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줄어든 수입을 보충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정부에서 발행하는 초급대학 교수자격증(Community College Professor Credential)만 있으면 초급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80년부터는 대학원 졸업장만 있으면 자격증을 그냥 내주지만 그 당시는 주정부의 공개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야 하는 제도였다. 더구나 나의 졸업장은 한국에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응시용지에 한국의 학력은 안 된다는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다. 그 시험결과 수학과 공학 그리고 생태학의 교수자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학력이 한국의 것이었기 때문에 더구나 야간반만 가르치겠다고 하니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LA시에 있는 열 개의 커뮤니티 대학을 전부 다니며 면접을 했으나 전부 거절 당했다. LA 커뮤니티 칼리지 중 한국의 미8군 안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대학이 있는데 원하면 미 8군으로 가라고 했으나 그 곳은 주간일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 전에 면접 했던 L.A.C.C 대학에서 편지가 와 있었다. 뜯어보니 주 2일 하루 세 시간씩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수학을 가르쳐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급료는 시간당 11.50불이라는 것이었다. 낮 직장인 플린코트에서 초과근무를 할 때의 수입만은 못하지만 경험 삼아 하기로 결심했다.
학장인 마가렛 크로포드 박사는 매우 깐깐한 여자였다. 이 여자는 첫날부터 다른 몇 명과 함께 내가 강의하는 교실의 뒷자리에 진을 치고 앉았다.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영수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쳐 본 경험은 있었지만 나를 심사하겠다고 진을 치고 앉아 있는 서양사람들 앞에서, 더구나 영어로 강의를 하자니 나의 손과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그들은 한번 들어오면 15분 내지 20분을 앉아서 무엇인가 적고 있는데 그 시간이 왜 그다지도 긴 시간인지 모른다. 겨울이었는데도 등에서 식은땀이 나왔고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얼마 후 학장에게 불려 갔다. “음! 때가 왔구나! 드디어 모가지구나!”하고 생각했다. 분명히 쫓겨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만나고 나니 의외에도 웃으면서 잘한다고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의외의 말에 나는 듣는 순간 너무나 감격해서 눈시울을 적셨다. 그 여자학장은 결근하는 교수가 있으면 나에게 전화를 하여 대신 강의를 하라며 나를 도와주었다. 그 여자는 1995년에 은퇴하여 LA의 8가와 아드모아 근처 큰 이층집에서 혼자 살았다.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하는 여자라, 가끔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가면 좋아하며 나를 반겨 주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작년에 별세했다. 그 여자가 살아 있을 때 자기는 자식도 친척도 없다며 나에게 자기집을 주겠노라 하는 것을 거절했다.
나의 욕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휴가를 이용하여 LA, 산타애나, 또는 하버 법정에 가서 법정통역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럭저럭 미국에 온지 약 2년만에 5만 달러 이상의 돈이 모였다. 그 때 내가 장사를 시작했거나 부동산사업을 시작했으면 지금쯤 부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1960년대 올림픽과 버몬트, 또는 웨스턴 길에 있는 작은 상가건물이 2만 내지 3만불 정도 였다. 그러나 나는 이 저축된 돈으로 미국에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대학에 가기 위하여 나의 상사이고 연구소장인 프레드 하니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사장과 상의한 결과를 나에게 전해주었다. 즉 플린코트는 나를 놓치기 싫다는 것이다. 제의인즉 회사에서 등록금 100%와 책값을 지불할테니 아무 때나 시간이 있을 때 회사에 와서 내가 해야 할 일만 하라는 것이었다. 또 하는 말이 대학은 일 학년부터 다녀야 진짜 미국대학의 맛을 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회사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대학교 일학년 수학과에 입학했다. 주립대학인지라 기초과목인 영어, 철학, 음악, 미술, 체육, 연설법 등부터 해야 했다. 미국대학의 수학의 수준이란 그리 어렵지가 않아 3년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장에는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의 사인이 들어있었다.
얼마 후 그 당시 미국에서는 월남전쟁이 막 끝나고 방위산업들은 거의 문을 닫게 되었고 고급실업자가 속출할 때였다. 정부에서는 실업자가 된 고급두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연방정부 내에 환경청을 새로 신설했고 주정부에서는 수질보전통제국이 신설되었으며 공업폐수처리국등이 새로 생겼다.
그러나 방위산업체의 두뇌들이란 대부분이 전기공학, 기계공학, 화학공학 등을 공부한 엔지니어들이고 환경공학을 공부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제일 먼저 환경공학을 시작한 대학은 USC 대학과 스탠포드 대학 뿐이었다. 나는 이것을 전공하면 미국에서 장래가 좋을 것 같았다. 대학원에 들어가려면 GRE시험을 치뤄야 하는데 겨우 합격선에 들어갈 정도였다.
대학원에 들어가니 같은 과 안에 정부 돈으로 공부하는 현직 엔지니어 공무원들이 몇 명 있었다. 함께 공부하다보니 자연히 숙제를 그들 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엔지니어 공무원이 되기는 어렵지만 되기만 하면 정부에서 100%의 등록금과 책값까지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친해지고 나니 그들은 시험예상문제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러던 중 환경공학의 석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과 친구들 소개로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공무원으로서 문명공학 엔지니어(Civil Engineer)가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생겼다.
고민거리란 내가 다니던 연구소에 아무 얘기도 안하고 모든 것을 진행했기 때문에 나를 여지껏 도와준 플린코트 회사에 무엇이라 말을 할 것인가 단돈 몇 푼을 들고 미국에 와 나의 거지생활을 면하게 해주었고 여지껏 많은 호의를 베풀어 준 그 회사를 떠난다는 것이 꼭 큰 죄를 진 죄인의 심정이었다.
정부에는 1973년 5월 10일부터 나가야 하는데 약 3주 정도가 남았는데도 상사에게 그만두겠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프레드 하니 사무실에 들어가 저녁식사 후 집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니 다우니에 있는 집을 알려 주었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잘생긴 화분을 하나 사 들고 갔다. 그의 부인은 칼 스테이트 대학교수였다. 나는 그와 그의 부인에게 모든 사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내 얘기를 다들은 그는 내일 사장과 함께 상의하자고 했다. 다음날 평소처럼 연구소에 출근했다. 점심시간 직전 그는 사장과의 회담결과를 말해주었다. 얘기인 즉 월급을 그대로 줄 테니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공업폐수의 연구문제와 정부와의 기술협조만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제의를 그대로 받아 주었다.
1973년 5월 10이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과장인 제이 크리머에게 전 직장을 공무원 근무시간외에 그대로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첫마디에 거절하는 것이었다. 즉 자기직책과 같은 일이나 비슷한 일도 외부에서 못한다는 것이었다. 단 대학강의만은 허용한다며 지금 이 자리에서 이중택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용서를 빈다는 편지를 써서 플린코트에 보내고 끝을 맺었다. 그러나 그 후 은혜를 갚기 위하여 나의 직분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도와주며 보답을 했다.
공무원이 되고 얼마있다가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잘 해결됐다. 공무원(기술직)의 월급이 학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되는데 문명공학 엔지니어의 자격증을 받자니 우선 인턴시험(EIT)에 합격하고 2년 내지 8년의 경험이 있어야 시험자격이 생기는데 시험과목을 알아보니 고층건물의 구조설계, 수력발전소 설계, 고속도로 설계, 상수도 배관 설계, 하수배관 및 폐수처리장설계, 건물의 지진방지설계, 토질 및 수질처리 설계, 항만설계, 수리학, 경제원리 및 분석, 측량 및 토지 분배, 토양학, 전자화학, 도시설계 등의 시험을 치뤄야 하는데 합격률이 겨우 25%라는 것이다. 나의 실력으로는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다행히 합격만 하면 세계 어딜가나 인정받는 U.S. 문명공학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다. 대학입학시험을 치룬다는 각오로 밤잠을 하루 다섯 시간 정도만 자고 약 삼년간 공부에 전념한 결과 모든 것에 합격할 수가 있었다. 2003년 현재 자격증 있는 문명공학 엔지니어의 연봉은 최하가 7만불, 최고가 26만불 정도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연봉이 겨우 7만 2천불임에 비하면 엔지니어가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이 미국인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파면을 당하고 왔지만 한국사람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하여 몇 배의 일을 했다. 예를 들면 그 당시 토런스시의 크렌셔 길과 190가를 지나가려면 송장 썩는 악취 때문에 주변의 부동산 값이 폭락했고 사람들은 기절, 구토, 설사, 두통 등을 호소했으나 그 원인을 몰랐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 심지어는 제 2차 대전 때 원자탄 발명자 중의 한사람인 존 밀 박사, 그리고 노벨화학상까지 받은 리차드 파머로이 박사까지 동원했으나 전부 손을 들었다. 아무도 이 프로젝트를 맡으려 하질 않았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를 자원해서 맡았다. 정부의 모든 수사력과 감독관, 심지어는 경찰대까지 동원시켜 그 송장 썩는 악취가 모빌(Mobil) 회사의 공업 폐수 속에 섞인 머캡턴(Mercaptans) 때문이란 것을 알아냈다. 이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훌륭한 사람(Great Guy)“하며 칭찬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애틀랜타시에 있는 월드 콘그래스 센터(World Congress Center)에 수천명의 대학교수, 엔지니어 및 과학자들을 모아놓고 나의 프로젝트 성공담을 발표하게 했다.
1981년과 1982년의 미스 아메리카들까지 불러 기념사진도 찍게 했다.
대기오염 엔지리어링(Pollution Engineering)으로부터 상장도 받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정부에서는 19개나 되는 모든 정유회사의 환경에 관한 문제를 나에게 관리감독토록 했다.
1986년에는 하루에 4억 8천만 갤런의 폐수를 처리하는 칼슨의 하수관(JWPCP)에 난데없이 150만 갤런의 원유가 흘러 들어와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힌 큰 사건이 발생했다.
모든 정유회사는 자기는 아니라며 발뺌을 했다.
밤 1시에 12명의 감독관들을 비상소집하여 맨홀뚜껑을 차례차례 열어 가며 역추적한 결과 아르코(ARCO)정유회사가 범인임을 알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