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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택구 에세이 10]북한 관리와 악수하면서 느껴진 두 갈래 감정

Vancouver

2006.08.28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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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택구(화가, 자유기고가)


지난 8월 초순 밴쿠버에서 개최된 조선미술전시회에 구경갔다가 평양에서 왔다는 북한 관리 세 명과 악수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남북 분단이래 북한 사람이라고는 가까이 에서 구경한 적조차 없는 내가 북한정부 관리를 직접 만나보고 손까지 잡아보기는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이번에 북한 사람들과 악수하면서 묘한 두 갈래 감정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한 갈래는 어렸을 때부터 뇌리에 쪄들은 반공사상 때문인지 조금 섬뜩하다는 두려움이었고, 또 다른 갈래는 단박에 언어와 혈온(血溫)이 통하는 동족이 분명하구나, 하는 새삼스런 깨달음이었습니다.
웃음도 똑같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예절도 똑같았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나 조선인민공화국 사람이나 같은 배달민족이라는 실증을 피부로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족끼리 무슨 원한이 사무쳤기에 남북으로 갈라져 반세기가 넘도록 서로 저주하는 주적(主敵)으로 싸우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60년 전 외세가 갈라놨다고는 하지만 여태껏 외세 탓만 하기에는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리석기 비길 데 없는 민족입니다.
중동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처럼 민족보존과 영토사수를 위한 싸움이라면 명분이라도 떳떳하겠지만 남과 북의 적대관계는 종국에 아무 것도 건질 게 없는 멍청한 소모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상(思想)과 이념(理念)의 상극관계(相剋關係) 때문이라고 체념합니다만 그런 이유는 고차원적 핑계에 불과합니다.


동족끼리 주체(主體), 자주(自主), 주권(主權), 자존심(自尊心) 타령하면서 싸우는 싸움이라 더 웃깁니다.
주권, 주체, 자존심 같은 거 당연히 챙겨야겠지요. 그러나 통치자가 나라를 잘 다스린다면 어린애 보채듯 칭얼대지 않아도 남의 나라들이 먼저 알아서 자존심 챙겨주기 마련입니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주체, 자주, 주권, 자존심 따위를 외쳐대는 집권자가 통치하는 나라 쳐놓고 존경받는 나라는 보질 못했습니다.
주체, 자주, 어쩌고 하면 으레 연상되는 나라가 있습니다.
북한입니다.
주체사상, 선군정치(先軍政治) 슬로건은 공식국호(公式國號)보다 더 널리 알려진 북한의 대명사입니다.


나는 북한에 그리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싫은 게 아니라 60여 년 세월을 이어오는 세습체제(世襲體制)가 싫다는 것입니다.


통치자를 위한, 통치자에 의한, 통치자의 나라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김씨왕국(金氏王國)입니다.
언제까지 세습체제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북한이 미국에게 체제보장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을 보면 3대세습(三代世襲)은 이미 짜여진 시나리오라고 짐작됩니다.
3대세습은 앞으로 최소한 30년을 예상해야 하니 남한의 진보세력이 주장하는 연방제가 실행된다 해도 단일정부 통일은 요원하다는 계산입니다.
정말 북한은 하늘과 땅에서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육면(六面)이 장막(帳幕)으로 가려진 나라입니다.


스탈린(Stalin) 시대 소련은 '철의 장막', 모택동 시절 중국은 '죽의 장막'이란 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김정일 치하 북한의 별명은 무어라 지어야 적절할 지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장막의 장막' 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요즈막 신문과 TV에 북한 뉴스가 자주 뜹니다.
김정일 이름이 한창 매스컴을 탑니다.
미국과 일본과 남한을 가상목표로 삼아 여러 발의 미사일을 팡팡 쏘아댔다고 한바탕 소란하더니 이제는 지하핵실험 준비 조짐이 감시위성 사진에 잡혔다는 뉴스가 방송됩니다.
미국 코밑에 혹처럼 붙어 있는 쿠바도 별로 시끄럽지 않는데 왜 북한만 별나게 시끄러운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건 나에겐 이상한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름만 나오면 소설 '모비 딕(Moby Dick)'의 포경선(捕鯨船) 피쿼드(Pequod) 호 애이합(Ahab) 선장이 연상됩니다.
김정일과 애이합의 통솔(統率) 패턴이 너무나도 닮았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기 한쪽 다리를 잘라먹은 모비 딕(흰 고래)를 기어코 잡아죽이고 말겠다는 복수심에 불타는 애이합 선장과 미국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고 강경히 맞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기세가 일란성 쌍둥이 모습으로 닮았다는 얘깁니다.


아시다시피 '모비 딕(백경/白鯨)'은 허만 멜빌(Herman Melville)이 1851년에 발표한 고전 해양소설입니다.
무려 240,000여 단어로 쓰여진 원작을 훗날 출판업계가 누구나 쉽게 읽도록 내용을 간추려 출간한 보급판이 널리 읽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50년대쯤인가 제작된 '모비 딕' 흑백영화(그레고리 팩 주연)를 보면 소설 내용을 대충 이해하게 됩니다.
작가 멜빌이 설정한 애이합 선장과 흰 고래(모비 딕)의 관계를 신성(神聖)한 대자연의 위력에 도전하려는 무모한 인간을 비판하면서 선과 악의 대결이 무엇일가를 시사했다고 일부 평론은 주장합니다.


애이합 선장은 한마디로 편집광적(偏執狂的)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모비 딕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애이합은 미국 동부 누투켓 아일랜드를 떠나 북대서양, 남대서양, 인도양, 일본해역을 거쳐 남태평양 적도선 뉴 기니 근해에서 드디어 모비 딕을 만나 싸우다 죽을 때까지 휘하 선원들의 안위(安危)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만약 애이합 선장이 모비 딕을 잡아죽이려는 복수심을 버리고 향유고래(Sperm Whale) 잡는 일에만 전념했었다면 선원들은 돈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았으리라는 생각입니다.
1851년 당시 전세계에서 양초원료와 램프(등불)에 사용하는 고래기름 거의 전량을 미국 포경업계가 공급하는 실정이었습니다.
포경선 700척과 선원 18,000명이 벌어드리는 연간 소득만 수백만 달러(several millions)였다니 엄청난 호황이었습니다.


1867년 미국이 러시아 영토 알래스카를 사들인 돈이 720만 달러($7.2 million)였으니 155년 전 수백만 달러가 얼마나 큰돈인지를 가늠하게 합니다.
그처럼 미국 포경업(捕鯨業)이 호황을 누렸던 시절에 소설 속의 인물이긴 하지만 애이합 선장은 고래잡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선원들을 비참한 죽음의 항로로 이끌어갔습니다.


이는 북한의 통치자가 헐벗고 굶주리는 국민들을 위한 복지정책은 뒤로 미뤄두고 오직 원수를 까부수는데 써먹을 핵폭탄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만 국력을 소비하는 어리석음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세계 제조업계는 저임금 노동력을 찾는데 혈안이 돼 있습니다.
점차 저가 생활용품 made in U.S.A., Japan, England, France 등등 선진국 제품이 구경하기 힘들어지는 이유가 바로 저임금 노동력 때문입니다.


요즘 중국 경제가 고도 성장하는 튼튼한 밑바닥 기반은 저임금 노동력이지 공산주의 이념이 아닙니다.
외국물건을 제조하는 중국 노동자의 한달 급여가 미화 50달러 정도라 노동력 착취라고 비판하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북한도 자력으로 잘 살 수 있는 기회는 집 문턱에 와 있습니다.


과감히 '장막의 장막'을 걷어내고 적극적으로 외국투자를 개방한다면 조만간 경제성장이 이룩될 것은 뻔한 순리인데도 북한은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기회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김정일 체제는 수천 수만 인력을 체제 홍보용 대규모 스타디움 카드섹션이나 매스게임 같은 관권행사(官權行事)에 투입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할 노릇입니다.


일부 친북여론(親北與論)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기술이 곧 통일한국의 기술이라고 자부합니다.
순수한 동족애 감정으로는 보면 지당한 말씀입니다.
형제끼리 사이좋게 공유하는 재산이란 얘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의 집권세력이 남한을 진정한 한 핏줄 형제로 간주하느냐는 것입니다.


한 밤중에 동생은 형 네 집으로, 형은 동생 네 집으로 몰래 볏섬을 날라다 주는 형제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북한은 비위가 조그만 거슬려도 "서울 불바다.
..." 어쩌고저쩌고 공갈협박을 서슴지 않는 성미 고약한 형제입니다.


한 뱃속 형제도 2대를 등지고 살다보면 남보다 더 멀어지기 마련이라 내일이라도 미국한테 뺨맞고는 남쪽에다 대고 미사일로 화풀이 안 한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김대중씨도 그런 보장 받아오지 않았고 북쪽 눈치 살피는 노무현정부도 각서 받아놓지 않고서는 장담 못합니다.


애이합 선장은 무척 냉정한 비인도적 인물입니다.
남의 충고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애이합 선장에게 무모한 발상을 재고토록 건의하지만 코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모비 딕에게 한쪽 팔을 잃어버린 영국 포경선 선장도 모비 딕 추적을 포기하라고 간곡히 충고합니다.


결과는 소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항해 도중 포경선 라첼(Rachel) 호 선장이 비용은 지불할 테니 보트 침몰로 실종된 자기 아들 찾는 수색작업에 동참해달라고 애원하는데도 애이합 선장은 가차없이 거절합니다.


남의 불행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최근 남한에서 쌀과 비료 지원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예정된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중단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북한의 비인도적 처사는 애이합 선장이 라첼 호 선장의 애원을 단호히 거부한 경우와 비슷한 케이스로 비교됩니다.


북한은 전쟁통에 헤어진 이산가족들을 볼모로 이득을 챙기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찔끔찔끔 100여 명씩 만나봤자 어느 세월에 그 많은 이산가족이 다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이산가족들에게 저승에 가서 만나라고 통보하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할 듯 싶습니다.
동족애, 형제애의 체온을 잃지 않은 체제라면 피맺힌 동족의 비극을 정치흥정에 이용해 먹을 순 없다는 주장입니다.


애이합 선장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선원들의 경쟁심을 선동합니다.
스페인 금화 한 잎을 돛대 기둥에 못박아놓고 누구든 먼저 모비 딕을 발견하는 사람이 금화를 차지하라고 선언합니다.
뉴 기니 근해에서 자기가 먼저 발견했다고 우겨 금화는 결국 애이합 선장의 소유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런 방법으로 휘하에 거느린 사람들의 직무를 경쟁시키는 지도력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통치자가 나라를 부적절한 방법으로 다스리면 하늘의 저주를 받습니다.
북한은 외화벌이에 간혹 부적절한 방법을 이용한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국가의 신뢰도는 그 나라 정부와 국민들의 품격을 평가하는 잣대입니다.
그래서 집권세력이 더러워지면 선량한 국민들까지 싸잡아 더러워집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리반(Taliban) 저항세력이 지방 관리들과 짜고 재배하는 아편(opium)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엊그제 신문에 보도된 2005년 유엔(UN) 조사자료에 의하면, 257,000 에이커 경작면적에서 수확한 아편 4,500톤은 전세계 헤로인(heroin) 보급량 90%에 해당하는 450톤을 제조하는데 충분한 분량이라는 설명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아편재배는 탈리반 세력이 정권을 잃은 2001년부터 대폭 늘어나 2005년 아프가니스탄 GDP의 52%에 달할 만큼 비공식 아편재배국이란 오명을 떨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폐인으로 만드는 마약으로 소득을 올리는 개인이나 집단은 사회에서 도태돼야 마땅합니다.


몸집이 엄청나게 우람한 흰 고래 모비 딕은 불멸의 상징입니다.
애이합 선장은 3일 간 모비 딕과 대치하면서 싸우다가 결국 자신이 모비 딕에게 던져 꽃은 작살 밧줄에 몸이 칭칭 감긴 채 비참히 죽고 맙니다.


모비 딕의 분노에 휘말려 피쿼드 호는 침몰하고 선원들 역시 모두 죽습니다만, 다행히 이슈미얼 선원 혼자만 동료 퀴이퀘그(Queequeg)가 죽으면 들어가려고 목수를 시켜 미리 짜둔 관(棺)을 타고 표류하다가 실종한 자식을 찾아다니는 포경선 라첼 호에 구조됩니다.


소설 '모비 딕'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슈미얼이 포경업계의 중심지 미국동부 대서양 연안 매서츄셋 주 뉴 베드포오드(New Bedford) 여인숙에서부터 뉴 기니 근해 적도 선에 이르기까지의 체험담을 내레이터 식으로 기술한 이야깁니다.
흰 고래와 애이합 선장의 대결은 인간들의 무모한 자만심과 편집광의 횡포가 얼마나 비참하게 종말을 맞게 되는지를 암시합니다.


나는 현세(現世)를 항해하는 북한 호가 애이합 선장 같은 통치자 때문에 조난 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무고한 우리 형제들까지 희생되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무작정 콧대만 높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높지도 않은 콧대 높이려고 안간힘 쓰다가 광대 꼴 되는 줄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북한이 하루빨리 주변 국가들이 우정으로 감싸주는 방향으로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風靡)하던 이념대결은 한낮 허상으로 종지부를 찍은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식솔들을 배불리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경우에 따라 꺾기니 보다 휘어지는 게 낫다, 라는 옛말을 절실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김정일 체제입니다.


북한, 나와 혈온(血溫)이 통하는 사람들이 사는 땅입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북한 사람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또 북한 관리와 악수할 기회를 갖게되면 한마디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혹시 애이합 선장이 누군지 아십니까?" 라고.... .

(끝/2006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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