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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계약서 용어 '갑·을' 없애자

Los Angeles

2015.01.1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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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진/알토스 비즈니스 그룹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보면 '갑과 을의 전쟁'을 방불케 한다. 힘을 가진 갑의 횡포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을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말도 안 되는 언행에 치욕을 당한 사무장, 신입으로 채용하겠다며 10일동안 실컷 부려먹고 해고한 위메프라는 회사, 백화점 주차요원을 무릎 꿇린 모녀 고객 등 최근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갑과 을의 문제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대부분 계약서에는 '갑'과 '을'이 나온다. 갑과 을은 법률적인 용어로 계약서상의 상호 당사자들을 칭하는 말이다. 모든 계약서는 동등한 입장에서 시작한다. 즉 계약을 통해 공정하게 진행하고 약속된 내용을 지키자는 것이다. 이름을 계속 반복하기 보다는 '갑' 또는 '을' 로 칭해서 간략하게 계약 당사자를 구별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갑과 을이라는 한 글자가 엄청난 의미와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갑은 상대적으로 유리하거나 또는 주도권을 쥔 사람이고 을은 불리한 위치에 있으면서 갑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사람을 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계약서상 갑이 되면 우월적 지위, 을이면 저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다. 사회도 갑의 위치에 서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도로 가고 있다.

갑과 을의 구도는 사회 전반의 관념으로 굳어져 버렸다. 어느 조직이나 관계든 간에 갑을 관계로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유리한 위치이면 갑이고 아니면 을이다. 이 관계는 연령, 성별, 학력 등 일반적인 구별도 없다. 그저 내가 상대방 보다 조금이라고 우월적 지위라면 무엇을 해도 상대방이 참아야 하고, 내가 을의 위치인 것 같으면 갑이 행하는 모든 부당함을 참아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이런 갑과 을에 대한 관념이 한국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어느 조직이나 관계에도 보이지 않게 갑과 을의 도식이 성립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관계 안에서 살아 남기 위해 애쓴다. 어떻게든 갑이 되어야 하는 사회다.

하지만 인생사 영원한 갑은 없어 보인다. 한순간에 갑이 을이 되고 을이 갑이 될 수도 있다.

대한항공 회항사건이 알려지고 사회의 공분을 사기 시작하면서 조현아 전 부사장은 을이 되고 사무장은 갑이 됐다. 위메프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회사는 을이 되고 신입사원은 갑이 된다. 즉 항상 당하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 또는 상대방에게 영향을 끼치는 입장으로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갑과 을이 존재한다. 미국에도 이런 관계는 존재하지만 한국의 갑을과 같은 관계는 아니다.

미국의 계약서에는 갑과 을이 아닌 회사(Company), 고객(Client), 소비자(Customer) 등 역할에 따라 명명하거나 직접 회사의 이름을 언급한다.

한국에서도 갑과 을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약서에서 갑과 을이라는 글자를 없애야 한다. 계약서 상에도 갑과 을이 아닌 공급자, 고객, 생산자 또는 업체명으로 부른다면 좀더 공정한 관계가 성립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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