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미국 작가 카버가 1977년에 남들이 기대하지 않게 금주한 동기는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훗날 그는 “그저 좀 더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죽음이 다가갔을 때 그는 생애의 첫 인생은 끝났지만 아직 시작해 보지 않은 “또 다른 생애”가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는 나중에 50평생을 돌아보면서 자기는 두 개의 인생을 가졌다고 말했다.
첫 번 인생은 술에 젖어 살았던 ‘나쁜 레이먼드’ 시절이었고 남은 11년은 맑은 정신에서 집필하고 여러 가지 상들을 받으면서 대학에서 창작을 지도하는 ‘좋은 레이먼드’시절로 구분했다.
그 후 카버는 5년 간에 걸쳐 ‘나쁜 레이먼드’ 시절에 지은 작품들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시 손을 대어 확대하거나 축소하기도 하고 가끔 쓰다가 중단했거나 빼어 버렸던 부분을 재생시키면서 5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술은 끊었어도 작가는 1978년에서 1981년 사이에 잡지를 통해 알코올에 의한 피해와 이로 인한 가정 파괴를 주제로 한 글을 10편이 넘게 발표했다.
그들 중 [춤을 추지 않을래?](Why Don't You Dance?)라는 단편에서 절제하지 못하는 음주로 인해 부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홀로 남게 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혼자 남을 집 앞에서 거라지 세일을 한다.
그는 그 무렵 전신이 마취가 된 것만큼 만취되어 있다.
그는 결혼 초에 사 들였던 침대까지도 매물로 내 놓았다.
그런 외롭고 절박한 사정을 모르는 젊은 부부가 세일 장소에 들려 이 침대를 산다.
젊은 날 지녔던 신혼의 희망에 가득 찬 상징물을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젊은이들에게 넘겨준다.
슬픔과 절망의 상태를 담담하게 기술한 것이다.
그는 1978년 구겐하임 펠로우쉽을 얻었고 1980년에는 미국 문화를 창달한 인사에게 수여하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는 또 미국 예술원에 해당하는 기구에 회원으로 가입되었다.
하트포드 대학에서는 명예문학박사 학위까지 수여했다.
또 [심부름](Errand)란 단편이 1987년 6월1일자 [더 뉴요커] 잡지에 실린 다음 오 헨리 상을 받았다.
술은 겨우 끊었어도 그는 항상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다.
담배의 해악을 알면서도 이를 끊지 못하는 그는 자신이‘몸통이 달려 붙어있는 담배’라고 자조적인 표현으로 기술했다.
1987년 9월 그는 각혈했다.
폐암이 원인이었다.
한달 후 그의 왼쪽 폐가 2/3나 수술로 제거되었다.
그 후 9개월 간 그는 폐암과 싸웠다.
그래도 폐암은 전신으로 펴져 나중에는 뇌암으로 전이되었다.
그는 말년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때마다 자기가 꼭 써야 할 걸작이 되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그는 ‘걸작’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마음대로 따르지 않았다.
다음 해 6월, 암이 재발하자 그는 [의사가 말하기를](What the Doctor Said)란 짧은 시를 통해 자신이 죽음에 대한 선고를 받았음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한편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에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지”라고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다.
그는 남은 여생 동안 작품을 정리하고 일부는 발표하면서 알래스카 여행까지 다녀왔다.
그는 더 많은 걸작을 남기지 못하는 아쉬움에서 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 심정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해야 되는데”라면서 “증언하러 다시 돌아올 수 있겠나”라고 그 안타까운 심정을 들어내었다.
그는 원래부터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래도 죽음을 앞두고 그는 “축복”, “은혜”, “신비”같은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으면 그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나는 기적을 믿어야 하고 부활의 가능성을 믿어야만 해”라고 했다.
결국 그는 친지들에 둘려 싸여 조용히 사망했다.
그가 후에 다시 부활하고 어떤 기적이 생겼을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신체는 암으로 인해 무참히 파괴되어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