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교차로] 사월의 합창
이기희/윈드화랑대표·작가
뿌리는 살을 에는 고통에도 놓지 못한 모진 목숨 줄을 땅위로 밀어올리며 생명의 언어들을 대지에 적고 있다. 꽃들도 사계절의 첫 악장인 봄의 향연을 위해 연지곤지 찍고 분단장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사계'는 비발디의 작품집 '화성과 착상의 시도'에 실린 12개의 콘체르토 중에 포함된 4개(봄 여름 가을 겨울)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다. 졸졸 흐르는 샘물소리와 함께 산들바람이 불며 봄의 서막을 알린다. 천둥 (트레몰로)과 번개(빠른 패시지와 삼화음 음형)가 치는 악천후가 지나면 새들이 다시 노래하고 나뭇잎과 풀잎들이 봄을 속삭인다.
끊기는 비올라는 개 짖는 소리를 표현하고 제1바이올린의 선율은 목동을 위한 자장가다. 피리 소리에 요정들과 목동들이 춤을 추고 목동은 꽃이 아름드리 핀 풀밭에서 사랑의 속삭임을 들으며 잠이 든다. 충만한 봄의 향연이다.
봄은 여인의 달이고 꽃의 달이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 속에 나오는 여인들은 화사한 꽃을 머리에 이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내릴 듯 우수에 찬 눈매로 담담하게 운명을 맞는다.
'한 많은 여인이 머리에 꽃을 얹는다'는 그의 말처럼 여인들의 머리에 얹힌 꽃은 한이다. 세상의 무거운 짐이다. 생의 버거운 짐은 그 짐을 질 수 있는 사람에게 부여되는 꽃왕관일지 모른다. 비록 가시왕관이 돼 살을 찌르더라고 거부하지 않는 몸짓으로 받아들이는 생의 면류관이다.
천화백은 불타는 예술혼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였지만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함께 극장을 가곤 했던 그 남자가 좋아하는 라일락을 여인의 머리에 담으며 붓과 화폭으로 사랑의 세레나데를 바쳤다.
나는 봄을 잘 타는 편이다. 실은 모든 계절을 잘 탄다. 주정뱅이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술먹는 것 같이 내게 가슴 설레지 않는 계절은 없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중요한 사람에게 순간은 놓칠 수 없는 영원이다. 남은 시간이 지나간 시간보다 적은 것을 알면 하찮은 것이 축제가 된다.
'다시는 되돌아 올 수가 없어서 /동으로 한 세상 서로 한 세상 /한 획이라도 더 긋고 싶어 /세찬 몸부림이라도 쳐 보았나요?' (배미순 시인의 '시간의 들판'중에서)
시간이 지나간 흔적은 잔인하지만 몸부림치며 오늘을 떠나보내야 하기에 부둥켜 안고 살만한 무엇이 내일 속에 있는 지도 모른다.
꽃피는 사월에는 '사월의 노래'를 부르리라.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기다리며 그대에게 꽃잎 연서를 띄우리라. 감춰 둔 오렌지색 드레스를 입고 '꽃다발을 든 여인'처럼 천개의 고독을 눈에 담고 그대에게 다가 가리라.
책갈피 속에 고이 넣어 둔 보고픈 이름들을 불러내 예쁜 종이학 접어 그리움을 담아 보내리라. 옛사랑의 숨길이 담긴 돌담길을 홀로 걸으며 외로워하지 않고 이 봄을 맞으리라.
황량한 계절의 모퉁이를 돌아 용케도 견뎌 온 그 인고의 시간들을 꽃잎 속에 알알이 새겨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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