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난 한국의 삼성그룹 창업자 호암 이병철(1910~1987)은 누가 뭐라고 해도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영자다.
일러스트 : 김희룡
그는 일본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떨친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 전 회장이나 마쓰시타 전기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전 회장 같은 아시아의 세계적인 CEO뿐만 아니라 81년 이후 약 20년간 세계를 매료시킨 GE의 잭 웰치 전 회장 같은 서양의 대표적인 경영자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경영의 달인이었다.
특히 그가 1969년 설립한 삼성전자는 세계 정상의 대기업인 미국의 인텔이나 IBM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는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해 우리 국민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고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일이다.
2005년 12월 말 현재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약 1072억 달러로 세계 35위다. 지멘스(831억 달러, 58위), 소니(463억 달러, 143위), 필립스(444억 달러, 148위) 같은 세계 굴지의 다른 전자회사들을 규모 면에서 이미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삼성 계열사의 대부분은 국내 시장에서 해당분야 1위에 올라 있고,
최근에는 삼성 출신 임직원들을 여기저기서 스카우트하려는 진풍경도 벌어지고 있다. ‘삼성에서 훈련받은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어떻게 몇십 년 만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탁월한 경영 유산을 후대에 물려준 호암 이병철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경영의 정수를 네가지 차원에서 짚어보고자 한다.
큰일 하기 전엔 널리 듣는다
경영자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은 의사결정(decision-making)이다. 크고 작은 의사결정을 제때에 제대로 하기만 하면 회사는 잘 굴러가게 되어 있다. 기업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경영자가 늘 맑은 정신으로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호암의 생애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의 독특한 의사결정 스타일 결정을 내린 후의 과감한 시행 그리고 의사결정의 수준 등에 주목하게 된다. 먼저 그의 의사결정 스타일을 보자.
호암은 큰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에 매우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최고 수준의 정보를 모으는 데 우선 힘을 기울인다. 아래의 사례들을 보자.
*일제 시절 마산에서 정미소 사업을 시작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호암은 운수업과 부동산에 투자하여 200만 평의 농토를 가진 대지주가 된다.
그러나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대출금 회수를 위한 일본 정부의 비상조치로 말미암아 갖고 있던 논밭을 싸게 팔아 은행 빚을 갚아야 했다.
한 순간에 몰락한 그는 국내 주요 도시는 물론 만주와 중국 본토의 여러 지역을 둘러보고 청과물 건어물 잡화 등을 취급하는 무역업이 유망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교통사정이 아주 나빴던 젊은 시절부터 시장이 있는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치밀한 사전조사를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함으로써 무역업을 시작한 호암은 6.25사변을 겪으면서 제조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어떤 물건을 생산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철저한 사전조사를 한다. 그 결과 대상품목은 설탕 페니실린 종이 세 가지로 압축된다.
그중 페니실린이 가장 유망해 보였으나 생산기술을 배우기가 어려웠고 종이도 사정이 비슷했다. 설탕은 수입해서 파는 것이 더 낫다는 임원들의 의견이 많았다. 이렇게 조사 자료나 남의 의견만 갖고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최고경영자의 직관이 중요하다고 호암은 말한 바 있다.
다만 이런 직관은 치밀한 계획 풍부한 경험 그리고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호암은 결국 설탕을 만들어 팔기로 결정하고 1953년 6월 제일제당을 설립한다.
*1980년부터 반도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호암은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전문가들을 수도 없이 만났고 국내의 전자산업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또한 일본과 미국에서 나온 관련 자료를 구할 수 있을 만큼 구해서 읽었으며 1982년에는 반도체산업의 본고장인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유수기업들의 생산현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그는 "반도체 진출은 늦을수록 뒤진다"는 생각을 굳히고 현지에서 본사에 전화로 사업계획의 수립을 지시한다.
*자신에게 폐암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1986년 5월 이후 호암은 1년 여에 걸쳐 매우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병과 맞서 싸운다. 먼저 여러 치료방법을 의료진이 체계적으로 검토하여 방사선 치료를 하기로 결정한다.
이어서 세계의 어느 나라 어느 병원이 어떤 암을 방사선으로 잘 치료하는가를 철저히 조사한 후 주치의와 상의하고 본인이 최종 결정했다고 한다.
호암은 결코 귀가 얇지 않았다.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여러 의견을 듣지만 깊이 생각한 후에는 궁극적으로 혼자 결정을 내렸다. 언뜻 보면 그의 결정에 가끔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듯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 예로 그는 1970년대 초 전화교환대 사업에 진출하고 싶어했으나 전문가인 부하들이 반대하자 깨끗하게 포기했다. 그는 또 평생 동안 음반 감상과 수집에 상당한 취미가 있어 1965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음반생산회사를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장조사를 맡았던 담당부서가 수익성이 별로 없다는 보고서를 올리자 매우 아쉬워하면서도 부하직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결정사항 시행
이렇게 하나하나의 결정은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면 흔들림 없이 강력하게 추진했다.
1983년 2월 6일 밤 도쿄의 오쿠라호텔 505호실. 호암은 밤새도록 반도체 사업에 대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이윽고 새벽이 되자 그는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3월 15일을 기해 삼성이 반도체 및 컴퓨터 산업에 뛰어든다는 것을 대내외에 공표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삼성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이듬해인 1984년 64KD램을 출시했다. 그러나 이 해부터 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1987년까지 계속된 적자는 무려 1159억원(누적)에 이르렀다. 당시 1000억원이란 보통 큰돈이 아니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개발 투자를 계속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느 날 호암은 반도체 관련 사람들과 점심을 같이하는 중에 누적적자가 1200억원에 가깝다는 것과 1메가D램 공장 착공을 당장에 하지 않으면 출하경쟁에서 뒤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듣게 됐다. 호암이 단호하게 말했다.
"64K 256KD램을 시장에 늦게 도입해 큰 고생을 했는데 1메가D램 공장 착공이 늦어지면 어떻게 하나? 내일 아침에 착공식을 합시다. 내가 기흥 공장으로 가겠네."
1메가D램 시장 출하는 선두 주자들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큰 차이는 없게 된 배경이다. 그 후 회사는 1988년 1649억원의 이익을 내는 등 꾸준히 성장 1995년에는 무려 2조5000억원이라는 엄청난 이익을 올렸다. 스스로 내린 결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닥칠지라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간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