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노무현 10년 왜 회한이 없겠나, 문득 지독하게 그리워"-김한길 "정치는 다시 안했으면 그러나 본인의 의견 중요, 좋은 남편으로 존경해"- 최명길
이 남자 경력 참 화려하다. 우선 소설가와 TV 토크쇼 진행자로 이름 깨나 날렸다. 이후 만 12년 정치하면서 문화관광부 장관 여당(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지냈다. 국회의원도 세 번 했다. 그런데 2008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여의도 정치에서 멀어진 뒤론 뭐라고 부를지 좀 애매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직함은 뭐라고 쓸까요?" "그냥 '김한길씨'로 합시다." 요즘 드라마 '근초고왕'과 '폭풍의 연인' 두 편에 동시 출연 중인 배우 최명길(49)이 그의 아내다. 지난 3년 간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는 남편과 그런 남편이 든든하다는 아내를 함께 만났다.
-불출마 이후 어떻게 지냈나.
김한길 "그 동안의 보상 차원에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1순위였다. 그 밖엔 책 보고 글 쓰고 산책하고 빈둥대고…. 빈둥거린다는 게 생각보다 중요하더라. '재충전'이란 말 많이 하는데 그 보다 먼저 필요한 게 비우는 거다. 비워야 채울 수 있으니까. 세상을 몇 발자국 밖에서 쳐다보는 거지. 우두커니 물끄러미…. 뭐 깨달음이랄 것까진 없지만 거기서 많은 걸 얻는다."
-3년 간 얻은 걸 하나만 꼽는다면.
한길 "들어오다 개들 봤나? 내가 요즘 개 키운다. 두 달 전에 새끼를 낳았다. 하루하루 커가는 게 너무 신비롭고 예쁘다. 그런데 누가 묻더라. '자식도 키워본 사람이 강아지 크는 게 그리 예쁘냐'고. 순간 바늘로 찔린 것 같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나는 아들 둘 크는 걸 지켜보지 못했다. 언제 첫 걸음마를 했는지 처음 '아빠'라고 불렀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너무나 큰 절대 되돌릴 수 없는 기회를 날려버리고 기껏 강아지에 빠져 있는 거지."
김한길.최명길 부부에겐 올해 각각 중학생과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두 아들이 있다. 강아지 추운 것도 못 견디는 남자가 두 아들에겐 아빠 노릇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남편이 3년 새 어떻게 달라졌나.
최명길 "이렇게 애들 잘 돌보는지 전엔 몰랐다. 요즘엔 되레 내가 더 바빠서 남편이 아이들 챙길 때가 많다. 그런데 나보다 낫더라. 한 번은 둘째의 방학 시간계획표를 짜준 걸 봤는데 엄청 꼼꼼하더라. 공부.휴식 시간을 10분 단위로 착착 나눠서…. 초등학생 시간표를 무슨 장관 스케줄처럼 만들어 놨나 싶기도 했는데 내 여동생이 그거 보고 '언니 우리 애도 형부에게 부탁하면 안 될까' 하더라. 내가 데뷔 이후 드라마 두 편에 같이 출연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남편이 안 도와주면 어려웠을 거다."
-큰 아들이 오바마 상을 받았다던데.
명길 "서울 구로구에 살았고 외국서 생활한 적도 없는데 영어 말하기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받았다. 상 받은 아이들이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 가서 미국 아이들과 영어로 토론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괜찮게 했던지 오바마 대통령상을 받아왔더라. 올해 청심국제중학교에 들어간다."
-정치할 땐 어떤 남편 어떤 아빠였나.
한길 "1995년에 결혼하고 이듬해 국회의원이 됐다. 97년 대선 땐 당시 김대중 후보 방송대책팀장을 맡아서 후보 모시고 전국을 다니느라 집에도 잘 못 갔다. 대선 한 달 전쯤이 아내 생일이었는데 미안해서 '근사한 곳에서 저녁 산다'고 약속했다. 그날 일 대강 매듭짓고 막 나가려는데 김 후보가 '김 의원 나랑 저녁 하면서 얘기 좀 하지' 하시더라. 결국 새벽에야 집에 갔는데 아내가 그때까지 안 자고 우두커니 있더라."
명길 "당연하죠. 잠이 오겠어요."
한길 "그날 밤에 김대중 후보와 뭔 얘기 했는지는 전혀 기억 안 나는데 새벽에 본 아내의 허전한 표정은 지금도 안 잊혀진다. 그때 후보에게 말씀드리고 갔어야 했는데…. 갑자기 청와대 수석으로 들어가게 돼 큰 아들 돌잔치를 취소한 적도 있다."
정치 얘기가 나오자 김한길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당선에 상당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본인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전략가'라는 평도 그래서 얻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분을 어떻게 기억하나.
한길 "한 분은 아버지 다른 분은 형님 같았다. 김 전 대통령은 대선 때 내 아내에게 '신혼 신랑 빼앗아 미안하다'고 격려하시던 따뜻한 분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 며칠 뒤 서울 명륜동 그 분 자택에서 단 둘이 마주앉았던 때가 기억난다. 담배를 권하시기에 '이제 대통령 되셨으니 담배는 따로 피우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어허 이러지 맙시다. 마음으로 대통령을 존경해주면 됐지 갑자기 담배까지 따로 피울 필요는 없잖아요' 하시더라. 노 대통령 임기 말에는 나와 껄끄러운 분위기인 때도 있었는데 그때도 만나면 서로 담배를 권하며 나눠 피운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두 분이 집권했던 10년의 성공과 좌절을 함께 겪었다. 회한이 없을 수 있겠나. 문득문득 그 분들이 지독하게 그립다."
-다시 정치할 생각 있나.
한길 "그렇게 권유하는 분들도 있지만 아직은 조용히 생각을 더 다듬을 때인 것 같다. 꼭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는지도 헤아려볼 필요가 있겠고."
정치 다시 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최명길씨는 '아휴'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에게도 물었다.
-남편이 혹시 다시 출마하겠다고 한다면.
명길 "(다시 한숨을 쉬며) 어떤 결정이든 남편의 생각을 존중한다. 물론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 안 하는 게 좋고. 난 지금이 좋다."
-그럼 남편이 어떤 일 했으면 좋겠나.
명길 "다시 글 쓰고 토크쇼 진행하고…. 나는 좋은 영화 볼 때도 남편이 (시나리오를) 쓰면 정말 좋은 작품 나오겠다는 생각을 한다. 남편이 쓴 소설 『여자의 남자』가 드라마로 만들어졌었는데 그때 나도 여배우 물망에 올랐다. 다른 방송국 드라마에 이미 캐스팅돼 출연은 못했지만. '결혼'이란 드라마였는데 나중에 그 작품으로 내가 한국방송대상을 받았다. 우리 사귀기 전이었는데 남편이 '결혼도 안 한 여자가 결혼이란 드라마로 상을 받다니 축하한다'고 축전을 보냈더라."
-아내가 저렇게 말하는데 다시 책 내고 드라마 극본도 쓸 생각 있나?
한길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 같은 본격 정치 드라마를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의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한 출판사에서 선인세까지 떠안겨서 책도 쓰긴 해야 하는데…. 글을 쓴다면 '기록'에 연연할 생각은 없다. 그것들을 녹여서 뭔가 감동을 주는 게 목적인 글 그게 내 본업이다."
-결혼 17년차다. 다른 부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명길 "여자가 일과 가정에서 둘 다 잘한다는 건 쉽지 않다. 힘들 땐 '내가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남편을 얻었을까 어떻게 이렇게 좋은 아이를 낳았을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결 힘이 날 거다."
한길 "가족에게 진 빚 갚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 안 되는 일이다. 되돌릴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가까이에 널브러져 있는 엄청난 행복의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한다. 그거 복권에 당첨된 것도 모르고 지나치는 것처럼 억울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