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핵전쟁의 위험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때는 1962년 10월이었다. 미국은 소련이 쿠바에 핵탄도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의 시작이다.
케네디 정부는 미사일기지의 철거를 요구했다. 소련은 미사일이 방어용이라며 맞섰다. 이어 미국은 쿠바를 봉쇄한다. 쿠바로 향하고 있던 소련 선박들이 저지선을 지나칠 경우 전쟁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끝내 소련은 미사일 철수를 결정했고 핵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혔던 세계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 냉전이란 성난 바다를 헤쳐갈 수 있는 자유세계의 선장으로서의 이미지를 확보했다.
지도력을 평가하는데 ‘Master and Commander’란 개념이 있다. 선장과 사령관을 말한다. 사령관은 눈앞의 적을 무찌르면 된다. 그러나 선장은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전체적인 국면을 읽어야 하고 총체적 국익을 따질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세계 공동체의 운명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케네디의 쿠바 미사일 위기 관리능력은 그를 마스터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케네디의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성공적 대처는 ‘A·B·C’로 정리된다. Assurance(확약), Balance(균형), 그리고 Compromise(타협)를 말한다.
원천적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의 원인은 미국이 제공했다. 카스트로의 공산혁명이 성공하자 케네디 정부는 쿠바 망명자들을 무장시켜 ‘Bay of Pigs’ 침공을 감행했다. 카스트로의 암살 작전도 폈다. 실패로 끝난 이 두 사건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의도를 확실히 했다. 카스트로와 쿠바 혁명의 종말이었다.
카스트로와 소련은 사태 해결의 조건으로 미국이 쿠바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확약을 요구했다. 결코 작은 정책적 변화가 아니었다. 중미에서 국익에 반하는 일이 생기면 군사적 개입을 당연시 해왔던 미국이었다. 특히 쿠바에 대한 미국의 애착과 향수는 강했다.
미국이 첫 제국주의 전쟁에서 스페인을 이기고 ‘해방’시킨 땅이었다. 쿠바와 소련의 불가침 확약은 이 특권의식의 포기를 뜻했다. 케네디는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미사일기지 건설이 드러나자 무력대응책이 대세였다. 강경론자들은 쿠바의 공습과 침공을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과 쿠바의 거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 최남단 플로리다와 쿠바 사이는 90마일. 이 공간적 개념을 적용하면 쿠바의 미사일은 미국의 코앞에서 미국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당연히 부수어야 했다.
그러나 신중론자들은 90마일 밖에 보지 못하는 근시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쿠바는 소련의 동맹이다. 전 세계적 비극을 촉발시킬 수 있는 뇌관이었다. 미국의 쿠바 침공 또는 폭격은 소련이 유럽에서 침략적 행동을 취하도록 자극할 것이 뻔했다.
이들은 또 역사를 넓게 보자고 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영원히 역사책에서 지워지지 않듯, 미국의 쿠바 공격도 비겁한 행동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협상이 필요했다.
케네디는 이 두 개의 대응책을 조화시켜 균형 있는 해결책을 택했다. 다름 아닌 쿠바 봉쇄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마련되었다. 그 사이 미국과 소련은 협상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케네디는 사태 해결을 위해 타협할 줄도 알았다. 그는 이탈리아와 터키에 배치된 주피터 미사일을 철수하라는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물론 이들은 다소 구식 무기체계로써 군사적 측면에서 큰 손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련의 협박에 넘어갔다는 비난이 강했다. 그럼에도 케네디는 이를 수용함으로써 후르시초프의 체면을 살려주고 그가 교착상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퇴로를 터 주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해결방식을 북한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까? 상황은 일치한다. 50년 전 쿠바와 같이 지금 북한에게 체제보존은 절체절명의 과제이며 이와 핵미사일을 같이 묶어 놓은 상태이다. 냉전주의자였지만 유연성을 발휘한 케네디의 마스터다운 리더십이 요구되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