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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고귀한 삶에 축복을

New York

2014.12.0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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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리 / 수필가
새벽 전화가 걸려왔다. 불안한 신호음이다. 다급한 목소리에 딸아이의 울음소리.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 응급실로 간다고 한다. 부랴부랴 옷을 입고 집을 나서니 새벽공기 써늘하고 높은 하늘에 달빛이 스산하다.

세상 어떤 일에 직면하더라고 감정의 지배에 흔들리지 말라는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의 글귀를 안간힘 써가며 내 가슴에 붙들어매고 남편의 운전석 옆에 돌처럼 굳어 앉아 있었다.

차는 서둘러 병원에 도착하였다. 복잡한 검사를 마치고 목에 흰 붕대를 두르고 나타난 딸은 천만다행 부러진 곳이 없어 퇴원수속을 진행했다. 날이 밝으면 추수감사절인데…. 응급실에 누워 있는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연민의 미소를 뒤로하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간호사가 "해피 땡스기빙"하는 인사소리가 한없이 생경하다. 마치 행복해야 하는 의무와 권한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도적당한 속수무책의 감정이라 해야 할까. 늘 대면하는 삶은 이렇게 마냥 낯설고 조심스럽다.

딸아이를 푹 쉬게 놔두고 예정대로 뉴저지 고모 집으로 가야 한다는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 '예 정 대 로'라는 단어가 번뜩 생각을 불러온다. 그렇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삶은 계속 이어져 나간다. 숙명적 과제처럼 주어진 생 앞에 어떻게든 마음을 추슬러 다시 희망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남편은 모두 9형제 부인과 조카들이 모이니 40명이 넘는 인원이다. 집이 작은 건지 사람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며 농을 하는 오늘의 주인장의 웃음이 행복하다. 늘 가까이 만나는 식구들은 물론이지만 이번 모임에는 특별히 사랑을 찾아 산 넘고 강을 건너 멀리 독일에서 뉴욕까지 날아온 조카의 새신랑이 반가웠다.

겸손하고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함 느긋한 말의 절제 지적인 언어 미국의 실용적인 삶에 길들여진 내게 그의 인상은 정말 산뜻하였다. 독일에서 정치가의 연설문을 쓴다는 그의 독특한 직업이 상기되며 순간 앙겔라 메르켈 얼굴이 번뜩 스친다. 음식과 와인과 웃음과 대화가 어울려져 시끌벅적 파티가 무르익을 즈음 문이 열리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셋째 고모 아들 조카 희석의 등장은 파티의 하이라이트였다.

희석이는 오늘을 위하여 누런 봉투에 오래된 앨범을 들추어 흑백의 사진을 들고 왔다. 색 바랜 사진 속의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고모부 희석의 아버지는 들은 대로 미남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오뚝한 콧날 숱만은 머리에 반듯한 이마 칠판을 향해 서 있는 그 앞에 아이들이 교실에 하나 가득이다. 남달리 가슴이 따뜻해 일이 끝나면 저녁마다 가난한 아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ㄱ ㄴㄷ'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희석이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절절히 넘치는 아들 사랑에 앉으나 서나 잠 못 이루던 희석의 엄마 고모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몇 해. 안쓰러운 너무나 안타가운 희석의 삶이 한없이 가슴 아프다. 희석은 내게 아픈 조카다. 나무에 박힌 옹이처럼. 이리저리 부딪치고 다시 일어나 새롭게 하는 그의 비즈니스를 축복하고 싶다.

잠깐 숨을 골라 와인 잔을 들고 창밖의 노을을 바라 보노라니 어두운 방에 혼자 누워 있을 딸 유럽에서 날아온 조카사위 그리고 희석이의 삶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한편의 영화가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의 삶은 영화다.

소설이다. 슬프기도 아름답기도 한. 가슴 미어지게 애련한. 순간 각자의 삶은 고귀하고 귀중하고 독특하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르며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살짝 눈물을 훔쳐내고 화들짝 밝은 목소리로 와인 잔을 높이 건배를 외쳤다. 신이여! 고귀하고 귀중하고 독특한 각자의 삶에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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