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한국학의 필독서다. 1890년대 중반 노령의 비숍은 오랜 탐방을 거쳐 직접 조사한 조선의 실상을 여행기로 정리했다.
1964년 시인 김수영은 이 책의 일부를 번역하면서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한 귀중한 문헌"이라 평했다. 같은 해 발표된 시 '거대한 뿌리'에서 그는 스스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고 썼다. 그가 비숍의 기록을 통해 본 '거대한 뿌리'는 무엇일까.
120년 전 비숍이 보았던 조선은 가난하고 무력한 나라였다. 조선인들은 대부분 초라한 움막에서 극빈하게 살았다. 인구 25만의 수도 서울은 베이징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더러운 도시였다. 비좁은 골목길 옆으로 초록빛 오물이 흘렀고 굶주린 개떼가 어슬렁거렸다.
여자들은 온종일 남자들의 백의(白衣)를 빨고 삶고 풀칠하고 다려야만 했다. 그런 풍습은 비숍에겐 여성노예제(female slavery)로 보였다. 저녁 8시 보신각 대종(大鐘) 소리에 맞춰 모든 남자의 통행이 금지되던 '기이한 습관'의 나라 김수영의 시구처럼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던 극적인" 서울이었다.
급류를 헤치며 한강의 뱃길을 둘러본 비숍은 조선의 절경에 경탄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줄곧 일반 백성의 비참한 생활상에 머물렀다. 표독스레 담뱃대를 뻑뻑 빠는 양반들과 백성의 고혈을 짜는 아전들을 묘사한 장면을 읽노라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양반은 담뱃대도 직접 들려 하지 않았고 양반집 아들들은 서당에 갈 때도 책조차 손수 들고 가지 않았다." 지주와 아전들은 강압으로 인민의 재산을 빼앗았고 저항하면 투옥시키고 곤장을 쳤다.
사람들은 틈만 나면 취하도록 막걸리를 마셔댔다. 양반들은 양주까지 구해 마셨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어도 욕될 것 없던 '술 권하는 사회'였다. 요컨대 비숍이 기록한 조선 말기의 사회상은 처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