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한국 기독교계 안에는 한 가문의 불행과 그 가문의 조상의 죄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가에 대한 문제를 놓고 수년 간 신학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주제가 모든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안식처가 되는 가정의 불행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 가문이 불행을 겪는 원인이 대대로 대물림 되고 있는 저주 때문이라는 주장은 일반의 호기심을 자극할 뿐 아니라, 죄와 그에 따른 심판을 역설하는 성경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소위 ‘가계에 저주가 흐르고 있다’ 혹은 ‘가계에 저주가 대물림 되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출애굽기 20장 5절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는 한다. 우상숭배를 엄금하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가계의 대물림을 주장하는 사람들, 즉 가계저주론자들은 이 구절에서 삼, 사대까지 대물림 되는 하나님의 저주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저주의 근거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구절의 성경 원어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 원어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삼, 사대라고 분명히 말씀함으로 여기 언급된 삼, 사대의 성격을 명확히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20장 5절을 성경 원어에 비추어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아비의 죄를 그 자녀에게 갚되 나를 미워하는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와 같은 번역은 이 구절의 영어 번역과 일맥 상통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메시지는 명확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범죄한 자들의 죄(하나님을 미워하는 죄)를 갚으시는 것이지, 죄 있는 조상 때문에 그 조상의 죄에 가담하지 않은 후손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 말씀은 분명히 아비나 후손이나 똑같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를 범할 때 심판이 임한다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아비의 죄를 아들에게 갚는다는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인가? 절대 다수의 신학자들은 이 심판을 아비의 죄가 아들에게 미치는 죄의 영향력 혹은 죄의 결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을 미워하는 아비의 죄가 후손에게 악한 영향을 주어서 후손으로 하여금 같은 죄를 짓도록 미혹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 혹은 아비의 죄의 나쁜 결과가 후손에게 임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계에 저주가 대물림 되고 있다고 해석해도 되는가 물론,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죄의 영향력과 결과는 범죄에 대한 저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상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 심판의 결과를 후손이 받도록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다른 것이다. 조상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만, 조상의 죄의 영향력과 결과는 후손의 삶에 결정적으로 악하게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경건한 아비의 죄의 영향을 받아 그 아비의 죄를 모방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의를 따라서 살아가며 경건하고 위대한 삶의 발자취를 남기는 예를 인류 역사상 허다하게 보고 있다.
열왕기하 18장에서 23장에 나와있는 이스라엘의 왕가에 대한 역사는 이러한 일에 대한 실례가 된다. 이곳에는 히스기야에서 므낫세 그리고 요시야에 이르는 삼대의 왕가에 대한 기록이 있다. 히스기야는 선한 왕이었지만 악한 후손 므낫세에 의해서 대를 잇게 된다. 그러나 악한 왕 므낫세는 그의 대를 잇는 요시야에게 자신의 악한 영향을 물려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요시야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의 영향력은 의로운 영향력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죄의 영향력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심판과 같이 절대화 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죄의 결과가 반드시 악한 결과로 끝난다고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다.
사람들의 가장 큰 죄의 결과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바로 그 죄인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8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속에는 죄의 결과도 포함된다. 비록 죄의 결과는 악한 것이며 종종 악한 결과를 수반하지만, 죄의 결과가 반드시 악한 결과로 끝난다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계에 저주가 흐른다’거나 ‘가계에 저주가 대물림 된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이러한 용어들은 가계에 절대적으로 저주가 놓여 있으며, 그 저주가 한 가정에 계속되는 재앙을 일으킨다는 뿌리깊은 저주 의식을 심어놓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가계저주론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저주에 관한 ‘보편적인 법칙’이니 ‘법적 권리’니 하는 말들은 이 뿌리깊은 저주 의식을 고착시키려는 그들의 책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에 더해서, 가계저주론자들은 조상의 죄의 책임을 그 후손이 지고 조상의 죄의 값인 저주를 대물림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에스겔 18장 20절에서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죄의 책임은 그 당사자에게서 끝난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그러므로 가계저주론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닌, 잘못된 인간의 상상이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계저주론자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고, 가계저주론자들에게 속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언급한 내용은 가계저주론 논의의 핵심 사항 중 하나이지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