻해진다는 바람의 목소리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새해인사로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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