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교차로] 죽어도 살아있는 나무
이기희/윈드화랑대표·작가
장례식은 한 인간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 모습을 증거하는 엄숙한 현장이다. 무얼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심은 만큼 거두고 뿌린 만큼 꽃 피고 베푼 만큼 백합꽃 향기로 남는다.
영정 앞에 머리 조아리는 것은 이룩한 업적 때문이 아니다. 진지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한 인간이 남긴 크고 작은 발자취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내가 죽거던 사랑하는 사람이여 /날 위해 슬픈 노랠 부르지 마오 /내 머리맡에 장미도 심지 말고 /그늘지는 사이프러스도 심지 마소서(중략). 원하신다면 날 기억 하시고/ 아님 잊으셔도 좋습니다.'
죽음이 갈라 놓는 이별의 단절과 망각을 노래한 영국 여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젯티의 시다. '뜨지도 지지도 않는 황혼 속에서 /어쩜 당신을 기억할는지 /아님 영원히 잊을는지도 모릅니다'에 이르면 죽음이 영원한 이별의 끝이라는 환상을 지울 수 없다.
서른 여섯의 꽃다운 생이 끝날 즈음 황진이는 '어우야담'에 '내 생전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니 죽은 후에는 산에다 묻지 말고 대로변에 묻어 주세요'라는 글을 남겼다.
'숭양기구전'에 '저는 천하의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자애할 수 없으니 제가 죽거던 금수의 관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신을 내 버려서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이가 내 살을 뜯어먹게 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 삼도록 해 주세요'라고 기록된 걸 보면 일부종사하며 필부로 살지 못한 여인의 한맺힌 몸부림이 절절이 담겨있다.
후회없는 삶은 없다. 완전한 삶이 없기 때문이다. 뻐꾸기는 둥지를 틀지 않고 혼자 산다. 수컷은 암컷과 교접을 한 뒤 날아가버리고 암컷은 때까치나 지빠귀 등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뻐꾹뻐꾹 우는 뻐꾸기의 울음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는 건 둥지없이 떠도는 처량함 때문일 것이다.
천국에서 다시 만난다해도 극락 환생한다 해도 이 땅에서의 이별은 뻐꾸기 울음처럼 슬프다. 한 인간의 삶을 접는 순간에 애통해 하며 겸손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의 일생을 요약하긴 쉽지 않다. 어쩌면 죽은 후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지 모른다. 장례식에서 간추린 몇 줄이 생의 이력서라면 적지 못한 채 꽃향기로 남는 것이 묘비에 새길 문구일 것이다.
어머님이 돌아 가신 후 딸과 자주 여행을 하기로 약속했다. 추억의 나무 심기를 할 작정이다.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내 삶 속에 크고 작은 나무들을 심어 주셨다. 가뭄과 거센 비비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단단하고 늘 푸른 나무들이 자라 우람한 숲이 되었다. 이제 내가 그 나무를 옮겨 심을 차례다.
영원히 죽지 않는 나무 한 그루를 딸 애 가슴에 심어 줄 생각이다. 죽어도 영원히 살아있는 별보다 더 빛나고 눈부신 사랑이란 이름의 나무 한 그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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