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정 귀환이기는 했을 망정 마음은 확실히 가벼웠다. 지난 2월 초순, 여행을 떠난지 약 5개월 반만에 다시 LA로 되돌아왔다.
샌 루이스 오비스포와 모로 베이 중간에 위치한 한 랜치. 그림같은 풍광의 전원 랜치다.
떠돌이 본능이 여전히 더 우세했지만 출발점으로의 귀소는 고향으로 향하는 발길 만큼이나 마음을 설레이게 한 것도 사실이다.
늦여름 자락에 떠나 가을을 나고 겨울의 막바지에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으니 감회가 없을 리 없다.
3개의 계절을 길바닥에서 보냈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이 분명히 나이테가 한 줄 더 그려졌고 지천명에 한발짝에 더 다가선 몸이 됐다.
머릿 속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150일 안팎의 밤을 보낸 '처소'들이다. 노스 다코타의 고속도로 휴게소 뉴잉글랜드의 길가 앨라배마의 숲속 텍사스의 주택가 공터… 주마등 처럼 노숙을 했던 장소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홀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긴긴 밤을 보내야 했던 그날의 기억들이 하나 하나 새록새록 되살아 났다.
해가 일찍 떨어지는 겨울이 지금까지 여정의 중심에 있었던 탓에 밤을 나기가 무엇보다 고역이라면 고역이었다.
처소는 돌이켜 보건대 과반이 고속도로 휴게소였던 것 같다.
얼추 50% 날짜로 치면 70여일 안팎의 밤을 휴게소 주차장에서 보냈다. 숲속 처럼 남의 눈에 잘 안띄는 으슥한 장소와 길가 등지에서 지샌 밤이 그 다음으로 많을 것이다. LA 진입은 애리조나쪽에서 40번 주간고속도로를 타다가 캘리포니아의 바스토우에서 15번 주간고속도로로 빠지는 코스를 택했다.
바스토우에서 엘에이까지는 차로 2시간 남짓 거리다.
15번 도로의 이 구간은 바로 지난 해 8월 출발때 탔던 길이기도 하다. 계절에 따른 날씨 변화가 크지 않은 남 캘리포니아 특유의 풍토 탓인지 길 주변은 여전한 모습이었다. 하기야 반년 만에 강산이 눈에 띄게 변할리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15번 길을 달리는 차안의 나는 최소한 6개월 전의 나는 아니다. 보석이든 오물이든 아니면 둘다가 섞였든 머리속에는 무엇인가가 정리되지 않은 채 뒤죽박죽 가득찬 상태로 나는 엘에이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와 함께 '생사'를 같이했던 차도 예전의 그 차는 아니다. 나의 또다른 발이고 식당이며 침대인 고물 중고 밴은 그새 많이 늙고 쇠약해졌다.
심적 혹은 영적인 그 어떤 것도 상당 부분 물적 토대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승차 유랑인으로써 내 온갖 마음의 조화도 사실 많은 부분이 차라는 녀석에 의해 좌우됐다. 특히 느닷없는 고장은 들뜬 기분에 곧잘 찬물을 끼얹곤 했다.
이 녀석이 카혼 패스(Cajon Pass)를 막 넘어서는데 반항의 몸짓을 시작했다. 카혼 패스는 LA 분지 북쪽에 떡 버티고 서있는 샌개브리얼 산맥과 샌버나디노 산맥 사이로 뚫린 LA의 대표적인 북동쪽 관문.
푹 패인 계곡을 따라 길이 나서 주변에 비해 고도가 낮은 데도 불구하고 고개의 정상은 해발고도 4000피트가 넘는다. 옛날 같으면 산적이 지키며 '통행료' 징수하기에 딱 알맞은 길목이다.
산 너머로 붉으스레한 엘에이의 밤 하늘이 눈에 들어오면서 귀향의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려 찰나에 차가 경고음을 보내기 시작했다. 큭큭큭 끽끽끽. 수마일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 길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족족 패드의 금속 심이 로터를 갉아먹는 것이었다.
마치 가슴을 긁어 후벼파는 것처럼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마찰음이다. 지난 약 6개월 만신창이가 돼버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 같다. 무사 귀환의 안도감만 느끼지 말고 자기도 좀 돌봐달라는 항변에 다름 아니다.
트랜스미션 엔진 구동벨트 휠 밸런스 창문 경적기… 차는 사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망가져서 봐도 크게 손을 봐야 할 상태였다.
다 닳아버린 브레이크의 '저항'으로 결국 그 날 밤의 엘에이 입성 시도는 다음 날로 미뤄야 했다. 엘에이를 코 앞에 두고 샌가리브엘 산맥 자락에 위치한 랜초 쿠카몽가라는 신흥 도시의 한 주택가에서 또 '무단 숙박'이 불가피했다.
떠돌이 신세가 대충 이렇다. 끝까지 안심할 만한 게 별로 없다. 차가 고장나고 마음이 변덕을 부리고 날씨가 안받쳐주고 때로는 밤새 차를 달려도 달려도 차를 세우고 잠잘만한 데가 나타나지 않을때도 있다.
이튿날 새벽 4시쯤 잠에서 깼다. 주택가의 골목은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들로 환한 반면 모두 단잠에 취해있는지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은 없었다. 예상대로 새벽 엘에이로 가는 길은 뻥뻥 뚫려있어 브레이크를 딱 두차례만 밟고 한인 타운의 한 자동차 정비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LA의 지인들과 반가운 재회를 뒤로 미루고 서둘러 자동차 정비소를 이리 저리 전전해야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트랜스미션 브레이크 엔진 등을 따로 따로 손봤다. 그중 큰 예산 출혈을 예상했던 트랜스미션은 본체가 아닌 모듈에서 누출이 있다는 진단이 나와 그나마 선방한 셈이 됐다.
캘리포니아 센트럴 코스트를 따라 다시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 것은 이렇게 차도 기운을 차리고 나도 달포 넘게 휴식을 취한 뒤였다.
지난해 여름 출발때 보다 약 7 킬로그램 늘어난 체중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차안 생활로 퇴화했던 근육을 추스려 건강은 나무랄수 없을 만큼 좋은 수준이었다.
센트럴 코스트는 '2%의 땅'이다. 왜 하필 2%냐. 지구상을 통틀어 센트럴 코스트 같은 풍토를 가진 땅 덩어리는 2%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은 흔히 '지중해성 기후' 지대로 불린다. 미국에서는 서안 해양성 기후 지역이라고도 한다.
두 용어는 비슷한 뜻을 가졌는데 센트럴 코스트의 서안 해양성 기후는 미국 서해안의 다른 지역보다 특히 지중해성 기후와 흡사하다.
지중해성 기후 권역은 이탈리아 남부 남 프랑스 스페인 동부 아프리카 모로코 북부 등 말 그대로 지중해 일원에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이밖에 호주 남서부의 퍼스 해안과 남미 칠레의 중부 해안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단도 같은 기후 권역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세계 부도에서 보면 지중해 주변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면적이 손톱 반절 만한 크기도 못돼 찾아내기 조차 쉽지 않다. 미국에서는 센트럴 코스트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 지역이 유일한 지중해성 기후 권역이다. 미국만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지중해성 기후 권역은 2%는 커녕 1%에도 훨씬 못미칠 것이다. 그만큼 풍토에서 희소성이 큰 지역이다. 지중해가 어떤 곳인가. 인류 문명 특히 아랍권까지를 포함하는 서구 문명의 요람이다. 문명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노력으로만 꽃피울 수는 없다. 오히려 자연이 받쳐줘야 가능하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다.
2%의 지중해성 기후 권역은 그래서 '황금의 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희소 가치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런 지역에서 평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은 '선택된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흔히 말하는 2%라는 게 갈증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몸안 수분의 감소치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2%가 채워지지 않으면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2%라는 수치가 이렇게 보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지난 약 6개월 동안 미국 땅 3만5000여 마일을 누비면서 아름다운 곳을 수없이 봤다. 나중에는 웬만큼 장관이어서는 별다른 감흥도 일지 않을 정도로 눈이 호사했다.
그러나 모든 여인은 아름답지만 누구나 쳐주는 미인은 따로 있듯 '땅의 여왕'은 하나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우선 세상에 2% 만 존재하는 지중해성 기후 지역에 속해있어야만 여왕 후보에 오를 수 있다.
눈부시게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뉴잉글랜드도 남국의 정취 가득한 플로리다도 내 눈에는 반대로 2%가 부족했다. 장엄한 로키도 땅의 여왕 후보로는 조금 모자라다. 샌타 바버라. 센트럴 코스트를 대표하는 이 곳 만큼 미국에서 천혜의 날씨로 축복받은 도시도 드물다.
항상 온도가 일정한 탓에 수은주 눈금이 촘촘히 새겨진 길다란 온도계가 이 곳에서는 따로 필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차 유랑인처럼 바닥 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보다 기후에 민감해진다. 밤은 노숙이고 낮에도 바깥 생활 뿐이니 날씨에 따라 그날 그날 기분이 정해진다.
샌타 바버라의 날씨는 마음에 안정과 평화를 준다. 낮 시간에는 바다에서 상큼한 바람이 사시사철 불어온다. 밤에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샌타 이네즈 산맥의 온풍이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다.
식물은 사람보다 기후에 더 민감하다. 샌타 바버라가 이웃의 롬폭(Lompoc)과 더불어 꽃의 집산지인지 것은 유명하다. 샌타 이네즈 산맥을 제법 숲으로 풍성하게 하는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잘자라기로는 포도 나무도 예외가 아니어서 '풍경이 있는' 와인의 주생산지로는 미국에서 이 곳이 으뜸이다. 실제로 샌타 바버라 일대는 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가 조연한 영화 사이드웨이즈(Sideways)의 로케이션으로도 유명하다. 아름다운 샌타 바버라가 배경이 아니었다면 아카데미상 수상에는 못미치지 않았을까.
지중해의 문명과 문화는 포도와 뗄레야 뗄수 없는 인연을 맺어왔다. 이렇게 보면 미래 미국의 문화가 어쩌면 이 곳에서 만개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샌타 바버라와 기후며 식생 등 풍토가 비슷한 '정통' 지중해성 기후 지역은 이 곳에서 부터 태평양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대략 샌 루카스(San Lucas) 까지다. 샌 루카스 바로 위 세계 3대 미항중 하나라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도 아쉽지만 같은 반열에는 못올려 놓겠다. 다 좋은데 겨울철 비가 적지 않은 탓이다.
연중 강수량에서 샌프란시스코는 25인치로 샌타 바버라에서 샌 루카스의 15인치 안팎에 비해 '확실히' 많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은 겨울철 맑은 날 보다 흐린 날이 많다. 북 캘리포니아 해안은 이런 점에서 겨울 마저도 하늘과 바다가 블루 일색인 센트럴 코스트에는 1% 부족하다.
산·바다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 ▶ 센트럴 코스트는 캘리포니아 센트럴 코스트의 거점 도시는 예닐곱개. 남단인 샌타 바버라에서 북쪽으로 롬폭 샌 루이스 오비스포 모로 베이 샌 시미온 샌 루카스 등의 도시를 꼽을 수 있다.
이중 바다에서 대략 30분 거리인 샌 루이스 오비스포는 엘에이와 샌프란시스코 딱 중간쯤 위치한 도시로 센트럴 코스트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있는 곳이다.
스페인 식민 시절의 도시 분위기가 구석구석에 살아있고 센트럴 코스트 농업의 중심지이다. 지중해에 위치한 스페인의 어느 도시를 연상시키는 가장 센트럴 코스트적인 도시다.
모텔이란 이름이 탄생한 것도 샌 루이스 오비스포인데 미국 최초의 모텔 건물은 현재 수리중이다. 센트럴 코스트의 아름다움은 산과 바다의 조화다. 태평양 해안 산맥(Pacific Coast Range)이 고꾸라질듯 태평양을 향해 내달리다가 물속으로 몸을 처박으면서 연출된 풍광이 무엇보다 압권이다.
이 곳을 지중해성 기후와 식생지대로 만드는 것 또한 산과 바다다. 겨울철에도 기온이 온화한 것은 따뜻한 바닷물 탓이다. 반대로 바다는 여름철에는 냉장고 구실을 한다.
태평양 해안 산맥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뜻하게 머금고 산맥 서편에 비를 뿌린다. 한 여름에도 센트럴 코스트의 해안 도로 주변이 나무들이 푸르름을 띠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