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붙들고 있던 사각형이 흙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보았다. 울컥했다. 은빛 억새풀마저 빛을 잃은 야윈 계절에 나비 되어 날아가셨다. "나는 행복해 행복해"를 연발하시며 꼭 붙잡은 손을 놓지 않으셨던 마지막 모습! 그녀의 향기가 소나기처럼 내려붓는다.
'줄탁동시' 중국 송나라 때 불교서적인 '벽암록'에 나오는 사자성어로 아직 부화하지 않은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단단한 껍질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병아리의 고통을 귀를 세우고 그 소리를 기다려 온 어미닭이 밖에서 깨뜨려 줌으로써 세상 밖으로 나옴을 뜻한다. 이 일은 동시에 일어나야만 완수가 된다는 의미에서 동시(同時)다.
그녀는 나에게 어미닭이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게 해주신 귀한 분이시다. 삶의 '멋'을 모르고 정형화된 사회규범 안에서 헉헉대며 앞만 보고 달리던 나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보게 해주셨다. 딸 아들 대학 보낸 후 '빈둥지증후군'으로 몸살을 앓던 중 선생님의 개인전(Holiday Inn Gallery in Manhattan 2002)을 찾았다. 첫눈에 먹의 마력이 내 심장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기쁨과 환희의 천둥번개가 여기저기서 터졌던 기억이 난다.
예술의 도시 맨해튼 한가운데서 선생님의 동양화가 내뿜는 은은하면서도 힘찬 필력에 나는 완전 무너졌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에 살면서 서양화를 하는 것도 아닌 뉴욕에서 동양화를 한다는 자부심과 우리 문화를 배우고 전하고 계승할 수 있다는 특권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예술의 다른 장르와는 달리 아주 예민한 한지에 '묵' 하나로 자연 삶 감정 그리고 느낌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는 마력에 나는 전율했다. 이렇게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당신께서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신 것도 아니고 늦은 나이에 내면의 힘에 이끌려 시작하신 동양화였기에 반평생을 돌고 돌아온 우리 제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힘이 되어 주셨다. 우리는 여느 화실처럼 그림의 기술만을 배우지 않았다. 당신의 조그마한 스튜디오 아파트에서 차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와 가족의 안녕을 챙긴 후 인생수업에 들어갔다. 그 당시 선생님의 모습은 조선의 양반집 규수이면서 맏며느리요 한국미의 곡선처럼 부드럽지만 잘 절제된 동양미인이셨다. 선생님의 선은 소박하면서도 단아하고 단아하면서도 따뜻한 그래서 누구든 편히 마음 문을 열고 다가서고 싶은 살가운 우아함을 갖고 계셨다.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선이 조용히 내려가는가 하면 어느새 매화 등걸에서는 휘어지고 빠른 속도로 꺾이면서 직선으로 되돌아간다. 직선이 주는 날카로움을 곡선이 부드럽게 감싼다. 직선과 곡선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이 오묘한 아름다움! 백가지 먹색과 천 가지 붓놀림의 속도로 갈필과 농담을 이용하여 화선지 위에서 춤사위를 펼친다. 이것이 바로 동양화만의 신비다.
당신은 우리에게 그림의 스승이었을 뿐 아니라 인생의 카운슬러이셨다. 우리 내부에 숨어있는 끼와 재능을 명주실을 뽑듯 정성스럽게 뽑아내셨다. 1987년부터 후학 양성에 힘을 쏟으신 선생님은 뉴욕에 100명 가까이 제자를 키우셨다. 그 제자들이 지역사회에 나가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또 대한민국 국전에서 많은 대상을 받기도 했다. 선생님의 호를 딴 '호연회'는 격년으로 그룹전을 해왔으며 오는 2월에 9회째 전시회를 연다. 또 특별히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어쩌면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호연 김주상 회고전'을 남아있는 생의 마지막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동원해 계획하고 준비하고 계신 중에 이런 변고를 당하셨다.
당신께서는 절실하게 이번 전시장에 꼭 서 계시기 위해 항암치료도 받으셨지만 선생님 체력의 한계는 거기까지이셨다. 안타깝게도 다가오는 2월 6일 오프닝 리셉션을 뒤로하신 채 무채색의 계절에 호랑나비 되어 찬란한 비상을 하셨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