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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부모 체험수기 대상-한번에 한 걸음씩

Chicago

2002.08.3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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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동틀 채비를 끝낸 먼 하늘 끝이 오늘도 아름다운 아침이다.
간단한 차림으로 물병 하나를 챙겨 허리에 차고 오늘도 '아침고요 숲'(마샬케년의 한 구역을 내가 이렇게 이름 붙여 주었다)으로 들어선다.
계곡의 흐르는 물에 세수를 하고, 산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물소리, 아침 숲이 깨어나는 소리들이 어우러진 '아침고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자주 생각하곤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또 있을까 하고.
산 중턱에 올라 먼 하늘 끝을 쳐다보며 가뿐 숨을 몰아내고 앉아 있으면 살아 온 날들의 모든 찌꺼기들이 올올이 빠져나가는 듯 하기도 하고 아침 숲의 정기가 내 가슴속을 어루만져 주는 듯 하기도 한다.

송 에스더 <캘리포니아 거주>

송 에스더 <캘리포니아 거주>

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숨 가쁘게 살아온 지난 10여 년의 세월, 억만금을 준대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세월이지만 그 격랑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나는 그것이 아니고서는 배울 수 없었을 삶의 신비를 얼마만큼 체험했다고 나 할까, 아니면 신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고 나 할까, 그것을 인해 감사해 하고 싶다.

한 남자와 여자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 자녀와 더불어 가정을 이루고, 소중하게 지켜주며 믿어주고 의지하는 삶. 백발의 노부부가 다정하게 노을을 바라보다가 서로의 옷 깃을 여며주며 따스한 차 한잔을 서로 권하는 아름다운 모습.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고, 당연히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었다.

어디에서부터 균열이 생겼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함께 공유할 수 없는 너무나 큰 가치관의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여자의 육감은 믿을 만 한 것인가? 아닌가? 정답은 모른다.
그러나 두 아이를 낳고 언제인가부터 가끔 내 육감은 아이아빠의 지나치게 여자들에게 친절한 것에 적신호를 보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교회의 일이라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명목 앞에 나는 할 말을 잃었고, 때로는 남편의 해명에 내 자신이 부끄럽기 조차했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좀 더 분명한 태도로 아내를 배려해 주기를 바램 했었다.
우리가 아무리 별 뜻 없이 때로는 선의로 관여한 일이라 하더라도, 남녀 관계란 미묘한 것이어서 경계하지 않으면 스스로 시험을 자초하게 되는 것임을 그는 오만스레 무시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나약하기 그지없어서 스스로 섰다고 자부할 그 때가 가장 넘어지기 쉬운 때임을 그는 잊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세월이 흐르며 우리는 어느새 학부모가 되어 훌로리다에 살게 되었다.

일년을 훨씬 넘기고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 졌을 무렵, 남편의 J 엄마에 대한 유난스런 관심으로 다투는 일이 잦아지던 어느 날, 우연히 유심히 보게 된 전화 청구서 기록에 유독 그녀의 집 전화번호가 많이 눈에 띠었다.
시간을 살펴보니 주로 내가 출근하고 난 낮 시간에 건 전화가 하루에도 몇 번 씩 이나 치는 때도 있었다.
(그 당시 남편은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상스런 생각에 지난 몇 달간의 청구서를 찾아보니 언제인가부터 계속 되어 온 전화사용이었다.
촉각을 세우고 생각해 보니 의혹스런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럴 즈음 본부에서 무슨 연유에서인지 전근 발령이 있었고, 다행히 우리는 그 도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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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 콜로라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주위에서의 무성한 소문으로 서둘러 윗 사람들 선에서 인사처리가 있었다고 한다.

새 도시에서의 어느 월요일 아침, 출근을 하려고 막 집을 나서려다 급한 연락을 해달라는 전화를 받고 남편의 출장지에 전화를 해보니 안 왔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심장의 박동이 순간적으로 멎는 듯 했고,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토요일 오후에 출장 떠나는 그를 분명히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는데, 안 왔다니 그러면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내 머리 속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난 2년여 동안의 의혹과 불신은 불씨에 기름을 끼얹은 듯 혀를 날름거리며 가슴을 태워왔다.

"그래 이성을 찾아야지. 함부로 감정에 휘말리지 말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 두 아이의 아빠가 아니 교회의 지도자가 아닌가?"
겨우 진정을 하고 산호세에 있는 작은 댁으로 전화를 해 보았다.
비록 그가 떠나면서 일정이 바빠 들를 수 없다며 작은 댁을 위해 준비해 준 선물마저 두고 갔지만, 생각이 바뀌어 그곳에 들렀다가 출장계획에 차질이 생겼기를 희망해 보았다.
그러나 시동생은 자기 형님이 그쪽으로 출장을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확인해 볼 곳은 한 곳 뿐이었다.
얼마 전에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간 J 엄마는 그때 친정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쪽 전화번호를 찾아 번호를 누르는 내 손 끝은 후둘후둘 내 마음처럼 떨려왔다.

"나도 우리 J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구만, 어제 일 나간다고 나가더니 연락도 없이 지난밤에 안 들어 왔어, 이런 일은 없었는데..."
제발 J 엄마와 연관된 일이 아니기를 소원하며 걸었던 전화에서 나는 내가 가장 두려워 했던, 듣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듣고 그만 다리에 힘이 빠져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할 일을 생각해 보려 했으나 머리 속이 하얗게 바래져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온종일 허기가 지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멍하게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내 눈에서 그제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감정은 극으로 치 닫을 뿐 전혀 합의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리저리 합리화할 뿐 사과 한마디 없이 도리어 부아만 질러대며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가 없었던 그때 얼음처럼 차가운 그의 표정과 몸짓이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너무도 쉽게 표현해주고 있었다.

J 엄마가 남편과 별거를 하면서 소문은 더 무성하게 소란을 떨었고 우리는 우리대로 안으로 곪아 가는 부부관계를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그 곳에서의 임기를 채우지도 못하고 그는 스스로 사표를 썼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이제 남편은 자기는 한국 부모님 댁에 가서 쉬고 싶으니 나는 알아서 아이들 데리고 갈 곳을 정하라는 식이었다.
친정 어머니께서 일년 전에 작고 하셨기에 마땅히 갈 곳이 없던 나는 텍사스 큰 오빠네를 향해 9살, 11살 두 딸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세 모녀의 불안한 여정이 언제, 어디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을지 그것은 기약이 없어 보였다.
한국에서 쉴 만큼 쉬다가 자식들 생각이 나면 데리러 오겠지.... 그렇게 무작정 기다려 보았으나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소문만 들려올 뿐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어이없고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 잠을 깨고 나면 악몽이었구나 하고 잊고 싶은 그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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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순간 나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강요하는 그 아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픔은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결국 나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몇 일 째인지도 모르는 날들을 불면으로 지새워도 육신만 흐느적거릴 뿐 잠은 오지 않고, 어찌된 일인지 잘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정신은 또렷하기만 했다.
불면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온갖 생각의 나래들이 현실과 비 현실을 넘나들며 나를 피폐시켜 갔고, 어둠이 내리면 침대에 들면서 "하나님 아침을 보지 않고 깊이 잠들게 해주세요, 그렇게 해주세요"하는 기도가 매일의 소원이 되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내 기도에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생각이 들자 나는 약사로 일하고 있던 조카에게 나의 불면증을 호소하고 보내주는 약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불면과 부족한 섭생으로 점점 나약해 가는 몸을 위해서조차 한 알의 약도 양보하지 않고 서로 크기와 색깔이 다른 한 병의 알약을 모았다.
그 당시 내 경우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다가 알게 된, 술과 함께 수면제를 복용하면 효과가 높다는 사실도 깨어나면 안 된다는 내 결심에 확신을 주었다.
이제 신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어느 때고 나 스스로 나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마저 들었다.

영혼이 달아나 버린 흐느적거리는 육체가 하루를 버티고 나면 어둠은 안도와 함께 현실에서의 도피를 제공해 주어 다행이었다.
산다는 일이 '욕'처럼 혐오스럽던 그때, 아무 미련도 없는 삶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고 끈질기게 내 의식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두 딸아이 들 이었다.
내가 없으면 아이들 아빠가 데려다 거둬 주겠지 하면서도 허망하게 스스로 목숨을 취해버린 제 어미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아이들이 폐인이 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며 잠을 청하는 밤이면, 나는 베게 밑에 묻어 두었던 약병을 딸각딸각 내 귀에 흔들어 주며 나를 달래주곤 했다.

"여기에 약이 없잖아, 언제든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그래, 오늘밤만 참자, 하루만 더 참자!"
고통의 세월은 참으로 더디게 하루해가 뜨고 또 어둠이 내리며 그렇게 흘러갔다.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한국에서의 대학 졸업이 적당한 직장을 얻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해서 답답해하고 있을 때, 교회 집사님의 권유로 배운 치과기공 기술이 1991년 여름 북가주로 거처를 옮긴 우리 세 모녀의 밥줄이 되어 주었다.
초를 녹여 이 모양을 만드는 기술자로 일을 했는데 손으로는 일을 하면서도 머리 속은 복잡한 남편과의 일들로 안정을 누릴 수가 없었으나 다행히 그 직업은 아이들과의 기본적인 생활을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한참 불경기로 힘들어하던 주인이 직원을 반으로 줄이면서 일 한지 얼마 안 되는 나도 그 중에 하나가 되어 임시 해고되었다.
몇몇 다른 기공소를 알아보았으나 자리가 없었고, 신문을 뒤져 청소자리를 얻어 보려해도 일자리를 주는 곳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러 날의 수고 끝에 내가 찾아 낸 일은 커다란 저택에서 일주일에 두 번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첫날, 주인은 몇 가지를 나에 대해 물어보더니 무슨 이유인지 청소는 안 시키고 그 댁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 오는 일이나 식품점에서 적어주는 물건들을 사오는 일들을 시키고 임금은 넉넉하게 챙겨주곤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아이들과 생활을 하기엔 어림이 없어 답답해하던 어느 날,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마침 오래간만에 여러 해 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던 LA의 롸저 엄마와 전화로 서로의 근황을 얘기할 기회가 생겼다.
전후 사정 얘기를 듣던 그녀는 대짜고짜 생활비를 당분간 대줄 테니 공부를 시작하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녀가 도대체 무얼 믿고 기약도 없이 내게 그런 투자(?)를 했었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녀를 통해 당신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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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내 주셨으리 라는 상상만 해볼 뿐이다.

그렇게 나는 거의 8년 전 직장에서 잠시 만난 그녀의 도움을 믿고 근처의 시티 칼리지에 등록을 했다.
무슨 전공을 할지도 모른 채, 형제도 도움을 못 주는 형편에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의 말만 믿고 공부를 시작하려는 나를 큰오빠는 어처구니없어 하셨다.
그러나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고 지푸라기를 잡았다 놓치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랬다.
안간힘으로 발버둥치다가 안되면 생을 놔 버리면 그뿐이라는 생각이었다.
더 이상 내 책임은 아니라고 누군가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마음을 정하여 등록을 하고 개강을 하루 앞둔 저녁, 치과 기공소 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음 주부터 일을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술을 썩히기엔 아까우니 그럼 학교는 밤에 다니고 낮엔 일을 하면 어떠냐는 제안은 당장 먹고사는 일이 시급한 나에게 미끼가 되었으나 나는 고심 끝에 학교만 다니기로 마음을 정했다.
무슨 전공을 하게 될지는 모르나 영어가 제한된 내가 학교와 직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영어로 받는 수업은 예상했던 이상으로 어려운 매일의 싸움이었다.
때로는 교수의 지시사항을 눈치로 짐작하기도 하고, 매일 밤낮을 영한사전에 매달려 씨름을 하며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으로부터 길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게 쳐진 39살의 두 아이의 엄마가 상처투성이인 영혼을 질질 끌며 익숙치않은 영어로 대학공부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시작한 공부의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은 마치 사우나탕 속의 거울처럼 수증기에 가려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만약 모든 전후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이 이런 나를 보았다면 휘청거리는 내 발걸음에 얼마나 불안해하고 답답해했을까 싶다.

첫 학기에는 영어를 잘 못해도 그냥 저냥 따라갈 수 있겠지 하는 마음에 수학이나 화학을 ESL 영어와 함께 등록을 했고, 밤이나 낮이나 공부에만 몰두하며 숨통을 조여오는 남편과의 어긋난 관계를 안간힘으로 머리 속에서 밀어냈다.
하루가 멀다하고 치뤄야 하는 퀴즈와 과제물로 학교생활이 바빠질수록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적어도 당장은 변하지 않는 현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시간은 줄어갔고, 가슴의 고통은 남아 있을지라도 그 고통을 껴안은 채 규칙적인 일상 속에 나를 맡기워 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는 졸업에 대한 구체적인 꿈을 꾸며 학교를 다닌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치닫는 나에게 오늘만 참으라며 베게 밑의 약병을 밤이면 딸각딸각 흔들어 주며 달래어 주었듯 그저 하루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지런히 영한사전을 뒤적이며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책들을 찾아 읽다가 어둠이 내리는 교정을 빠져 나올 때면 "아!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살았구나"하는 안도감에 젖어들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니 말이다.

-썰파약에 알러지가 있는 줄 모르고 잘못 먹은 항생제 때문에 종다리가 허벅지처럼 부어올라 겨우 올라갔던 이층 강의실에서 통증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고 계단 벽에 기대어 울던 일, -미생물학이나 화학 실험시간에 교수가 일러주는 실험과정을 제대로 못 알아들어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애태우던 시간들, -등록 경쟁이 심했던 과목에 등록하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다가 학기말 시험이 있는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 줄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내 순서를 포기하고 집에 왔다가 가니 등록 컴퓨터가 그 동안 고장났다가 내가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작동하던 감격의 순간.
숱한 기억들 중에서 이것들이 세크라멘토 시티 칼리지에 다니면서 가장 기억이 남는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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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일들이다.

1995년 7월, 힘에 겨워 툴툴거리는 아이들을 달래며 야단을 치며 이삿짐을 다시 챙겨 남가주로 이사를 왔다.
이년여의 결실로 다행히 덴탈 하이진(Dental Hygiene) 프로그램에 합격이 되어 대학 3학년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큰 아이가 9번 학교를 옮겨 다니며 겨우 졸업한 중학교 과정이었으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친구를 사귈 만 하면 또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가는 엄마가 얼마나 원망스러웠고 스스로들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내 상처가 너무 컸고 아이들과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절박감에 나는 그들의 눈물과 기막혀 하는 눈동자를 그 당시 외면했었지만 지금도 가끔 아이들의 그 때, 그 눈빛이 기억나면 너무나 가슴이 아파 저절로 눈물이 흐르곤 한다.

졸업후의 직장이 거의 보장되는 전공관계로 모든 학비는 융자로 해결이 되었으나 생활비는 은행 빚으로 쓰지 않으려고 작정을 했었기에(졸업후의 융자금 반환이 자립을 방해하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그 즈음 천불씩 보내오는 아이 아빠의 도움이 전부인 채로 나는 대학교에, 큰 아이는 고등학교에, 작은아이는 중학교에 적을 두게 되었다.
집세가 775불, 전화 전기, 가스 등의 유틸리티 그리고 식비와 자동차 가스비 등, 그때 어떻게 한달 한 달을 버텨 나갔는지 지금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계산이 맞지 않는다.
그저 안아 나르셨던 하나님의 은혜, 그것 말고 무슨 답을 할 수가 있을까.
아침 8시에 시작되는 첫 강의를 위해 치과대학 건물로 들어가면 실습이 있는 날은 어두워져서야 하루를 마감하며 학교를 나서야 했던 꼬박 2년의 생활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또 내일 있을 퀴즈와 과제물을 챙기다 보면 자정이 금새 다가오곤 했다.
차츰 공부에 이력도 생기고 마음속의 원망이나 증오심도 바쁨에 밀려 더 이상 나를 점령하지 못하게 되자 누군가를 미워하는 고통에서 풀려나는 그 해방감이 우선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1997년 5월 xx일 치과대학 졸업식 날, 나는 덴탈 하이진으로 학위를 받았다.
이제 모든 공부가 끝나고 새로운 시작만 남았구나 하는 설레 임이 나를 들뜨게 했던 날이다.
순서를 따라 학위 식에 참여하느라 긴장하여 학업성취로 인한 기쁨이나 그 동안의 어려움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감회에 젖을 틈도 없었다.
그런데 시애틀에서 아들, 며느리의 학위 수여식을 위해 와 계셨던 L 목사님(그분은 애 아빠와 나를 이민초기부터 알고 계시는 분이다)께서 나를 보시자 그 동안 수고 많았다며 나를 끌어안으시고는 그 몸집 좋은 남자 분이 그 많은 인파에도 아랑곳없이 엉엉 소리를 내어 우시자 꼭 닫아 두었던 내 눈물샘도 터지고 말아 나도 목사님을 잡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를 여러 해 전에 보내고 혼자 작은 오빠 집에 계시던 친정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 나의 학업성취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 것 같구나" 식구들과 함께 축하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 동안 내가 얼마나 불효를 하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국가고시를 보는 일, 직장을 구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두 딸아이들과 아버지, 오빠부부, 조카부부, 그리고 친구와 교인들이 건네주는 축하와 꽃다발에 묻혀 나는 그날 모든 짐을 털어 내고 모처럼 밝게 웃었다.

오유월이면 교정에 만발하는 자카린다 나무에서 보라 빛 꽃잎들이 축복처럼 흩날리는 날이었다.

졸업식 전날 있었던, 국가 고시 필기시험 발표에서 우리 1997학년도 졸업반 전원이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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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경사가 있었으므로 이제는 실기시험만 합격하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게으른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온종일 쉬엄쉬엄 밀린 일도 하면서 예정된 실기시험 발표를 한달 정도 앞둔 어느 날, 아이 아빠에게서 더 이상 생활비 보조를 해줄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실기시험에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고 합격한다고 해도 적당한 직장을 찾으려면 시일이 걸릴 텐데 그나마도 안 도와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슴에 바위 덩어리 하나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도와주는 사람이 못 도와준다면 할 수 없지요. 어떻게 하겠어요" 어이가 없었으나 그렇게 선선히 대답을 해주고는 돌아서서 나는 하늘에다 대고 물어보았다.
"이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
온 종일 착잡한 심정으로 생활비 걱정을 하다가, 오후에 열어 본 우편함 거리에는 대답처럼 라이센스가 동봉된 우편물이 예상외로 몇 주 일찍 도착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제 부턴 내가 생활비가 되어 줄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젊지도 예쁘지도 않은, 게다가 투박한 액센트의 제한된 영어구사 능력의 동양인, 여러 가지 제약으로 직장에 대한 걱정이 가슴을 조여 왔으나 너무도 쉽게 첫 직장의 문은 내게 열렸다.
대리로 하루 나갔던 치과에서 환자들이 좋아한다면서 인터뷰도 없이 그날로 채용이 됐던 것이다.
이제는 내 손으로 쓸 만큼 여유 있게 돈을 번다는 기쁨에 취해 열심히 바쁘게 살아가던 날들이었다.

그러나 그 즈음 어느 날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요즈음, 가끔 사이몬과 가펑클의 '브리지 오버 더 트라볼드 워러'을 들으며 누군가 나에게 그런 의지로 다가서 줄 사람을 막연히 그리워하곤 한다.
이런 목마름 끝에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이 찾아 와 줄까? 내 의식 속에서 그는 점점 색깔을 잃어가고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아이들의 아빠라는 이유를 잡고 그를 가까이 끌어안으려 해도 그는 점점 그렇게 잊혀져 가고 있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혼자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때로 두려움으로까지 느껴진다.
]
아이들을 앞세워 손 내미는 나의 간청을 오래도록 외면하고 신앙까지 저버린 채 점점 더 변해만 가는 아이 아빠에 대한 내 감정이 마른 가랑잎처럼 그렇게 생기를 잃어갈 즈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씩씩하게 적극적으로 살아가며 나에게도 자주 힘이 되어 주던 친구 M이 한분을 소개해 주었다.

"에스더, 내가 옛날 학교 때부터 잘 알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데 너무 자상한 사람이야, 네가 퇴근하고 양말 벗을 기운도 없어 하면 양말 벗겨서 발까지 씻어 줄 사람이야 한번 만나보기만 해라, 응?"
그렇게 소개를 받고 그와의 어색한 첫 만남이 있었다.
마지못해 끌려 나왔는지 청바지에 운동화 그리고 나이키 잠바를 걸치고 나와서는 툭툭 돌 뿌리만 차고 있더라는 게 지금은 남편이 된 그 사람의 나에 대한 첫 기억이다.

그 후로 여러 가지 고민과 갈등 끝에 나는 고단한 삶의 짐을 나누어 질 그를 향해 마음을 열었다.
아이 아빠와 헤어지고 근 9년만의 큰 변화였다.

그 당시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 엄청난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떨림과 두려움 그리고 삶의 환희와 빛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겨울나무처럼 그렇게 하늘을 향해 팔들을 벌린 그리움들을 잘라내며 살아 온 세월, 때로는 물고기처럼 입을 벌리고 목마름으로 안타까워했던 시간도 있었지. 그러나 여자이기 이전에 두 아이를 앞세운 엄마이어야 했기에 나는 그리움도 목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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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도 외면한 채 앞으로 난 곧은길을 따라 그저 걷고 또 걸어 여기까지 왔다.
뒤돌아보기만 해도 눈물이 고이는 지난날을 뒤로하고 나는 이제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나는 이제 오늘을 서성이지도, 다가 올 내일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차라리 설레이는 가슴으로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고 싶다.
]
2000년 겨울, 아이들 아빠에게도 오랜 방황 끝에 변화스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때의 일기를 옮겨본다.

[지난 XX 월 00일 그가 재혼을 했다.
결혼 전날, 한국에서 그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저녁식사 준비를 하다가 전화를 받고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냥 보고 싶고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노라고 했다.
살다가 별 소리 다 들어본다고 웃는 내게 그는 한국시간으로 내일 결혼을 한다고 했다.
(아이들을 통해 그의 소식은 알았으나 결혼날짜와 시간은 모르고 있었다) 지나간 함께 살아온 날들이 많이 되살아 온다고, 오래 잊지 못 할거라고 했다.
그 동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자기를 용서하라고 했다.
아픔들은 잊었노라고 , 꼭 그렇게 행복하게 살라고 축복해 주었다.
그것이 진심이기도 했으니까. 한국과 미국에서 전화기를 잡고 이제는 서로 남남이 되어, 남의 남편과 아내가 되어 울고 있었다.
그래 이제 우리는 영원한 남이 된 것이다.
류시화의 시귀절처럼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사랑했던 사람 사이의 이별, 가슴속을 쏴아하며 지나가는 바람소리, 상처를 훝고 지나가는 시린 아픔, 며칠을 그렇게 가슴이 시렸다.
동네 뒷산을 걸으며, 먼 하늘 끝을 쳐다보며 이미 떨어져 나간 인연의 줄이 저 멀리 아스라한 곳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잘 가라, 한 때는 모든 것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여 부디 잘 가라, 기도처럼 파란 하늘을 보며 되뇌였다.

이제 내 안에 들어 와 있는 새로운 사람, 언제나 편하고 부담 없는 사람, 짜장면이 먹고 싶다가도 내가 순두부가 먹고 싶어하면 어느새 자기도 순두부가 먹고 싶어지는 사람. 이 사람이 내게 있으므로 나의 삶이 얼마나 넉넉하고 평화로운지 소중히 여김을 받음으로 소중한 사람이 되어 행복을 느끼다가 이렇게 근심 걱정 없이 살아도 되는 걸까 두리번거려지기도 한다.
이 넉넉한 사랑 없이 내가 그의 결혼을 접했다면 나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우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생의 길을 택해 자신의 길로 떠났다.

내가 재혼을 하고 6개월쯤이 지난 후 대상포진(Shingle)이 생겨 한참 고생을 하다가 이제 회복이 되나 싶었던 2001년 4월, 이번에는 윗몸 전체에 무성한 열꽃이 생기고 무릎 관절이 아파서 앉고 나면 일어설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오후엔 입원을 해야 한다는 담당의사의 처방에 따라 입원환자가 되었다.
약 처방이나 받으러 갔다가 졸지에 이동침대 실려 입원실로 옮겨졌다.
하루에도 수 차례 몇 대롱씩 검사를 해야 한다면서 피를 뽑아가고 이약저약 시간에 맞춰 혈관주사를 놓으면 나는 그냥 잠에 취해 버리는 며칠이 지난 후, 내게 내려진 병명은 루퍼스(자가면역증)라는 잘 알지도, 별로 들어보지도 못한 병명이었다.
나를 담당한 전문의에게 원인과 치료방법을 물었더니 현대의학으로는 치료방법이 없고 코티죤 계통의 약으로 증상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돕는 게 전부이며, 확실한 원인은 모르고 다만 스트레스가 심한 사람들에게 잘 생기므로 마음을 편하게 갖고 스트레스를 줄이라고 했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백혈구 수가 모자랄 뿐 아니라 비정상적인 백혈구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적과 싸우는 대신에 도리어 몸을 공격하는 병이라는 데, 결국 증상이 어디로 언제 올지 모르니까 고질적인 지병이라는 해석을 멍하게 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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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던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시리도록 파란 날이었다.

이렇게 투병은 시작되었고 나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줄이고 쉬는 날이면 산행을 하면서 면역을 강화시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2001년 9월, 큰 딸아이가 결혼을 했다.
성실하고 착한 심성을 가진 첫 사위를 보았다.
사랑스런 청년이기도 하고, 사돈댁에서도 저희들이 서로 좋아하고 원하기도 하니 결혼을 시켜주자고 제안을 해주셔서 케빈이 대학을 졸업하고 치과대학 입학 전인 여름에 식을 치뤄주었다.
사돈댁도 너그러우시고 배려가 깊으신 분들이시라서 무엇하나 아쉬운 것 없이 보내는 시집이었지만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자꾸만 흘러 내렸다.
하얀 면사포에 싸여 제 신랑의 손을 잡고 행복해 하는 딸아이가 지난 세월의 모든 상처를, 못난 부모 때문에 어린 마음에 응어리진 모든 것들을 딛고 꼭 행복해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나에게는 홀 엄마로 겪었던 경제적인 압박이 너무나 컸으므로 어느 때든 자립이 가능한 의대나 치대로 전공을 택해 주기를 바랐지만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학교를 그만 두고 내려온 큰 딸아이를 붙들고 울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던 혼란의 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제 적성을 찾아 나선 큰 딸아이는 이제 UCLA 영문과 졸업반이 되어 이번 6월 졸업을 한다.
비록 내가 엄마로서 집착처럼 밀어 부치려 했던 그 전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그런 딸아이의 23살 생일선물로 두권의 책, '시소라는 소녀'와 '단 하나의 도자기'를 선물해 주었다.
'단 하나의 도자기'는 한국인 2세 작가 린다 박이 2002년도 뉴베리 메달을 받은 동화책이다.
책 첫 장에 '사랑하는 딸, 소정, 장래의 작가를 위해'라고 정성스레 써 주었다.

조그만 고사리 손으로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아빠, 엄마의 결합을 꿈꾸며 결혼 기념일 카드를 만들어 주던 9살 초등학생이었던 작은 딸아이는 이제 제 엄마나 언니보다도 훌쩍 더 키가 컷다.
젊음의 자유로움과 전공 사이에서 고민도 하고, 미래를 꿈꾸며 설레이기도 하는 대학 3학년생이 되었다.

아빠가 보고 싶다며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리는 아이들에게 그까짓 아빠가 뭐가 그리 보고 싶으냐고 악을 써대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날인가부터 정신을 차리고 아이 아빠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말들을 목구멍 안으로 꿀꺽꿀꺽 삼키는 연습을 했다.
함께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리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린것들의 상처를 감싸주지는 못할 망정 상처를 덧나게 하여 그 마음속에서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나 동경을 앗아간다는 것은 엄마가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나에게서 끝내야 한다.
아이들 마음속에 아빠에 대한 미움이나 한을 심어주는 대신에 아름다운 추억들을 기억나게 해주자, 그래서 '보통아이'들로 자라도록 도와주자' 그렇게 다짐을 했다.
아빠의 생일이 다가오면 아이들을 데리고 카드 가게엘 가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이들을 앞세워 선물을 사게 해 주었다.
다행히 나의 노력이 조금이라도 효과를 본 것일까? 아이들은 '보통아이'들로 자라나 제 아빠와 좋은 관계를 가진 채 사랑을 주고받으며 내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주 정부 라이센스를 받고 치과 의생사가 되어 일한지 일년만에 작지만 아담하고 채광이 좋은 집을 하나 장만했다.
엄두를 못내는 내게 세금 혜택을 보려면 집을 사야 한다고 직접 집을 알아 봐 주기도 하고, 힘들어 할 때면 삶의 격려로 나를 일으켜 주던 친구 M과 작은오빠 친구, Y 오빠의 경제적 도움 덕택이었다.
그는 오래 전 한국에서 어려웠던 대학생 시절에 '숫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된다'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배려로 얼마동안 우리집에 기거했던 것을 은혜로 여겨 10배, 100배로 그 시절을 나에게까지 갚아주고 있다.
아이들 데리고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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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사 다니기에 공포마저 느끼던 나는 죽어서 관이 나갈 때까지 이제는 이사 안가리라는 생각에 15년 상환으로 융자를 했다.
아이 아빠와 헤어져 텍사스 오빠 네로 이사를 갔던 때가 1990년이었으니 1998년 이 집으로 올 때까지 6번의 이삿짐을 싸고 푼 셈인데 이사하는 일이 매번 너무나 힘에 겨운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자주 주소와 전화번호가 바뀌어 챙피스럽다는 작은 딸아이의 투정에 가슴 아파했던 나는 아이에게 말해 주었다.
"봉아야, 이제 주소도 전화번호도 안 바꾸고 엄마가 죽을 때까지 여기에 살꺼야, 알겠니?" 아이는 아무말없이 다가와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이사 후 사다 심은 단감나무, 대추나무, 살구나무가 이제는 제법 가을이면 열매를 가져다 주고, 옮겨다 심은 다년생 꽃모종들은 번식하여 봄이면 노란 꽃, 환한 핑크 꽃으로 집 둘레를 장식해 준다.

어느 날 이사하고 처음 사다 심었던 소철나무가 이제 제법 모양을 갖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감회가 되살아나기도 해서 나무들을 쓰다듬어 주며 "이 집은 엄마의 피와 땀이 서린 집이야" 라고 함께 정원에 있던 아이들에게 말했더니, 큰 딸아이가 "아니지, 엄마, 엄마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의 집이야" 그렇게 정정을 해주었다.
"그래, 맞다 눈물이 섞인 집이기도 하지"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이제는 결혼한 딸이 제 남편과 함께 동생을 데리고 이 집에 살고 있다.
사위가 다니는 치과대학이 곁에 있고, 작은딸의 대학도 가까이에 있어서 나는 아이들에게 집을 맡기고 산 숲이 우거지고 계곡에 물이 흐르는 지역에 아파트를 얻어 나와서 살고 있다.
남편의 직장에서 그리 멀지 않고 또 매일 걸어야 하는 내 건강상의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초혼에 실패하고 내 삶 전체가 어둠의 터널 속으로 곤두박질 치는 경험을 했다.
매일의 삶이 겨울 들판에 맨발로 서서 칭얼거리는 두 아이를 껴안고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듯 춥고 서럽고 힘이 들었다.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가정이 깨지자 그것에 기대어 섰던 내 삶도 함께 무너져 내려 나는 그 잔해와 먼지를 피해 죽음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영원히 숨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가정은 내 삶의 커다란 부분일 뿐 전부는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물론 다시 시작한 결혼생활에서 안정을 누리며 행복을 느끼고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내 인생에서 승리자로 남고 싶은 마음이다.
내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한번에 한 걸음씩 열심히 최선을 다 해 살았다고, 삶이 다 하는 날 나 스스로에게 승리의 말을 해주고 싶은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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