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영혼의 울림' 줄리어드 예비학교를 가다

New York

2011.01.14 13:18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넘쳐나던 한인 학생 줄고 중국인 학생 급증
'음악 신동 집합소'…극성 부모들 치맛바람
쇼스타코비치는 상당히 우울해. 유머조차도 냉소적이야. 자, 여기에서는 러시안 작곡가의 깊고 굵은 소리가 스며져 나와야지."

최근 찾은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 아트 디렉터이자 피아노 학과장인 베다 카플린스키가 영세호(13)군과 피아노 두 대에 나란히 앉아 그날 연습할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설명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조이스 양의 지도교수였던 그는 13세 남자아이가 쇼스타코비치의 굵은 소리를 표현해 낼 수 있도록 설명하는 중이었다. 이날 새벽 5시에 보스톤을 출발해 학교에 온 세호는 형광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발로 힘있게 페달을 밟으면서 방금 들은 설명에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첼리스트 장한나 등 세계적 음악가들이 거쳐간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 매주 토요일마다 줄리어드 음대 지도교수에게 개인 교습을 받을 수 있고, 음악 이론과 청각 수업, 개인 리사이틀, 오케스트라 협연 등 세계적 수준의 음악 교육을 가르치는 이 '음악 발전소'는 최근까지만 해도 한인 학생들로 넘쳐났다. 동시에 한인 부모들의 치맛바람 역시 막을 수 없는 강력한 바람으로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한국에서 열린 줄리어드 음대 동문 모임에는 200여 명에 가까운 한인 음악가들이 모였고, 그들의 파워를 인정하듯 줄리어드 음대 총장인 조셉 폴리시도 참석했다. 그러나 한때 '코리아타운'이었던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가 이제 '차이나타운'으로 변모하고 있다. 카플린스키 교수는 "(한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이 학교는 차이나타운이 됐다"고 말했다.

◆중국인이 몰려온다=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 로비에는 둘러보는 곳마다 한인 혹은 중국인이었다.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04년부터 중국인 학생수는 꾸준히 증가, 올해는 전체 학생의 6%를 차지했다. 이와는 반대로 한인 학생 숫자는 꾸준히 줄어 올해 9%에 머물렀다. 7년 전 18%까지 치솟았던 전성기에 비해 절반으로 떨어진 수치다. 같은 기간 중국인 학생은 3%에서 두 배로 늘었다. 이 숫자는 미국 시민권이 없는 한인과 중국인만을 집계한 것이다. 시민권 보유 여부를 떠나 집계한 아시안 비율은 전체의 46%로 여전히 인종별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여줬다.

예비학교는 2007년부터 전체 학생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부모들 사이에서는 이같은 행보를 두고 전액 장학금을 주는 음악학교 '커티스(Curtis)' 체제로 바꾸려고 서서히 몸집을 줄인다는 등 온갖 소문이 무성했지만, 학교 당국의 입장은 단순 명료했다. 의도적으로 줄였다는 것이다. 카티아 로손 입학처장은 "더 수준 높은 학생들을 입학시킬 뿐 아니라, 재학생들이 높은 수준의 음악 교육을 꾸준히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숫자를 제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체 학생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2007년부터 미국 학생과 중국 학생은 오히려 늘어난 까닭은 무엇일까. 한때 5명 중 1명이 한인이었던 '한인 전성 시대' 현상을 없애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해석은 분분하다. 로손 입학처장은 "한인 학생들이 한때 몰려들었던 것처럼 이제는 중국인들이 몰려들고 있고, 지원자가 많으니 합격하는 비율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한인 부모들의 치맛바람이 수그러든 것은 아니다. 이제 한인 부모는 물론 중국 부모들과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예비학교 아트 디렉터인 베다 카플린스키 교수는 이 질문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는 "아무리 설명을 하고 말려도, 수 천 달러씩 들고 오는 부모들 때문에 골칫거리"라고 털어놓았다.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를 떠나, 일정 수준 이상의 선물은 ‘불법’이라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일부 극성 부모들 때문에 한인 부모의 전체적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것. 카플린스키 교수는 최근 동료 교수들과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모 2%가 우리 시간의 80% 이상을 써버리고 있는 처지를 한탄했다고 털어놓았다.

◆경쟁, 또 경쟁=한인 부모들 사이에서 치맛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중국인이 몰려들기 훨씬 이전부터다. 자녀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 부모들은 '아이가 연습은 몇 시간이나 하느냐, 악기는 얼마짜리를 쓰느냐, 아이가 배우는 교수는 어떤 비법으로 가르치느냐' 등 다른 학생의 비밀 아닌 비밀을 캐내기에 바쁘다. 도미니크(15)와 발레리(12) 자매를 이 학교에 보내는 김경아씨는 "한인 부모들 사이에서 경쟁이 너무 골치 아파 아예 학교에 오지를 않는다"고 말했다. 아버지 김정석씨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같은 대답을 한다. "우리 아이들은 연습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해야 하는 양보다는 적게 하고, 악기는 비싼 것은 아니지만 우리 형편에 비해서는 비쌉니다."

모든 부모가 경쟁 모드는 아니다. 세호군의 어머니 현복심씨는 "경쟁보다는 오히려 음악 하는 아이를 가졌다는 점에서 한 가족 같은 분위기라 편하다"고 말했다. 재일동포 3세인 현씨는 줄리어드 음대 교수에게 개인 교습 한 번 시키지 않고 세호를 오디션에 합격시켰다.

'음악 좀 한다’ 하는 신동들이 모여있으니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사실. 하지만 음악을 추구하는 같은 목표가 있기에 배우는 것도 많다. 언니 도미니크와 함께 올해 예비학교에 동시 합격한 발레리 김양은 "경쟁이 심한 것도 사실이지만, 오케스트라에서 친구들과 협연하면서 나 혼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하나를 이뤄간다는 점을 배운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예비학교 때문에 매주 샌디에이고에서 뉴욕으로 고단한 비행기 여행을 했던 엘리 최(9)양은 올해 드디어 뉴욕으로 이사 왔다. 이미 두바이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수한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경력이 있는 엘리는 하루에 3시간 정도 연습한다. 강효 교수에게 배우는 엘리는 이미 세계적인 무대와 경쟁을 즐기는 바이올리니스트지만, 어머니 최영은씨에겐 어린 딸일 뿐이다. 최씨는 "처음에는 어린이가 연주를 잘한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엘리 나이와 상관없이 완벽한 연주를 기대한다"면서 걱정 어린 시선으로 엘리를 쳐다봤다.

도미니크와 발레리 자매의 아버지 김정석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딸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표정, 그리고 내려올 때 표정이 내게는 가장 중요하다"면서 "솔직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털어놓았다. 김씨는 올해 자매와 아내를 뉴욕으로 보내고, 본인은 캘리포니아주에 남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매주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 아빠의 말을 듣던 큰 딸, 도미니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음악 경쟁은 물론 미국 생활 적응까지 더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성정음악콩쿠르 역사상 최연소로 대상을 거머쥔 문태국(16)군은 예비학교 3년차. 예비학교 오디션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뉴욕까지 왔던 태국이는 한국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다. 입학 담당자는 "합격할 수준이 되는데, 정말 한국에서 뉴욕으로 입학을 위해 올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대답은 예스. 태국이네 세 식구는 3년 전 미국으로 이민 와 롱아일랜드에 새 둥지를 틀었다.

태국이는 이민 초기, 영어로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곧 대입을 앞두고 있는 태국이는 "요즘 학교 숙제가 많아져 스트레스"라고 말했다. 지휘자인 아버지 문삼성씨는 아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 내년 초 줄리어드 음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앞두고 있는 아들이 더 자랑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태국이는 매주 토요일 예비학교를 오면 이런 고민은 모두 잊는다. 그는 "이곳에 오면 음악을 잘하는 한인 학생들이 많아 나도 덩달아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조진화 프리랜서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