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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론] 박정희 키드의 고백

Los Angeles

2013.01.0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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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주/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나는 거의 완벽한 박정희 키드(Kid)이다. 5.16 한 해 전에 태어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는 대학교 1학년이었다. 아직 뚜렷하게 의식화되지 않은 비교적 순진한 상태에서 박정희 시대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하는 시대의 특성에 대한 인식은 국민(초등)학교 5~6학년 즈음에 생겨난 것 같다. 베트콩과 싸우는 파월장병 아저씨들에게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보내면서다. 선생님이 칠판에 써 주신 몇몇 예문을 약간 변화시켜 편지를 썼다.

내가 특별히 좋아한 문장은 파월장병 아저씨가 이역만리 월남의 밀림에서 용감히 싸우셔서 우린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감사의 말이었다. 건강하게 계시다가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시라는 부탁보다는 왠지 성숙하고 멋이 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월남은 휴전선의 연장이라는 박 대통령의 '베트남 제2전선론'을 무의식 중에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파월장병 아저씨로부터 답장이 오기도 했다. 우리가 보낸 편지와 '럭키치약' 또 '눈깔사탕' 덕에 더욱 잘 싸울 수 있다는 얘기에 자부심을 느꼈다. 간혹 시집 안간 누나가 있냐는 아리송한 질문도 있었지만.

한 국립교육대학 부속국민학교에 다닌 덕에 유신이 시작된 6학년 때엔 학교에 군인 아저씨들이 진을 친 광경을 목격했다. 운동장에 도열해 착검을 하고 훈련을 하는 광경은 멋있게 보였다. 하지만 기죽은 대학생 형들은 참으로 안돼 보였다.

이 시기 학교 소풍의 문화도 달라졌다. 미지근한 '칠성사이다'와 함께 김밥을 먹고 나서 수건돌리기나 닭싸움으로 시간을 보내던 과거가 아니었다. 우린 나무젓가락에 고무줄을 엮어 만든 집게를 이용해 송충이를 잡았다.

나는 박 대통령 덕에 상을 받았고 칭찬도 들었다. '국민교육헌장' 때문이다. 이 헌장을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외워 상을 받았다. 중학교에 진학해서 수학을 못해 고생했는데 한 번은 낮은 시험점수 때문에 '빳다'를 앞두고 있었다. 그 때 용기를 내어 국민교육헌장을 인용했다. "선생님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해야 하지 않나요?" 선생님은 크게 웃으셨고 매는 피할 수 있었다.

괴로웠던 기억도 있다. 1974년 5월. 고향 인천에 대형 선박의 접안을 가능케 한 갑문식 도크가 완공되어 박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했을 때다.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땅이 된 연안부두 흙먼지 속에서 오전 내내 대통령을 기다렸다. 변소와 수도도 없는 그곳에서 헬리콥터에서 우리를 내려다 볼 대통령을 위해 거대한 사각형 대열을 만들고 하얀 손수건을 흔드는 연습을 거듭했다. '타는 목마름'이 무엇인지 철저히 경험했지만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기억은 간직하고 있다.

그즈음 몇몇 친구와 나의 집에서 과외공부를 했었다. 하루 저녁 대학생 선생님이 오시지 않았다. 투덜거리며 친구들이 돌아간 후 아주 늦은 시간 선생님은 왔다. 공부를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승려처럼 머리를 밀고 있었다. 어른들은 그가 '수배자'라고 속삭였다. 선생님이 그 시대에 '간첩' 다음으로 무서운 단어로 묘사된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흥분되기까지 했다.

1979년 10월. 미국의 대학 기숙사에서 박 대통령의 시해 소식을 접했다. 그의 죽음과 연관된 '안가' '모델' '가수' '시바스리갈' 등의 단어들은 내가 지나온 박정희 시대에 비추어 견딜 수 없도록 가벼웠다.

그럼 나에게 박정희 시대는 무엇인가? 박정희 시대는 나를 역사의 무대에 조금 더 가까이 앉도록 했다. 어렸지만 세상의 변화를 C석에서가 아니라 A석에서 보았던 것이다. 물론 무대 위에서 펼쳐진 드라마는 기분 좋고 즐거운 내용만은 아니었다. 이해 못하는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 덕분에 성숙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이제 와서 선과 악 둘 중에 하나로 규정하라고 요구한 선거전략은 확실히 유치하고 예의없게 느껴졌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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