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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미 초기 역사를 보는 창 ‘리치먼드’

Washington DC

2015.03.2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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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마다 새겨진 역사의 숨결을 느낀다
의회 정치의 랜드마크 주 의사당 등
리치먼드에 가면 사방이 역사다. 역사를 자랑하는 리치먼드같은 곳에 가면 내 사소한 일상과 거대한 산맥같은 역사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리치먼드는 1737년에 도시의 모습을 갖췄고 1780년 버지니아의 수도가 됐다. 독립전쟁 기간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패트릭 헨리의 명연설이 있었고 남북전쟁 시기에는 남군의 수도로 대형 무기제조 공장이 운영됐던 곳이다.

1775년 3월 토마스 제퍼슨, 조지 워싱턴, 패트릭 헨리 등 당대 정치 거물들이 리치먼드의 세인트 존스 교회에 모여 앉았다. 이른바 제2차 버지니아 컨벤션. 컨벤션은 지금으로 치면 의회쯤에 해당된다. 이들은 이날 갈수록 난폭해 가는 영국 국왕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자는 안건을 내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패트릭 헨리는 상기된 얼굴로 연단으로 나아가 군대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마침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소리쳤다.

역사는 알고 있다. 1800년대 중반까지 미국내에서도 가장 활발하고 규모가 큰 노예시장이 리치먼드 시내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노예들의 자유와 백인 정치인들의 자유는 같은 단어가 아니었다.

리치먼드 의사당에서 10분도 채 떨어지지 않은 세인트 존스 성공회교회에 가면 벼락같이 떨어지던 헨리의 자유가 지금도 메아리 치고 있다. 결국 그 자유가 돌고 돌아 궁극적으로 노예들에게도 도달했고 내게도 혜택을 주었을 것이다. 장마철 탁류처럼 거센 역사는 시시때때로 내 소박한 삶을 뿌리채 흔들곤 한다.

강물처럼 거침없어 보이는 역사도 나같은 소박한 개인의 배고픔을 채워주진 못한다. 역사 공부는 내일로 미루고 캐주얼한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많다는 캐리타운을 먼저 찾았다. 워싱턴의 조지타운 혹은 서울의 대학로쯤 되려나. VCU(Virginia Commonwealth Univ.)에서 서쪽으로 2마일 께 위치한 웨스트 캐리 스트릿(W. Cary Street) 일대가 캐리타운(Carytown)이다. 어설픈 리치먼드 스카이라인 사이로 해가 넘어가고 본격적 어둠이 시작되기 전 그 사이. 빛을 상실한 사물들이 입체감을 잃어갈 무렵 네온사인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캐리타운의 색깔도 돌연 활기를 띤다.

타운내 최고의 버거를 판다는 풍문에 캐리타운 버거&프라이스(Carytown Burger & Fries, 3500 W. Cary St)를 찾았다. 시골 분위기의 전형적인 작은 버거 가게였는데 코에 은빛 코걸이를 하고 자주색으로 펑키 머리를 한 캐시어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버거는 기대보다 좋았고 흑색에 커피향이 배어있는 맥주도 좋았다. 여행의 즐거움의 원천은 다양하지만 낯선 곳에서 맛집 하나만 제대로 찾아도 기쁨은 배가 된다. 아 내 소박한 개인사의 단순함이여. 버거 가게가 들어선 빌딩이 1841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했다. 170년이 더 된 빌딩에서 아직도 이런 가게들이 물건을 팔고 손님을 받는다는게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리치먼드에서는 버거 가게에서도 역사를 생각한다.

낯선 곳에 대한 긴장감도 무뎌지고 포만감이 살짝 시작되니 커피가 머리속을 오르내린다. 요즘은 여행지 이방인도 토박이 못지 않게 좋은 가게들을 금방 찾아낸다. 구글링 구글링, 스마트폰을 개발한 이에게 축복있으라. 구글맵에 주변 사방으로 커피 가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로스토브스(Rostov’s coffee & tea, 1618 W Main St)는 1979년 오픈해 직접 커피를 볶아 판다. 캐리 스트릿과 나란히 가는 메인 스트릿에 있다. 10 이탈리안 카페(10 Italian Cafe, 3200 W Cary St)는 이탈리아 카푸치노가 유명하다.

캐리타운은 조지타운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처럼 천천히 걸으며 예쁜 샵들을 기웃거리고 개성있게 차려 입은 사람들을 구경을 하기에 좋다.

긴 역사를 가진 리치먼드에서 내 개별적 시간은 많지 않았다. 리치먼드에서 하루를 보낼 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5곳을 내 맘대로 뽑아 정리했다.
주의회 의사당, 리치먼드 미술관, 트레드거 병기창, 세인트 존스 교회 그리고 캐리타운이다.

남군 최대의 무기제조 공장
트레드거 아이언 웍스(Tredegar Iron Works, 500 Tredegar St)
1837년 문을 연 주철소로 1860년대 미국내 3번째로 큰 주철공장으로 발전했다. 트레드거 공장 때문에 1861년 앨러매마 몽고메리에 있는 남부연합의 수도가 리치먼드로 옮겨왔다. 남북전쟁 기간 중 남군의 총포를 생산하는 병기창 역할을 했고 1900년대 중반까지 철제품을 계속 생산했다. 현재 22에이크에 달하는 공장 부지와 건물은 국립역사 보존구역으로 지정됐고 빌딩은 리치먼드 국립 전투공원의 방문자센터로 사용되고 있다. 또 이곳에는 개인 박물관과 미국남북전쟁센터도 있다. 남북전쟁 기간중 트레드거 아이언 웍스는 남군이 생산한 화포의 절반에 가까운 대포와 총기를 생산했다. 같은 기간 트레드거는 증기기관차를 제작하기도 했다.
전쟁이 계속되고 일할 수 있는 남자들이 전쟁터로 나가면서 기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지고 철강석 등 기본 원료들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생산력과 제품의 질이 크게 떨어졌다.
1865년 4월 2일 마침내 리치먼드가 북군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 등 남군 지도자들과 남은 군인들이 리치먼드를 빠져 나가면서 군수창고 등 북군에게 득이 될 것들을 모두 불태운다. 하지만 트레드거 대표인 앤더슨은 50명의 사병을 고용해 폭도들의 방화로부터 트레드거를 지켜내 오늘날 까지 건물들이 보존돼 오고 있다.

고급스런 빌딩과 소장품으로 ‘깜짝’
버지니아 미술관(Virginia Museum of Fine Art, 200 N Blvd.)
공식 명칭을 그대로 번역하면 버지니아 순수예술 박물관인데 그냥 리치먼드 미술관으로 불린다. 1936년 문을 열었다. 연도가 의미가 있는 것은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항이 그 한계점에 다달은 시기로 경제가 파탄나고 거리에 실업자가 넘쳤다. 그런 가운데 뜻 있는 정치가와 경제인들이 의기투합해 예술의 가치를 드높일 전당을 세운 것이다. 몸이 굶어도 우린 예술 정신을 고양한다는 취지가 가슴에 반응을 일으킨다. 입장은 무료다.

미술관은 현재 3만 3천여점의 세계적 수준의 미술, 조각, 공예품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아르 누보, 아르 데코, 미국 현대 작가 작품들이 유명하다.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와 영국의 스포츠 아트, 보석 공예품과 은세공품 그리고 고가구 등 다양한 소장품을 갖춰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으로 손색이 없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작가로는 반 고흐, 앤디 워홀, 앙리 마티스, 러시아 입체파 칸딘스키, 피카소, 모빌로 유명한 알렉산드 칼더, 사진작가 안셀 아담스, 헨리 무어, 한국의 신예 문지하 등의 작가 작품이 소장돼 있다.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던 존 바튼 페인이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그림 50점을 기증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소장가들의 기부가 이어졌다. 1947년 릴리언 토마스 프랫이 러시아 보석 공예품을 기증했고 같은 해 캐츠비 존스가 현대 미술을 기증했다. 1970년 미술관은 계속되는 작품 기증으로 전시 공간이 더 필요했고 미술관은 남관 증축을 완성한다. 시드니와 프랜세스 루이스 부부가 1971년 아르 누보 가구들을 기증했고 미술관은 전시공간이 또 더 필요했다. 1976년 북관을 완공했다.

미술관 역사가 이런식으로 기부의 역사가 됐다. 사업가 은행가 정치가 등 개인들의 미술품 기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러면 또 부족한 전시공간을 늘리고 또 작품들이 기증된다. 옛 버지니아 사람들의 사는 방식이 참 부럽고 궁금하다.

현재 특별 전시회로 쿠르베, 반 고흐, 마네, 마티스 등 19세기 프랑스 작가들의 정물화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6월 21일까지 계속되고 15달러의 입장료를 받는다. 올 연말에는 위대한 조각가 로뎅의 작품 200점을 전시하는 기획전이 예정돼 있다.

미 의회 정치의 랜드마크

버지니아 주 의사당(State Capitol, 1000 Bank St.)

1788년 세워진 리치먼드 주 의사당은 미국 의회 정치의 랜드마크다. 현재 사용중인 의사당 건물로는 서구사회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토마스 제퍼슨이 설계했고 지난 200년동안 법원 시청 교회 의사당 등으로 사용됐다.

1904년 지금의 서관(상원 빌딩)과 동관(하원 빌딩)이 추가됐다.

12에이크 넓이의 캐피탈 스퀘어는 1818년 만들어진 철제 펜스로 둘러 쌓여 있는데 펜스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791년 미국의 권리장전이 이곳에서 비준됐고 미 전역에서 효력을 발휘하도록 했다. 권리장전은 1차 수정헌법의 10개 조항으로 언론, 종교, 집회의 자유 등 미국 시민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권리를 제공하고 있다.

상식으로 알아두면 좋다. 버지니아 하원은 100명의 의원으로 구성돼 인구 8만명당 한명 꼴이며 임기는 2년 연봉은 17,760달러를 받는다.

상원은 40명의 의원으로 구성됐고 4년 임기로 연봉 18,000달러를 받는다. 상원의원은 보통 인구 20만명중 한명 꼴로 선출한다.

의회는 해마다 1월 둘째주 수요일 개원해 짝수 해에는 60일, 홀수 해에는 30일 동안의 회기를 갖는다. 필요에 따라 30일까지 회기를 연장할 수 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세인트 존스 교회(St. John’s Church, 2401 E Broad St)
세인트 존스 교회 역사는 리치먼드 역사다. 1600년대 초 제임스타운에 세워졌던 헨리코 교구가 제임스강을 타고 북서진해 1740년 리치먼드에 새 교회 건립을 허가하고 1741년 세인트 존스 교회가 세워진다.

처음에 교회는 새 교회, 타운 교회, 어퍼 교회, 리치먼드 힐 교회 등으로 불리다 1829년 처음으로 세인트 존스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세인트 존스 교회는 예배만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공공 집회 장소로도 자주 이용됐다. 당시 교회만한 건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1770년대 버지니아와 영국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두번째 버지니아 컨벤션이 윌리엄스버그에서 리치먼드로 옮겨져 1775년 세인트 존스 교회에서 열린다. 버지니아 컨벤션은 지금으로 말하면 의회쯤 된다. 당시 리치먼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빌딩이 바로 세인트 존스 교회였다. 이날 미팅에는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리차드 헨리 리 등 버지니아의 기라성같은 정치인들이 다 모였다. 영국 국왕 조지 3세에 의한 침탈에 대해 군사를 일으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중 하노버 카운티 대표인 패트릭 헨리가 일어나 군사적 대응을 해야한다는 취지의 강력한 발언을 해 안을 가결토록 유도했다. 이때 패트릭 헨리가 사용한 유명한 문장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였다.

3차 버지니아 컨벤션도 1775년 7월 이곳 교회에서 개최됐는데 군대를 조직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안을 논의했다. 3차 컨벤션에서 조지 워싱턴을 미 육군의 총대장으로 임명했고 패트릭 헨리는 첫번째 버지니아 주지사로 임명됐다.

단 한번의 명연설로 200백년 후 세인트 존스 교회는 해마다 4만여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물이 된다. 지금은 국립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방문객들은 교회 빌딩 투어를 할 수 있고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다.

남북전쟁과 2차 세계대전 사이 세인트 존스 교회는 가장 번영했고 리치먼드 시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500~600여명이 모이는 교회였다.

2차세계대전 이후 교인들이 외곽으로 이주가 늘면서 교인수가 줄었다.

김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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